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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25화)
4장 ― 자매의 입장(9)
“이놈!”
장쾌한 도약. 내려친 검에서 이어지는 초식은 장중한 검도였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굵은 선을 그리는 초식을 격화시켰다. 벌 떼가 울 듯 울리는 검은 받아칠 수 없을 듯 거대한 진력을 가득 품고 있었다.
우우웅! 뻐엉!
진철이 검을 움직여 세 개의 원을 그렸다. 어깨와 명치, 다리를 노린 세 줄기 검기가 태극의 원 속에 갇혀 휘몰아치다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소멸했다. 직접 맞부딪치지 않고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기예는 무당의 태극혜검, 사량발천근의 무리. 이어지는 공격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까앙!
“큭!”
빠르고 역동적인 검마의 검이 단 한 번 부딪친 것만으로 튕겨 나갈 듯 솟구쳤다. 회전하는 손목과 그로 인한 전사. 완만한 곡선 사이로 굵은 줄기가 막강한 내력을 담고 이어지니, 보는 것만으로는 상상치 못할 거력이었다.
‘무당.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다 생각했건만, 이런 괴물을 내놓다니!’
무당의 검법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사량발천근. 선심후수의 기예에 화경과 전사를 이용한 초식들이 주를 이루니,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무공이었다. 그렇기에 무당의 무공을 상대하는 법은 단 하나였다.
똑같은 유한 공격으로 상대하거나, 부드러움으로도 버틸 수 없는 강맹한 공격을 하거나.
“카합!”
탁한 기합성. 검마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기천검 천장화신(天將化身). 응축된 마기가 검마의 몸을 돌며 피부 너머로 이글거렸다. 내치는 검격에서 흘러나오는 파공음이 전에 없이 컸다. 태극의 원 속을 파고든 검기가 막을 뚫고 진철의 어깨를 스쳤다.
타탓! 타타탓!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이제는 눈이 따라가는 것이 벅찰 정도였다. 기기묘묘한 변화와 쾌속하게 바뀌며 밟아 가는 방위. 멍하니 보자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일게 만드는 보법이었다.
카앙!
점차 빨라지는 검격에 진철이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다섯 개의 원. 한 호흡만으로 한 번에 하나씩 다섯 줄기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낸 검마가 왼손으로 검결을 짚으며 화살을 쏘듯 기운을 쏘아 냈다.
기천검 비격뢰(飛激雷).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기운.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그에 맞서는 진철의 검이 처음과 같은 빠른 속도로 하얀 잔영을 그렸다.
스걱!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꺾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꿰뚫릴 뻔했다. 귀의 반을 베고 지나간 무형의 기운. 궤적을 따라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후예의 화살이 떠오르는 무공이었다.
“이번엔 사일검법(射日劍法)이라니!”
사일검법은 구대문파 점창파의 절기였다. 구파 중 어느 한곳의 무공조차 평생을 배워도 오의를 깨우치기 어렵건만, 진철은 두 개의 절기를 어릴 적부터 배워 온 양 수준급으로 펼쳐 냈다.
“말을 내뱉을 여유도 있나?”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찔러 낸 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그 속도에 검마는 오직 생존의 감만으로 다시 한 번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횡으로 휘둘러 도도히 이어지는 검격에 검마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방어하며 근근이 버텨 갔다.
챙! 큐웅! 쩌엉!
검과 검이 부딪치며 몇 번을 불꽃을 피웠을까. 기세를 빼앗겨 불리한 상황임에도 괜히 고수가 아닌 것인지 검마의 방어는 난공불락과도 같았다. 막지 못하더라도 요혈만은 보호하니, 온몸이 피투성이이긴 하지만 투지만은 겉잡을 데 없이 솟아나는 중이었다.
텅! 슈쩡!
살짝 휘돌려 풀어내는 경력. 경험의 소산, 능숙한 대처였다. 불리한 상황에서 체력의 소모를 최대한 아끼는 방법이었다.
“크압!”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공이란 무공의 기본. 천장화신은 마기를 일시적으로 증폭시켜 신체의 능력을 겉잡을 데 없이 상승시키는 초식. 대해와 같이 끝을 모르던 내력이 점차 한계를 보여 가고 있던 것이다.
콰앙!
일순간 폭발적으로 집약된 진기에 진철이 맞받아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검을 회수하였다. 이렇게 가다간 결국 자멸하고 말 것이란 사실을 느낀 검마가 마지막 일격으로 싸움을 끝내려는 듯 검을 한차례 휘돌리며 마기를 응축시켰다. 빠른 속도. 기의 수급이 자유롭다는 얘기였다.
우우우웅!
검명이 일었다. 한계치를 넘어설 정도로 집약된 마기에 부서질 법도 하건만, 검은 마치 자신의 기운을 속에서 뽑아내듯 울리고 있었다.
“카아앗!”
쩌어어엉!
검마의 신형이 쭈욱 늘어나는 듯하더니, 진철의 앞에 이르러 벼락과도 같이 검을 내려쳤다. 전력을 다한 일격.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세였다. 검신에 검붉은 진기가 그득히 담기며 천붕(天崩)의 경력이 휘몰아쳤다.
기천검 붕천격(崩天擊). 쾌검 속에 중검이 있다. 결코 같이 있을 수 없는 두 무공의 묘리. 그것이 기천검의 검법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기천(奇天), 일대 종사를 칭할 수 있는 희대의 검법이었다.
쿠웅!
진철이 얼굴을 굳히며 크게 진각을 밟았다. 회전하며 힘을 모으는 나선의 진기. 다리를 거쳐 허리, 허리에서 꺾여 어깨로, 그리고 어깨에서 검으로.
카카칵! 슈걱!
“크읏!”
파공음도 작고 가볍게 휘두른 검이지만, 검마는 결국 검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다. 검사들이 염원하는 경지가 이곳에 있었다.
쾅! 콰앙! 콰아앙!
포탄이 터진 듯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휘몰아치는 경력의 소용돌이는 질풍을 넘어서 태풍에 가까워졌고, 공기에 녹아 들어가는 살기는 찐득하게 엉겨 붙어 손에 잡힐 듯 뜨거웠다.
쨍강!
한껏 몰아붙이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맥을 못 추는 검마. 하지만 천운이 따른 듯 크게 반원을 그린 검격에 진철의 검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상승의 영역, 느려진 시간 속 흩어지는 파편.
쓰러진 숭검단 무인의 시체에서 건져 낸 검. 이미 한차례 격전을 겪었던 탓인지 그만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순간, 검마의 두 눈동자 속에 승리의 희열이 담겼다.
‘끝이다!’
짜낼 수 있는 모든 내공을 짜내 검에 불어넣고 내쳤다. 진철의 목을 노리는 직선의 궤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검마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품이 커다란 소매에서 한 자루 단검이 나타나 검격을 막아섰다.
쨍강!
부러지는 검. 나머지 한쪽 소매에서 또 한 자루 단검이 나타나 반월을 그렸다.
쩌엉! 파삭!
이번엔 검마와 진철의 검, 두 자루 모두 버티지 못했다. 소모품처럼 검을 맞부딪쳐 깨부순 진철이 양손을 들고 은사를 쏘아 냈다. 사방에서 그물처럼 옭아매는 은사에 검마는 내공까지 바닥나 더 이상 막아 낼 여력이 없었다. 은사가 검마의 몸을 옭아매고, 죽음을 예감한 듯 검마의 눈빛이 침전되었다.
“모든 역량을 다해 싸워서 패했으니 여한은 없다. 죽여라.”
힘을 숭상하기에 마(魔)라 불렸다. 정정당당한 싸움에 패하였으니, 다만, 이런 자를 알지 못하여 마교가 곤욕을 치를까 걱정될 뿐이었다. 담담히 눈을 감은 검마. 진철이 작게 한마디를 속삭였다.
“지옥에 가서 교주에게 안부나 전해.”
“……?!”
퍼서석! 푸화학!
기밀 중에서도 기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한 검마가 뭐라 소리치려 하였지만, 진철은 손가락을 튕겨 검마의 신체를 조각냈다.
“……괴물.”
경천동지할 싸움. 검마는 과연 마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하지만 진철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순간 또한 있었지만, 대부분 방어에만 급급했던 모습. 그렇기에 격렬했던 싸움임에도 진철의 몸에서는 상처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유선아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선영이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소?”
진철이 농을 건네자 유선아는 피식 웃었다. 그 한마디로 인해 낭인왕 후보라는 단세명이 호위무사조차 되지 못하는 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깥의 싸움도 이제 끝난 것 같군.”
검마가 별채에서 나와 합류하는 것을 기점으로 빠져나가려 하였건만,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소녀궁의 문도들이 하나둘 차가운 땅에 몸을 뉘였다. 퇴각을 지휘해야 할 소염노희 윤혜 또한 문겸익의 분전에 몸을 빼지 못하자 완전히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이었다.
숭검단은 무림맹 제일의 무력 단체. 함정과 기습에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열을 수습하고 기세를 올리자 소녀궁으로서는 당해 낼 수 없었다.
“선영아.”
단세명을 업고 바깥으로 나온 진철이 팔을 활짝 펴며 유선영을 불렀다.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있는 유선영. 유선아가 움직이기 힘든 팔을 들어 올려 등을 툭, 밀었다. 그에 유선영이 비틀거리며 진철의 품속에 푹 안기자 진철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싸움의 끝이 다가오는 듯, 동쪽 하늘로부터 여명이 빛났다.
후화(後話)
격렬하고 처절했던 싸움이 끝이 났다. 숭검단 무인 백오십 인 중 사망자가 마흔, 중상자가 서른, 경상자가 열이나 되는, 숭검단이 겪어 온 임무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은 싸움이었다.
함정이 있었다? 관계없다. 싸움이라는 것은 서로가 죽고 죽이는 것이 정상이다. 무슨 수를 쓰든 정공으로 돌파하는 것이 정파의 도리. 숭검단 무인으로서는 그저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에 울분을 참고 검을 닦을 뿐이었다.
다행히 소녀궁의 무인들은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당가의 대표라는 당의철이 소녀궁 정예 십 인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것은 유감스럽지만, 소녀궁의 목표였던 유선영은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뇌부에서 막으려 해도 알음알음 퍼져 나간 소문. 흉수가 마교라는 소문이었다. 고작 마교 십이궁 중 여성들이 주축인 소녀궁이 정예를 추려 쳐들어왔을 뿐이었다. 한데 그것만으로 무림맹 제일의 무력단체라는 숭검단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평화에 찌들어 자신들을 과신하던 정파무림인들의 머릿속에 마교에 대한 경각심이 퍼져 나가니,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산동유가의 별채. 복구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파괴되니, 결국 별채는 새로 짓기로 하고 그동안은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도록 배려를 받았다. 전의 것과 비교하면 작지만, 아담한 정원이 소박한 경치를 보여 주는, 좋은 장소였다. 소녀궁은 전멸했다지만 마교의 무리가 또 언제 노릴지 모르기에 건물을 원으로 둘러싼 고수들이 일 장 간격을 유지한 채 진을 치고 있었다.
야옹~!
고양이가 앞발을 들어 얼굴을 매만지며 울었다. 아양을 떠는 모습이었다. 배를 깔고 누운 유선영의 얼굴 바로 앞에 누워 그리 행동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무심결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히 잘 돌보네요.”
일주일이 지나고 손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상처가 치료된 유선아가 말했다. 장포 속으로 보이는 상체에는 붕대가 감겨 있지만, 그조차도 건강해졌다는 증거였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소.”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유선영이 처음으로 가슴에 품고 지키려던 동물이었다. 동물이지만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움직여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면 유선영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 대협의 상세는 어때요?”
“많이 좋아졌소.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생사신의가 직접 치료하였으니, 괜찮아지지 않는다면 그자가 문제 있는 것 아니겠소?”
단세명의 상처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한데 모으고 중상자들을 치료하려 생사신의를 부르자 숭검단 무인들을 제치고 단세명에게 달려갈 정도였다. 한순간만 늦었어도 숨이 넘어갔을 것이라니, 운이 따랐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팔은 아직 움직이기 힘들지만 간단한 무공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낭인왕에게 한 수 배웠다더니, 심법 또한 낭인왕의 것인 듯 몸의 회복이 남달랐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그건 그렇고…….”
유선아가 힐끔 진철을 바라보다가 땅바닥을 쳐다보는 등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떨떠름한 얼굴. 진철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떨리는 입술로 말을 내뱉었다.
“……선영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와도 괜찮아요?”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치료되고 벌써 삼 일. 유선영이 보고 싶어 단숨에 달려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철과 단세명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잘못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심한 말을 한 것인지도 안다. 마침내 어떤 말이든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고 물어봤건만, 진철의 답은 간단했다.
“되오. 선영이를 껴안아도 되고, 같이 밥을 먹어도 되오.”
“저, 정말요?”
시원스러운 답변에 오히려 유선아가 당황했다.
“그대는 변했소. 잘못을 인정했고, 선영이를 위할 줄 알게 되었소. 본인이 선영이에게 접근하지 말라 그대에게 말했던 것은 독선에 선영이가 상처 입을까 걱정해서 한 말이었소.”
고개를 끄덕인 유선아의 얼굴이 환해졌지만, 이어진 말에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그 변화가 그 나이 대의 소녀처럼 순수해 진철은 무심코 피식 웃었다.
“미안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모되어 빛이 바랄지언정 잘못을 저질렀다는 그 기억만은 잊어선 안 되오. 평생을 가슴속에 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오.”
“각오는, 되어 있어요.”
유선아의 눈빛은 굳건했다.
“본인과 단세명, 그리고 무림맹의 노강호들이 선영이를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가족만큼 가까운 사람은 없소. 가족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만, 보답받을 시간은 충분하오. 그대의 언니가 그대에게 해 준 것처럼, 선영이를 잘 돌봐 주시오.”
“그쪽이 선영이에게 가족의 사랑을 알려 줄 생각은 없나요?”
진철이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유선아의 머리를 손으로 푹 눌렀다.
“가족이 아닌 이가 그럴 수야 없지 않겠소.”
“당신은…….”
무언가 할 말을 찾던 유선아지만, 결국 한숨과 함께 말을 삼켰다.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니, 그 마음이 언젠가 바뀔 때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진철.”
“응?”
고양이와 노닥거리던 유선영이 몸을 일으켜 진철을 불렀다.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이제는 사람다운 생기가 느껴졌다. 유선영의 바로 옆에서 그녀를 따라 하듯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었다.
“배고파.”
진철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슴이 터져라 뛰어 대는 심장을 느끼며 진철은 싱긋 웃었다.
“알았어. 금방 준비해 주마.”
간단한 표현일지언정 그 파급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표현을 할 수 있기까지 겪은 사건 또한 적지 않았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황무지에 심어 놓은 씨앗 하나가 드디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선영아.”
진철이 바깥으로 나가자 유선아가 유선영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들어 가녀린 어깨를 쓰다듬었다.
“언니, 가.”
언니라 자칭하는데, 가슴이 콕콕 침에 찔리듯 아파 왔다.
“일이 있어 떠나야 될 것 같아.”
상처가 심하다지만 숭검단이 해야 할 일은 적지 않았다. 간단한 잡일 정도는 이 몸으로도 할 수 있었다.
“진철과 단 대협의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보석 같은 눈동자, 그 속에 담긴 희망의 씨앗.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끌어당겨 유선영을 품에 꼬옥 안았다.
“……사랑해.”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슬픈 사과보다도 따뜻한 사랑을. 미안함을 전할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사랑을 전할 시간은 평생이 걸려도 부족했다. 한마디 말과 깊은 포옹으로 마음을 전한 유선아가 유선영의 온기를 가슴에 가득 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가려고 하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것일까? 진철이 문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리해야 할 임무가 많아요. 간단한 잡일 정도는 해야겠죠.”
“본가에 가려고 하오?”
용케도 알아차렸다. 유선아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요. 숭검단 부단주 자리 내놓고 돌아가려고요.”
“과거를 후회하여 그리하려는 것이라면 포기하시오.”
진지한 충고. 그러나 유선아는 베, 혀를 내밀었다.
“웃기는군요.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요? 제가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중요시했다고. 이뤄 놓은 것이 얼만데 제가 후회하겠어요? 선영이에 대한 일만 제외하면 저는 지금이 가장 만족스러워요.”
“그렇다면?”
“담판을 지으러 갈 거예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유선아가 말했다.
“아버지, 가주와 싸우러 갈 거예요.”
가녀린 교구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얼굴. 진철은 솟아오르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그래요, 맘껏 비웃어요. 도망쳐 나오고는 결연하게 싸우러 간다고 말하니 웃기겠죠.”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오.”
유선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진철의 말대로 이건 그저 마음속 즐거움이 바깥으로 표출되었을 뿐이다. 고립되었던 유선영을 도와줄 가족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기꺼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갈게요. 선영이 잘 챙겨 줘요.”
“걱정하지 않아도 과잉보호라 할 만큼 챙겨 줄 거요.”
“그리고 언니에게도 안부 전해 주고요.”
나뭇잎 하나가 뒷머리를 가리고 떨어지자 유선아의 신형이 사라졌다.
“언니에게 안부라…….”
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 내리쬐는 태양빛이 따스했다.
“바람 따라 날아가면 전할 수 있을까 모르겠군.”
하늘은 빌어먹게도 맑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