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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글자 꼬라지 하고는…… 쯧쯧쯧.’
계피학발의 노도장이 쳐다본 산사의 입구에 걸려 있는 넓적한 나무판에는 조악한 솜씨로 ‘조림사(操林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혀를 차며 산사의 마당으로 들어선 노도장은 산사에 있는 유일한 건물인 목옥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노승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놈이 이젠 아는 체도 안 하네. 젠장! 거운이 놈은 어디 갔냐?”
노승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무 팔러 정주에 갔는데 아직 안 오네.”
“그러냐?”
“그나저나 네놈은 왜 그놈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애가 잠도 못 자게 하냐?”
노승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뱉었다. 백미를 꿈틀거리며 말을 하는 그의 어투에서는 짜증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이놈의 땡초가 뭔 흰소리냐? 내가 뭐랬다고?”
노도장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코, 네놈이 거운이보고 돌대가리라고 했다면서?”
노도장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야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거운이 녀석만 한 돌대가리가 어디 있냐? 그러기에 왜 애한테 철두공을 가르쳐 가지고…….”
“철두공이야 거운이 놈이 어릴 때 걸핏하면 맨땅에 머리를 처박으니까, 그놈 머리 다치지 말라고 가르친 거지!”
“지랄! 애들이 걸음마 뗄 때 다들 머리 처박고 하는 거지, 그렇다고 걷지도 못하는 갓난애한테 철두공을 가르치냐? 이 화상아!”
“염병! 말코야, 니가 애 키워 봤냐? 애 안 키워 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원래 철두공은 대가리가 굳어지기 전에 말랑말랑할 때부터 해야 효과를 제대로 보는 거야. 그게 다 제 놈 살아가기 편하라고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가르친 거라니까.”
“얼씨구, 핑계 하고는……. 그럼 금강곤은 빨래 잘하라고 가르친 거고, 용형보는 술심부름 잘하라고 가르친 것이냐?”
“당연하지! 그게 다 제 놈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 이야!”
노도장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자 노승은 정색을 하고는 언성을 높여 가며 말들을 뱉어 냈다.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노승을 쳐다보던 노도장이 다시 물었다.
“헐! 그럼 달마역근경은 뭘 하는 데 필요하다고 서지도 못하는 갓난아기 때부터 가르쳤냐?”
“이런 무식한 말코를 봤나! 달마역근경이 뭐하는 공부냐? 그게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제 어미젖도 못 먹고 자란 놈, 근골이 부실해질까 봐서 할 수 없이 가르친 것이지!”
노승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열변을 토로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의 땡초가 불문과 인연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도 가르칠 건 다 가르쳤구먼. 혹시 너 거운이 놈한테 칠십이절기를 죄다 가르친 게냐?”
노도장은 원래 작은 눈을 더욱더 가늘게 뜨고는 노승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노도장이 수상쩍은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자 노승은 정색을 하고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언성을 높여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지랄! 내가 칠십이절기를 어찌 다 안다고 그걸 다 가르치냐? 그러는 말코 네놈이야말로 그놈 어릴 때 태극권만 가르쳤으면 됐지, 왜 또 쓸 데도 없는 삼재검법을 가르친답시고 대가리 다 큰 놈한테 돌대가리니 뭐니 하면서 애한테 상처를 주고 지랄 염병을 틀었냐?”
“흠흠, 뭐 상처까지야……. 근데 설마 그놈 진짜로 천만 번 휘두른 건 아니겠지?”
노도장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노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을 이었다.
“왜 아니겠냐? 천만 번은 일찌감치 채우고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밤마다 만 번씩 휘두르고 난리다. 내가 그놈의 윙윙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이 인간아!”
“쩝! 무식한 놈. 천만 번이나 하고서도 그걸 못 깨치다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노도장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그는 장거운의 우직한 성격이라면 충분히 자신이 전수한 삼재검법의 진정한 묘용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노승이 고까운 눈초리로 쏘아붙였다.
“지랄! 네놈이 가르친 삼재검법이 그냥 삼재검법이냐? 그리고 그놈이 그걸 못 깨달아서 윙윙거리겠냐? 검에 내기를 담지 못하니 파공음이 날 수밖에 없는 거지.”
“뭐야? 그럼 그놈 아직도 내기가 안 움직이는 거냐?”
“낸들 아냐? 단전도 멀쩡하고 십이경맥에 기경팔맥은 물론이고 십오낙맥까지 뻥뻥 뚫려 있는 놈이 내기를 쓰지 못하니…….”
“거참, 별일이네. 암만 봐도 몸에는 이상이 없던데.”
노승의 말에 노도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몸 하나는 정말 이상적이지! 문제는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내기가 꼼짝도 안 한다는 건데, 내가 보기엔 아마도 ‘아함경(阿含經)’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함경이면 네놈이 이곳에 틀어박혀 번역을 한다던 그 불경 말이냐?”
노도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노승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노승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었다.
“그래.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그놈이 네다섯 살 때만 해도 그 고사리 같은 주먹에서 제법 내기가 느껴졌는데, 그놈한테 글을 가르친다고 아함경의 필사를 시킨 뒤로 점점 내기를 못 쓰게 된 것 같단 말이야.”
“흠, 그럼 네놈은 아함경에 뭐가 문제가 있는지 알 것 아니냐?”
“그게, 암만 봐도 나로서는 모르겠으니 하는 말이지! 젠장, 내가 보기엔 그저 석가세존의 말씀을 옮겨 놓은 것일 뿐인데…….”
노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을 보면 노승으로서도 도저히 아함경에 담겨 있는 비밀을 알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노도장은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한 천하에서 불경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은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노승이었다. 그런 그가 이십 년 동안 파고들었던 아함경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도장이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놈이 그걸 모른단 말이냐?”
“그러니 나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초식은 가르치는 족족 완벽하게 다 펼치는 것을 보면 내기가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노승의 탄식 어린 혼잣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도장도 진중한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놈 내공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 아닐까?”
“뭔 소리야? 그놈 내공이 왜 약해? 내가 다른 거는 몰라도 역근과 세수는 확실히 가르쳤어!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역근경을 익히고 열 살 때부터는 세수경까지 익히기 시작한 놈이 내공이 약하다니 그게 말이 되냐!”
노승이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받자 노도장은 손사래를 치며 다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하는 말이다. 너무 어릴 때부터 역근과 세수를 익히는 바람에 단전에 축기는 안 되고 기맥만 잔뜩 넓어진 것 아니냐, 그 말이다. 기맥은 넓은데 단전에 축기된 내공은 미미하니까 내기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 말하자면, 비가 조금 오면 도랑에는 금방 물이 불어도 넓은 장강은 별로 표가 나지 않는다는, 뭐 그런 말이지.”
“흠, 그런가?”
노도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노승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노도장의 의견에 쉽게 수긍이 가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장거운의 가장 문제점은 몸 밖으로 내기를 뿜어내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전에 축기된 내공이 미미하다고 해도 장거운 정도의 무위라면 내기가 뿜어져 나와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노도장이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뱉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뭐?”
노승이 눈에 이채를 띠며 자신을 쳐다보자 노도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뭐긴, 네놈이 대환단을 훔쳐 오는 수밖에 없다는 거지. 대환단이면 가랑비가 아니라 장마철 폭우와 맞먹는데, 제 놈 기맥이 아무리 넓어도 넘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겠지.”
“그러지 말고 말코 네놈이 자소단 몇 알만 훔쳐 와라! 그게 더 쉽지 않겠냐?”
“염병, 그놈들이 나만 보면 또 뭘 훔쳐 가나 싶어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본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그래도 땡초 네놈은 당당하게 대환단을 내놓으라고 할 수가 있잖아?”
노도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승을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노승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대환단이 뉘 집 개새끼 이름이냐? 내가 내놓으란다고 그놈들이 넙죽 내놓게?”
“아함경 있잖아! 그동안 번역해서 필사해 놓은 아함경이랑 대환단이랑 바꾸자고 하면 되잖냐?”
“이놈이 누굴 진짜 땡초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나. 지금 나보고 불경을 팔아먹으란 말이냐? 그리고 어차피 대환단은 본사에도 없어.”
노승이 눈을 치켜뜨며 말을 하자 노도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엥? 그건 또 뭔 소리냐?”
“몇 해 전에 금면신투인지 뭔지 하는 도둑놈이 대환단 남은 거 몽땅 다 털어 갔다고 하더라.”
“헐! 저런 훌륭한 도둑놈을 봤나!”
노도장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감탄의 말을 흘렸다. 소림사에 들어가 대환단을 훔쳐 갈 정도로 대단한 도둑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말에 노도장이 은근히 즐거워하는 것 같아 보이자, 노승이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지랄! 말코 네놈들의 자소단은 멀쩡할 것 같으냐?”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건 모르지.”
노승의 중얼거림에 덜컥 불안한 생각이 드는지 노도장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생겼다.
소림사의 대환단도 훔친 놈이니 무당산의 금전에 보관하고 있는 자소단도 훔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입을 열어 뭔가 말을 하려던 노도장은 산사의 입구에 들어서는 장거운을 보며 입을 닫았다.
“어? 말코 할아버지 오셨네요.”
장거운이 노도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걸었다.
“오냐! 이제 오느냐?”
“예, 좀 늦었습니다. 할아버지, 다녀왔어요.”
장거운은 다시 노승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많이 늦었구나.”
“예, 저녁 공양은 드셨어요?”
“흠흠, 혼자 먹기도 뭐 그렇고…….”
노승은 헛기침을 하고는 최대한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노승은 배는 고팠지만 밥상을 차리기가 귀찮아서 굶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구, 그냥 드시지. 말코 할아버지도 아직 안 드셨죠? 마침 왕 총관 아저씨가 떡이랑 요리 좀 싸 주신 게 있으니 제가 금방 차려 올게요.”
장거운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얼른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급하게 차려 온 음식을 먹고 있던 노도장이 장거운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어째 네 녀석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냐?”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장거운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했다.
그러나 장거운의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두워 보이자, 노승이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흠, 내가 네놈을 모르겠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거라.”
잠시 노승의 눈치를 보던 장거운은 머뭇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 그게…… 할아버지, 본사에 언제 돌아가실 거예요?”
“글쎄다. 어차피 아함경의 필사본들은 모두 완성이 되었으니 가긴 가야겠지. 왜, 이곳을 떠나기 싫으냐?”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당연히 떠나기 싫겠지. 까까머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뭐 볼 게 있다고 가고 싶겠냐?”
“지랄! 헛소리 하지 말고 먹던 밥이나 마저 처먹어!”
노도장이 끼어들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노승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타박을 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끙, 됐다. 그래, 왜 갑자기 그걸 묻는 게냐? 달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 게냐?”
노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장거운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이었다.
“예, 저 무사가 되고 싶어요.”
노승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정색을 하며 장거운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무사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강호는 네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자칫하다간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이 보낼 수도 있다.”
“그게…….”
장거운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노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네놈은 피를 묻히며 살 놈은 못 되는 것 같구나. 그냥 나와 같이 본사로 가서 세존의 말씀이나 지키고 사는 게 어떻겠느냐?”
“염병! 잘도 지키고 살겠다. 걸핏하면 ‘살계를 열겠노라’ 하면서 피거품을 물고 지랄 발광을 하는 것들이.”
또다시 노도장이 끼어들어 비아냥거리며 깐죽거리자, 노승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조용히 좀 해! 콱! 오늘 진짜 제대로 살계 여는 꼴을 보고 싶냐?”
“워워! 진정하라고. 애 앞에서 뭔 그런 격한 소리를 하고 그러냐?”
노도장은 노승이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듯이 기세를 끌어올리며 노기 띤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움찔 놀라며 진정하라는 의미로 손사래를 쳤다.
노승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애써 억누르며 노도장에게 힐난을 퍼부었다.
“끙! 할아비하고 손자가 간만에 인생 상담 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밥 다 처먹었으면 제발 저기 가서 찌그러져 있어!”
“지랄! 네놈만 할아비냐? 나도 저놈 할아비야!”
조손간의 대화에 끼어들지 말라는 노승의 말에 울컥 화가 치민 노도장이 다시 고함을 치며 대들었다.
노도장이 따지고 들자 노승은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네깟 놈이 한 게 뭐 있다고 할아비 타령이냐?”
“왜 한 게 없어? 내가 저놈 젖먹이 때 동네 아낙네들한테 부적 써 주고 젖동냥해 먹인 게 서른 말도 넘을 거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소리가 나오냐?”
“염병할 소리 하고 있네. 동냥젖이 서른 말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무슨 소들이냐?”
노승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했지만, 조금 전처럼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다. 어쨌든 노도장의 말마따나 그가 젖먹이인 장거운을 안고 젖동냥을 다닌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뭐야? 이놈의 땡초가!”
노승의 빈정거림에, 이번에는 노도장이 분통을 터뜨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노승도 지지 않으려는 듯이 수저를 놓고 벌떡 일어섰다.
“그만들 좀 하세요!”
노승과 노도장의 말다툼이 격해지자 장거운이 만류를 하고 나섰다.
장거운이 나서자 노승과 노도장은 못 이기는 척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성정이 불같은 두 사람이라도 갓난아기 때부터 기저귀를 갈아 주고 젖동냥을 해 먹이며 애지중지 키워 온 장거운의 말에는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장거운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노승이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커험, 정말 내가 애 앞이라서 참는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그냥 이 할아비와 함께 소림사로 가자꾸나.”
“그깟 땡초들한테 뭐 배울 거 있다고 거길 가냐? 거운아! 그냥 이 할아비와 함께 무당산으로 가자!”
다시 노도장이 끼어들며 장거운에게 말을 걸었다.
노승의 백미가 다시 꿈틀거리며 언성이 높아졌다.
“이 얼어 죽을 놈의 말코가!”
“아, 불연(佛緣)이 없어서 중질은 못한다며!”
노도장도 지지 않고 꿋꿋하게 대꾸를 했다.
다시 두 사람의 언쟁이 격해지려고 하자 장거운이 얼른 말을 뱉었다.
“전 그냥 청룡무사가 되고 싶어요!”
“뭐? 청룡무사?”
노도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장거운의 대답이 이어졌다.
“예! 무림맹의 청룡무사가 되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흠, 청룡무사라……. 하긴 네놈하고 어울리긴 하구나.”
“청룡무사같이 피곤한 걸 왜 하려고 그러냐? 그냥 나랑 무당산이나 가자니까.”
장거운의 대답에 노승과 노도장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러나 장거운은 이미 결심이 확고하다는 듯이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러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고 노승이 정색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말리지 않으마. 단, 네가 명심할 것이 있다.”
“예.”
장거운이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자 노승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무슨 연유인지 너는 아직 네 몸속의 내기를 외부로 뿜을 수가 없다. 그래서 네가 익히고 있는 무공 중에 쓸 수 있는 것은 십이금룡수와 반선수 등의 금나수법과 백타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고자 한다. 거운아, 백타를 행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예, 검전무아(劍前無我)입니다.”
“그래, 검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면 족하다.”
장거운의 대답에 노승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식하게 백타 같은 걸 애한테 가르쳤냐? 거운아, 다 필요 없고, 태극권의 원리만 생각해라! 태극권의 원리가 무엇이더냐?”
노도장이 노승을 힐긋 쳐다보며 말을 뱉고 나서 정색을 하고는 장거운에게 물었다.
“이유제강(以柔制剛)입니다.”
“그래, 그것만 명심하면 충분할 것이다.”
노도장 역시 장거운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장거운과 노도장의 대화가 끝나자 노승이 다시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장거운에게 말을 건넸다.
“흠,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세상에는 세존의 말씀 말고도 자연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너도 산중의 제왕이라는 호랑이라는 놈은 알지?”
“예, 며칠 전에도 나무하러 갔다가 봤어요.”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노도장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헉! 그래서 다치진 않았냐?”
“아뇨, 한참 째려보더니 그냥 가던데요.”
“젠장, 호랑이 새끼가 비겁하네.”
“예?”
노도장의 중얼거림에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노승은 노도장을 한 번 째려보고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다시 말을 건넸다.
“아니다. 암튼 그 호랑이란 놈은 제 놈이 살기 위해선 토끼나 노루와 같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바로 그 호랑이란 놈과 토끼와 노루의 운명처럼 강호 무사들의 운명도 그러하다는 말이지.”
“헛! 그럼 저도 무사가 되면 다른 사람들 막 잡아먹어야 해요?”
노승의 말에 장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놈이!”
“헤헤, 농담이에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말씀은 강호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그런 말이잖아요?”
노승이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치자, 장거운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며 말을 했다.
“그래, 바로 그 말이다. 강호무림은 무엇보다도 힘이 우선시되고, 또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다. 내가 이제까지는 타인을 상하게 할까 봐 너에게 절대로 남들과 다투지 말라고 했지만, 기왕에 무사가 되기로 하였으니 꼭 남들과 다투어야 한다면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느니라.”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
장거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출도를 앞둔 손자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담은 자애로운 눈빛이 흘렀다. 두 조손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노도장 역시 따뜻한 미소로 장거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두 분 할아버지, 저 잘할게요.”
장거운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대답을 했다. 어느새 장거운의 얼굴에도 장난기 가득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2장 무림맹(武林盟)
무림맹의 외당 위사인 곽호는 진시에 근무 교대를 하자마자 진화로를 거슬러 맹의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는 봉두난발의 괴인을 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또다시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봉두난발의 괴인은 시전에서 푸줏간을 하는 장육이라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 원통함을 풀어 달라며 나흘째 무림맹의 정문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 진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세 시진 동안 통곡을 하다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이곳 항주에서만 이십 년 넘게 근무하여 푸줏간을 하는 장육과도 제법 안면이 있는 곽호로서는 좋은 말로 그를 달래 보려고 했지만, 장육은 막무가내로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소리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달래도 안 되고, 으름장을 놓아 봐도 장육은 요지부동이니 곽호로서는 골치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때론 안면 몰수하고 강제로 제압하여 내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구경을 한답시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눈이 문제였다. 가뜩이나 구경을 하면서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이 억울한 사람을 본체만체한다는 둥 말이 많은데, 장육을 강제로 내쳤다간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곽호로서는 이래저래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육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곽호를 발견하자 황급히 달려와서는 발 앞에 넙죽 엎드리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대협! 흑흑흑! 제발 이놈의 원통함을 풀어 주시오!”
“이보게, 장육!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이렇게 찾아와서 졸라 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은가? 그만하고 일어서게!”
곽호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네며 장육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장육은 곽호의 팔을 뿌리치고는 다시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이놈 나이 마흔에 겨우겨우 얻은 여자입니다. 이놈의 핏줄을 가진 여자이기도 하고요. 흑흑흑!”
“허! 이 사람, 자네가 여기서 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리 관아에 가 보게!”
“관아요? 추관 나리는 이놈이 아무리 하소연해도 쳐다보지도 않습디다. 오히려 관아에서 행패를 부린다고 장만 열 대나 맞고 나왔습죠.”
곽호의 말에 장육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정말 답답한 사람이구먼! 관아에서도 안 되는 일을 여기서 이런다고 해결이 되는가?”
“대협! 그러지 마시고 제발…… 흑흑흑!”
곽호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 보지만, 장육은 막무가내로 다시 통곡을 했다.
“무슨 일인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곽호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청수한 인상을 지닌 초로의 중년인이었다. 곽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말끔한 용모에 희끗희끗한 은발, 옅은 갈색의 눈썹에 눈매가 약간은 처진 듯한 큰 눈은 분명히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곽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자색 장삼에 수놓아진 하얀 매화들이 그의 눈동자로 파고들었다.
“흡! 충!”
곽호가 헛바람을 삼키며 오른손을 가슴으로 당기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곽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무림맹의 맹주인 매화검군 화중혁이었다. 그의 옆에는 내당 당주인 냉심비도 제갈후가 차가운 눈초리로 곽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중혁이 가볍게 손을 젓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고 있는가?”
“저 그, 그게…….”
“아이고, 대협! 제발 이놈의 말 좀 들어주시오!”
곽호가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엎드려 있던 장육이 고함을 치며 화중혁에게 달려들었다.
창!
“갈! 물러서라!”
화중혁의 뒤쪽에 시립하고 있던 맹주의 호위대주인 전광흑검 철위가 호통을 치며 뇌전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장육을 막아섰다. 철위는 어느새 장육의 완맥을 틀어쥔 채 검을 그의 목에 대고 있었다.
“됐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청룡고를 울리면 되지 않는가?”
화중혁이 손을 저어 철위를 만류하고는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장육을 대신하여 곽호에게 물음을 건넸다.
“그게 이미 청룡고를 울렸는데 부패(否牌)를 받았다고 합니다.”
곽호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무림인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은 무림맹과 각 지부에 설치된 청룡고를 울려 청원을 하게 되는데, 청원이 접수되면 청룡당에서는 개입 여부를 결정하여 청원을 한 이에게 그 사실을 작은 목패로서 알려 주게 된다.
청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면, 가패(可牌)를 주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부패(否牌)를 주는 것이다. 일단 부패가 발급되면 더 이상 그 사안을 가지고 청원을 할 수 없는 것이 기존의 관례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냉심비도 제갈후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네놈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부패를 받고서도 이런 소동을 부리도록 놔두고 있단 말이냐?”
화중혁이 제갈후를 제지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하게! 사연이 있겠지. 이 사람의 일을 자네가 직접 조사해서 보고를 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제갈후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을 하자, 화중혁은 넋을 놓고 있는 장육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정문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제갈후와 호위대들이 따랐다.
잠시 후 화중혁을 비롯한 맹주 일행이 사라지자 곽호는 쓰러져 있는 장육을 일으켜 세웠다. 장육은 철위가 손을 거두자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곽호는 자신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뒤에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육에게 말을 건넸다.
“장육! 어여 정신 차리게, 맹주님이 다시 알아보겠다고 하셨으니 기별이 갈 것이야.”
“히익! 저, 저분이 맹주님이셨단 말입니까?”
곽호의 말에 장육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래, 이 사람아! 암튼 자넨 운 좋은 줄 알아! 어서 집에 가 있게.”
“예, 대협, 제발 부탁합니다요.”
“아, 그 대협 소리 좀 하지 말고! 어여 가!”
장육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네자 곽호는 짜증이 잔뜩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백정의 신분인 장육은 무림인이라면 아무에게나 대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무림맹의 일개 위사에 지나지 않는 곽호로서는 참으로 듣기에 쑥스러운 소리였던 것이다.
* * *
“오랜만에 뵙네요. 사부님께서 맹주님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하하하! 사적인 자리이니 그냥 사숙이라고 하여라. 아무튼 먼 길을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구나.”
매화검군 화중혁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건넸다. 그의 맞은편에는 일남 일녀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화중혁과 마주한 일남 일녀는 그의 사문인 화산파의 제자들로 청풍일검 영호군과 매화옥녀 냉가혜였다. 영호군은 짙은 검미에 우뚝 솟은 콧날을 가진 전형적인 미남형의 얼굴을 가졌고, 그 옆에 앉은 냉가혜 역시 투명하게 느껴질 만큼 새하얀 피부에 호수처럼 크고 맑은 눈과 도톰한 입술이 도도한 그녀의 표정과 묘하게 어우러져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화중혁은 화산에 있는 자신의 사형이자 냉가혜의 사부인 백매검협 기형두를 떠올리며 냉가혜에게 말을 건넸다.
“사형은 여전히 잘 계시느냐?”
“예, 사부님은 잘 계셔요.”
“하긴 워낙에 낙천적인 분이니……. 그래, 사문에 별일은 없었느냐?”
화중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자, 냉가혜 대신 영호군이 끼어들어 말을 받았다.
“예, 요즘 같은 세상에 별일이 있겠습니까. 굳이 있다면야 사매를 사모하는 청년들이 더 늘어난 것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말을 하는 영호군은 잔뜩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매인 냉가혜와 같이 무림맹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더없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영호군의 말에 화중혁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냉가혜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혜아는 갈수록 예뻐지는 것 같구나.”
“…….”
화중혁의 말에 냉가혜는 묵묵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만 있었다.
영호군이 다시 너스레를 떨며 나섰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사숙,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림맹에서 사매에게 찝쩍대는 날파리들은 제가 책임지고 정리하겠습니다. 하하하!”
“사형, 그만하세요.”
냉가혜가 흘깃 영호군을 쳐다보며 차가운 표정으로 약간은 무뚝뚝하게 말을 뱉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화중혁이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어쨌든 백 년 이래 화산 최고의 후지기수라고 불리는 혜아가 이렇게 무림맹에 와 주니 내가 든든해지는구나. 혜아도 군아가 있는 백호당으로 갈 것이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뇨, 전 청룡당에 지원을 할까 해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영호군은 냉가혜가 뱉은 뜻밖의 말에 놀라 황급히 냉가혜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청룡당이라니?”
“…….”
냉가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화중혁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냉가혜의 말에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에 이채를 띠며 다시 물었다.
“흠, 왜 하필 힘든 청룡당에 가려고 하는 것이냐?”
“특별히 이유는 없어요. 단지 사부님의 뒤를 이어 청룡당에 가고 싶어요.”
“사매가 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청룡당에 가면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밤낮 주야로 격무에 시달려야 하고, 그러니 개인 수련은 아예 꿈도 못 꿔!”
영호군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로서는 사매인 냉가혜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한때는 청룡당에 들어가 청룡무사가 되는 것이 모든 무림 후기지수들의 꿈인 적도 있었다. 청룡무사란 이름이 최고의 실력과 엄격한 도덕성을 갖춘 자들을 대변하는 말로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청룡무사의 역할이 점점 확대되면서 지나친 격무에 시달리게 되고 개인적인 수련 시간이 전혀 보장이 안 되니, 무공이 떨어졌던 백호당이나 내당의 일반 무사들보다 오히려 실력이 뒤처지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결국 명예만 있고 실리는 전혀 없는 청룡당은 후기지수들이 기피하는 곳으로 점점 바뀌게 된 것이다.
영호군의 말에 냉가혜는 눈빛을 빛내며 차분하게 대답을 이었다.
“예, 그렇겠지요. 그래도 전 사부님처럼 청룡당에 들어가고 싶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화중혁이 진중한 표정으로 달래듯이 말을 걸었다.
“혜아,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청룡당은 좀 그렇구나. 그냥 백호당에 들어가거라. 그곳엔 각파의 용봉지재들이 모여 있으니 그들과 좋은 교분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전 교분이니 교류니 하는 것 따윈 관심 없어요. 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생각이에요.”
눈을 살짝 아래로 깔며 대답을 하는 냉가혜의 표정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러한 표정을 보이면 웬만해선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영호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잔뜩 인상을 썼다. 무림맹에서 냉가혜와 즐겁게 지내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청룡무사가 되면 한 달에 한 번 보기조차 힘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 진짜, 사매,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니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하세요.”
답답한 마음에 영호군은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다시 말을 건네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냉가혜의 냉랭한 대꾸뿐이었다.
밖에서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맹주의 호위대주인 철위가 들어와 기별을 고했다.
“어흠, 맹주님! 내당 당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가? 들어오라고 하게. 일단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그만 물러들 가서 쉬도록 하여라.”
“예.”
“그럼 사숙,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냉가혜와 영호군이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는 맹주전을 나가자 내당 당주인 냉심비도 제갈후가 들어섰다.
“어서 오게.”
“담소를 나누고 계신 걸 제가 방해를 했군요.”
제갈후가 미소를 띠며 인사말을 건네자 화중혁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고는 자리를 권했다.
“아닐세, 이리로 앉게나.”
제갈후가 자리에 앉자 화중혁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 무슨 일인가?”
“아침에 조사해 보라고 하신 건 때문에 왔습니다.”
“아, 그 일 때문인가? 이야기해 보게.”
“예, 그자는 시전에서 푸줏간 일을 하는 장육이라는 자인데, 그자의 처가 얼마 전에 청홍교에서 투신자살을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투신자살이라……. 그자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단 것일 테고…….”
제갈후의 설명이 끝나자 화중혁은 뭔가 생각을 해 보는 듯 자신의 턱을 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건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천민인 백정의 아낙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투신자살을 하는 경우는 제법 흔한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육이라는 자가 그토록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화중혁이 다시 물었다.
“그자가 그렇게 주장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자는 자신의 처가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데다 생활에 곤란한 문제도 없어 스스로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흠, 그자의 말도 일리가 있군. 모성애가 강한 임부가 자살을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야 그렇습니다만…….”
화중혁의 물음에 제갈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화중혁이나 제갈후 두 사람 모두 장육이 처의 자살을 믿지 못하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조차도 새끼를 가진 경우에는 제 몸을 아끼는데, 하물며 아이를 잉태한 임부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살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화중혁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검장(檢狀, 시체를 검시하고 기록한 문서)은 살펴보았는가?”
“예, 검험관(檢驗官, 시체를 검시하는 관리)이 작성한 검장에는 투수(投水, 타인에 의해 물에 빠짐)로 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긴 백정의 아낙이니 제대로 검시를 하지도 않고 그저 형식적으로 기록했겠지.”
“그야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화중혁의 중얼거림에 제갈후는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화중혁의 입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관 당주는 검장의 기록을 보고 부패를 주었단 말인가?”
“그보다 관 당주가 부패를 결정한 이유는, 설령 죽은 아낙이 타살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무림인이 개입된 정황이 전혀 없으므로 청룡당이 개입할 수 없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군. 일이란 게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가지고 해야지. 아이를 가진 임부가 자살하여 죽었다는데 가족들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일세. 그냥 청원을 받아들여 보위사를 시켜 조사하는 척만 하였어도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청룡당주 천성검 관종호의 처사에 화중혁은 약간의 노기마저 드러내고 답답해하고 있었다.
관종호는 과거 화중혁이 백호당을 맡고 있던 시절부터 그와 대립하는 일이 많았다. 유연한 태도로 실리를 추구하는 화중혁과는 달리 관종호는 융통성이 없는 데다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면도 강해 두 사람의 의견은 늘 극명하게 갈리곤 했던 것이다.
노기를 드러내고 있는 화중혁의 표정을 살피던 제갈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것이 요즘 관 당주께서 달리 신경을 쓰는 데가 많으셔서 사려 깊게 판단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달리 신경을 쓰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 그것이…… 요즘 관 당주께서 하가장에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화중혁이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하가장? 북경 하가상단의 항주지부인 그곳 말인가?”
“그렇습니다. 요즘 종남에서 운영하는 서안의 천하표국이 곤란을 많이 겪고 있다는 풍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 뻣뻣한 인간이 천하표국을 위해서 하가상단에 줄이라도 대려고 한다는 말인가?”
“그야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갈후가 묘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이제는 관 당주의 거취를 결정해야만 하겠군.”
화중혁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갈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눈엣가시 같았던 관종호를 쫓아낼 명분을 찾고 있던 그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도덕적으로 엄정한 중립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청룡당주가 특정 세력과 친분을 가진다는 것은 충분히 비난받을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관종호의 성격상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가장과의 관계를 추궁한다면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청룡당주를 사임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화중혁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화중혁이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눈치 챈 제갈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생각해 두신 후임자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청룡당 내부에서 후임자를 물색해야 하지 않겠나?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사람을 보내 장씨라는 그자를 달래 보게.”
“예, 알겠습니다.”
화중혁이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화제를 바꿔서 장씨 사건의 처리를 지시하자, 제갈후는 고개를 조아리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화중혁은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에게도 완전히 흉금을 털어놓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제갈후였다. 더 이상 호기심을 보였다간, 얻는 것보단 잃는 것이 더 많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