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수호검인 1권(21화)
4장 ― 자매의 입장(5)
“문 단주님!”
달려오는 무인이 있었다. 온몸에 피로 칠갑을 하였고, 어깨에는 커다란 검상이 있어 그곳으로부터 핏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위중해 보이는 상처였다. 저런 몸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정신력이 놀라울 뿐. 주변을 정리하던 숭검단 무인이 다급히 금창약을 들고 달려왔지만, 손으로 제지하고 문겸익의 앞에서 포권을 취하고 섰다.
“무슨 일이더냐!”
“일조와 이조가 흉수들의 추적에 성공하여 현재 교전 중입니다! 그러나 미리 도주할 길을 상정하고 함정을 파두어 전투 불능이 된 대원들이 절반, 거기에 상대 측에 실력을 측정하기 힘든 고수가 있어 유 부단주께서 힘겹게 막아 내고 있습니다. 속히 지원을!”
“역시 마교란 건가…….”
당의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추격을 시도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숭검단 안에서도 가장 무력이 강하다는 일조와 이조가 힘겹게 막아 내고 있다니, 역시 평범한 마인들이 습격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의도가 있었다. 문겸익이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끼리 먼저 출발한다. 삼조와 오조는 모이는 대로 곧바로 달려오도록! 장소는 어디냐! 속히 안내하라!”
“예!”
급히 의원에게 달려가야만 하는 중상임에도 옷을 찢어 상처 부위를 압박하는 것만으로 끝이었다. 두 눈에 깃든 정광에서 불길이 치솟으니, 그 정신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정파의 중심, 정도의 정수. 이들이야말로 무림맹 최고의 단체 숭검단이었다.
숭검단 단주, 팽가의 대표, 당가의 대표, 낭인왕 후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의 무인. 하나하나가 절정을 넘어선 고수이다 보니 달려가는 속도가 빨라 상처를 입었던 숭검단 단원이 숨을 헐떡이며 달릴 지경이었다. 문겸익이 뒤에서 그의 명문혈에 손을 대 진기를 불어넣으니, 그제야 안정되는 호흡. 힘을 내 조금 더 속도를 올려 얼마간 달리자 병장기 소리와 기합성,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숲길 구석구석 쓰러져 있는 시체와 무인들. 숭검단 최고의 무력이라는 일조와 이조의 무인들이 상처를 입어 헐떡이고 있었다. 어떤 함정에 걸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그 흉험함이 짐작이 갔다.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한 명, 한 명 일별하는 문겸익의 눈에서 살의가 이글거렸다.
“감히…….”
터엉!
땅거죽에 발 도장이 크게 찍히며 문겸익의 신형이 날아갈 듯 높이 떠올랐다. 발아래로 비춰지는 광경. 커다란 공터에 수많은 무인들이 모여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흉험한 살초를 뿌리고 있었다. 단숨에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여 지원이 필요한 곳을 살핀 문겸익이 두 검을 뽑아 들고 내려쳤다.
쩌어억!
반응할 새도 없이 반으로 갈라지는 무인의 육신. 힘겹게 공격을 막아가던 숭검단 단원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문 단주님!”
문겸익은 답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검을 바로잡고 앞으로 전진. 반응하지 못하는 적도의 머리를 베어 내고, 병장기로 막는다면 병장기째 잘라 내 모두의 주목을 사며 적도의 수장이라 의심되는 무인에게 무인지경으로 달려갔다.
옷 이곳저곳이 찢겨진 채 힘겹게 공격을 막아 가던 유선아가 그를 보고 다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그녀를 공격해 가던 수장 또한 뒤에서 달려오는 문겸익의 기운을 눈치채고 몸을 빙글 돌려 공격을 막았다.
카아아앙!
칼날에 닿을 듯 맞대어진 얼굴. 남성이 아닌 여성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직 불혹을 넘지 않은 듯 피부에 주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젊은 나이에 전대미문의 경지에 오른 유선아를 상대할 만한 젊은 여류 고수가 마교에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숭검단의 단주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화를 잘 참지 못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군요.”
하얀 손으로 문겸익의 공격을 막은 여성이 말하였다. 멍하니 듣고 있으면 현혹되어 버릴 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네년은 누구기에 무림맹을 습격하고 이런 방자한 짓을 저지른 것이냐?”
“글쎄요? 소녀는 문 단주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방자한 짓이라 칭하셨는지 모르겠네요.”
검을 더욱 앞으로 밀어내려고 하여도 태산처럼 막아선 하얀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문겸익의 눈에 이채가 스치자 여성은 싱긋 웃으며 귀신처럼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소녀와 수하들이 한 일이라곤 무림맹의 보급 창고를 습격하고 무인들을 죽인 것밖에 없는데, 무엇이 방자한 일이지요?”
“그것을 포함하여 숭검단 단원들까지 이리 만들었다는 것이 방자하다는 소리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셨는데 아직도 농담을 잘하시다니, 유쾌하셔라. 무림맹이라며 정도를 걷는 정파인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무인. 약육강식의 강자존이 지배하는 무림의 사람들이지요.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뿐인데, 무엇이 방자한가요?”
“시끄럽다! 그 간사한 입을 당장 다물지 못할까!”
현혹을 일으키는 목소리에 묘한 논리가 섞이자 누구라도 수긍할 법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렸다. 말로는 못 이길 상대였다. 문겸익이 억세게 으름장을 놓자 여성이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정인에게 버림받은 소녀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소녀의 말을 듣고서 그리 큰 소리를 지르시니,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무림맹에서도 연배가 가장 높은 축에 든다고 하시더니, 귀까지 머셨나 보네요. 머리가 굳고 귀가 닫히고 입이 사나우니, 무림맹 숭검단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네년이 그리 입을 놀릴 만한 분이 아니야!”
“반하! 멈춰라!”
그만 분을 참지 못한 한 단원이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옆에 있던 단원이 말렸지만, 분을 못 이긴 몸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달려든 것은 호남 금룡산장(金龍山莊)의 적자인 금룡협도(金龍俠刀) 금반하라는 무인이었다. 금룡산장의 절기인 금룡도법을 극성으로 익혀 곧 절정의 중입을 넘을 수 있다 평가받는 고수였다.
큐우웅!
뽑혀져 나오는 도, 강맹한 경기, 검법을 보는 듯 유려한 투로. 그러나 그 속에 든 날카로움은 용의 이빨이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금룡도법(金龍刀法) 삼초, 금룡조아(金龍爪牙)가 펼쳐지며 여성의 목을 노리고 뻗어 갔다.
“그리 장난처럼 몸을 놀릴 상대가 아니에요.”
맞받아치는 여성의 손은 하얗고 여렸다. 금색 진기 속을 헤치는 하얀 손가락.
쨍강! 푸욱!
“커헉!”
휘몰아치던 바람이 미풍이 되어 여성의 잔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도를 부러뜨리고 심장을 꿰뚫은 여성이 물건을 치우듯 손을 휙 털자 금반하의 시체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네 이년…….”
“어머, 화를 내시는군요. 문 단주님도 보지 않으셨나요? 저에게 살초를 뿌린 것은 그입니다. 저는 그에 반응해 주었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멈추었던 싸움이 다시금 시작될 듯하였다.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피할 수 없는 도발만을 받았다. 이러고도 물러난다면 무림맹 제일의 단체라는 숭검단의 이름이 울고 말 것이다. 결코 멀쩡히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결심한 문겸익이 쌍검을 가슴께에서 교차시키며 냉정한 눈빛을 발했다.
“잘못되진 않았소. 다만,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지.”
다가오는 남자. 등에 여자아이를 업은, 기묘한 모양새였다. 진철이 숭검단 무인들에게 눈총받을 말을 하자 그에 단세명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쪽은 누구시죠?”
같은 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냉정한 발언을 한 자였다. 그러나 그리도 화를 내고 있던 문겸익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있는 자였다. 여성이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 같아 보이시오?”
“……농담을 건넬 분위기는 아니라 생각해요.”
“그렇게 잘 아는데 도대체 왜 그러셨소?”
방금 전의 언행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진철의 그 말에 여성이 더는 미소를 유지할 수 없다는 듯 소매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글쎄, 눈이 삐었나보오.”
무덤덤하게 말을 건네는데, 그것이 더 울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에 말을 되돌려주기엔 초장부터 말려들어 버렸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린 여성이 다시금 냉정을 찾고 말했다.
“뒤쪽의 분들은 사천당가와 하북팽가, 그리고 낭인 단철호도 단 대협이시군요. 낭인이신가요?”
“글쎄.”
여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어깨너머로 얼굴을 내민 한 여자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산동유가가 이번에 무림성에서 장중보옥의 호위무사를 뽑는 대회를 개최했다 하였지요. 그 과정에서 뽑힌 자가 이름도 모를 무명소졸 하나와 단 대협이라고 하였던가요? 그쪽이 그 무명소졸인가 보군요.”
큰 사건이 일어났을 시 무림맹은 구파와 오대세가를 소집한다. 구파와 모용세가, 남궁세가가 오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안다. 그러므로 숭검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 그리고 오대세가. 두 정보를 조합하니 답이 보였다. 진철의 정체를 알아챈 그녀가 무시하는 눈빛으로 진철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렇소.”
그녀의 행동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진철은 마치 처음부터 알려주려 하였던 것처럼 순순히 긍정하였다.
“그러는 그쪽은 마교의 교인으로 보이오. 상처에 남는 냉기, 하얗고 단단한 손, 소수마공의 특징이지.”
“그 정도 특징이야 북해(北海)의 빙궁(氷宮)에서 내려오는 빙공(氷功)과도 연관이 없지 않지요.”
“그것도 맞는 말이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말을 건 것일까? 단세명조차 파악치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할까. 팽무군과 당의철이 쯧, 하고 혀를 차고, 숭검단 무인들이 병장기의 손잡이를 다시금 꾸욱 붙잡았다.
“그러니 한 가지 물어보겠소.”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상히 답해 드릴게요.”
“소상히 답할 필요도 없소. 한마디면 족하니.”
한 걸음을 내딛으며 진철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딸아이의 복수는 만족스럽게 진행될 것 같소?”
“……네놈이 그걸 어떻게!”
무슨 소리일까? 알아들은 사람은 여성과 그의 수하들뿐이었다. 진철에 이어 멍한 눈빛으로 여성을 바라보던 유선영이 중얼거렸다.
“역시.”
놀란 얼굴 작아진 눈동자, 그 속에서 빛나는 사냥꾼의 날카로운 눈빛.
“산동유가는 마음을 읽는군.”
딱딱하게 굳은 얼굴 희미한 미소, 독사의 혓바닥처럼 낼름 입술을 핥는 붉은 혀.
“죽어라.”
콰앙!
진철의 사방 땅이 진동하더니 그 안에서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괴인들이 사혈을 노리고 단검을 내찔렀다. 시야를 가리는 모래 먼지 속에서 짜인 듯 정확히 사각(死角)으로 단검을 찔러 오니, 모두가 놀라 숨을 헙, 하고 들이켜며 굳어 버렸다.
“시도는 좋으나 부족하오.”
그러나 유선영이 등에 업혀 있는데 위협을 내버려 둘 진철이 아니었다. 어느새 손을 쓴 것인지 여유롭게 말하며 손을 휙 내저었다.
햇빛을 받아 미미하게 반짝이는 은사. 함정을 깔아 둔 것은 저들뿐만이 아니었다. 다섯 손가락으로 동시에 은사를 튕기자 멈추었던 복면인들의 몸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마교 여성들의 지주라는 소녀궁의 힘이 이리 약했소?”
“흥!”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없었다. 진철의 핵심을 관통하는 몇 마디에 모두 들켰다 생각한 여성은 코웃음을 치며 은밀하게 손짓했다.
“도망…….”
진철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못 들었을까. 놀라움에 무인들이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마인들이 동시에 땅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펑!
“큭! 연기?”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하얀색 연기. 숭검단 무인들이 기습을 대비하여 기감을 넓혀 갔다. 하지만 병장기 소리는 들리지 않고, 땅을 스치는 발걸음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가 흩어지자 공터에 남은 것은 무림맹의 사람들뿐이었다.
“허…….”
다 잡은 적인데 눈앞에서 적을 놓치다니. 허탈함에 하나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철을 욕하고 싶지만, 방심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숭검단 단원이라는 자가 적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문제 있는 행위였다.
“한숨 쉴 때가 아니다! 뭣들 하고 있느냐! 멀쩡한 자들은 반으로 나뉘어 적을 추적하고, 나머지 반은 이곳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수습한다!”
문겸익이 외치자 숭검단 단원들이 금세 정신을 추스르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오대세가의 인물들, 그리고 단세명과 유선아의 시선은 진철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답해야 할 것이다.”
당의철이 진철에게 다가가 말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은 진철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괘씸함이 느껴져서인지 그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럴 것이오.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오.”
“도움이라 했느냐?”
“그렇소.”
진철이 스산하게 말하였다.
“선영이에게 손을 대려 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않겠소?”
당의철과 마주 본 시선에서 살의가 요동쳤다.
“정말로 그 녀석들이 다시 올까?”
“단주님이 그렇다고 하시니 믿을 수밖에.”
“잡담은 그만. 언제 적도들이 다시 올지 모르니 집중해라.”
문 건너편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죽였지만 풀벌레 소리만이 울리는 적막한 자정에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조장의 말에 숭검단 단원들이 짧게 답하곤 다시 조용히 망을 보았다.
“……그렇다는데,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냐?”
“황새의 뜻을 뱁새가 어찌 알꼬. 속단을 내리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뿐이오.”
“그 입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다물어질지 궁금해서 그런데 시험해 봐도 되냐?”
“안 그래도 되오. 알아서 잘 닫히니까.”
“그리 말하는 놈이 그렇게 말대답을 해?”
“…….”
“허이구.”
“…….”
“야.”
“…….”
“……졌으니까 그냥 말이나 해라.”
“좋은 판단이오.”
진철은 흡족하게 웃고, 단세명은 열이 뻗쳐 두피를 벅벅 긁으며 분을 삭였다. 보름달이 떠오른 늦은 밤, 무림맹에서 산동유가에게 내준 별채는 평소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평소와 똑같지는 않았다. 무림맹 숭검단 단원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매복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그 녀석들이 선영이를 노리고 있다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느냐?”
주변을 대충이나마 정리하고 이어진 진철의 설명. 그들이 마교의 인물인 것은 사실이고, 여성들로 이루어진 소녀궁의 궁주와 그 궁도들이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소녀궁이라 하면 문겸익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수괴의 무공 실력이 이해가 갔다. 소녀궁은 방중술과 주안술, 암살 기술에 능통했다. 소녀궁의 궁주라는 적도들의 수괴 소염노희(素艶老姬) 윤혜의 나이는 일흔. 주안술과 무공의 능력에만 힘입어 그리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 문겸익과 마찬가지로 전대의 고수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남은 의문. 도대체 왜 보급 창고를 습격했는가. 그것은 아마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진철은 설명하였다. 개선식 직후에 일어난 사건. 마교라고 의심이 가면 숭검단이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선식 때문에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어 있어 구파의 인물들은 움직일 수 없으니 오대세가의 인물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런 사건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진철이 밝히는 그들의 목적.
유선영을 죽이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 말해 줄 수 있는데, 어떻소?”
“나는 선영이에게 빚을 졌다. 선영이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차라리 내 목숨을 끊지.”
어린아이에게 짐을, 자신의 바람과 원망을 넘겼었다. 어른인 자신조차 버티지 못한 일을 어린아이에게 넘겼으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그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단세명은 자신의 목숨마저 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좀 믿을 만해졌소.”
몇 개월을 같이 생활하며 내린 판단은 단세명은 믿을 수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신의를 지키고, 마음에 솔직하지만 상황을 가릴 줄 아는 사람. 이보다 믿음직한 아군이 또 있을까. 찬찬히 기를 끌어 올려 단세명과 자신을 둘러싸는 기의 막을 만든 진철이 유선영의 호위무사를 뽑던 대회 날, 모예단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모예단이 소녀궁의 소궁주이자 궁주인 윤혜의 딸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를 진철이 죽였다는 것.
“들었던 사정과는 다르군.”
“선영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도록 증거를 조작하고 말을 지어냈으니까 당연하오.”
당시의 진상을 아는 것은 진철과 유선영뿐이었다. 무림맹마저 속일 정도로 비범한 능력. 단세명이 속으로 다시 한 번 진철에게 감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