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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야! 멍충이!”
냉가혜가 청룡당 집무실의 다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장거운의 어깨를 흔들며 깨워 대고 있었다.
부스스한 얼굴로 잠을 깬 장거운이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어! 무슨 일이야?”
“으, 더러워! 그 침 좀 닦아!”
“어? 아 흠, 무슨 일로 그래?”
장거운이 옷소매로 입가를 쓰윽 문지르고는 짜증이 한껏 묻어나는 어투로 물었다.
“밖에 나가 봐! 묘령의 소저가 너 찾아왔어.”
“엉? 진짜? 누구?”
“어쭈,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장거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자 냉가혜가 버럭 고함을 쳤다.
“뵈기 싫으니까 빨리 나가!”
“어, 그, 그래.”
“어휴, 내가 저런 걸 살리자고…….”
대충 옷을 추스르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는 장거운을 쳐다보며 냉가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찰당의 금옥에 갇힌 장거운을 구해 보려고 사숙인 화중혁을 찾아갔다가 장거운을 좋아하는 속마음을 들킨 이후로, 여러모로 화중혁의 눈치를 보게 된 그녀였다.
특히 영호군은 그녀를 볼 때마다 잔소리를 심하게 해 대곤 했다. 덕분에 그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어젯밤에는 웬 허여멀건 하니 느끼하게 생긴 놈하고 저녁까지 같이 먹어 줘야 했다. 냉가혜는 그런 자신의 상황도 모르고 맹한 표정만 짓고 있는 장거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울컥 화가 치밀곤 했다.
장거운이 청룡각 밖으로 나가 보니 백연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그녀의 소식을 궁금해하던 장거운은 반색을 하며 말을 건넸다.
“어? 백 소저!”
“안녕하셨어요?”
“예, 잘 계셨죠? 몸은 다 나은 겁니까?”
“예, 이젠 괜찮아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는 백연화를 보며 장거운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흠, 당 당주님이 자기 입으로는 만날 돌팔이라고 하던데, 돌팔이 의원님이 제대로 치료는 했나 모르겠네요. 하하하!”
“호호호, 당 당주님이 그러셨어요? 아니에요. 당 당주님 덕분에 정말 깨끗하게 나은걸요.”
백연화는 이제는 제법 안정을 찾았는지 장거운의 농담에 환하게 웃으면서 대꾸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을 건네려던 장거운의 귀에 냉가혜의 냉랭한 전음이 파고들었다.
“흥! 아주 깨가 쏟아지네. 입에 침이나 좀 닦으시지.”
장거운이 흘깃 쳐다보니 냉가혜가 청룡고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냥 가던 길 가라. 가뜩이나 추운데 찬바람 몰고 다니지 말고.”
“야! 뒈질래?”

장거운이 퉁명스럽게 전음을 보내자, 성난 냉가혜의 전음이 그의 고막을 찢어발기려는 듯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장거운은 냉가혜의 전음을 애써 무시하고는 다시 백연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동생은 같이 안 왔나 보네요.”
“예, 사부님이 데리고 계셔요.”
“아, 검각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하더니, 거기 같이 있는 모양이네요.”
“예, 죄송해요. 저희들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는데, 이제야 인사를 드리네요.”
백연화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장거운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에이, 의당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뭘.”
“아니에요. 장 무사님 아니었으면 저나 연호나 살아 있지 못했을 거예요.”
진심 어린 백연화의 인사에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제 검각으로 가시는 겁니까?”
“아뇨, 사부님과 의논해 봤는데 다시 장원을 세우려고 해요.”
“그 자리에다가 말입니까?”
묻고 있는 장거운의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쳤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백가장의 터에는 죽은 백가장의 식솔들이 묻혀 있는 데다, 외진 곳이 되어 언제든지 다시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장거운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곳이었다.
백연화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이곳 항주에 있을 것 같아요. 사문에서 좋은 가격에 검을 사 주겠다고 하셔서 작은 장원은 하나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잘되었네요. 하긴 거기보다는 이곳 항주가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네요.”
“안 그래도 사부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래도 무림맹이 있는 이곳 항주가 더 안전할 것 같다고요. 그리고 사부님과 사매들이 당분간은 같이 머물러 주신다고 하니 신변 문제는 크게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검각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동생이 커서 제대로 검을 만들 때까지는 고생을 좀 하셔야겠어요.”
“아니에요. 검장 일은 저도 할 수 있는걸요. 사실 동생보다 제가 더 잘 만들어요.”
장거운의 말에 백연화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했다. 그녀가 검을 만드는 검장(劍匠)이라는 사실은 백가장의 식솔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보타산의 검각에 가지 않고 백가장에서 무공을 익힌 것도 검장의 기술을 같이 익히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장거운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백연화의 팔을 보며 말을 건넸다.
“예? 흠, 이 가녀린 팔뚝으로 망치질을 한다고요?”
“호호. 보기보다 제가 힘이 무지 세요.”
“그래도 백 소저 같은 분이 검을 만드는 모습은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하하하.”
백연화가 귀여운 표정으로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을 하자, 장거운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백연화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 저희 백가의 좋은 검은 어머님이 다 만드셨어요. 저희 외가가 유명한 검장가였거든요.”
“어, 그래요?”
장거운이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자 백연화는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예, 사실 그때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놈들이 노린 것은 우리 가문의 검이 아니었어요.”
“철황비록 말입니까?”
“아셨어요?”
장거운이 철황비록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백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거운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날 연호를 찾으러 갔다가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무래도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을 안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심한 고초를 겪었는데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정말 감사해요. 사실 그 책이야말로 우리 가문의 전부예요. 외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검장의 비법을 담은 책이거든요.”
“그럼 그게 무공 비급이 아니었군요?”
“예?”
“난 또 그게 뭐 절대 무공이라도 담긴 비급이어서 놈들이 노리는 줄 알고 왜 그렇게 그 책을 얻으려고 안달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이제 보니 놈들이 노릴 만했네요.”
백연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을 하자 장거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해 주었다.
이제껏 장거운은 적우기와 위지웅의 말을 듣고는 철황비록이 무공 비급인 줄 알고 있었다. 죽은 적우기도 말했지만 무공이란 비급만 있다고 해서 제대로 익힐 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가장의 장주인 하정문이 철황비록을 그토록 탐내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백연화에게 철황비록이 검장의 비법을 담은 책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장거운은 하정문이 철황비록을 차지하기 위해서 백가장을 멸문시킨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검장의 비법이 적힌 철황비록만 있다면 하가장의 소유인 만검장은 중원 최고의 검장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백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 책만 있다고 해서 무조건 명검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비슷하게는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아무튼 잘해 나가실 거예요. 자리 잡히면 연락 주세요. 저도 마침 검이 하나 필요할 것 같은데, 나중에 하나 사러 갈게요.”
장거운의 말에 백연화가 빙긋이 웃더니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끌러 장거운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제가 장 무사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예? 이걸 저 주신다고요?”
“예, 이 정도로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갚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제가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아니, 이런 걸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백연화의 얼굴이 너무 진지하여 장거운은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내민 검은 마치 장거운을 위해 만든 것처럼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검집에는 푸른 색깔의 안료로 착색을 한 청룡이 한 마리 음각되어 있었고, 상어의 가죽으로 감싼 검병에는 푸른 수실이 매달려 있었다. 청룡무사에게 딱 어울리는 검이었다.
멍하니 검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거운을 보며 백연화가 다시 말을 건넸다.
“다른 분들하고도 언제 한번 같이 오세요. 제가 선물로 검 한 자루씩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희들이 팔아 드려야죠.”
장거운이 급히 손사래를 치자, 백연화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다시 감사의 말을 건넸다.
“장 무사님,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힘내세요. 연호에게도 힘내라고 전해 주시고요. 가요. 제가 배웅해 드릴게요.”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건넨 장거운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청룡각의 마당에 나와서 찌뿌드드한 몸을 풀던 사공한은 장거운이 허리에 검을 차고 다가오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 너 그거 뭐냐?”
“어때요? 제법 어울리지 않아요?”
“오, 괜찮은데!”
“그렇죠?”
장거운도 검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이런저런 자세를 잡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갑자기 사공한이 실눈을 뜨고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냐? 이것도 금면신투가 훔쳐다 준 거냐?”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백 소저한테 선물 받은 거예요.”
장거운이 짜증을 내며 소리를 쳤다. 사공한이 금면신투 양충원을 들먹거리자 허리에 감고 있는 자룡창이 생각나서 은근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공한이 실실거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야, 이 자식 능력 있네. 너 이거 나 주면 안 되냐?”
“에이, 선물 받은 걸 어떻게 줘요?”
“왜 못 주냐? 그냥 주면 되지. 넌 검법도 모르잖아!”
“내가 왜 아는 검법이 없어요? 저도 검법 익혔거든요.”
장거운이 퉁명스럽게 사공한의 말을 받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장거운이 검법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공한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엉? 검법도 할 줄 알아? 무슨 검법을 익혔는데?”
“삼재검법요.”
“지랄! 개나 소나 다 한다는 삼재검법이 검법이냐?”
“삼재검법이 그래요?”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사공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음! 삼재검법 할 줄 아냐고 저잣거리에 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봐라. 열에 아홉은 그렇다고 할 거다, 아마.”
“이상하네, 그거 익히기 힘든데…….”
장거운은 자신이 익힌 곡운자의 삼재검법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공한이 말하는 아무 무관에서나 가르치는 삼재검법과 절대이광의 한 명인 광도 곡운자의 삼재검법은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물론 장거운이나 사공한은 아직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공한이 다시 졸라 대기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나 줘라!”
“아무튼 싫어요. 백 소저가 나중에 찾아오면 한 자루씩 준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요.”
“엉? 진짜냐?”
“예, 그러니까 내 거 넘보지 말고 기다려요. 자꾸 달라고 하면 백 소저한테 절대로 검 주지 말라고 할 거니깐.”
장거운이 자신의 검을 탐내는 사공한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을 때 뒤쪽에서 냉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장거운이 고개를 돌려 보니 냉가혜는 낯선 얼굴의 미공자와 함께 사이좋게 걸어오면서 교소를 흘리고 있었다. 큰 키에 약간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미공자는 하얀 피부에 주사 빛 입술을 가진 눈에 확 띄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장거운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사공한에게 물었다.
“저거 누구예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 있어. 좀 재수 없는 놈.”
“우리 청룡당이네? 누구지?”
“그냥 신경 꺼라. 알아봤자 피곤해!”
처음 보는 미공자가 가슴에 청룡이 새겨진 청룡무복을 입고 있음을 알고는 장거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공한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했다.
잠시 후 사공한과 장거운의 앞으로 다가온 미공자는 손을 들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여!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사공 형!”
“어, 그, 그래 오랜만이다. 복귀한 거냐?”
대답을 하는 사공한의 표정은 쓴 약재를 씹은 것마냥 떨떠름했다.
사공한의 표정과는 달리 미공자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예, 당연히 복귀해야지요. 참, 부대주가 되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어, 그래. 뭐, 고맙다.”
미공자는 사공한의 옆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장거운을 흘깃 쳐다보고는 사공한에게 물었다.
“흠, 근데 이 친구는 처음 보는데 신입인가 보죠?”
“그래, 장거운이라고, 올해 청룡무사가 된 친구다.”
사공한의 소개에 미공자는 반색을 하며 장거운에게 말을 건넸다.
“아, 자네가 우리 혜 매와 동기라는 그 유명한 소광룡이군! 반갑네, 난 백리현일세.”
“우, 우리 혜 매……?”
“이거 참 머쓱해지는군. 뭐, 아무튼 반갑네! 잘 지내보세.”
자신을 백리현이라고 밝힌 미공자는 장거운이 자신의 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만 중얼거리자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장거운이 냉가혜를 노려보며 전음을 날렸다.
“얼음귀신! 우리 혜 매가 무슨 소리야?”
“흥! 멍충이, 네가 뭔 상관이야!”

둥! 둥! 둥!
장거운의 귀에 냉가혜의 앙칼진 전음과 함께 청룡고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 청룡고 소리!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둥, 둥, 둥, 언제 들어 봐도 즐겁단 말이야! 그렇지 않소, 사공 형?”
백리현이 탄성을 흘리며 눈을 감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허공을 튕기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 글쎄…….”
“흠, 그럼 무슨 일인지 한번 가 볼까? 복귀 후 처음 맡는 일인데 좀 즐거운 일이었으면 좋겠군.”
백리현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청룡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뿐사뿐 청룡고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백리현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장거운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