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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무사 1
1화

작가서문


밤새 원고를 마감하고 졸린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니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군요.
올해 초, 첫 작품인 진호전기를 쓰게 되면서 봄을 기다렸는데, 어느새 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바라보며 두 번째 작품인 청룡무사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정말, 문득 돌아보면 이미 저만치 가 버린 세월의 빠름을 절감하게 됩니다.
전작인 진호전기를 통해서 독자 분들과 교감을 나누기 시작했다면, 이번 청룡무사를 통해서 좀 더 친숙하게 무와 협에 대해서 수다를 떨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룡무사는 내가 만약 무림에 존재했다면,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작품입니다. 고기를 좋아하니 소림의 스님이 되기는 힘들 것 같고, 생각이 단순하니 머리 아픈 음양의 도를 논하는 무당의 도인이 되기도 힘드니 사람들 틈에 묻혀서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천성이 게을러 표사도 되지 못할 것 같아서 택한 것이 청룡무사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주위를 둘러보면 수없이 많은 청룡무사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격투가들이 사각의 링 위에서 적을 눕혔을 때 받는 열광적인 박수도 받은 적이 없고, 화려한 조명이 그들을 비추어 주지도 않고, 거액의 돈을 벌지도 못하지만, 묵묵히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삶을 지켜 주는 경찰입니다. 청룡무사는 강호 무림에 있는 강력반 형사들과 같은 존재들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시대와 형태 등 다른 것이 너무나 많겠지만, 그들의 혈관 속에 흐르는 의혈의 정신은 같을 것이기에 미숙한 솜씨나마 그들의 삶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최근 방송이나 지상매체를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는 슬픈 소식들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겨울을 부쩍 앞당겨 버린 느낌입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의 어깨가 움츠려 있고, 우리의 손이 바지 주머니 깊숙이 찔러져 있지만, 우리의 눈만은 머지않아 다가올 따뜻한 봄날을 바라보는, 그런 겨울을 보냈으면 합니다.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임홍준 배상



서장


가파른 산길에 나무를 박아 만들어 놓은 백여덟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는 조그마한 암자가 눈에 들어온다. 깊은 산중에 홀로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암자는 기와를 대신하여 너와로 처마 위를 덮고 있어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여느 산사 못지않게 고즈넉한 정취가 느껴졌다.
산사의 밤을 느끼게 해 주는 정취의 백미는 툭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흐느끼듯 신음을 흘리는 풍경 소리이다. 그러나 이곳 암자에서는 그윽한 풍경 소리를 대신하여 낭랑한 소년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백만 하나, 백만 둘, 백만 셋!”
“이놈아! 잠 안 자고 뭐하는 게야!”
암자로 들어서던 백미의 노승이 버럭 호통을 쳤다.
어림잡아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황급히 뒤로 감추며 노승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엇! 할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노승은 소년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잠시 눈에 이채를 띠고는 넌지시 물었다.
“오냐, 근데 도대체 오밤중에 잠도 안 자고 뭐하는 게냐?”
“헤헤, 수련을 하고 있었어요.”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했다.
“수련? 뭘 말이냐?”
“사, 삼재검법요.”
“삼재검법? 그딴 것 해서 뭐하려고?”
소년의 말에 노승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딱히 뭘 하려는 게 아니라, 말코 할아버지가 하도 놀려 대서…….”
소년은 쭈뼛거리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말코가 뭐라고 그랬는데?”
“있잖아요, 할아버지! 말코 할아버지가 저는 돌대가리라서 삼재검법을 익히려면 천만 번을 휘둘러도 흉내도 못 낼 거라고 했어요.”
노승이 묻자 소년은 고자질을 하는 아이처럼 입을 삐죽 내밀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 있었다.
‘망할 놈의 말코 같으니. 뭔 헛소리를 해 가지고.’
노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소년에게 달래듯이 말을 걸었다.
“흠흠, 그러니깐 내가 말코랑 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거 다 헛소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제 그만 들어가 자거라.”
“예, 헤헤. 근데요, 하다 보니까 재밌어요! 암튼 오늘은 이미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씻고 들어가 잘게요. 할아버지도 주무세요.”
노승은 한결 기분이 나아진 표정으로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우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우라질 말코 놈이 애한테 뭔 헛소리를 한 거야? 가만! 그러고 보니 말코 놈과 내가 무당산으로 떠난 게 한 달쯤 되었으니……. 그럼 저놈 저거 한 달 동안 매일 삼재검법을 하루에 삼만 번씩이나 휘두른 거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보던 노승은 속으로 탄식을 흘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에휴, 단순 무식한 놈. 쯧쯧! 그나저나 저놈 저거 앞으로 뭐해 먹고 살려나.’



제1장 청룡무사(靑龍武士)


“거운아! 다 했느냐?”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에 자리한 기루인 명화루의 총관인 왕방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청년을 쳐다보며 외쳤다.
청년은 육 척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큼직한 체구와는 달리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선한 눈매 때문에 인상이 순박해 보였다. 청년의 이름은 장거운으로 그는 이레에 한 번씩 이곳 명화루에 나무 장작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왕방에게 다가선 장거운이 웃는 얼굴로 말을 했다.
“자리가 없어서 지난번 거 뒤쪽에 쌓아 놓았어요.”
“그래, 수고했다. 근데 오늘은 어찌 이리 늦게 온 게야?”
“늦잠을 잤어요. 헤헤!”
장거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순박하게 웃음을 흘렸다.
“녀석! 곧 어두워질 텐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거라.”
왕방은 실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장거운의 순박한 웃음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탓이다. 장거운이 돌아보니 이미 술시가 다 되어 가는지 왕방의 말대로 주위는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래도 혼자 밤길을 가려면 무섭지 않겠느냐?”
“에이, 제가 뭐 어린앤가요?”
“호! 욘석이, 좀 컸다 이거지?”
장거운이 입을 삐죽 내밀며 계집애마냥 새침하게 대꾸를 하자 왕방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아래위로 눈을 부라렸다. 장거운의 표정이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체구도 크고 남들의 두세 배 되는 나뭇짐을 지고 올 만큼 힘도 장사인 장거운이지만, 어릴 때부터 봐 온 왕방에게는 마냥 귀엽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저도 이제 열여덟 살이라고요!”
“허, 세월이 빠르긴 빠르구나, 열두 살짜리 꼬맹이가 코 질질 흘리며 나무 팔러 왔을 때가 엊그제 같더니만, 벌써 열여덟이나 되었네.”
“그죠? 그런 거 보면 너무 억울해요. 아저씬 늙지도 않고 그대론데 저만 늙었잖아요.”
“뭐야! 이 녀석이!”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을 하는 장거운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 듯, 왕방은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아야! 헤헤. 근데 오늘은 일찍 손님들이 들었네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엄살을 부리던 장거운이 아직은 영업을 하기 이른 시간임에도 전각에 등이 켜진 것을 보고 말을 건넸다.
“그래, 그렇구나.”
대답을 하는 왕방의 표정이 좋지 않자, 장거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 총관님,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 왜 그러느냐?”
왕방은 애써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째 왕 총관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그러냐? 내가 어젯밤에 과음을 좀 했더니…….”
왕방은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두 사람의 귀에 파고들었다.
“아악!”
등이 켜져 있던 전각에서 비명이 들려오자 왕방은 안색이 급변한 채 황급히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장거운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득달같이 달려온 왕방과 장거운이 비명 소리가 난 전각 앞에 이르자 고급스러운 적색 비단 장삼을 입은 귀공자 한 명이 명화루의 청기(노래나 연주를 하는 기녀)인 설향의 머리채를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오고 있었다.
짝!
“악!”
귀공자가 느닷없이 설향의 뺨을 후려갈겨 버리자 설향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그녀의 비파와 함께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곧바로 마당으로 내려선 귀공자는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쓰러져 있는 설향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쳐 댔다.
“네 이년! 내가 우습게 보이느냐?”
“고, 공자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귀공자의 호통 소리에 설향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얼른 일어나 무릎을 꿇고서 두 손으로 싹싹 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이 가시지 않는지 귀공자가 씩씩대며 또다시 설향에게 발길질을 하려 하자, 왕방이 황급히 뛰어들며 말을 뱉었다.
“아이고! 모 공자님, 왜 이러십니까?”
“뭐야? 오! 왕 총관, 너 내가 누군지 알지?”
“아이고 제가 어찌 모 공자님을 모르겠습니까? 저 아이가 뭘 잘못한 것 같은데 모 공자님께서 참으십시오. 천한 것을 더 손대서 뭐하시겠습니까?”
왕방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을 하고는 만류의 말을 건넸다.
모 공자라고 불린 작자는 정주의 밤을 지배하고 있는 흑수방의 둘째 공자 모지명이었다. 기루인 명화루의 총관을 맡고 있는 왕방으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작자인 것이다. 모지명은 술만 마시면 심심찮게 주사를 부렸는데, 특히 기루의 기녀들에게 손찌검을 잘하기로 유명해서 정주의 모든 기루가 기피하는 손님이었다. 벌써 손님이 들었냐는 장거운의 말에 왕방이 인상을 찌푸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모지명이 왕방을 쳐다보며 또다시 고함을 쳤다.
“천한 것? 그래, 너 말 잘했다. 저 천한 것이 감히 내 손을 뿌리쳐?”
“그게…… 저 아이가 청기인지라 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왕방은 좋은 말로 모지명을 달래면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설향을 쳐다보았다.
모지명이 내뱉는 소리와 앞섶이 헝클어진 설향의 모습으로 보아 모지명이 청기인 설향의 가슴을 만지려고 하다가 사단이 난 모양이었다. 청기인 설향의 입장에서는 놀라서 모지명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한바탕 난리를 면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시바! 뭔 개소리야? 청기고 나발이고 그런 것은 나는 모르겠고, 에이 썅! 버러지 같은 년이 감히!”
모지명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빌고 있는 설향을 또다시 발로 밟으려고 달려들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이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시오!”
“뭐? 이 새끼는 또 뭐야?”
모지명이 세모꼴로 찢어진 눈을 희번덕거리며 장거운을 노려보았다.
“거운아!”
왕방이 놀라서 나직하게 장거운을 불러 보지만, 장거운은 모지명을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발 앞으로 나선 모지명이 장거운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을 뱉었다.
“오라! 네놈이 이년 기둥서방이냐?”
“난 기둥이 아니고 장작을 파는 사람이오.”
“뭐? 이 새끼가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말이냐?”
모지명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뱉고는 느닷없이 장거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기둥서방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장거운은 자신은 기둥이 아니라 장작을 판다고 사실대로 대답을 했지만 모지명은 장거운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모지명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장거운의 얼굴에 박혀 들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모지명의 주먹을 슬쩍 우측으로 흘려버리고는 모지명의 손목을 갈고리처럼 잡아 버렸다.
모지명은 자신의 손목이 장거운에게 잡혀 버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고함을 질러 댔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이거 안 놔?”
모지명이 고함을 치며 용을 써 보았지만 장거운에게 잡힌 손목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펑!
“욱!”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나고 장거운이 신음을 뱉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모지명의 앞에는 어느새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모지명의 호위무사인 팔괘염라 구자충이었다. 전각 안에 있던 그는 모지명이 장거운에게 주먹을 잡혀 쩔쩔매는 것을 보고는 벼락같이 몸을 날려 장거운의 복부에 팔괘장을 출수한 것이다.
구자충이 쓰러진 장거운을 향해 다시 몸을 날리려는 순간 굵직한 음성이 옆에서 흘러나왔다.
“그만하지!”
“뭐야! 또 어떤…… 청룡무사?”
짜증스럽게 말을 뱉으며 고개를 돌리던 모지명이 상대를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을 뱉은 사내는 흐트러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어 얼핏 부랑아 같아 보였지만,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만은 차가운 정광이 일렁거렸다. 무엇보다 그가 입고 있는 흑색 무복의 가슴에 푸른 수실로 새겨진 한 마리의 청룡이 모지명의 눈을 파고들었다. 사내는 바로 청룡무사였다.
청룡무사는 무림맹 소속의 무사들 가운데 청룡당의 무사들만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정파 무림의 연맹인 무림맹 내에서 청룡당은 매우 특별한 조직이었는데 그것은 청룡당의 임무 때문이었다.
흔히 강호라고 부르는 무림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의 세상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그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도 있었다. 대다수의 백성들과 극소수의 무림인이 강호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결과 무림인들에 의해 일반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부상을 입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부의 힘만으로 그러한 사건들을 모두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을 관부의 포쾌나 포두들의 실력으로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무림인에 의해 발생한 사건들은 대부분 그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문파와 관부가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왔다. 결국 무림맹 청룡당의 임무는 그러한 관행을 확대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무림인이나 무림 문파의 폭압적인 무력행사로 인해 피해를 입은 백성들은 누구나 무림맹에 탄원을 할 수 있었고, 그와 같은 탄원이 들어오면 청룡당이 나서서 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색출해 내는 것이다.
청룡당은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항주에 본당을 두었고 무림맹의 각 지부에 지당을 두어 운영되고 있었는데, 청룡무사란 바로 청룡당의 무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곳 정주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사내는 청룡당 하남지당에 소속된 청룡무사인 모양이었다.
결국 청룡무사는 모지명과 같은 자들에 있어서는 천적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모지명과 구자충이 벌레를 씹어 먹은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고 있는 이유였다.
모지명과 구자충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청룡무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웬만큼 했으면 그만하지 그래?”
“그, 그러겠소.”
모지명이 말을 더듬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모지명과 구자충이 뒤로 물러서며 은근슬쩍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장거운이 벌떡 일어서서 그들을 막아섰다.
“거운아!”
왕방이 황급하게 장거운의 팔을 잡고 만류했다.
그러나 장거운은 그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지명과 구자충을 노려보며 일갈을 내뱉었다.
“당신들이 인간이라면 적어도 설향 누님에게 사과는 해야 할 것이오.”
“이 새……!”
모지명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장거운에게 욕설을 뱉으려다 급히 입을 닫았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청룡무사를 떠올린 것이다.
장거운의 시선이 청룡무사를 향했다.
“당신은 청룡무사가 아닙니까? 청룡무사가 어찌 힘없는 아녀자를 폭행한 자를 보고서도 그냥 보내 주려는 것입니까?”
청룡무사는 자신에게 따지고 있는 장거운을 보며 잠시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장거운이 복부에 제법 경력이 실린 것처럼 보였던 팔괘장을 맞고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청룡무사는 보기보다 팔괘장에 실린 경력이 약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뱉었다.
“난 단지 시끄러운 게 귀찮아서 조용히 하라고 한 것뿐이다.”
“가슴에 청룡을 새긴 자가 불의를 보고도 물러서다니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장거운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청룡무사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볍게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한낱 기녀와 취객의 싸움 따위에 청룡무사가 관여를 해야 하느냐?”
“당신의 눈에는 저 모습이 한낱 기녀와 취객의 싸움으로 보이십니까? 내 눈에는 힘없는 아녀자를 폭행하는 불한당의 행패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질책을 퍼붓는 장거운을 청룡무사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장거운의 질타가 계속 이어졌다.
“한낱 기녀라고요? 양가의 규수는 폭행을 당하면 안 되고 기루의 기녀는 폭행을 당해도 당연하다는 말입니까? 기녀도 여느 여자들과 똑같은 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불한당의 주먹보다도 당신 같은 사람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들을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당신의 가슴에 새겨진 청룡이 불쌍하군요. 한 줌의 자비심도 남아 있지 않아 피폐해져 버린 당신의 가슴에서는 영원히 승천을 꿈꿀 수가 없을 테니까요.”
“거, 거운…….”
청룡무사를 호되게 나무라고 있는 장거운의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왕방은 저도 모르게 신음처럼 장거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청룡무사를 향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낸 장거운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설향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
“누님 가요! 저놈들은 내가 나중에 힘이 더 세지면 혼내 줄게요.”
장거운이 설향을 부축하여 걸음을 옮기는 순간 청룡무사의 입에서 나직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거기 서라!”
“무사님!”
왕방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화가 난 청룡무사가 장거운에게 손을 쓸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청룡무사의 시선은 모지명과 구자충을 향해 있었다.
청룡무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지명과 구자충에게 턱짓을 하며 말을 뱉었다.
“너희 둘은 저 여인에게 절을 하면서 사과를 하라!”
“그, 그것이…….”
모지명은 주저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주의 밤거리를 주름잡고 있는 흑수방의 이공자인 그가 한낱 기녀 따위에게 절을 하고 사과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지명은 주저거리며 설향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사과의 말을 해야만 했다. 그를 옭아매는 청룡무사의 기세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거역했다간 당장에라도 목이 잘려 나갈 것만 같았다.
모지명과 구자충이 설향에게 사과를 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청룡무사가 장거운을 보며 물었다.
“어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장, 장거운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의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장거운이 더듬거리며 이름을 말했다. 그는 무림맹 최고의 무사라고 불리는 청룡무사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모지명과 구자충에게 사과를 명하자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청룡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은 이름이군. ‘청룡은 자비심의 연못에서 승천을 한다!’ 오랜만에 들어 본 말이구나. 꼬마야! 훗날 인연이 있다면 또 보자. 내 이름은 남궁천호라고 한다.”
“남궁천호…… 히익! 창천검룡 남궁천호!”
청룡무사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걸음을 옮기자 그 이름을 되새겨 보던 구자충이 기겁을 하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청룡무사가 밝힌 남궁천호라는 이름은 이런 정주의 삼류 기루와 같은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로 알려진 창천검룡 남궁천호는 청룡당 일대주로서 후기지수들 가운데 최강의 고수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파 십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태행노괴 막희구를 노략질과 양민 학살의 죄를 물어 강소성에서부터 감숙성의 주천까지 쫓아가서 참살하였다는 이른바 ‘만리추살’의 일화는 청룡당의 전설로 자리 잡고 있었다. 꾀죄죄해 보이던 상대가 바로 그 남궁천호였으니 구자충은 너무 놀라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한편, 묵묵히 남궁천호의 등을 노려보고 있던 장거운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청룡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