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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전대검후와 후기지수들이 무련각의 사용료를 가지러 가자 혈불은 가만 앉아 있었더니 좀이 쑤신다고 밖으로 나갔다. 촌장도 자신의 집에 가서 할 일이 있다고 돌아가고, 양곤은 할아버지들이 머물 방을 청소하고 침구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네 녀석의 이름이 사일이지?”
마뇌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선인.”
“광극, 저놈을 좀 단련시켜야겠다.”
“왜?”
“곤이와 함께 북해로 갈 건데 저놈이 곤이를 지켜 줘야 되지 않을까 하네.”
“그렇군. 자네 말이 맞네.”
“네놈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
사일은 자신이 아는 주술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광극과 마뇌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마뇌가 고개를 들었다.
“저놈이 양신(陽神)을 얻었으니 무공도 익힐 수 있겠지?”
“가능하겠지. 더구나 순수한 양기로 이루어진 몸이라 성취도 빠를 게야.”
“그럼 내가 저놈에게 적당한 무공을 가르치겠네.”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선인.”
사일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말에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마뇌의 입이 열리고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쉬운 일이 아니다. 너는 귀선이라 혼(魂)이 흩어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백(魄)을 모아 몸을 이루게 했지만, 몸을 가짐으로 너는 육체적 요소를 가진 칠백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의미를 아느냐?”
“제가 우둔하여 알지 못합니다. 하교하여 주십시오.”
“본디 혼백(魂魄)을 이를 때 삼혼칠백(三魂七魄)이라고 한다. 혼(魂)은 맑고 청정(淸淨)한 것이고 백(魄)은 탁하고 거친 것이다. 그러기에 혼비백산(魂飛魄散), 즉 혼은 위로 날아가고 백은 아래로 흩어진다. 삼혼(三魂)은 사람의 몸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이 어미에 뱃속에 안착할 때 처음 들어서는 혼인 영혼(靈魂)과 뱃속에서 나오면서 고고성을 지를 때 들어오는 생혼(生魂)과 철이 들면서 자아가 생길 때 들어오는 각혼(覺魂)을 일컫는 말이다. 천지의 진리는 일삼(一三)의 원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하나에서 셋이 생기는 이치와 같다. 삼혼이 안정되면 정신이 온전해지고 총명해지기에 빨리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
마뇌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사일의 안색을 살피고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칠백(七魄)이란 것은 사람의 몸속에 있는 일곱 가지 탁기를 말하는데 희노우구애증욕(喜怒憂懼愛憎慾)의 칠정(七情)을 낳는다. 먹기를 좋아하고, 옷 입는 것을 좋아하고, 음행을 좋아하고, 놀음을 좋아하고, 앙화(殃禍, 잘못으로 인해 받는 화)를 좋아하고, 탐내기를 좋아하고, 잡스러운 일을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욕망이 적절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기운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 백들은 항상 심장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에 숨어 있는데 운명에 따라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마뇌는 한층 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백(魄)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오욕칠정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라고 원하는 것이 많아질 것이야. 이 칠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날뛰게 되면, 너는 다시 귀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부단히 노력해서 삼혼을 안정시키고 칠백을 잘 제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인선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소인이 우둔하여 확실하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고언(高言)을 각골명심하여 항상 갈고닦겠습니다.”
“내가 가르칠 무공을 수련할 때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대화를 듣던 광극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사일의 태도를 기뻐했다. 귀선이라 마음이 삐뚤 줄 알았는데 제법 곧은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인연이 닿지 않았음이야.’
마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얼마 없는 듯하니 바로 시작해야겠네.”
“어디서 가르칠 건가?”
“심법은 이곳에서 가르치고, 초식은 삼선도에 가서 가르치겠네.”
“그렇게 하게.”
마뇌가 밖으로 나가자 사일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던 광극은 또 하나의 선연(仙緣)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했다.
‘저 녀석 곤이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게야.’

칠 주야가 흐른 지금 양곤의 삼선장(三仙裝)과 어촌은 급속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학동들도 이제는 광극에게 훈장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잘 따르고 있었고, 광극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혈불은 전대검후와 후기지수들의 수련을 조금씩 도와주고 있었다. 마뇌는 사일에게 무공을 가르친다며 그를 삼선도에 데려갔다.
큰 변화의 시작은 보타문에서였는데, 연검장이 흘린 소문의 진위를 따지러 온 서문세가(西門世家)와 백리세가(百里世家), 단목세가(檀木世家)의 가주들이 끝까지 부인하지 못한 검후의 진실을 듣고 대사부의 소문이 사실로 알려졌다.
대사부의 정체와 장원의 비밀이 사실임이 밝혀지자 세 가문은 자신들의 소가주들을 장원으로 보냈고, 자신들의 체면을 생각해 차마 제자들을 장원으로 보낼 수 없었던 대문파들은 세작(細作)을 어촌에 심었다. 그들이 힘으로 삼선장을 노리지 않은 것은 서로 견제하는 세력구도 탓이었다.
공작금을 얻으러 갔던 아구는 분타주에게 안 죽을 만큼 다시 구타당하며 겨우 조금의 돈을 얻어 돌아왔다. 공작금이 모자라 무련각에는 들지 못하고 양곤에게 애걸복걸하여 학동들 뒤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비록 아이들이 냄새 난다고 해 훈육각(訓育閣)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배웠지만, 장원의 사정을 살필 수 있었고, 자수신니가 끼니때마다 음식을 챙겨 주었기에 아구는 대만족이었다.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촌에 상주하게 되자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어촌 주민들의 수입도 덩달아 늘었다. 수입이 늘어난 주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늘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작았던 어촌은 상산보다 큰 규모의 마을로 발전할 것이었다.
“대사부님, 이제 장원에 사람이 많이 늘어 손이 많이 부족합니다.”
옆에서 과일을 깎아 양곤에게 건네주던 자수신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니께서 촌장님과 상의하셔서 일할 사람을 구하세요.”
촌장이 매일 장원에 와서 이것저것 많은 일을 도와주는 것을 아는 양곤이 그녀와 촌장에게 일을 위임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수신니가 밖으로 나가자 양곤은 이제 장원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간다고 생각하고 얼른 북해로 가 청린빙어(靑鱗氷魚)를 구해 오리라 마음먹었다.
양곤은 그날 저녁 식사 중에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할아버지, 이제 장원이 자리를 잡았으니 저는 북해로 가야겠습니다.”
“마뇌가 돌아오면 사일과 함께 가지 그러냐?”
“아닙니다. 사일은 수련을 마치면 보내 주십시오. 제가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곤아, 사실 우리가 청린빙어를 거론한 것은 네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꼭 청린빙어가 필요하지는 않단다.”
광극은 양곤을 혼자 험한 강호에 내보내는 것이 조금 껄끄러웠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요. 얼른 청린빙어를 구해 오고 난 후 세상을 구경할 겁니다.”
양곤의 마음이 이미 정해진 것을 보고 광극이 입을 열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그럼 언제 출발하겠느냐?”
“내일 출발할 생각입니다.”
양곤의 폭탄선언에 모두들 수저를 멈추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가, 그렇게나 빨리요?”
수련에 재미를 붙여 한동안 양곤과 함께하지 못했던 여미려는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갔다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혼자 가는 것이 빠를 거야.”
양곤이 거절의 뜻을 보이자 여미려의 안색이 더욱 흐려졌다.
“알았다. 항상 조심하도록 해라.”
“네, 할아버지.”
모두들 섭섭한 마음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지만, 여미려는 양곤의 곁에 머물렀다. 두 사람은 기화요초(琪花瑤草)에 둘러싸인 작은 연못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피곤하지 않느냐?”
다정한 양곤의 말에 여미려는 설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샘을 터뜨렸다.
“흑흑흑, 안 가시면 안 돼요?”
가녀리게 떨리는 여미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하던 양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나온 목적이 할아버지들께 청린빙어를 구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목적을 잊어버리고 약속을 저버리면, 남아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북해만 다녀오면 되는 것이니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하구나.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볼 수 있을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네.”
겨우 마음을 다스린 여미려가 고개를 들어 양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런 손길로 닦아 주던 양곤은 달빛에 하얗게 반사된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곱구나.”
은근한 그의 목소리에 여미려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끈거리는 자신의 얼굴이 부끄러웠던 여미려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하얀 달빛은 그녀의 뽀얀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가가,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시는 거죠?”
너무 낮아 잘 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래. 약속하마.”
“알았어요. 제가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돼요.”
용기를 낸 여미려가 고개를 발딱 들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촉촉한 눈망울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여미려가 사랑스러웠던 양곤은 살며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만월이 부끄러워하는 여미려의 모습을 보고 살며시 구름 뒤에 숨었다. 두 연인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직접 느끼며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양곤은 자신이 길을 떠날 때 가져가야 할 물건들을 꼼꼼히 챙기며 채비를 하였다.
“음, 돈은 조금 남아 있고, 모자라면 무한낭의 산삼을 처분하면 될 것이고.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 외에는 챙길 것이 없네. 또 뭐가 더 필요할까?”
행랑이 너무 간단한 것 같아 찜찜했던 양곤은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챙길 것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대사부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객청으로 오시지요.”
자수신니의 부드러운 음성에 양곤이 방문을 열고 나섰다.
“항상 신니께 감사드립니다.”
양곤의 다정한 어투에 자수신니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처서(處暑)가 막 지난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솜처럼 희고 부드러운 구름이 떠 있었다. 양곤의 환송식은 오래 걸렸다. 할아버지들과 장원의 사람들, 그리고 어촌의 주민들까지 그의 떠나는 길을 축복해 주었기에 인사가 길어졌고 여인들의 붉어진 눈망울에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양곤의 심약함도 한몫했다. 겨우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겨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달한 양곤은 길을 떠나기도 전에 기운이 빠져 축 늘어졌다.
“휴, 길을 떠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네.”
그렇지만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자신을 아껴 주는 그들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일에게 무공을 가르친다고 섬으로 간 마뇌 할아버지께 인사를 못 드렸다는 것이었다.
“이해해 주시겠지. 영차!”
어깨에 멘 바랑을 추스르며 기합을 한번 지른 양곤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축지법을 펼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몰랐지만, 이런 양곤의 행보를 지켜보던 눈이 있었다. 온몸을 검은 야행복으로 둘러싸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동자가 다인 그는 조환이었다. 그는 양곤의 축지법을 보고 놀라움에 눈이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서둘러 양곤의 뒤를 따라 경신술을 펼친 그는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사부님께서 주술을 익히고 있다고 하신 말씀이 맞구나. 어디서 어떻게 저놈을 처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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