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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무사 3
1화



제1장 입춘지절(立春之節)


“음…… 이것이 전부 다인가?”
남궁천호는 항주부의 추관으로 있는 신규진이 건네준 서찰을 받아 들면서 물었다.
신규진의 대답이 이어졌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 항주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지난 넉 달 동안 모두 열일곱 건이 발생했고, 그중에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무림인의 소행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열두 건인데, 그중 여덟 건은 청룡당의 협조로 범인을 색출했고, 나머지 네 건은 현재 조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궁천호는 서찰을 펼쳐 찬찬히 읽어 본 뒤 다탁 위에 내려놓았다. 서찰에는 최근 넉 달 동안 항주부 일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관한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남궁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 당에 접수된 열두 건 외에 다섯 건은 모두 치정과 보복에 의한 사건으로 곧바로 현장에서 범인들이 밝혀진 사건들이군.”
“그렇습니다.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저지른 사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단순 살인 사건이다 보니 범인의 윤곽이 바로 드러나는 법이라…….”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미해결 사건은 본 당에서 조사하고 있는 이 네 사건밖에 없는가?”
“예, 서찰에 적힌 사건들 외에는 저희 항주부에 접수된 살인 사건은 없습니다.”
신규진의 대답에 남궁천호는 뭔가 미진한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악우진이 말을 건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닐세. 그냥 좀 알아볼 것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조사 중인 사건들을 모두 일대에서 맡고 있군.”
“예. 공교롭게도 그렇게 되는군요.”
대답을 하는 악우진의 어투는 무덤덤했지만, 그의 눈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항주부에서 협조를 요청한 열두 건의 사건을 모용현의 청룡일대와 그의 청룡이대가 똑같이 여섯 개씩 맡아서 조사를 했지만, 그가 맡고 있는 청룡이대는 사건을 모두 해결한 반면에 모용현의 청룡일대는 두 건만을 해결했을 뿐 나머지 네 건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지휘 능력에 있어서 이대주인 악우진은 일대주인 모용현을 훨씬 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대주인 악우진이 선배인 모용현과의 경쟁에서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천호가 다시 물었다.
“지금 일대 전원이 마가장의 일로 상산(象山)에 갔지?”
“예, 어제 오후에 모용 대주와 함께 전원이 상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흠…… 일대가 복귀를 하려면 시일이 좀 걸리겠군.”
“아무래도 적해방의 개입이 의심되는 일인지라 그럴 것 같습니다.”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강과 강소성 일대의 해안을 무대로 암약하는 해적 집단인 적해방은 그 폐해가 너무 심하여 청룡당으로서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암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모용현은 얼마 전 상산에서 벌어진 마가장의 피습 사건에 적해방이 개입된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맡고 있는 사건들을 중단하고 일대의 무사들과 함께 상산으로 출동한 상태였다.
잠시 생각을 하던 남궁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일단 일대에서 조사하던 네 사건들을 모두 자네의 이대가 맡도록 하게.”
“그게, 처음부터 일대가 맡아서 조사를 하던 사건들이라서 처음부터 다시 재조사를 하려면 일대가 복귀할 때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묻고 있는 악우진은 약간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모용현의 일대가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건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맡은 사건도 아닌데 괜스레 건드렸다가 만에 하나라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쓸데없이 자신의 이름에 먹칠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궁천호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용 대주가 복귀할 때까지 계속 조사를 중단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해야 할 일이니 자네 말대로 처음부터 철저하게 조사를 시작하게. 그리고 중간에 모용 대주가 복귀를 한다면 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악우진을 본 남궁천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신규진에게 말을 건넸다.
“신 추관도 그 사건들에 대한 자료들 가운데 혹시 단서가 될 부분이 있는지 다시 찾아보고 있다면 악 대주에게 전해 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저도 돌아가서 세밀하게 다시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수고 좀 해 주게.”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인데 수고랄 게 있습니까?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신규진이 인사를 건네고 물러가자 남궁천호는 악우진을 보며 물었다.
“거운이는 요즘 어떻던가?”
“아직까지는 다른 당의 무사들이나 위사들과는 조금 소원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저희 당 내에서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건 해결에도 적극적이고 말입니다. 저희들이 해결한 여섯 건의 사건에서도 장거운의 활약이 컸습니다.”
악우진의 대답에 남궁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람들이 장거운을 소광룡이라 부르며 경원시하는데다가 감찰당의 내사가 흐지부지하게 끝난 일을 두고 말들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장거운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당부의 말을 건넸다.
“다행이군. 모쪼록 자네가 잘 살펴 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주님, 백리현은 저대로 놓아두실 것입니까?”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백리현이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달리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부대주인 사공한이 그를 통제하는 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사공한이?”
“예,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사공한과 백리현은 과거에 악연이 있습니다.”
“악연이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묻고 있는 남궁천호의 표정을 보며 악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게, 오 년 전에 사공한은 오대검파 비무대회에 사문인 점창의 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 년 전이면, 사공한이 잠시 사문에 다녀온다고 휴직을 하였던 그때 말이군.”
“예, 그때 오대검파 간에 비무대회가 있어 사공한이 참가를 한 것입니다.”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지고 있었다.
남궁천호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럼, 그 비무대회에서 사공한이 백리현을 만났단 말인가?”
“예. 그런 모양입니다. 당시 사공한은 백리현에게 처참하게 패배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어쩐지 그 후로 사공한이 변한 것 같더라니…….”
악우진의 말을 들은 남궁천호는 오 년 전 사문에 다녀온 후 의기소침하게 지내던 사공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악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청룡무사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패배를 당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 일을 두고 백리현과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게, 문제라기보다는 백리현이 사공한을 얕보는지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러한 백리현의 태도가 이상하여 사공한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그는 오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래도 백리현을 대하기가 껄끄럽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남궁천호가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사공한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또한 스스로 극복을 해야 할 문제인 것이야. 자네나 나나 할 것 없이 무인이라면 그러한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은가? 비록 사공한이 평소엔 실실거리고 실없어 보이긴 해도 무인으로서는 누구보다도 근성이 있는 친구이니 스스로 잘 이겨 낼 수 있을 걸세.”
“저도 그렇게 말은 했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리는 악우진에게 남궁천호의 물음이 이어졌다.
“자네는 어떤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남궁천호가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악우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을 했다.
“자네가 백리현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은 없냐는 말일세.”
“저야, 당연히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백리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저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백리현이 백호당주인 백리문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음, 형제간에 자주 어울리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남궁천호는 무덤덤하게 말을 했지만 악우진은 생각이 다른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주 어울리는 것으로 봐서는 형인 백호당주와 반목을 하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백호당이 아닌 청룡당에 들어왔냐는 것이지요.”
“그야…… 자네도 알다시피 백리세가가 욕심이 많지 않은가? 청성과 밀착하면서부터 부쩍 욕심이 많아지지 않았나?”
“흥, 오대세가에 들어온 지 이제 오십 년도 채 되지 않은 백리가가 청룡과 백호 이대 당을 장악하여 오대세가의 수장으로 올라서려는 망상이라도 하는 모양이군요.”
악우진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뱉어 냈다.
백 년 전부터 청성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하면서 부쩍 힘이 강성해진 백리세가는 오십 년 전부터는 악우진의 가문인 산동악가를 제치고 오대세가에 들었다. 게다가 요즘은 더욱더 강성해지고 있으니, 산동악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악우진으로서는 백리세가에 강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보기엔 망상이 아닐 수도 있겠지. 백리현의 능력이라면 청룡당을 넘보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당주님이 계신데 놈들이 감히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야말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남궁천호는 자신을 거론하며 흥분하고 있는 악우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마도 산동악가의 기대주인 악우진은 현재 오대세가의 수장인 남궁세가가 백리세가와 대립각을 세우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의 가문인 남궁세가에서도 최근 들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백리세가를 주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악우진의 말대로 현재 오대세가가 무림맹의 오대 당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리세가가 백호와 청룡의 두 당을 장악한다면 오대세가의 수장이 백리세가로 바뀔 수도 있는 문제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기존의 전통적인 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가들의 세력 다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남궁천호는 팽창하는 백리세가의 행보나 재기하려는 산동악가의 움직임 따위에 휩쓸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백리현보다는 어느 정도 신임을 하고 있는 악우진이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남궁천호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히려 나보다는 자네가 그들로서는 견제의 대상이 되겠지. 자네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네. 아무튼 현재로서는 그 아이가 청룡무사인 것이 분명하니 다른 청룡당의 무사들과 똑같이 대해 주게.”
“알겠습니다.”
악우진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부끄럽기는 했지만 남궁천호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여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담백한 성격 탓에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궁천호가 은연중에 자신을 밀어주는 듯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그 사건들을 조사할 때, 혹시 죽임을 당한 자들과 하가장이 관련이 있는지도 한번 살펴봐 주게.”
“하가장과 말입니까?”
“그래, 사실 자네에게 그 사건들을 맡긴 진짜 이유는 그것 때문일세. 내 생각엔 하가장이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네. 그들이 오죽색마와 분명히 연관이 있다면 그놈을 불러들였을 때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혹시 오죽색마가 살수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악우진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을 하자 남궁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 오죽으로 만든 비도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백가장의 사건에서는 놈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놈은 단독으로 움직이는 살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알겠습니다. 피해자들 간이나 하가장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하겠습니다.”
악우진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남궁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신규진이 건넨 서찰을 들어 찬찬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하가장을 옭아맬 확실한 단서가 없었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살펴봐야 했다.

* * *

사시가 끝나고 오시가 시작될 무렵 사공한은 청룡고의 뒤쪽에 자리한 무림맹의 담벼락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느새 훌쩍 다가온 봄이 세상을 향해 뿌려 대는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봄의 은혜를 만끽하는 여유로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장거운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공한은 불퉁한 표정으로 장거운에게 말을 건넸다.
“웬일이냐? 모처럼 쉬는 날인데, 잠이나 푹 자지 않고?”
“예,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도통 잠이 안 오네요.”
말을 하면서도 장거운은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공한은 장거운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호,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맴이 뒤숭숭하냐?”
“에이, 제가 무슨 이팔청춘인가요? 봄 타령이나 하고 있게…….”
“글쎄다. 내 눈에는 이팔청춘으로 보이는데…….”
말을 하는 사공한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비록 손사래까지 치며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장거운이 찾는 사람은 뻔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청룡고에서 당직을 서고 있어야 할 냉가혜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거운이 곧바로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나 참, 이팔청춘은 무슨…… 근데 오늘 가혜가 당직 아니에요?”
“원래는 그랬지.”
“그런데요?”
“지존망대하신 백리 공께서 정중히 부탁하시기를, 가혜와 함께 갈 곳이 있으니 당직을 바꾸어 달라 하시더구나.”
장거운의 물음에 사공한은 입가를 씰룩이며 대꾸를 하고 있었다.
‘지존망대하신 백리 공’이란 말은 사공한이 평소에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백리현을 비꼬아 부르는 말이었다. 물론 장거운도 거드름을 피우는 백리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가 유난히 냉가혜와 친한 척한다는 점이었다.
장거운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디 간다고 하던데요?”
“그야 나도 모르지…… 지존망대하신 백리 공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래서 가혜, 그 계집애가 얼씨구나 좋다고 하면서 부대주님이랑 당직까지 바꾸고는 쫄래쫄래 그 인간을 따라갔단 말이에요?”
“왜 아니겠느냐? 때는 시나브로 방심을 흔드는 춘삼월이 코앞인데, 백리 공 같은 미남자가 다가와서는 ‘소저, 나와 같이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서호 변으로 바람을 쐬러 가지 않겠소?’ 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
장거운을 놀리려는 심산인지 말을 하는 사공한의 입가엔 치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공한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장거운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뱉었다.
“칫, 얼굴은 분칠을 한 것처럼 허여멀건 하니 생긴데다가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인간이 뭐가 좋다구……. 안 그래요? 원래 분칠한 것들은 믿으면 안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흠, 그런 말이 있었나? 어쨌든 그 말이랑 지존망대하신 백리 공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혹시 너 가혜 좋아하냐?”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하던 사공한이 갑자기 실눈을 뜨며 물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그런 얼음귀신을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요?”
“뭐, 아니면 말고. 네가 혹시나 맘이 있다면 내가 특별한 비책을 하나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얼토당토않다는 듯이 펄쩍 뛰고 손사래를 치며 부인을 하는 장거운의 모습에 사공한은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공한의 말을 들은 장거운은 눈에 이채를 띤 채 저도 모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예? 비책이라니요?”
“가혜한테 관심도 없다며?”
사공한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자 장거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넸다.
“그야 뭐, 제가 가혜한테 관심은 없는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대주님이 특별한 비책이 있다고 하니 신기해서 그러죠. 도대체 그 비책이란 게 뭔데요?”
“맨 입에 가르쳐 달라고?”
“뭐, 들어 보고 제법 쓸 만한 생각이라면 제가 나중에 진화루에 가서 거하게 한잔 살게요.”
아닌 척하면서 말을 뱉는 장거운의 얼굴에는 은근슬쩍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사공한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짐짓 정색을 하고는 진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흠, 정히 너의 마음이 그렇다면야. 내가 또 어찌 간곡한 너의 청을 거절하겠느냐?”
“그렇다고 간곡할 것까지는 아닌데…… 암튼 그 비책이란 게 뭔데요?”
장거운은 사공한의 진중한 말투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음 지으며 다시 재촉했다.
“그게 뭐냐면 말이다. 어! 저게 누구야, 신 추관이네.”
“예? 정말 그러네요. 무슨 일이 있나 본데요.”
비책에 대해서 말을 하려던 사공한은 청룡당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신규진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말을 뱉었다.
장거운도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신규진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주부 내에 사건이 생기면 청룡당으로 전서나 전령이 오기는 했지만, 추관인 신규진이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신규진이 다가오자 사공한이 먼저 손을 들어 보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어! 신 추관이 어쩐 일이신가?”
“아이고, 사공 부대주님이 직접 청룡고에 나와 계십니까?”
신규진이 읍을 하며 인사말을 건네자 사공한은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꾸를 했다.
“뭐, 내가 당직이니 나와 있어야지 어쩌겠소?”
“아니, 부대주이신대도 당직을 서십니까?”
“그러게 말이오. 이건 뭐, 직책만 부대주이지 아직도 진무사로 승급하지 못하고 선무사에 머물러 있으니 매번 당직을 서야 하는 처지라우.”
“저런,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참, 장 무사님도 안녕하시지요?”
사공한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네던 신규진은 사공한의 옆에 멀뚱하게 서 있는 장거운을 보고는 살갑게 대하던 예전과는 달리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한 신규진의 태도에 나름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장거운도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신규진에게 말을 건넸다.
“예, 저야 잘 지내지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지난번에 도지휘사사에서 뵈었을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그게 제가 나설 만한 자리가 아닌지라…….”
“아닙니다. 그때는 상황이 그랬지 않았습니까? 개의치 마십시오.”
신규진이 자신을 보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장거운은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신규진은 하가장에서 벌어졌던 살육에 대해 듣고 난 뒤부터는 저도 모르게 장거운을 보면 괜스레 오금이 저려 왔다. 그래서 그는 도지휘사사에서 백가장의 사건에 대해 조사를 받으러 온 장거운을 만났을 때 제대로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었다. 은연중에 자신을 지켜보는 장수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도 있지만, 왠지 장거운에게 다가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장거운과 신규진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사공한이 얼른 나서며 입을 열었다.
“참, 그때 그 관군 놈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들은 바가 있소이까?”
“그게…… 제가 듣기로는 주모자인 위지웅은 삭탈관직을 당한 채 멀리 광서로 귀양을 갔고, 백가장의 습격에 참가한 나머지 자들은 모두 가벼운 징계만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규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대답을 하자 듣고 있던 사공한이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엥! 그게 뭔 소리요? 한 가문을 멸문시킨 놈들을 능지처참을 하지 않고 귀양에다 가벼운 징계에 그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도지휘사사에서는 위지웅은 그간의 공훈을 상쇄하여 참형을 면제하기로 하고, 나머지 부하들은 군령태산(軍令泰山, 군의 명령은 태산과 같이 높고 존엄하다)인지라, 단지 상관의 명을 따른 것을 두고 가혹한 형벌을 내릴 수는 없다고 한 모양입니다.”
“허참!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냔 말이오. 아무리 군령에 따랐다고는 하지만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놈들이지 않소? 그런 놈들을 어찌 용서한다는 말이오!”
이어진 신규진의 설명에 사공한이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
신규진으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는지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머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거운이 나서며 사공한에게 말을 건넸다.
“그만하세요. 신 추관님께 역정을 낼 일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놈들이 수작을 부릴 거라고는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일 아닙니까?”
“물론 놈들이 꼼수를 부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니냐!”
“저들이 황명을 앞세운 권력을 쥐고 있으니 분통이 터져도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사필귀정이라고 했으니, 언젠간 제 손으로 놈들의 추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사공한에게 달래듯이 말을 건네던 장거운은 차가운 눈빛을 하가장이 있는 남쪽으로 고정한 채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듯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신규진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장거운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에 그가 왜 소광룡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떠올리고는 심장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껴야 했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고 장거운이 신규진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참! 신 추관님, 혹시 그때 관도에서 관군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던 그 장수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장거운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신규진이 조심스럽게 반문을 했다.
“혹시, 그때 악 대주님과 싸우다가 나중에 장 무사님에게 어깨를 다쳤던 그자 말입니까?”
“예, 혹시 그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습니까?”
“그게,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그자의 이름은 추동연으로 직급이 부천호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징계를 받아서 흑호군에서는 물러나고 지금은 도지휘사사의 훈련 교두로 있는 모양입니다.”
신규진의 대답에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훈련 교두라, 확실히 그자의 무공만큼은 교두를 맡기기에 충분하지요. 혹시 그자도 위지웅이나 적우기와 같이 해남파 출신입니까?”
“글쎄요, 그자의 사문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지웅의 오른팔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징계만 받은 것으로 봐서는 그자의 출신이 동창이나 금의위일지 모른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공한이 침중한 기색으로 신규진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나도 그날 그자가 악 대주님이나 너와 싸우는 것을 봤는데 확실히 낯선 검공이었어. 특히 해남파의 검공은 절대로 아니야.”
“동창이나 금의위라면, 그자가 황궁에 있던 자라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그나마 관부의 무리들 가운데 고강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들은 그자들이 대부분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렇군요…… 그런 자를 수족으로 부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하가장의 힘이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군요.”
장거운이 어두운 안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사공한도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사실, 하가장의 힘이라면 그보다 더한 자를 부릴 수도 있지. 헌데, 갑자기 그자는 왜 묻는 것이냐?”
“그게…… 에이, 아니에요. 그냥 그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요.”
뭔가 말을 꺼내던 장거운은 신규진을 흘깃 쳐다보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추관인 신규진의 앞에서 그의 직속상관인 제형안찰사 하진문과 그의 집안인 하가장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는 것이 좀 꺼림칙하였던 것이다.
말을 돌린 장거운은 곧바로 사공한에게 전음을 건넸다.
“이틀 전에 그자가 하진문과 같이 하가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뭐야, 너 아직까지도 하가장을 살피고 있는 게냐?”

사공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전음을 보내며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백가장을 멸문시킨 배후가 하가장이라는 사실은 청룡무사라면 다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딱히 하가장의 죄상을 밝혀낼 방법이 없는지라 청룡당 내에서는 하가장의 문제는 거의 포기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장거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여태까지도 하가장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장거운의 전음이 이어졌다.
“당연하죠. 놈들에게 죄가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찌 감시를 하지 않겠어요? 그동안은 우리 청룡당의 눈 때문에 참고 있었겠지만, 곧 놈들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내가 당주님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너도 참 어지간하다.”

전음을 건넨 사공한은 한일자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장거운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규진을 향해 돌아섰다.
사공한은 자신과 장거운이 전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신규진을 보고는 시익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직접 여기까지 온 것이오?”
“아, 예. 다른 것이 아니라. 당주님이 좀 보자고 하셔서…….”
“당주님이 말이오?”
“예. 그간 일어난 살인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래요? 흠, 무슨 일이지…….”
사공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할 때 장거운은 고개를 돌려 앞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급하게 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관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항주부의 전령인 것 같았다.
장거운이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항주부의 전령 같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요?”
신규진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눈으로는 황급히 물러서는 행인들 사이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말은 볼 수 있었지만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새삼 장거운이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신규진이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자는 장거운의 말대로 항주부의 전령이었다. 청룡고 앞에 서 있는 신규진을 발견한 전령은 급하게 말에서 내려 읍을 하고 있었다.
신규진이 전령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가?”
“예. 조금 전에 서관촌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전언이 왔는데, 죽은 자의 신분 때문에 청룡당에 기별을 하려고 왔습니다.”
전령은 대답을 하며 서찰을 건넸다.
급히 서찰을 받아 든 신규진은 서찰을 읽고 나서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죽은 자의 신분 때문에 청룡무사 한 분은 저와 같이 가 주셔야 할 것 같소이다.”
“죽은 사람이 누군데 그러시오?”
“혹시 사공 부대주님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동진표국이라고 있었지 않습니까?”
“동진표국이라…… 아, 생각이 나는군. 아마, 지금은 금하표국으로 바뀌었지요?”
신규진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사공한이 오 년 전에 문을 닫았던 동진표국을 떠올리고는 반문하자 신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바로 그 동진표국의 국주였던 화양검 정운호 대협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저런! 그 정 국주가 살해당했단 말이오?”
신규진의 말에 사공한이 꽤나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비록 화양검 정운호가 동진표국을 금하표국에 넘긴 이후에 자신의 장원에서 칩거하면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도 그는 엄연히 맨손으로 동진표국을 항주의 삼대표국으로까지 키운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살해를 당했다는 소식은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공한보다 더 놀란 것은 장거운이었다. 그는 양충원이 떠나면서 남긴 서찰에 공우 형제의 부친인 공진의 죽음에 의문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 하가장과 금하표국을 살펴보라는 말이 적혀 있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금하표국에 합병된 동진표국은 공진이 표사로 몸을 담고 있던 곳이었던 만큼 정운호가 죽기 전에 자신이 만났다면 공진의 죽음에 대해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동안 하가장의 일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금하표국을 살펴보라는 양충원의 말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거운과 사공한이 각자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는 사이 다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 냉가혜와 백리현이 청룡고를 향해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장거운의 눈이 점점 실처럼 가늘어졌다.
잠시 후 장거운 등에게 다가온 백리현이 말에서 내리며 신규진에게 말을 건넸다.
“신 추관 아니시오?”
“아이고, 백리 무사님, 안녕하십니까?”
“하하, 저야 늘 잘 지내지요. 그래, 일전의 유하촌의 사건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이런,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백리 무사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백리현이 낭랑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네자 신규진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는 백리현이 유하촌의 사건을 거론하자 달포 전 유하촌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의 조언으로 범인을 잡은 사실이 생각났던 것이다.
백리현이 짐짓 겸양의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뭔 별말씀을, 나야 한 게 있소이까? 딱 보니 범인이 뻔히 보이기에 한마디 던진 것뿐인데 말이오. 하하하!”
“바로 그 한마디 때문에 범인을 잡았는데,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신규진은 백리현의 겸양이 지나치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스럽게 대답을 했다.
백리현이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신규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무슨 일로 다들 여기에 모여 계시는 것이오?”
“예, 안 그래도 사공 부대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었는데……. 동진표국의 국주였던 화양검 정운호 대협이 살해를 당했다는 전언이 있어서 지금 동진장이 있는 서관촌으로 청룡무사님들 가운데 한 분이 저와 같이 가 주셔야 하겠습니다.”
신규진의 말에 냉가혜가 눈에 이채를 띠며 입을 열었다.
“표국의 국주라면 제법 무공이 높을 텐데 그런 자가 살해를 당했다면 흉수가 무림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네요?”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청룡무사님들과 동행을 하려는 것입니다.”
“흠, 혜 매의 말대로 무림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군요. 마침 시간도 있고 하니 제가 같이 가지요.”
“아이고, 송학신룡이라 불리시는 백리 무사님이 같이 가 주신다면야 저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자신이 가겠다는 말에 신규진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반기자, 백리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펴며 다시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청룡무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인데, 감사할 게 무에 있겠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공 형, 혜 매와 함께 서관촌에 좀 다녀오겠소. 혹시나 대주님이 찾으시면 그리 전해 주시오.”
사공한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부대주인 자신의 지시를 받아야 할 백리현이 제 마음대로 결정을 내린 뒤 오히려 자신에게 통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공한은 여전히 백리현에게 움츠러드는 자신에게 짜증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고개를 돌리던 사공한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냉가혜를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가혜, 너도 가려고?”
“바늘 가는 데 실이 빠지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같이 가야 하지 않겠소?”
사공한의 물음에 냉가혜가 아니라 백리현이 싱글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러자 백리현의 뒤에 서 있던 냉가혜의 표정이 완전히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부대주인 사공한을 대하는 백리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이 찌푸려지던 참에 백리현이 또다시 제멋대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화가 난 냉가혜가 백리현에게 쏘아붙이려는 순간 장거운의 전음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이고, 누구는 실이라서 좋겠네!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시시덕거리고는 또 따라가냐?”
냉가혜가 고개를 홱 돌려 싸늘한 눈초리로 장거운을 째려보았다. 장거운은 삐딱하게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씰룩거리며 코끝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백리현이 냉가혜를 마치 제 여자라도 되는 듯이 대하자 잔뜩 심통이 난 것이다.
장거운을 째려보던 냉가혜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호기심이 생기네요. 같이 가 보죠.”
“냉 무사님까지 가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정말 바늘과 실처럼 잘 어울리십니다. 하하하!”
신규진의 말에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던 백리현이 장거운을 힐긋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어이, 장거운, 자네도 달리 할 일 없으면 같이 가는 게 어때?”
“아니, 장 무사님까지 말입니까?”
신규진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물론 그로서는 청룡무사들이 세 명씩이나 현장에 간다면 당연히 좋아할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장거운과 같이 가는 것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백리현의 제안에 장거운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규진이 전과 달리 자신을 어려워하는데다가 짜증나게 하는 백리현과 같이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공진의 죽음에 의문이 있다는 양충원의 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직접 동진장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을 하던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뱉었다.
“나도 딱히 할 일은 없으니 한번 같이 가 보죠. 갑시다!”
“혜 매의 말로는 자네가 보기보다 추리력이 있다고 하던데 기대되는군. 그럼 자네는 신 추관과 같이 말을 타고 오게.”
장거운에게 건넨 백리현의 말에 신규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로서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장거운과는 함께 말을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규진의 표정을 본 장거운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백리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뱉었다.
“아니면, 자네가 내 말을 타겠는가? 나는 혜 매와 같이 타고 가고 싶은데 말이야.”
“나는 원래가 말이 필요 없는 놈이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각자 말들 타고 가시죠!”
“뭐, 자네가 원한다면 그러든지…….”
장거운이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뱉자 백리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말에 올라 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부대주님, 갔다 올게요. 나중에 그 비책이란 거 가르쳐 주셔야 해요!”
백리현 등이 달려가는 모습을 째려보고 있던 장거운이 용형보를 펼쳐 일행의 뒤를 쫓아가면서 사공한에게 외치고 있었다.
백리현의 행동 때문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사공한은 갑작스런 장거운의 말에 다소 놀란 듯이 말을 더듬거리며 손을 들어 보였다.
“어? 어, 그, 그래…….”
장거운의 모습까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공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청룡고 뒤쪽의 담장으로 걸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쩝, 거운이 저놈, 진짜 가혜를 좋아하나 보네……. 불쌍한 놈. 하필이면 백리현, 저 싸가지 없는 놈의 새끼가 나타나 가지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