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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위사 1
1화
작가서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 동안 무협을 즐겨 오며 가슴속에 항상 저만의 강호를 그려 왔습니다.
그 강호는 마치 ‘옛 강호’처럼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하지만 또한 ‘현 강호’처럼 시원하고 통쾌하기도 합니다.
그 강호의 첫 번째가 바로 ‘금의위사’입니다.
금의위사의 ‘강호’는 바로 무(武)와 애(愛)입니다.
역사이되 역사가 아닌 이야기.
초인이되 인간인 강호라는 세계에서 사는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무(武)에 대한 갈망과 우정, 배신, 복수, 그리고 사랑을 담고 싶었습니다.
저는 옛 무협을 유독 좋아합니다. 이미 뿌연 먼지로 뒤덮인, 까만 손때로 뒤덮인 그런 옛 무협을 말입니다.
하지만 또한 옛 무협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고 휩쓸리는 나약한 모습의 인간들의 이야기에 대한 젊은 피로서의 반발일 것입니다.
그래서 ‘금의위사’를 쓰며 다양한 연령대가 두루 즐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젊은이들은 웅혼한 기상을, 지나간 세월에 눈물 흘리는 중년, 노년의 독자들께는 옛 향수와 함께 잃어버린 패기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글이나 무협다운 글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저의 글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시고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많은 선배 작가님들, 동료 작가 분들, 출판을 위해 힘써 주신 뿔미디어 정필 대표님, 편집부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안녕이 깃들기를 희망합니다.
태영 올림
서장
명(明)제국.
서기 1368년에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수립되어 280여 년을 존속하다가 1644년 멸망한 대(大)제국.
개국 초기 논공행상을 마치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명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얻어 버린 개국 공신들이었다.
이에 홍무제는 강력한 결단을 내리니 그것은 바로 1380년 호유용(胡惟庸) 사건과 1393년 남옥(藍玉) 사건이었다.
모반의 이유로 관련자 수만여 명이 죽음을 당한 이 두 사건 모두 밝혀진 증거가 없어 홍무제의 독재적인 권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된 사건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극비로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호유용 사건과 남옥 사건, 두 사건 모두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다만 그 증거라는 것이 홍무제의 명에 의해 정보기관에서 조작한 증거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조작하고 관장하는 기관을 홍무제가 이름 짓기를 금의위(錦衣衛)라 하였다.
제1장 금의위(錦衣衛) 입문(入門)
1
명제국(明帝國)의 황도 남경(南京).
남경은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의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종산(鐘山), 서쪽으로는 완남 구릉지대와 맞닿은 전략적 요충지이다. 행정적으로는 서쪽으로 안휘성(安徽省)에 인접해 있다. 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지세를 갖추고 있어, 삼국지 영웅호걸 중의 한 사람인 손권(孫權)이 이곳에 동오(東吳) 왕조를 열고 이름을 건업(建業)이라 붙인 이래, 동진(東晋),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남당(南唐), 명(明) 등의 도읍지였던 고도(古都)이다.
남경의 부자묘(夫子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명제국이 건국되기도 몇백 년 전에 이미 남경에 세워진 곳으로 ‘문묘’, ‘문선왕묘’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주변에 진회하(秦淮河)를 끼고 있어 남경에서도 사람과 물자가 활발히 드나들어 자연히 전시가 생기고 시장이 발달하여 번화하게 된 곳이었다.
부자묘 앞의 번화로의 중심가에는 족히 반경 수백 장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대저택이 있었다.
그곳은 예전에 이름깨나 높은 고관대작이 살던 저택이었으나 홍무제가 명제국을 세우며 그 저택을 모두 헐어 버리고는 근처 부지까지 사들여 이런 큰 대저택을 세우고 말았다.
그 저택의 이름은 천영장(天影場)이었다.
이 천영장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부자묘 근처에 산 자들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명제국의 건국과 동시에 생긴 저택이고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사내들이 드나드는 것 정도를 빼고는.
그러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비록 숨죽인 채 이곳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으나 알 만한 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이 홍무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은 채 명천하의 구석구석을 모조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는 금의위(錦衣衛)라는 것을 말이다.
오시(午時)가 조금 넘은 시각, 천영장의 정문으로 다가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남색 장삼에 흑색 건을 두른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미루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총기 어린 눈빛에서는 그가 둔재가 아님을 말하고 있었고, 꽉 다문 입술과 강인한 턱 선은 가볍지 않은 인물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내는 급하지도, 그렇다고 유유자적하지도 않은 적당한 걸음걸이로 위풍당당히 천영장의 정문에 이르러 손잡이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쾅쾅!
사내는 높다란 담장과 꽉 닫힌 거대한 정문을 보고 조심할 법도 하건만 그 큰 대문이 울리도록 크게 손잡이를 흔들며 문을 두들겨 댔다.
서너 번이나 두들겼을까?
우측 정문에 난 작은 창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얼굴을 보였다.
독안(獨眼)의 험상궂은 사내였는데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거칠게 물었다.
“웬 놈이냐?!”
다짜고짜 내뱉는 말은 벌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울려 대었다.
남삼 사내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가슴을 뒤져 한 통의 봉투를 꺼내어 건넸다.
“소개장이오.”
짤막하게 한마디 덧붙이고는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독안의 사내는 뺏어 내듯 봉투를 받아 들고는 사내를 한 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창문을 거칠게 닫고는 들어가 버렸다.
독안의 사내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남삼 사내는 입을 열었다.
“휴우∼ 금의위가 대단하긴 하구만!”
남삼 사내는 그제야 한숨 돌리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의위가 보통 대단한 곳인가?
사실상 명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무력 단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홍무제의 오른팔이니 어지간하겠는가?
그러나 남삼 사내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록 지인의 소개장으로 금의위의 문을 통과할 수는 있겠으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오죽 까다롭고 어려웠으면 문과의 장원 급제에 비유하겠는가?
일다경(一茶頃)이 흐른 뒤 정문의 오른편에 소문(小門)이 열리며 예의 독안의 사내가 얼굴을 보였다.
“따라와라!”
다짜고짜 반말에다 무례한 태도였으나 남삼 사내는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런 것쯤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닳고 닳은 인물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없는 위인인가?
남삼 사내는 독안의 사내를 따라 금의위에 들어서자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먼저 놀랐다. 끝없이 펼쳐진 대연무장과 그 위로 세워진 높게 솟은 본당.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수많은 저택들은 금의위의 위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혀를 내두르며 한참을 걸어가자 독안의 사내는 연무장의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를 따라 걷자니 안내하는 자에게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심히 살피자 이자의 극히 규칙적인 걸음걸이에는 힘이 있되 이상하게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의아심이 일자 더욱 사내에게 관심이 갔다.
잠시간의 탐색을 마치자 남삼 사내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상대에 대해 대중의 파악이 끝난 것이라.
앞서 가는 독안의 사내는 아무래도 전문적인 암살법을 수련한 살수의 일종으로 보였다. 가볍고도 기척이 없는 움직임은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접근하는 데에 적합하리라. 남삼 사내가 그리 짐작하는 데는 한량으로 전전하던 어릴 적에 잠시 이런 자들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발을 옮길 때 드디어 멀지 않은 곳에 한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독안의 사내는 정면의 입문관(入門關)이라 쓰인 곳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남삼 사내는 오는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당신 직책이 무엇이오?”
독안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는 무심히 말했다.
“문지기!”
이에 남삼 사내는 미소를 짓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금의위에서의 위치는?”
남삼 사내의 다소 무례한 물음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독안의 사내는 일일이 답해 주었다.
“하급 무사.”
“이름은?”
“전숭(戰崧).”
그것을 끝으로 한동안 남삼 사내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다만 입 꼬리가 더욱 올라갔을 뿐이었다.
“금의위가 그렇게나 대단한 곳인가?”
갑작스런 남삼 사내의 말에 독안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삼 사내의 말에 무척이나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네 같은 사람을 고작 문지기를 시키니 말이야!”
그 말에 독안의 사내는 피식!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문관에 도착하기까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고, 도착한 후 임무를 마친 전숭은 신형을 돌려 다시 제 위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뒤에서 남삼 사내가 말했다.
“고생하게! 내가 찾아갈 때까지!”
남삼 사내의 말에 독안의 사내 전숭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후후. 그것도 좋지. 물론 자네가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그 말에 남삼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관량(關良)이오.”
독안의 사내는 그렇게 멀어져 갔고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남삼 사내 관량은 입문관으로 힘차게 들어섰다.
‘재미있는 자이군. 저 배포만큼이나 기량 또한 뛰어나길 바라야겠지만 그것은 후에 일이겠지. 어디 한번 기대해 보겠다. 얼마나 뛰어난 자가 되어 세상에 나올지를!’
관량이 입문관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다시 정문으로 향하는 독안 사내 전숭의 얼굴에 맺힌 엷은 웃음은 걷힐 줄 몰랐다.
그를 아는 자들이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독안 사내 전숭은 평소 웃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무척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지녀 강호상에서 야차면(夜叉面)이라 불리던 터였으니까.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는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탁자를 사이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방 안은 빛이 스며들지 않게 창이 나 있지 않았고 탁자 위에 놓인 등잔 하나에 의지해 식별할 따름이었다.
남삼 사내 관량의 앞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인이 앉아서 그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질문이란 것은 지극히 소소한 것으로 이미 이런 절차가 있기 전에 관량에 대한 모든 정보를 파악한 뒤였기에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소개장을 써 준 우군도독부 부천호(副千戶) 하후평(夏侯怦)과는 무슨 관계지?”
“아버님의 가장 절친한 친우로서 제게는 아버님과 같은 존재십니다. 그분에게 무예를 배웠지요.”
관량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중년 사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일어나지. 퀴퀴한 곳에 오래 있었더니 뼈마디가 쑤시는구먼.”
그렇게 말한 중년 사내는 서류를 집어 들며 문을 열고 나섰다.
뒤따라 나오며 관량은 의아심에 물었다.
“끝입니까?”
그의 다소 엉뚱한 물음에 중년 사내는 멀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더 무엇이 필요한가?”
그에 관량이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쳐다만 보고 있자 중년 사내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하하. 축하하네! 이제부터 자네는 금의위사(錦衣衛士)일세. 얼마간의 훈련 기간을 통과해야 가능한 얘기지만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이제부터 관량이 아닌 훈련위사(訓練衛士) 38호네. 무운을 빌겠네.”
2
숙소로 안내되는 동안 중년 사내는 금의위에 대해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다.
“자네, 금의위가 어떤 곳인지는 알지?”
“잘 알지 못합니다.”
관량은 솔직히 말했다.
“흠…… 하긴, 그럴 만하지. 오히려 자세히 아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만큼 음지에 속한 기관이니까! 내 설명해 주겠네. 자네가 속할 금의위란 말이야, 구 년 전에 홍무제께서 천하를 통일한 후 문무를 재편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긴 곳이야. 말 그대로 황제 폐하의 직속 감찰 기관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표면적으로 우리 금의위는 외부에 알려져서도 안 되고 알려지지도 않았네. 이는 우리가 비록 표면적으로는 황실 무력 단체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정보 조직이자 감찰 조직이기 때문이야. 앞으로 자네가 할 일 또한 정보와 감찰, 크게 이 두 가지라 볼 수 있겠지. 물론 자네가 훈련 기간에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말이야. 지금 이 순간부터 자네의 관량이라는 이름은 잊어버리게. 훈련 기간 동안은 38호로서, 그리고 그 기간을 마친 후엔 기관에서 내려 주는 이름을 갖게 될 걸세. 물론 임무의 중차대함에 따라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임무에는 자네의 본래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야. 금의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 두지.”
그는 잠시 마른침을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자네가 앞으로 할 일을 일러 주겠네. 자네는 오늘부터 묵게 될 방을 지정 받을 걸세. 그리고 그곳에는 세 가지 서책과 다양한 병장기가 배치되어 있을 걸세. 먼저 세 가지 서책이란 금의위의 기본 규율에 관한 책이 첫 번째이고, 천하의 주요 세력들에 대한 대강의 정보가 담긴 것이 두 번째이네. 마지막은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가 총망라된 무예서일세.”
중년 사내가 말을 마쳤을 때 눈앞에는 수많은 작은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훈련위사들의 숙소네. 본 금의위의 위사에 대한 대우는 최고여서 모두 각방을 제공해 주고 있지. 저쪽이 자네가 묵을 숙소일세. 아! 그리고 참고로 알려 주겠네. 자네가 이번 차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훈련위사일세. 한마디로 자네 외에 37명의 경쟁자들이 있다는 소리네. 앞으로 1년간의 숙소 훈련 기간이 펼쳐질 걸세. 하나 충고해 주자면 내일부터 훈련이 시작될 것이지만 행여나 오늘 밤에 방문을 벗어나지 말게. 이곳에서는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으니까 말일세. 그럼 무운을 비네!”
관량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멀어져 갔다. 꽤 사람 좋은 인물이라 여겨졌다.
발길을 돌려 중년 사내가 일러 준 건물로 향했다.
사실 건물이라기에도 무리가 있는 집이었다.
같은 크기에 같은 모양으로 늘어선 집들은 사람 하나 살기 딱 적당한 크기였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집의 문 위에는 작게 문패가 달려 있었다.
제38동
역시 배정 받은 번호대로 집 또한 배정 받은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교적 아늑한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 크지 않게 난 창문이 하나 있었고 그 창 밑의 침상의 좌우측 벽면에는 무수한 병장기가 걸려 있었다. 십팔반무예에 해당하는 병장기일 터였다. 그리고 침상 위에는 일러 준 대로 세 권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문을 닫고 침상에 앉았다.
잠시 서책을 들춰 보았으나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서책을 내려놓고 가져온 짐을 풀었다.
짐이래 봐야 즐겨 입는 남색 장삼 한 벌과 속옷 한 벌뿐이지만 말이다.
대충 주변에 정리해 놓고는 시선을 벽면의 병장기로 향했다.
벽면에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무기들이 모두 걸려 있었다.
궁(弓), 노(弩), 창(槍), 도(刀), 검(劍), 모(矛), 순(盾), 부(斧), 월(鉞), 극(戟), 편(鞭), 간(鐗), 호(鎬), 수(殳), 차(杈), 파두(耙斗), 면선투색(綿線套索)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중에 무심코 창을 들어 보았다.
이곳에 있는 창은 길이가 대중 여덟 자 다섯 치에 이르는 장창이었다.
관량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애병으로 손에 익은 창을 대하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금의위에 들기 위해 요 몇 년간 손에 익은 애병을 놔두고 육장을 수련해 왔던 터여서 오랜만의 창이 생경한 기분마저 들었다.
창의 중앙을 거머쥔 손에 힘이 실리며 몸의 자세 또한 마보를 취했다. 관량이 수련한 관부 무장들의 창술인 24로 창법의 기수식이었다.
찻!
호쾌한 기합과 함께 전반부 12로가 연달아 펼쳐졌다.
먼저 바람을 가르며 창으로 연달아 전후좌우를 찌르고는 다시 사방을 베어 갔다. 힘이 실린 창에서는 연방 쉭쉭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방 베기를 마친 관량은 창에 회전을 가하기 시작했다.
양손을 오가며 휘도는 창에서 강맹한 풍압이 발생하며 마치 강풍이 불어온 듯 침상 위 서책이 나풀거렸다.
끊임없이 회전하는 창에 의해 풍압은 갈수록 거세어졌고 그 극에 달했을 때 관량은 창을 찔러 갔다.
파삭!
창이 벽에 닿지도 않았건만 벽에는 풍압으로 인한 두 치 정도의 흠집이 생겼다.
이에 관량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창을 다시 걸어 놓았다.
비록 장소가 협소하여 동작이 큰 편인 후반부 12로는 펼치지 못하였으나 이 정도로도 기분이 개운해졌다.
이어서 관량은 서서히 온몸의 근육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권각술을 수련하기 전에 꼭 하는 준비 동작이었다.
몸의 마디마디 구석구석을 꼼꼼히 풀어 준 관량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타(打), 퇴(腿), 솔(率), 나(拿)의 순서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펼치는 무예는 꽤 실전적이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그의 주먹이 앞으로 뻗어 가자 바람 소리가 나며 상대의 당문혈(當門穴)을 노렸고, 마치 끊어지듯 차올린 발차기에 상대의 하음혈(下陰穴)을 노렸다. 이어진 솔, 나의 수법 또한 극도로 실용적이며 절도 있는 무예였다.
이는 바로 아버지의 친우인 우군도독부 부천호 하후평으로부터 전수 받은 사격타법(四擊打法)이었다.
사격타법이란 군부에 입부한 무관 중 십호장 이상의 장수들에게 전수되는 무예로 지극히 실전적이고 전투적인 적을 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예였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니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쓰러지듯 침상에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 두는 것이 좋겠지. 이제 이곳은 내 새로운 전장(戰場)이니까…….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몸으로 체득한 석 푼을 숨기라는 격언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다시는 그 같은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날카롭게 두 눈을 번뜩인 관량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수마에 빠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금의위에 들며 긴장한 탓이었다.
그렇게 관량의 금의위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그러나 관량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하나 내일이면 알 수 있으리라.
왜 이곳이 금의위사들도 가장 치를 떠는 곳인지를…….
3
댕댕댕!
아침을 깨우는 괴종(怪鐘) 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깨우며 울려 퍼졌다.
‘종소리라……. 그나저나 이제 시작이로군.’
재빨리 복장을 갖추고 방문을 나서자 얼굴의 반쪽을 가로지른 깊은 검상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냉막한 분위기의 삼십 대 장한의 앞에 훈련위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두 개의 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직 반수도 채 모여 있지 않았다. 재빨리 가까운 쪽의 줄에 선 후 주변을 살피자 훈련위사들이 부산을 떨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관량은 무언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1화
작가서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 동안 무협을 즐겨 오며 가슴속에 항상 저만의 강호를 그려 왔습니다.
그 강호는 마치 ‘옛 강호’처럼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하지만 또한 ‘현 강호’처럼 시원하고 통쾌하기도 합니다.
그 강호의 첫 번째가 바로 ‘금의위사’입니다.
금의위사의 ‘강호’는 바로 무(武)와 애(愛)입니다.
역사이되 역사가 아닌 이야기.
초인이되 인간인 강호라는 세계에서 사는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무(武)에 대한 갈망과 우정, 배신, 복수, 그리고 사랑을 담고 싶었습니다.
저는 옛 무협을 유독 좋아합니다. 이미 뿌연 먼지로 뒤덮인, 까만 손때로 뒤덮인 그런 옛 무협을 말입니다.
하지만 또한 옛 무협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고 휩쓸리는 나약한 모습의 인간들의 이야기에 대한 젊은 피로서의 반발일 것입니다.
그래서 ‘금의위사’를 쓰며 다양한 연령대가 두루 즐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젊은이들은 웅혼한 기상을, 지나간 세월에 눈물 흘리는 중년, 노년의 독자들께는 옛 향수와 함께 잃어버린 패기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글이나 무협다운 글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저의 글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시고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많은 선배 작가님들, 동료 작가 분들, 출판을 위해 힘써 주신 뿔미디어 정필 대표님, 편집부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안녕이 깃들기를 희망합니다.
태영 올림
서장
명(明)제국.
서기 1368년에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수립되어 280여 년을 존속하다가 1644년 멸망한 대(大)제국.
개국 초기 논공행상을 마치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명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얻어 버린 개국 공신들이었다.
이에 홍무제는 강력한 결단을 내리니 그것은 바로 1380년 호유용(胡惟庸) 사건과 1393년 남옥(藍玉) 사건이었다.
모반의 이유로 관련자 수만여 명이 죽음을 당한 이 두 사건 모두 밝혀진 증거가 없어 홍무제의 독재적인 권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된 사건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극비로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호유용 사건과 남옥 사건, 두 사건 모두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다만 그 증거라는 것이 홍무제의 명에 의해 정보기관에서 조작한 증거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조작하고 관장하는 기관을 홍무제가 이름 짓기를 금의위(錦衣衛)라 하였다.
제1장 금의위(錦衣衛) 입문(入門)
1
명제국(明帝國)의 황도 남경(南京).
남경은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의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종산(鐘山), 서쪽으로는 완남 구릉지대와 맞닿은 전략적 요충지이다. 행정적으로는 서쪽으로 안휘성(安徽省)에 인접해 있다. 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지세를 갖추고 있어, 삼국지 영웅호걸 중의 한 사람인 손권(孫權)이 이곳에 동오(東吳) 왕조를 열고 이름을 건업(建業)이라 붙인 이래, 동진(東晋),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남당(南唐), 명(明) 등의 도읍지였던 고도(古都)이다.
남경의 부자묘(夫子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명제국이 건국되기도 몇백 년 전에 이미 남경에 세워진 곳으로 ‘문묘’, ‘문선왕묘’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주변에 진회하(秦淮河)를 끼고 있어 남경에서도 사람과 물자가 활발히 드나들어 자연히 전시가 생기고 시장이 발달하여 번화하게 된 곳이었다.
부자묘 앞의 번화로의 중심가에는 족히 반경 수백 장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대저택이 있었다.
그곳은 예전에 이름깨나 높은 고관대작이 살던 저택이었으나 홍무제가 명제국을 세우며 그 저택을 모두 헐어 버리고는 근처 부지까지 사들여 이런 큰 대저택을 세우고 말았다.
그 저택의 이름은 천영장(天影場)이었다.
이 천영장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부자묘 근처에 산 자들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명제국의 건국과 동시에 생긴 저택이고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사내들이 드나드는 것 정도를 빼고는.
그러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비록 숨죽인 채 이곳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으나 알 만한 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이 홍무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은 채 명천하의 구석구석을 모조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는 금의위(錦衣衛)라는 것을 말이다.
오시(午時)가 조금 넘은 시각, 천영장의 정문으로 다가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남색 장삼에 흑색 건을 두른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미루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총기 어린 눈빛에서는 그가 둔재가 아님을 말하고 있었고, 꽉 다문 입술과 강인한 턱 선은 가볍지 않은 인물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내는 급하지도, 그렇다고 유유자적하지도 않은 적당한 걸음걸이로 위풍당당히 천영장의 정문에 이르러 손잡이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쾅쾅!
사내는 높다란 담장과 꽉 닫힌 거대한 정문을 보고 조심할 법도 하건만 그 큰 대문이 울리도록 크게 손잡이를 흔들며 문을 두들겨 댔다.
서너 번이나 두들겼을까?
우측 정문에 난 작은 창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얼굴을 보였다.
독안(獨眼)의 험상궂은 사내였는데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거칠게 물었다.
“웬 놈이냐?!”
다짜고짜 내뱉는 말은 벌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울려 대었다.
남삼 사내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가슴을 뒤져 한 통의 봉투를 꺼내어 건넸다.
“소개장이오.”
짤막하게 한마디 덧붙이고는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독안의 사내는 뺏어 내듯 봉투를 받아 들고는 사내를 한 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창문을 거칠게 닫고는 들어가 버렸다.
독안의 사내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남삼 사내는 입을 열었다.
“휴우∼ 금의위가 대단하긴 하구만!”
남삼 사내는 그제야 한숨 돌리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의위가 보통 대단한 곳인가?
사실상 명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무력 단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홍무제의 오른팔이니 어지간하겠는가?
그러나 남삼 사내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록 지인의 소개장으로 금의위의 문을 통과할 수는 있겠으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오죽 까다롭고 어려웠으면 문과의 장원 급제에 비유하겠는가?
일다경(一茶頃)이 흐른 뒤 정문의 오른편에 소문(小門)이 열리며 예의 독안의 사내가 얼굴을 보였다.
“따라와라!”
다짜고짜 반말에다 무례한 태도였으나 남삼 사내는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런 것쯤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닳고 닳은 인물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없는 위인인가?
남삼 사내는 독안의 사내를 따라 금의위에 들어서자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먼저 놀랐다. 끝없이 펼쳐진 대연무장과 그 위로 세워진 높게 솟은 본당.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수많은 저택들은 금의위의 위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혀를 내두르며 한참을 걸어가자 독안의 사내는 연무장의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를 따라 걷자니 안내하는 자에게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심히 살피자 이자의 극히 규칙적인 걸음걸이에는 힘이 있되 이상하게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의아심이 일자 더욱 사내에게 관심이 갔다.
잠시간의 탐색을 마치자 남삼 사내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상대에 대해 대중의 파악이 끝난 것이라.
앞서 가는 독안의 사내는 아무래도 전문적인 암살법을 수련한 살수의 일종으로 보였다. 가볍고도 기척이 없는 움직임은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접근하는 데에 적합하리라. 남삼 사내가 그리 짐작하는 데는 한량으로 전전하던 어릴 적에 잠시 이런 자들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발을 옮길 때 드디어 멀지 않은 곳에 한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독안의 사내는 정면의 입문관(入門關)이라 쓰인 곳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남삼 사내는 오는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당신 직책이 무엇이오?”
독안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는 무심히 말했다.
“문지기!”
이에 남삼 사내는 미소를 짓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금의위에서의 위치는?”
남삼 사내의 다소 무례한 물음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독안의 사내는 일일이 답해 주었다.
“하급 무사.”
“이름은?”
“전숭(戰崧).”
그것을 끝으로 한동안 남삼 사내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다만 입 꼬리가 더욱 올라갔을 뿐이었다.
“금의위가 그렇게나 대단한 곳인가?”
갑작스런 남삼 사내의 말에 독안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삼 사내의 말에 무척이나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네 같은 사람을 고작 문지기를 시키니 말이야!”
그 말에 독안의 사내는 피식!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문관에 도착하기까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고, 도착한 후 임무를 마친 전숭은 신형을 돌려 다시 제 위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뒤에서 남삼 사내가 말했다.
“고생하게! 내가 찾아갈 때까지!”
남삼 사내의 말에 독안의 사내 전숭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후후. 그것도 좋지. 물론 자네가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그 말에 남삼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관량(關良)이오.”
독안의 사내는 그렇게 멀어져 갔고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남삼 사내 관량은 입문관으로 힘차게 들어섰다.
‘재미있는 자이군. 저 배포만큼이나 기량 또한 뛰어나길 바라야겠지만 그것은 후에 일이겠지. 어디 한번 기대해 보겠다. 얼마나 뛰어난 자가 되어 세상에 나올지를!’
관량이 입문관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다시 정문으로 향하는 독안 사내 전숭의 얼굴에 맺힌 엷은 웃음은 걷힐 줄 몰랐다.
그를 아는 자들이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독안 사내 전숭은 평소 웃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무척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지녀 강호상에서 야차면(夜叉面)이라 불리던 터였으니까.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는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탁자를 사이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방 안은 빛이 스며들지 않게 창이 나 있지 않았고 탁자 위에 놓인 등잔 하나에 의지해 식별할 따름이었다.
남삼 사내 관량의 앞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인이 앉아서 그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질문이란 것은 지극히 소소한 것으로 이미 이런 절차가 있기 전에 관량에 대한 모든 정보를 파악한 뒤였기에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소개장을 써 준 우군도독부 부천호(副千戶) 하후평(夏侯怦)과는 무슨 관계지?”
“아버님의 가장 절친한 친우로서 제게는 아버님과 같은 존재십니다. 그분에게 무예를 배웠지요.”
관량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중년 사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일어나지. 퀴퀴한 곳에 오래 있었더니 뼈마디가 쑤시는구먼.”
그렇게 말한 중년 사내는 서류를 집어 들며 문을 열고 나섰다.
뒤따라 나오며 관량은 의아심에 물었다.
“끝입니까?”
그의 다소 엉뚱한 물음에 중년 사내는 멀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더 무엇이 필요한가?”
그에 관량이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쳐다만 보고 있자 중년 사내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하하. 축하하네! 이제부터 자네는 금의위사(錦衣衛士)일세. 얼마간의 훈련 기간을 통과해야 가능한 얘기지만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이제부터 관량이 아닌 훈련위사(訓練衛士) 38호네. 무운을 빌겠네.”
2
숙소로 안내되는 동안 중년 사내는 금의위에 대해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다.
“자네, 금의위가 어떤 곳인지는 알지?”
“잘 알지 못합니다.”
관량은 솔직히 말했다.
“흠…… 하긴, 그럴 만하지. 오히려 자세히 아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만큼 음지에 속한 기관이니까! 내 설명해 주겠네. 자네가 속할 금의위란 말이야, 구 년 전에 홍무제께서 천하를 통일한 후 문무를 재편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긴 곳이야. 말 그대로 황제 폐하의 직속 감찰 기관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표면적으로 우리 금의위는 외부에 알려져서도 안 되고 알려지지도 않았네. 이는 우리가 비록 표면적으로는 황실 무력 단체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정보 조직이자 감찰 조직이기 때문이야. 앞으로 자네가 할 일 또한 정보와 감찰, 크게 이 두 가지라 볼 수 있겠지. 물론 자네가 훈련 기간에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말이야. 지금 이 순간부터 자네의 관량이라는 이름은 잊어버리게. 훈련 기간 동안은 38호로서, 그리고 그 기간을 마친 후엔 기관에서 내려 주는 이름을 갖게 될 걸세. 물론 임무의 중차대함에 따라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임무에는 자네의 본래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야. 금의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 두지.”
그는 잠시 마른침을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자네가 앞으로 할 일을 일러 주겠네. 자네는 오늘부터 묵게 될 방을 지정 받을 걸세. 그리고 그곳에는 세 가지 서책과 다양한 병장기가 배치되어 있을 걸세. 먼저 세 가지 서책이란 금의위의 기본 규율에 관한 책이 첫 번째이고, 천하의 주요 세력들에 대한 대강의 정보가 담긴 것이 두 번째이네. 마지막은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가 총망라된 무예서일세.”
중년 사내가 말을 마쳤을 때 눈앞에는 수많은 작은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훈련위사들의 숙소네. 본 금의위의 위사에 대한 대우는 최고여서 모두 각방을 제공해 주고 있지. 저쪽이 자네가 묵을 숙소일세. 아! 그리고 참고로 알려 주겠네. 자네가 이번 차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훈련위사일세. 한마디로 자네 외에 37명의 경쟁자들이 있다는 소리네. 앞으로 1년간의 숙소 훈련 기간이 펼쳐질 걸세. 하나 충고해 주자면 내일부터 훈련이 시작될 것이지만 행여나 오늘 밤에 방문을 벗어나지 말게. 이곳에서는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으니까 말일세. 그럼 무운을 비네!”
관량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멀어져 갔다. 꽤 사람 좋은 인물이라 여겨졌다.
발길을 돌려 중년 사내가 일러 준 건물로 향했다.
사실 건물이라기에도 무리가 있는 집이었다.
같은 크기에 같은 모양으로 늘어선 집들은 사람 하나 살기 딱 적당한 크기였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집의 문 위에는 작게 문패가 달려 있었다.
제38동
역시 배정 받은 번호대로 집 또한 배정 받은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교적 아늑한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 크지 않게 난 창문이 하나 있었고 그 창 밑의 침상의 좌우측 벽면에는 무수한 병장기가 걸려 있었다. 십팔반무예에 해당하는 병장기일 터였다. 그리고 침상 위에는 일러 준 대로 세 권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문을 닫고 침상에 앉았다.
잠시 서책을 들춰 보았으나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서책을 내려놓고 가져온 짐을 풀었다.
짐이래 봐야 즐겨 입는 남색 장삼 한 벌과 속옷 한 벌뿐이지만 말이다.
대충 주변에 정리해 놓고는 시선을 벽면의 병장기로 향했다.
벽면에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무기들이 모두 걸려 있었다.
궁(弓), 노(弩), 창(槍), 도(刀), 검(劍), 모(矛), 순(盾), 부(斧), 월(鉞), 극(戟), 편(鞭), 간(鐗), 호(鎬), 수(殳), 차(杈), 파두(耙斗), 면선투색(綿線套索)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중에 무심코 창을 들어 보았다.
이곳에 있는 창은 길이가 대중 여덟 자 다섯 치에 이르는 장창이었다.
관량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애병으로 손에 익은 창을 대하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금의위에 들기 위해 요 몇 년간 손에 익은 애병을 놔두고 육장을 수련해 왔던 터여서 오랜만의 창이 생경한 기분마저 들었다.
창의 중앙을 거머쥔 손에 힘이 실리며 몸의 자세 또한 마보를 취했다. 관량이 수련한 관부 무장들의 창술인 24로 창법의 기수식이었다.
찻!
호쾌한 기합과 함께 전반부 12로가 연달아 펼쳐졌다.
먼저 바람을 가르며 창으로 연달아 전후좌우를 찌르고는 다시 사방을 베어 갔다. 힘이 실린 창에서는 연방 쉭쉭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방 베기를 마친 관량은 창에 회전을 가하기 시작했다.
양손을 오가며 휘도는 창에서 강맹한 풍압이 발생하며 마치 강풍이 불어온 듯 침상 위 서책이 나풀거렸다.
끊임없이 회전하는 창에 의해 풍압은 갈수록 거세어졌고 그 극에 달했을 때 관량은 창을 찔러 갔다.
파삭!
창이 벽에 닿지도 않았건만 벽에는 풍압으로 인한 두 치 정도의 흠집이 생겼다.
이에 관량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창을 다시 걸어 놓았다.
비록 장소가 협소하여 동작이 큰 편인 후반부 12로는 펼치지 못하였으나 이 정도로도 기분이 개운해졌다.
이어서 관량은 서서히 온몸의 근육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권각술을 수련하기 전에 꼭 하는 준비 동작이었다.
몸의 마디마디 구석구석을 꼼꼼히 풀어 준 관량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타(打), 퇴(腿), 솔(率), 나(拿)의 순서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펼치는 무예는 꽤 실전적이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그의 주먹이 앞으로 뻗어 가자 바람 소리가 나며 상대의 당문혈(當門穴)을 노렸고, 마치 끊어지듯 차올린 발차기에 상대의 하음혈(下陰穴)을 노렸다. 이어진 솔, 나의 수법 또한 극도로 실용적이며 절도 있는 무예였다.
이는 바로 아버지의 친우인 우군도독부 부천호 하후평으로부터 전수 받은 사격타법(四擊打法)이었다.
사격타법이란 군부에 입부한 무관 중 십호장 이상의 장수들에게 전수되는 무예로 지극히 실전적이고 전투적인 적을 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예였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니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쓰러지듯 침상에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 두는 것이 좋겠지. 이제 이곳은 내 새로운 전장(戰場)이니까…….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몸으로 체득한 석 푼을 숨기라는 격언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다시는 그 같은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날카롭게 두 눈을 번뜩인 관량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수마에 빠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금의위에 들며 긴장한 탓이었다.
그렇게 관량의 금의위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그러나 관량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하나 내일이면 알 수 있으리라.
왜 이곳이 금의위사들도 가장 치를 떠는 곳인지를…….
3
댕댕댕!
아침을 깨우는 괴종(怪鐘) 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깨우며 울려 퍼졌다.
‘종소리라……. 그나저나 이제 시작이로군.’
재빨리 복장을 갖추고 방문을 나서자 얼굴의 반쪽을 가로지른 깊은 검상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냉막한 분위기의 삼십 대 장한의 앞에 훈련위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두 개의 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직 반수도 채 모여 있지 않았다. 재빨리 가까운 쪽의 줄에 선 후 주변을 살피자 훈련위사들이 부산을 떨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관량은 무언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