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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24화)
4장 ― 자매의 입장(8)
처음 보았을 때, 그 아이는 무척이나 작은 모습이었다.
“네 동생이다.”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 꼼지락대는 작은 손, 꿈틀대는 작은 발, 아직 다 뜨지 못한 눈으로 게슴츠레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아버지, 가주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다투며 있던 때라 그러한 천진난만함이 좋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좋았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일에 관련된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하는 것이 좋았다.
“아. 바.”
하지만 아이가 점차 옹알이를 끝내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사라져.”
“가주의 자리는 나의 것인데…….”
“내일이 너의 제삿날이다.”
“조금씩 음식에 독을 탔으니 네놈도 이제 끝이다.”
그 아이의 두 눈이 흐려지면 언제나 사람 하나가 은밀하게 사라졌다. 마음을 읽는 타심통. 이 아이 또한 핏줄을 타고난 영향인지, 그 저주받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하지 않으려 하니 이 아이를 쓸 수밖에.”
갓난아기답지 않은 초연한 표정은 자신의 의지란 것이 존재치 않는, 마음을 담는 그릇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인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식 하나가 말을 듣지 않으면 또 다른 자식을 이용하면 되는 일이지. 이제 너에게 볼일은 없다. 네 맘대로 하여라.”
산동유가의 가주인 아버지는 갓난아기 시절에는 부모 외에는 접촉시키지 않는다는 규칙을 깨고, 자신의 자식을 이용하여 오직 타심통이라는 능력을 사용할 뿐인 인형을 만들었다.
“아.”
걸음마조차 떼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돌아서는 그 아이를 보자 슬픔이 밀려왔다. 내 고집 때문에 저 어린 나이에 괴로운 일을 겪게 만들었다. 언니가 이런 심정으로 나를 돌봤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만큼 착하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돌보자고 작정할 정도로 정이 넘치지 않았다.
“…….”
적막한 공원, 홀로 툇마루에 앉아 돌처럼 굳어 있던 그 아이.
“……저.”
아이가 홀로 있는 일은 드물다. 이 틈을 타 말을 걸어보려 하였다.
“…….”
하지만 아이는 나를 바라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하여도 답하지 않고, 자세 하나 바꾸지 않고 한 시진 이상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가복 하나가 다가왔을 때, 아이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만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온몸에 소름이 돋아 힘없이 방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자신이라는 주체성이 없다.
남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그대로 읊어 내릴 뿐인 기계.
사람이 아니야.
그래,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시린 검날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내가 뿌린 재앙의 씨앗을 거두지 못하고, 나는 눈을 돌리고 마음을 감추며 숭검단으로 도망쳐 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무엇을 하고 있니?’
아이는 성장하여 이제 자신 혼자서도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곧 미인이 될 것이란 걸 예상케 하였다.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이는 나이를 먹은 것이다.
‘무엇을 하고 있니?’
아이의 처지는 변하지 않는 듯하였다. 지옥 같던 세가에서 벗어나 무림맹에 왔지만, 아이의 대우는 변하지 않았다. 남의 마음을 읽는 도구. 오직 그러한 취급만을 받으며 무림맹에 이용당했다.
그러한 처지를 안타까워하여 문 단주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마음을 써 주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이는 자신이라는 인격을 확립하지 못하였고, 남의 마음을 받아들여 그것을 원동력 삼아 몸을 움직였다.
‘무엇을 하고 있니?’
그러나 호위무사를 뽑는 대회가 끝나고 아이가 점차 달라진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반년가량 이어진 임무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표정이 풀려 있고,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손을 올려 남의 손을 꾹 잡고 서 있는 모습은 일대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을 하고 있니?’
이 아이는 사람이 아니다, 오직 그 한마디 말을 변명 삼아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자신의 유약했던 부분을 직접 지적당하고 비판당했을 때, 그만 참지 못하고 심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죄책감과 죄악감을 인정하기 싫었다.
‘무엇을 하고 있니?’
아이는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초탈한 채 오히려 죽음을 바라듯 멍하니 있었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에게는 오히려 죽음이 편안한 도피처이리라. 그리 생각하자 온몸에 힘이 풀려 단세명의 외침 또한 점차 멀어져 갔다.
그러나 고양이가 도망치고, 아이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불에 휩싸인 목재 골조가 떨어지자 고양이를 지키듯 끌어안았다. 두 눈을 꾸욱 감고 움찔 몸을 떨며 웅크리자 번개가 관통하듯 온몸이 전율했다.
“……안, 돼.”
저 아이는 도구가 아니었다.
저 아이는 기계가 아니었다.
저 아이는 그릇이 아니었다.
난 도대체 왜 그런 심한 말을 변명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일까?
잘 알 수 있었다.
보고 깨달았다.
저 아이는 명실상부한…….
사람이다.
생각한 순간, 자신의 것이 아닌 양 기운이 움직여 상단전을 관통했다. 보일 리 없는 기의 흐름이 눈에 잡히고, 한 줄기 영사(靈絲)가 중년인과 유선아를 연결하였다.
‘죽이면 안 돼!’
강하게 불어넣는 의지. 자신이라는 자아가 중년인의 자아와 혼합되고,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갔다. 검을 막아서는 것은 자신의 의지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의지인가.
중년인의 빠른 검격이 무언가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격하게 느려졌다. 연이어 튕기듯 몸을 움직인 유선아가 유선영에게 손을 뻗었다.
촤아악! 푸확!
손이 뜨거웠다. 등이 불타는 것 같았다. 주홍색 불빛 속에서 검게 빛나는 혈흔. 손을 뻗어 첫 번째 검격을 막아 냈고, 유선영을 끌어당겨 등으로 두 번째 공격을 받아 냈다. 날뛰는 거센 경력이 혈도를 막고, 깊이 새겨진 상처가 지독한 고통을 야기했지만, 참아 낼 수 있었다.
눈치를 보듯 한쪽 눈을 뜨고 위를 바라보는 유선영. 그녀를 향해 유선아는 싱긋 웃었다.
“걱정 마. 안 죽었어.”
죽어선 안 된다. 살아야만 한다. 살리고 말 것이다.
속죄를 위해서라도, 보답받을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아이는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되었다.
“뭐지?”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중년인이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분명 검을 휘두른 것은 자신이건만, 방금 전의 기억이 모호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중년인이 유선영을 베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기똥차게도 방해하는구나.”
두 번이나 목표를 달성치 못하자 화가 잔뜩 난 듯 중년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단세명이 독기를 발휘해서 또다시 방해를 할까 싶어 검을 두 번 휘둘렀더니, 이번엔 여자가 방해를 하였다. 그것도 온몸을 바쳐서 기를 쓰고 막아섰다.
“귀찮군.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시도할 수 없게 확실히 죽여 주마.”
중년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지독한 마기(魔氣)였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악의와 살의. 마공이 극에 이르니 불꽃조차 그를 침범치 못하고 흩어지는 듯하였다.
드드드드!
“……?”
그러나 지진이 일 듯 건물이 울리자 중년인은 검을 내려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니, 건물이 흔들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태산이 무너지듯 쏟아지는 기운에 반응한 몸이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쿨럭! 드디어 왔군.”
각혈하는 와중에도 무엇이 기쁜지 단세명이 이빨까지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조심하도록 해라, 마인이여.”
피를 많이 쏟기도 하였고, 상황이 원만히 해결될 거란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살아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콰아아아앙!
중년인의 바로 옆에 있던 벽이 폭탄이라도 맞은 듯 부서지며 파편을 흩날렸다. 그 속에 몸을 숨긴 검은 인영의 품속에서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무언가가 쏟아지며 하얀 잔영을 남겼다.
쩌어어엉!
“큭!”
공격은 막아 냈지만 밀려나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마기를 극한까지 끌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검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쐐애액!
튕겨난 무언가가 원을 그리며 다시 한 번 쏘아졌다. 중년인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올올이 초식을 풀어냈다. 하지만 격류를 거슬러 오르는 하얀 잔영은 거침이 없었다. 그물처럼 펼쳐진 검격 속을 헤집어 맥을 끊고, 모든 공격을 예상한 듯 거침없이 빈틈을 꿰뚫었다.
피슛!
눈썹에서 한 치 옆,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스치지도 않았음에도 이 정도 위력, 융통무애하여 옷자락조차 찢기 힘든 경지에 올랐건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기세를 탄 거친 공격에 중년인이 경악하여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누구냐!”
“입 닥쳐라, 검마.”
“뭣?!”
바람에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늘어뜨린 검.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검의 자루를 부서져라 쥐고 있는 진철의 표정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검마 이진성. 정체를 들킨 것도 놀라운데 그 정체를 알고도 저리 방자한 언사라니, 순간 얼이 빠지는 듯했다.
“폐관수련을 마치더니 살 만해졌나 보군. 신마궁(神魔宮) 전각 태사의 아래서 고깃덩이가 되어 꿈틀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네놈이 그걸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철이 말한 사실은 마교의 인물들 가운데서도 소수의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오문과 개방조차 손을 놓고 파고들지 않은 정보를 어떻게 저런 젊은 자가 알고 있는가.
아니, 그런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검술. 결코 검마의 아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만을 보고 평가하자면, 검마보다 몇 수는 뛰어났다. 들어 본 적도,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숨겨진 신진 고수. 검마가 진철을 탐색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선영이는?”
“괜, 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유선아가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핏줄기를 닦으며 말했다. 내상이 심하기는 하지만, 아직 버틸 만했다. 무엇보다 자신 덕분에 선영이가 다치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유선아는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선영아.”
유선아의 어깨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민 유선영. 진철은 그 얼굴을 보자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아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당의철과 소녀궁의 정예 십 인을 상대하는 데 그만 시간을 지체하여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십초지적이라 생각했건만, 진철 또한 유선영 일행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기고 온 것이었다.
‘하필이면 십전통(十全桶)을 가져왔을 줄이야…….’
작은 나무통 안에 세침을 넣고 화약을 이용하여 일순간에 폭발시키는 암기가 바로 십전통이었다. 작은 크기로 인해 위력을 착각하기 쉽다만, 근거리에서 사용한다면 사람의 상체 정도는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무기. 설마 당가 내에서도 그 위력에 놀라 사용을 금지하였던 십전통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경험을 살려 막아 내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다행이라 생각해라, 검마.”
“무슨 소리냐?”
진철이 몸을 돌려 검마와 마주 보며 검을 중단에 세웠다. 파르르 흔들리는 검신. 덜덜 떨리던 검첨이 이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영이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생기면 마교를 무림에서 지워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검마가 일갈했다. 무림맹과 더불어 천하제일의 자리를 두고 겨루는 마교. 일개 무명의 후기지수가 강호에서 지워 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마는 상대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무명의 신진이라 해도 편견에 치우쳐 오판하는 우를 범하는 자가 아니었다. 검마가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는 단 하나, 무(武)였다.
예와 의를 따지고 경험을 중시하는 정도의 인사들이 흔히들 범하는 그 실수를 마인들은 범하는 일이 드물었다. 약육강식. 오직 강함만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마인들의 세계에서 나이와 경험이란 논외였다.
“하지만 선영이를 위협한 그 죄는 넘어가지 못한다. 그 죗값, 목숨으로 갚아라.”
진철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는 검첨. 이어지고 이어지는 원은 끝을 맺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작이 끝이요, 끝이 시작이니, 오직 그 가운데 태극만이 존재할 따름이라. 흔들린 손끝에 반으로 갈라진 원이 태극의 문양을 그리자 검마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하였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모를 수가 없는 검법이었다. 문도의 수는 구파 중 가장 적지만 위용만은 소림에 버금간다는 태산북두 무당의 검법이니까. 많은 수의 마인들이 무당의 도사들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고, 검마 또한 무당의 고수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아직 기천검을 완벽히 연성하지 못하였을 때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무당의 무공은 그만큼 신묘한 것이었다.
“무당이냐?”
강하게 마기를 끌어 올려 정신을 다잡는 검마. 진철의 검이 그리는 원은 점차 커져 이제는 사람의 머리 하나 크기만큼이 되었다.
“글쎄?”
진철이 검마를 비웃었다.
“눈이 삐었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