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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23화)
4장 ― 자매의 입장(7)
“뭐가 이리 사정이 복잡한 인간들이 많은 건지…….”
진철이 당의철과 함께 빠져나간 후의 별채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입술을 깨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선아와 멍하니 가슴께를 부둥켜안은 채 서 있는 유선영, 그리고 진철이 말한 단편적인 편린들만으로 사정을 유추해 낸 단세명. 이렇게 세 명이 있으니 대화가 이어질 리가 없었다. 단세명이 지금까지 진철과 함께 있으며 겪었던 사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나만 물어보지. 지금 진철이 원망스럽더냐?”
“…….”
대답은 꽉 쥔 주먹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진철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네가 원망을 해 봐야 자기 위안일 뿐이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고 자신이 후회해야지, 비난한 자에게 화를 돌린다면 도량의 좁음을 나타낼 뿐이다. 무엇보다…….”
단세명이 유선아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네놈이 선영이의 가족이라 한들, 아니, 가족이기에 나는 더욱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다. 진철이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화를 낸 것이 이해가 가. 진철의 말은 정확하다. 너는 권리만을 추구한 채 의무를 저버린 도망자일 뿐이야.”
“…….”
한 번 더 가슴에 꽂히는 비수. 자신이 자초한 일임에 원망을 돌리려 했지만, 그 가능성조차 끊어지고 말았다. 어찌 대응할 것인가. 이 마음이 향하는 것은 과연 어디인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정신은 몽롱해지고, 오갈 곳을 찾지 못한 분노는 심마(心魔)로 변해갈 조짐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러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마디 변명. 자신을 지켜 주던 한마디의 주문.
“이 아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만큼 비정한 저주.
“……무슨 소리를!!”
단세명이 놀라 눈을 부릅뜬 채 상황조차 잊고 큰 소리를 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 상상조차 한 적 없을뿐더러 그 누구도 아닌 유선영의 가족인 유선아가 할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모르고, 남의 마음이 그것을 대신해 그 속에 갇혀 있으니 사람이 아니잖아요!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찬란한 과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명예. 자랑으로 여겼던 그 모두를 질타하는 신랄한 비판. 추악한 마음은 변질되어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겨우 이런 아이를 위해서 희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이 ‘그릇’을 위해서 저 같은 재능 있는 무인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 반대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 모르는 이 아이가 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유선아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미몽이 눈앞을 가리니 가슴속에 회의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서 유선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양심이라는 한 줄기 끈을 끊어 버렸다.
“그리 생각한다니, 내 단언하지.”
심한 분노는 정신을 잃게 만들지만, 그보다 더한 분노는 이성을 차갑게 식혀 냉정함을 관철시킨다. 명백한 적의를 표출하는 단세명이 이글거리는 광망을 내보이며 말했다.
“너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나아가지 못할 거다. 퇴보가 있다면 그 또한 당연한 것이리니, 명성은 지금 한때에 머무르고 끝날 것이다.”
“아니요,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제게 타심통이 있는 한…….”
말을 이어 가던 도중 유선아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타심통은 산동유가의 비밀이고, 그것이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비밀이었다. 그 중요성을 알아 결코 티를 내지 않았던 것인데,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다.
“진철의 설명으로 다 알고 있으니 지금에 와서 비밀로 해 봐야 무소용이다. 너는 선영이와 달리 타심통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것 같군. 아니, 어쩌면 타심통의 능력에 선영이가 특출 난 것일지도 모르겠고. 어찌 되었든 너는 그것을 무공에 응용하여 전대미문의 성취를 이룬 것이겠군. 그렇기에 네 주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남의 마음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능력, 타심통. 그것을 기억의 편린을 부상시킨다는 한 가지 방면 외에 무공에 썼다 하면 당연 유선아의 성취가 이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무리가 자신의 것이고, 타인의 깨달음이 자신의 것이니, 인외의 경지라는 절세의 경지가 아닌 이상 그 성취가 독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네 주장은 틀릴 수밖에 없다. 단언하지.”
“어째서죠?!”
“전장의 무공이란 상대방을 격살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무인의 무공이란 수도(修道)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정파는 특히 더하지.”
단세명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은 무와 협의 정의가 변질되어 남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진정한 무공의 경지라 말하고는 하지. 하지만 결국 무의 끝자락을 편린이나마 본 자들은 모두가 자신이 세운 기준이 명확했고, 하늘의 이치를 역행하지 아니했다.”
“낭인왕이라 불리는 자들은 언제나 천하제일을 논하는 고수들 중 손가락 안에 꼽혔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닐 텐데요!”
“잠자코 들어라. 그렇기에 우리 낭인들은 언제나 최고가 될 수 없었고, 진정한 고수들에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낭인이 전통과 절제가 없어 그들에게 졌다고 세인들은 말하나, 뭣도 모르는 헛소리일 뿐이다. 허례허식이 없는 낭인의 무공은 전투와 살인이라는 면에 있어서 결코 일반적인 무인들에게 하등 꿇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월등히 뛰어나지. 그러나 낭인들은 진정한 고수들에게는 언제나 졌고, 그 진정한 고수들에게 비견될 만한 낭인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모두가 내가 말한 이유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는 전장의 이치를 배웠으면서 무인의 도와 비견하고자 하니 그럴 수밖에.”
아무 말 못하는 유선아를 향해 단세명은 차갑게 단언했다.
“네가 사람의 마음을 버리고자 한다면, 결국 무인이 아닌 낭인과 같은 수준으로 남을 뿐일 거다.”
단세명이 진철과 어울리며 그 무위가 평가절하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단세명이 느슨해져 무공이 약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무위는 점차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단세명이 단언한 근거였다. 그의 은사 낭인왕에게서 듣고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던 저 말들의 증거였다.
“마지막으로 나 또한 진철과 같은 말을 하도록 하지. 이후 절대 선영이의 곁에 다가오지 말도록 해라. 다가온다면 선영이가 말하지 않아도, 진철이 움직이지 않아도 내가 먼저 너를 베어 버릴 테니까.”
유선아의 목숨을 노리는 살기는 순수하여 단세명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었다. 유선아에게서 유선영을 지켜 내듯 유선영을 꼭 끌어안은 단세명. 아무 말 없이 그림자 속에서 잠자코 있던 유선영의 손이 순간 단세명의 옷을 꾹 붙잡은 듯 보였다.
쾅!
그 순간, 귓전을 멍멍하게 울리는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별채가 무너질 듯 요동치고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큭!”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립을 잊고 단세명과 유선아가 다급히 방어할 준비를 마쳤다.
콰아앙!
그러나 이어진 것은 또 한차례의 폭음과 화마(火魔)였다. 별채의 옆구리가 터져 나가며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흩어지는 파편. 단세명이 박도를 꺼내 들고 전면을 방어하는 올올한 도막을 전개했다.
“무림성 내부에서 함정이라니!”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진철의 말이 맞았다는 것은 둘째 치고, 예상했던 정도가 달랐다. 무림성 내부에서 폭발이라니, 이곳에 잠복해 있는 수많은 숭검단 무인들의 무위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별채에 함정이 미리 깔려 있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화마가 솟구치며 벽이 부서지고 지붕이 내려앉았다. 목조건물을 불태우며 솟아오르는 연기. 단세명이 급히 옷을 찢어 유선영의 손에 쥐어 준 후 입을 막게 하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반신반의했던 간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제는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진철이 없을 때에 습격을 시작하다니, 노린 것은 아니라 생각되니 괜히 하늘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
쿠웅!
거친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대들보.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합 소리. 뜨거운 열기 속이건만 살을 에는 듯한 한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목숨의 위협. 유선아가 재빨리 몸을 반전하며 검을 쳐 냈다.
쩌엉!
“읏!”
잡고 있던 검을 놓칠 뻔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 기습을 방어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선아 정도의 실력자에게 단 한 수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만들 고수는 흔치 않았다. 불리함을 느낀 유선아가 이화보(梨花步)를 펼치며 경력을 풀어내고 다섯 발걸음을 물러났다.
“제법이구나.”
연격을 대비하여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짧은 수염, 각진 얼굴, 눈가에 있는 한 줄기 흉터.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흉악한 인상이었다. 한 자루 검을 늘어뜨린 채 중년인이 감탄하였다.
“누구냐!”
“문겸익은 궁주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숭검단 조장 중 하나인가? 그러고 보니 여자의 몸으로 일조의 조장이 된 녀석이 있다고 했지. 네년이 그 녀석인가?”
물음을 던졌더니 오히려 반문한다.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 태연자약한 모양새. 그러나 빈틈이라고 여겨 달려들 수는 없었다. 한 발자국 내딛으면 그만큼 짙어지는 살기. 평범하게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고절한 고수였다.
“그쪽은 단철호도 단세명이로군.”
중년인이 시선을 돌려 단세명을 스윽 훑어보았다. 유선영과 유선아와는 다른 의미에서 기분이 나빠졌다. 산동유가의 여아들에게 마음이 읽힌다면, 이자에게는 자신의 수준이 읽혀 버렸다. 시선이 닿는 곳 하나하나에 얼음이 미끄러지듯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낭인왕이 몇 수 가르쳤다고 하더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성취는 아니군. 실망이다.”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자 단세명은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잊고 달려들 뻔했다. 누구이기에 자신을 품평하고 낭인왕을 마음대로 부르는가. 생각해 볼수록 불안해지는 느낌에 호왕기(虎王氣)를 온몸에 빠르게 휘돌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배분도 안 되는 것이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낭인왕이 그리 가르치더냐?”
“낭인이 그런 허례허식을 따졌던가?”
단세명이 반박하며 코웃음을 치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군. 뭐, 어차피 죽을 녀석이니 따질 필요도 없었나?”
중얼거린 말에 단세명이 안색을 굳혔다. 누가 봐도 이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자는 이 중년인이었다. 소녀궁 궁주와 만났을 때조차 이런 위압감을 느껴 보진 못했다.
단세명이 입을 다물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유선영을 가리자 유선아가 시선을 돌리려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름을 밝혀라, 마두.”
“알 필요가 있는가? 시체는 고깃덩이일 뿐이거늘.”
비웃듯 내뱉은 말에 유선아의 마음속에 분노가 타올랐다. 타심통을 가지고 있다 한들 상대가 되지 않는 자였다. 유선아가 문겸익을 이길 수 없듯, 이자 또한 마찬가지. 이 싸움의 목적은 유선영의 보호. 평소대로라면 시간을 끌어 문겸익을 기다리며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철에 이은 단세명과의 말다툼이 유선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말할 마음이 없다면 말하게 만들어 주마!”
“멈춰라!”
단세명이 소리쳤지만, 유선아를 멈출 수는 없었다. 전력을 다해 세차게 휘두른 검격. 중년인 또한 그에 맞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쩌엉!
맞부딪친 검에 불똥이 튕겼다. 깨져 버릴 듯 격렬하게 진동하는 유선아의 검. 유선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빙글 휘돌며 연검처럼 나풀나풀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처럼 남은 검의 잔영이 중년인의 전신을 휘돌았다. 월검보 월하무도(月下舞蹈)였다.
“조잡하다.”
전신을 압박하는 잔영이지만, 중년인은 그저 눈앞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기천검(奇天劍) 풍뢰섬(風雷閃). 주홍빛 불꽃을 가로지르는 하얀 섬광. 유선아가 예상했다는 듯 손목을 비틀었다.
째앵!
“꺄아악!”
하지만 유선아의 검은 중년인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유리가 깨지듯 유선아의 검이 조각나 흩어졌다. 타심통을 통해 상대방의 수를 읽었지만, 수준의 차라는 것은 그 정도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알아도 몸이 따르지를 못했다. 알고도 막을 방도가 없으니, 절세고수가 인외지신(人外之身)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젠장!”
절체절명의 순간, 호위무사이므로 유선영에게서 떨어지면 안 되지만 유선영의 친언니가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다. 마음이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눈앞에서 보고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비껴 멘 박도를 빼 들고 단세명이 일보를 내딛으며 진각을 밟았다.
“……걸렸군.”
앞으로 몸을 내밀고 공격을 준비한 탓에 유선영이 단세명의 주의로부터 멀어졌을 때, 중년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유선아를 내버려 둔 채 유선영과 단세명을 향해 질주했다.
“큭!”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 단세명은 중년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백색 섬광이 주홍빛 불꽃을 일단하였다. 누구를 노리는 것인가 생각할 순간조차 없었다. 단세명의 몸은 머리보다도 먼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도에서 손을 놓고 유선영을 멀리 밀쳐 냈다.
촤아악!
“끄아아악!”
단세명의 판단은 옳았다. 중년인이 노린 것은 단세명이 아니라 유선영이었다. 애초에 소녀궁이 무림맹을 습격한 이유가 유선영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호위무사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비무가 아닌 살인을 위해 온 것이니 무공을 겨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귀찮게 구는군.”
왼쪽 어깨가 반 이상 잘려 버린 단세명. 고통에 울부짖는 그를 보며 중년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단숨에 끝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과연 낭인이랄지, 전장에서의 감만큼은 이지를 뛰어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금 수고를 더할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 휙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낸 그가 엉덩방아를 찧은 유선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탁!
“끄으으……!”
그러나 단세명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깨가 반 이상 잘려 나갔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움직일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세명은 그를 막아섰다.
“피, 해라.”
단세명이 유선영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유선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초연한 눈동자. 유선영이 고개를 들어 중년인을 마주 보았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독기만큼은 인정해 주마.”
중년인이 아닌, 유선영이 발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마음을 읽다니.”
이번엔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놀라움 때문인지 중년인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아까운 재주다.”
푸욱!
“끄으윽!”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년인이 단세명의 손을 칼로 찍었다. 그러나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단세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선영을 구하기 위해 유선아를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적대하는 우리에겐 위험한 능력이기도 하다.”
유선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서진 검을 붙잡은 채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유선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년아, 좀 움직이란 말이다─!!”
단세명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어야 할 아이가 아니었다. 이용당할 뿐이었던 지금까지의 인생, 언젠가 보답을 받을 날이 올 아이였다. 거기에 아직 빚도 다 갚지 못했다.
무거운 어른들의 짐을 가녀린 몸속, 작은 마음에 대신 짊어지며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사실은 괴로울 것이다. 울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하는 방법을 모르는 불쌍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친언니라는 자가 돕지 않는가. 괴롭히는가. 욕하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상시국만 아니라면 직접 목을 쳤을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두 팔을 움직일 수 없는 단세명 대신 유선영을 도피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단세명이 이번엔 두 발로 중년인의 허벅지를 때리며 절박하게 절규했다.
“선영이를 데리고 진철에게 도망치라고 말하잖아──!!”
힘 빠진 발차기는 중년인을 멈추지 못했다. 중년인은 단세명을 내동댕이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유선영의 앞에 섰다.
지붕에서 불탄 목재가 유선영의 앞으로 떨어졌다. 불똥이 튀어서일까, 단세명이 밀치자 유선영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내밀었던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며 앞으로 뛰어갔다.
“아!”
흐려졌던 눈의 초점이 잡혔다.
“안타깝지만…….”
유선영이 고양이를 잡으러 앞으로 뛰어갔다. 중년인의 옆을 지나 유선아와 중년인의 중간으로. 또다시 떨어지는 나무토막, 고양이와 부딪치는 궤도였다. 그것을 보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유선영은 멈추지 않았다. 손을 뻗고, 고양이의 머리를 감쌌다.
“이만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