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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검인 1권(22화)
4장 ― 자매의 입장(6)


“하지만 눈치챌 만한 사람은 눈치를 챘을 거요. 조사를 해 보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이 무림맹 내에서 모든 것을 파헤치기 위하여 신중하게 조사하고 정보를 넘겨줄 만한 사람이 있소.”
“간자가 있다는 말이냐?”
“본인이 알려 준 이야기를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끝마친 순간, 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방 안의 흔들리는 불빛, 열린 문 틈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달빛.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이 고운 자태가 희미한 후광을 발했다. 차가운 얼굴, 냉심소화 유선아였다.
“말을 나누던 중이었나요?”
“다 끝났으니 괜찮소.”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얼마든지.”
기묘한 긴장감이었다. 같은 편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적의가 맴돌고 있었다. 유선아로서는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적의였다.
“정말 오늘 적들이 오는 건가요?”
“바깥에서도 몇 번을 물어봤던 질문인지 모르겠소.”
“그거야, 믿기지가 않으니 그렇죠.”
습격을 한 바로 그날 늦은 밤 습격을 해 오다니, 서로가 속한 단체가 얼마나 큰 단체인데 그리 속 보이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진철의 주장은 그러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믿지 않아도 되오. 말을 해 주는 것은 결과이지, 과정이진 않잖소?”
“그렇긴 하지만…….”
“그리 애매한 긍정이 뭐가 필요 있소? 결과만으로 인해 탄생된 결실이 그대인데 말이오.”
“무슨 뜻이죠?”
물어볼 것도, 들을 것도 없이 명백한 진철의 시비였다. 유선아가 도끼눈을 하고 진철을 노려보았다.
“말 그대로요. 과정에 있던 희생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어린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전대미문의 여고수라고 호평을 받는 것이 그대이지 않소.”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경멸스러워하는 태도가 목소리에서 뚝뚝 떨어질 듯 묻어 나왔다. 유선아가 조금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제가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있던 희생은 모두가 그러했듯 똑같아요. 스승을 부르기 위한 금전적 지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무공에 전념했던 제 굳건한 마음, 그리고 저를 믿어 준 가족들의 기다림.”
“틀렸소. 그대는 다르오.”
언성이 높아진 것은 진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빌려 책임을 기피하고 권리만을 바랐을 뿐이잖소.”
“내가 도대체 언제……!”
“아니오? 아니라 말하고 싶소? 그대의 언니는 가주의 명령에 따라 홀로 사람들을 상대하였지. 그대는 언제나 언니의 뒤쪽에 서서, 그 그늘 아래에서 자유를 누렸소. 언니의 희생으로 얻어 낸 그 삶이 무척이나 당연하다고 느끼고 살았지 않소?”
“언니는……!”
“그러나 언니가 사라지고 나자 이제 가족들의 시선은 모두 자신에게 쏠렸지. 하지만 그동안의 자유를 버리고 자신이 희생하는 것을 그대는 못마땅해했소. 그대의 언니가 십 년 넘게 자신의 그늘이 되었던 것을 잊고, 왜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냐고 원망했지.”
“그건…….”
“그리하여 그대는 끝까지 가주의 명을 거역하고 반항했소.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동생이 생겼고, 그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행동하였지. 동생을 언니 대신 내세우고, 자신은 자신의 꿈을 위해 숭검단으로 들어와 충실히 무공을 배웠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냉심소화라 불리며 차기 숭검단 단주의 첫 번째 계승자로 부상하였소. 그 과정에서 있을 동생의 희생은 모두 무시하고, 언니의 희생조차 떠올리지 않으며 절벽 위에 고고히 핀 한 떨기 꽃처럼 살았지. 그런 주제에 손톱만큼 남아 있는 양심이 가슴을 찔러 주위를 맴돌지만, 결코 눈길을 주지는 않았소. 그렇게 신경을 써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속죄했다며 자기 위안을 하지.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물었잖소. 못 들었다면 다시 한 번 얘기해 주겠소.”

“핑계를 대지 않고서는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할 사람이었군.”
“회피할 정도라면 시도를 말았어야지.”
“남의 희생은 당연하나 자신의 희생은 용납 못한다니,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오?”
“벌써 두 번째 도피로군. 그래서?”
“언니와 동생의 희생으로 얻어 낸 삶은 만족스럽소?”

“…….”
할 말이 있을까? 모든 진실을 눈앞에서 본 것마냥 까발리며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부분들을 콕 집어서 비난한다. 자신마저 몰랐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읊으니, 그녀 또한 깨닫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또다시 답이 없군. 하기 싫다면 마시오. 다만, 본인이 그대에게 딱 두 마디만 더 하겠소.”
시선을 회피하는 유선아를 끝까지 쫓아가 눈을 마주하며 한마디.
“가족이란 혼자가 아닌, 서로가 희생하는 것이오.”
유선영을 덥석 품에 안으며 유선아에게서 지켜 내듯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
“더 이상 선영이에게 접근하지 마시오.”
크게 한숨을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젓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혼란스러운 감정.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
“진철.”
돌처럼 굳은 유선아의 뒤, 살짝 벌어진 문을 활짝 열고 당의철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했지만,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왜 부르시오?”
“상의할 것이 생겼다.”
“방도 많은데, 그냥 이곳에서 하면 되지 않소?”
“숨어 있는 자들에게 방해다.”
“겨우 그 정도 이유만으로 본인이 움직일 이유는 없소. 호위무사는 호위 대상을 지켜야 하는 법이오. 그것도 이런 비상시국에 본인이 움직였다가 사건이 벌어지면 어떻게 책임지실 생각이오?”
“단철호도라 불리는 낭인왕 후보 단세명이 있다. 시간도 못 벌어 줄 것이라 생각하나?”
진철이 고개를 돌려 단세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입술이 경련하고 있는 단세명. 진철이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못하지만, 다섯 초 정도는 버티겠지. 가겠소.”
“…….”
낭인왕 후보라는 자가 겨우 다섯 초 정도 버틸 실력이라고 평가하는 진철. 단세명이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당의철의 앞이라 화조차 내지 못하고 분을 삭였다.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오자 쌀쌀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별채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소로로 접어들자 진철이 물었다.
“어디로 갈 셈이오?”
“별채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도까진 멀어질 생각이다.”
“싸움이 벌어졌을 시 눈 깜빡할 사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최고요.”
“그랬으면 그냥 네놈 말대로 방에서 했을 것이다. 싸움의 시간을 정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으니 참아라.”
“싸움의 시간?”
“마교 소녀궁의 적도들이 쳐들어온다면 분명히 빈틈이 있을 때를 노리고 올 것이다. 숭검단 무인들이 매복해 있다는 것은 모를 터이니, 호위무사와 고수들이 별채에서 떨어져 있다면 그때를 노려서 오겠지. 지금도 불만이 있는데 몇 시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숭검단 무인들도 해이해질 것이고, 너에게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다. 싸움의 시간을 우리가 정하니 금방 달려갈 수 있고, 속히 결과를 보일 수 있으니 너에게도 좋지 않으냐?”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타당한 의견이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해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보다야 상대방이 쳐들어올 때의 허점을 일부러 만들어 싸움의 시간을 정하는 것이 몇 배는 유리했다.
“궁금한 것이 있소.”
하지만 의문점이 남았다.
“뭐지?”
“왜 그대는 한 번도 내 의견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소?”
“……문 단주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운 소로. 왜소한 어깨가 움찔 떨리고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당신은 문 단주에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직위가 아니오. 오대세가 중 사천당가의 대표로 있는 자가 당신이니 의문이 있다면 당연히 말하지 않겠소? 본인이 말했던 의견은 솔직히 말하자면,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하오. 모두를 납득시킬 타당한 근거가 없지. 본인이 어째서 오늘 밤에 그들이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했을까 생각은 해 보았소?”
“무슨 의미더냐?”
느려졌던 발걸음이 마침내 멈추었다. 어두울 뿐인 인영.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적도들이 오늘 쳐들어올 이유는 없소. 사건이 있은 당일 날에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소? 그것이 콕 집어서 산동유가의 별채든 아니든, 오늘 밤의 무림성은 전례 없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하오. 그런데 이런 날에 일부러 쳐들어오다니, 자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올 이유가 없지.”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본인은 딱히 마교의 마인들을 잡기 위해서 숭검단 무인들을 불러모은 것이 아니오. 저들을 부른 이유는 그저 증거를 잡기 위해서지.”
“증거?”
“그렇소, 증거.”
진철이 큰 품의 소매를 펄럭였다.
“마교와 협력한 간자를 잡기 위한 증거 말이오. 마침 구경꾼들도 다 모인 것 같은데, 시작하지 않을 작정이오?”
주변을 쭈욱 훑어보는 진철. 군데군데 풀숲이나 나뭇가지 위를 향해 단검을 내던지자 검은 인영들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각자 병장기들을 빼 들어 휘둘렀다.
같은 옷차림, 낮에 보았던 그들과 같은 무리였다. 진철을 원형으로 둘러싼 모습이었다. 뒤돌아선 당의철이 스산하게 말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이런 조잡한 함정에 걸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오.”
“소녀궁의 정예와 나 당의철을 상대해야 함을 알고도 일부러 걸렸다고? 그 정도로 실력에 자신이 있나?”
“벌레를 잡는 데 실력이 필요하다 생각하시오? 손가락으로 짓누르면 그만인 것을.”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언사. 당의철이 코웃음을 쳤다.
“오만하다 말하고 싶지만, 웃음이 먼저 나오는구나.”
“시끄러우니 그만 시작하지 않겠소? 어차피 이렇게 떠들기만 하면 불리한 것은 그대들이오. 마교의 인물들이 무림맹에 나타났으니, 기용 가능한 전력이 총동원될지도 모르오. 거기에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들킨다면 당의철 그대는 당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저들을 죽이겠지. 자중지란이 일어난다면 사천당가와 마교의 사이가 틀어질 것이오.”
마교 인물들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이야 같은 편이긴 하지만, 당의철은 본디 정도 무림의 지주라는 오대세가 중 사천당가의 무림맹 대표였다.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당의철이 그들을 공격할 것은 당연지사. 숭검단 무인들이 모인 별채와 멀리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누군가 의심스럽다며 오기라도 한다면 끝이다.
당의철이 진철을 노려보며 말했다.
“……얄팍한 수를 쓰는구나.”
“한 가지 수로 한 가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안배를 해 놓아야 상책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가 들키기 전에 네놈을 죽이고 마교의 짓이라 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을 텐데?”
“그럴 일은 없소.”
진철이 소매에서 손을 내밀고 손가락을 쫘악 폈다.
“그전에 모두 죽을 테니까.”
미미하게 빛을 발하는 은사. 소녀궁 궁주의 앞에서 궁도들을 도륙했던 그 무기였다.
“자네, 뭔가 착각을 하나 하고 있구만.”
그러나 화를 낼 만큼 광오한 말임에도 당의철의 신색은 편안했다.
“착각?”
“우리가 왜 자네를 이곳까지 끌고 왔다고 생각하나?”
“그야 성가신 본인을 먼저 처치하기 위해서…….”
콰앙!
폭발하는 불꽃. 굉음에 귀가 멍멍해지고 눈이 부셨다.
“그러니까 착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잖는가.”
불꽃으로 생긴 음영에 초승달과 같은 웃음이 걸렸다.
“우리들의 목적은 유선영이지, 자네가 아니네.”
다시 한 번 불꽃이 치솟았다. 산동유가의 별채가 있던 곳이다. 병장기 소리와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모두가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여 줄 것이란 생각은 버리게. 우리들 또한 머리가 있음이니.”
진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뇌, 천하제일을 다투는 마교를 아우르는 그 지력에는 한계가 없음이라. 역시 이 사건의 배후에는 마뇌가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는 실제로 오늘 움직일 생각이네. 내통자가 있는데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시간을 고를 필요가 있겠는가? 빈틈을 찾아 움직이면 그만이지.”
거기까지 타락을 한 것인가. 무림맹 제일의 단체라는 숭검단을 몰살시켜서라도 타심통이라는 재능을 없애고 싶은가.
“이번 계획에는 소녀궁 전체와 마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실력의 검마(劍魔) 또한 참가하네. 문겸익을 소녀궁 궁주가 상대한다면 남은 것은 단세명 하나뿐, 단세명 정도의 실력으로 검마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 오늘의 사건 이후로 더 이상 산동유가는 오대세가가 아니게 될 것이야.”
“……한마디 하지.”
당의철에게 등을 돌리고 산동유가의 별채를 바라보며 진철이 뚜렷하게 말하였다.
“선영이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당가와 마교, 둘 모두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헛소리를 잘도 하는군.”
일개 무인이 오대세가 중에서도 수위를 노리는 당가와 천하제일의 패권을 다투는 마교를 상대한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저 경고라고 생각한 당의철이 품속에서 독분이 든 자루를 펼치며 크게 소리쳤다.
“죽여라!”
달려드는 소녀궁 무인들. 하얀 손이 달빛 아래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시간도 없으니 창졸지간에 끝내 주도록 하지.”
하얀 은사가 진철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