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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장거운의 처리에 대한 집법회의가 오후에 있다는 말은 들은 곽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무림맹의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곽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장거운에 대한 악평들과 생각하기조차 싫은 집법회의 결과에 대한 예측들이었다.
혹자는 장거운이 청룡무사의 직위를 박탈당하는 선에서 끝날 것이라고도 하였지만, 지배적인 의견은 장거운이 사대금강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소림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심한 경우, 파문제자처럼 사지근맥을 자를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곽호는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에 죄 없는 바닥의 돌멩이들만 툭툭 차 보지만, 일개 위사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장거운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툭!
다시 돌멩이 한 개를 툭 차고는 자신이 찬 돌멩이를 따라가던 곽호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소림승들 때문에 열 받는데, 이마에 선명한 아홉 개의 계인을 찍은 두 명의 소림승들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곽호 앞에 나타난 눈썹이 하얗게 센 백미를 가진 노승은 바로 장거운의 할아버지였다. 그 뒤에 무거운 짐을 한 보퉁이 짊어진 건장한 체격에 피부가 까무잡잡한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년승이 한 명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는 장년승은 꽤나 먼 길을 왔는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보퉁이가 무거운지 땀을 뻘뻘 흘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백미의 노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범천아! 힘드냐?”
“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잔뜩 찌푸린 인상과는 정반대의 말을 외치고 있는 장년의 승려가 바로 백우선사의 대제자이자 십팔나한승의 수좌인 범천인 모양이었다.
다시 백미 노승의 말이 이어졌다.
“어째 끙끙대는 소리밖에 안 들리누. 이놈아! 내가 네놈 나이 땐 만 근의 바위를 지고 천산까지 갔다 오곤 했어!”
“그, 그렇습니까? 대, 대단하십니다.”
“지랄! 그런 공갈을 믿냐? 미련퉁이 같은 놈이 어째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라고 할까 봐. 두 놈 다 어찌 그리 곰탱이 같은지…….”
“끙!”
범천은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끙끙대기만 했다.
어느새 무림맹의 정문 앞에 다다른 백미 노승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곽호에게 말을 걸었다.
“거 말 좀 물어보겠네.”
“말은 마구간에 가서 물어보슈!”
곽호는 백미 노승을 삐딱하게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감히! 이분이 누구…….”
범천이 화들짝 놀라며 곽호에게 소리를 치려 하자 백미 노승이 손을 들어 제지를 하고는 다시 말을 건넸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손자를 좀 만나러 왔는데 말이야.”
“손자요? 혹시 성이 손(孫)에 이름이 자(子)요? 그 손자는 아주 옛날에 책 한 권 달랑 써 놓고 죽었는디요?”
“거참, 입담이 좋은 친구군.”
말을 하는 노승의 백미가 살짝 치켜 올라가자, 그제야 속으로 뜨끔해지는 곽호였다. 아마도 장거운의 일로 정신이 잠시 어떻게 되었는지 소림의 고승을 상대로 농을 뱉고 있었던 것이다.
곽호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었다.
“흠, 흠! 거 손자 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우?”
“혹시 장거운이라고 아나?”
“자, 장거운! 청룡무사 장거운?”
곽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말을 더듬자, 백미 노승은 반색을 하며 말을 했다.
“호! 아는군. 확실히 그놈이 덩치가 커서 눈에 잘 띄지!”
“아이고! 어르신,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곽호는 너무 반가워 백미 노승의 손을 덥석 잡으며 외치고 있었다. 장거운의 할아버지가 소림의 고승인 것 같으니 이제 살길이 열린 것이다.
곽호의 말에 백미 노승이 살짝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엉? 무슨 말인가? 우리 거운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무슨 일이 있습지요. 세상에 그 착하고 좋은 녀석을 소광룡이라며 미친놈 취급을 하지 않나, 소림 속가란 작자들이 사지근맥을 자른다고 하지 않나, 그게 말이 됩니까?”
“이, 이보게!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보게!”
곽호가 흥분을 하여 횡설수설하자 백미 노승이 곽호를 진정시켰다.
“사조님!”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백미 노승이 고개를 돌려 보니 백우선사가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범천아, 저놈 백우 아니냐?”
“마, 맞습니다만…….”
범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인 백우선사가 저렇게 빨리 신법을 펼치는 모습은 살아오면서 처음 봤던 것이다.
순식간에 다가온 백우선사가 황급히 백미 노승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을 건넸다.
“헉헉! 사, 사조님, 헉, 일단 저와 말씀 좀 나누시지요.”
“뭐야? 왜 이리 헐떡거려?”
“그, 그러니까 잠깐만 저와 먼저 이야기를 하시지요.”
백우선사가 다급하게 말을 건네자 노승이 살짝 백미를 찌푸리며 굳어진 얼굴로 말을 뱉었다.
“그만, 넌 이제부터 입을 다물어라. 그래, 위사 양반,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시오.”
백우선사의 출현으로 잠시 멍하니 있던 곽호가 정신을 차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예, 대사님, 저는 거운이의 의형인 곽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운이가 지금 감찰당의 금옥에 구금되어 있는데…….”
“곽 위사!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곽호의 말을 끊고 나선 것은 백우를 따라 달려온 남궁천호였다.
백미 노승이 남궁천호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청룡당을 맡고 있는 남궁천호입니다.”
“자네가 청룡당주군. 좋아, 그럼 자네가 말해 보게.”
“예, 지금 거운이가 구금된 것은……중략……그래서 오후에 집법회의를 통해 결정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남궁천호의 긴 설명이 끝날 때까지 눈 한 번 깜박거리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미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 혹시 근처에 조용히 이야기할 데가 없는가?”
“저희 청룡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맹 안에 말고 다른 곳 말일세.”
“그러면 조금만 가시면 진화루란 곳이 있는데 허름하지만 낮에는 조용합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그리하세.”
남궁천호가 앞장서자 백미 노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백우선사와 범천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엉기적엉기적 따르고 있었다.
몇 걸음 걸어가던 백미 노승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다보며 말을 건넸다.
“백우야! 넌 왜 따라오느냐?”
“그야 사조님이 가시니까…….”
“멍청한 놈! 네놈은 가서 사대금강 그놈들을 데리고 와야 할 것 아니냐!”
“아, 예. 알겠습니다.”
백우선사가 황급히 무림맹으로 향하자 백미 노승은 혀를 차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진화루로 들어선 백미 노승과 남궁천호는 이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낮인지라 진화루는 투덜거리며 차를 내어 온 왕팔을 제외하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백미 노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궁천호라고 하였는가?”
“예, 그렇습니다.”
백미 노승은 대답을 하는 남궁천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남궁수를 많이 닮았군.”
“할아버님을 아십니까?”
“그래, 제법 친했지.”
백미 노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호는 눈가에 잠시 이채를 띠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대사님의 법명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이 땡초는 무애라고 하네.”
“무애…… 광불 무애!”
백미 노승의 법명을 되뇌어 보던 남궁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백미 노승의 정체가 바로 광불광도(狂佛狂道)라고 하는 절대이광(絶代二狂) 중 한 명인 광불 무애대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광불 무애대사와 광도 곡운자, 절대이광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각기 소림과 무당의 최고수이자 이마삼군오왕으로 대표되던 무림의 십대고수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이었다.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무림에서 자취를 보이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절대이광은 여전히 무림의 절대자들이었다.
남궁천호의 격한 반응에 무애대사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뱉었다.
“크흠! 그래, 남들이 나를 광불이라고 하지.”
“죄, 죄송합니다, 대사님.”
“죄송할 게 뭐 있나?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거운이 그놈한테 내 법명을 말해 준 적이 없군.”
무덤덤하게 말을 건네던 무애대사는 남궁천호의 격한 반응을 보고 자신이 장거운에게 한 번도 자신의 법명을 가르쳐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자신이나 광도라고 불리는 곡운자로서는 법명이니 도명이니 하는 것을 뱉어 본 지도 오래고 들어 본 적도 오래되었기에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셨군요. 저도 거운이의 솜씨로 봐서는 할아버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은데도, 거운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이상하였습니다. 대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남궁천호는 무애대사가 장거운에게 절대로 자신의 법명을 말하지 않도록 지시를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장거운이 무애대사의 진전을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림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애대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알지를 못하니 할 말이 없었겠지. 그래, 그놈은 청룡무사 일은 제대로 하는가?”
“예, 잘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도 너무 잘해서 생긴 일이지요.”
“허허허! 그 녀석, 용케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군.”
청룡당주인 남궁천호가 장거운을 칭찬하자 무애대사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기야 손자가 잘하고 있다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 이후로도 남궁천호와 무애대사는 백우선사와 사대금강이 올 때까지 장거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같이 동석한 범천도 오랜만에 남궁천호를 만나 기분이 좋은지 웃는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거들었다.
연신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좌중은 백우선사와 사대금강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등장하자 다시 싸늘하게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무애대사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무애대사를 향해 사대금강이 반장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그래, 수고들이 많구나. 자리에들 앉아라.”
백우선사와 사대금강이 자리할 때까지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무애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우야! 먼저 한 가지 물어보자. 내가 너한테 조림사를 속가연명록에 올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 말씀하셨습니다. 금강당의 백인 사형께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백우선사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무애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대금강을 슬쩍 보고는 다시 말을 뱉기 시작했다.
“한데 어찌 이 아이들은 거운이를 보고 속가를 사칭한 놈이라고 했단 말이냐? 내 새끼인 거운이가 속가 자격이 없단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조님의 진전을 물려받으신 분인데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무애대사의 말에 백우선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뱉었다.
백우선사가 무애대사를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애대사의 대제자로 소림의 전대 방장이었던 방원대사가 바로 백우선사의 스승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우선사는 무애대사의 직계 사손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백우선사의 대제자인 범천이 무애대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엄밀하게 따지면 장거운이 백우선사의 막내 사숙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백우선사가 무애대사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광불이라고 불리게 된 무애대사의 과격한 성정 때문이었다. 삼십육방을 통과할 때 목인들을 모조리 다 박살 내 버린 일화도 유명하거니와, 소림의 고승들 가운데 무애대사에게 뼈마디 한두 군데 부서져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무애대사가 광불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사십 년 전에 광도 곡운자와 함께 둘이서 무림맹을 뒤집어엎어 버리고는 맹주를 끌어내서 볼기를 친 일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에 전 무림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해야 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무림에서 절대이광의 비위를 건드린다는 것은 자살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무애대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뭐냐? 백인이가 내 말을 씹은 거냐?”
자신의 사부인 금강당주 백인선사의 이름이 거론되자 범각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사, 사조님,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본산을 떠난 지가 제법 되어 새로운 연명록을 받지 못하여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제 놈 사부라고 변명은…….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범각 네놈은 내 새끼가 본의 아니게 대환단 한 알 먹은 게 그리 고깝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고지식한 범각이 내규를 떠올리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백우선사가 황급히 나섰다.
“아이들이 몰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분이라면 대환단이 아니라 더한 것도 가질 수 있지요!”
“흠흠, 그렇지?”
“그럼요. 방장이신 백원 사형이 아셨다면, 남아 있는 소환단까지 바리바리 싸 가지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그깟 소환단, 어디 쓰려고!”
백우선사의 아부가 마음에 드는지 무애대사는 입가에 흡족한 웃음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모두들 무애대사의 웃음을 보고 다소 안도를 하는 순간, 무애대사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네놈들이 그 아이하고 싸웠다고 하던데…….”
“싸, 싸운 것은 아니고, 범호와 잠시 손속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범호가 밀렸습니다.”
“지랄! 사대금강씩이나 되어 가지고 어디 가서 맞은 것이 자랑이냐?”
범각이 다급하게 변명을 하자 무애대사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의 입 꼬리는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장거운이 대외적으로 소림을 대표하는 사대금강의 한 명인 범호에게 이겼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 그게…….”
범각이 무애대사의 비위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자 무애대사가 다시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각설하고, 당장 달려가서 집법회의인지 지랄인지 못하게 하고 내 새끼 원상복귀 시켜 놔! 멀리서 이 할아비가 찾아왔는데 금옥인가 하는 곳에 갇혀서 만나게 되면 그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냔 말이다.”
“알겠습니다!”
사대금강이 이구동성으로 진화루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외치고는 벌떡 일어서자, 무애대사가 다시 냉랭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내가 여기 왔다는 말이나 그놈이 내 손자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돌면, 니들 금강당은 모조리 승적에서 파 버린다.”
“헉! 아, 알겠습니다.”
그냥 뼈마디를 부숴 버리겠다는 말도 아니고 아예 승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무애대사의 협박에 사대금강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달려 나가고 있었다.
“휴! 아미타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큰 소동 없이 넘어가는 듯하자 백우선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애대사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백우야! 어린놈이 왜 한숨을 쉬냐?”
“아니, 그게 저…….”
“왜? 내가 전처럼 무림맹을 뒤집어엎을까 봐 걱정했냐?”
“그건, 뭐…… 그렇습니다.”
무애대사가 정곡을 찌르자 백우선사는 쭈뼛거리며 대답을 했다.
무애대사의 말이 이어졌다.
“지랄! 그날은 광도 그놈이 술 처먹고 술주정을 부려서 그런 것이고. 그래도 내 새끼가 일하는 곳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때려 부술 수야 없지 않겠느냐? 내가 그래도 명색이 할아비인데 손자 녀석이 출세하는 데 방해가 되면 쓰겠냐?”
“……!”
광불이라고 불리는 무애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에 백우선사는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제10장 아수라(阿修羅)
감찰당의 금옥에서 풀려난 장거운은 영은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애대사와 함께 서호의 산책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장거운이 이곳 서호로 온 것은 지난번에 와 본 서호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나중에 꼭 두 분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저기 봐요. 석양이 정말 아름답죠?”
장거운이 가리킨 곳에는 뇌봉탑을 뒤로하여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서호의 풍경을 수도 없이 본 무애대사이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당당한 청룡무사가 된 장거운과 함께 바라보는 뇌봉석조는 흐뭇한 마음 탓인지 새삼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다시 장거운의 말이 이어졌다.
“아쉽다. 말코 할아버지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죠?”
“흠, 그러고 보니 그놈 면상 본 지가 꽤 오래되었구나. 하도 성질이 지랄 맞아서 무당산에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사는지 모르겠구나.”
무애대사도 둘도 없는 친구인 광도 곡운자가 은근히 걱정이 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곡운자를 떠올린 무애대사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장거운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에이, 말코 할아버지도 무당파에서 높으신 분이라면서요. 밥은 꼬박꼬박 챙겨 드실 거예요.”
“하기야 워낙에 식탐이 강한 놈이라, 천주봉 꼭대기에 있는 금전(金殿)의 기둥을 팔아서라도 밥은 챙겨 먹을 게다.”
“에이, 설마요. 무당파 도사님들이 잘 챙겨 주시겠죠.”
“글쎄다, 거운이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놈 원래부터 사문에서 구박을 많이 받는 모양이던데……. 에구, 늙으면 죽어야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무애대사의 표정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광불이라고 불리던 그도 장성한 장거운과 같이 서호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감상적인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두 분 다 정정하시잖아요.”
“정정하기는 이놈아, 성질머리만 정정하지, 이제는 온 뼈마디가 죄다 욱신거린다. 원래가 사물의 법이란 게 성할 때가 있으면 이지러질 때도 있는 법이야. 저기, 저 석양처럼 말이다.”
무애대사의 진지한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 장거운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헤,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하시니까 왠지 안 어울려요.”
“이놈이, 나라고 천년만년 살 것 같냐?”
“예, 할아버지는 그러실 거 같아요.”
“허, 이놈이……. 그래, 지내 보니 무림이란 곳이 어떠냐?”
무애대사의 물음에 장거운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요, 처음엔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조금 힘들어요.”
“왜? 대환단 먹고 이젠 내기도 제대로 뿜어낸다며? 그러고 보니 네 녀석 기도가 많이 달라졌구나.”
“그래서 더 힘들어요.”
늘 쾌활하고 밝은 모습의 장거운이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을 하자 무애대사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장거운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해 보아라.”
“사실 저도 몰랐는데요, 싸움을 하다 보면 가끔 제가 정신을 놓아 버릴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싸움이 끝난 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 말이에요.”
“그야 네놈이 역근경과 같은 동공을 익혔으니 싸우는 중에도 무아지경에 들 수가 있는 게지.”
“저도 처음엔 그게 검전무아(劍前無我)의 요체를 깨달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는데요…… 지금은 점점 제 자신이 무서워져요.”
장거운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하자, 무애대사는 장거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장거운의 눈에는 살짝 고통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무애대사는 남궁천호에게 장거운이 얼마 전에 힘든 경험을 했음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애대사가 자애로운 눈빛으로 장거운을 보며 물었다.
“이번에 있었던 하가장의 일 때문에 그러느냐?”
“예, 그냥 처음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는데, 문득 깨어 보니 제가 아수라가 되어 있었어요. 그저 싸움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젠 내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더 많은 사람을 해하게 될까 봐 무서워져요.”
“아수라의 길이라…….”
무애대사는 장거운의 말을 듣고 나서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장거운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가지게 되는 것으로, 무공을 익히게 되면 싸움을 좋아하고 파괴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장거운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할아버지도 그걸 아세요? 전 제 자신 속에 아수라가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사람은 누구나 아수라를 품고 살아가지.”
“모든 사람이요?”
“비록 그 형태나 발현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아수라는 잠들어 있다. 그 아수라가 마라의 속삭임을 듣고 깨어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한 세상이 곧 아수라장인 것이지.”
묵묵히 무애대사의 말을 듣고 있던 장거운이 여태껏 보지 못한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그 아수라를 없앨 수는 없나요?”
“너는 아수라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싸움과 파괴의 귀신요.”
무애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수라를 두고 다툼의 신이라고 하지. 하면 다툼은 왜 일어나느냐?”
“그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좋다. 가령 네 옆에서 굶어 죽어 가는 가난한 아이가 간신히 한 접시의 만두를 구하여 먹으려고 할 때, 배불리 먹은 부잣집의 아이가 그 만두를 뺏으려 한다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그야 당연히 부잣집 아이를 나무라야지요.”
장거운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무애대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러면 넌 다툼을 벌여야 하겠구나. 다툼은 왜 일어났느냐?”
“흠, 부잣집 아이가 욕심을 부려서요.”
장거운은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무애대사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네가 그냥 모른 체했다면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그것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면 그 가난한 아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래, 힘없는 그 아이가 불쌍하지. 그래서 넌 힘이 센 부잣집 아이와 다툼을 벌였고. 그러한 다툼도 결국은 아수라의 다툼이지 않느냐?”
“그건…….”
무애대사의 말에 장거운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당한 다툼이라고 하더라도 다툼인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무애대사의 말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한 다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다툼 역시 아수라의 다툼이라는 것이 무애대사의 말이었다.
장거운이 자신이 말하는 바를 알게 된 것 같아 보이자 무애대사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러한 아수라의 길이라면 걸어 볼 만하지 않겠느냐?”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수라가 제 뜻대로 길을 가지 않으면요?”
대답을 하는 장거운의 표정에는 여전히 두려운 빛이 남아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여 위안을 삼기엔 하가장에서의 살육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애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스스로 아수라를 길들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우냐?”
“조금은 그래요.”
장거운이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말을 하자 무애대사가 갑자기 불경의 한 구절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가 저를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불경의 한 구절을 듣고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며 무애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이 시구가 불방일(不放逸)을 하라는 가르침임을 알 것이다. 아수라를 길들이는 것 또한 그러하다. 네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방만한 마음이 생긴다면, 마라의 속삭임은 언제든지 너를 찾을 것이다.”
“불방일…….”
장거운이 불방일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방일(放逸)이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러한 방일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계속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무애대사의 설법이 이어졌다.
“그래,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정진을 해야 한다. 또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행동에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아함경에 이르기를, 탁발을 떠난 석가세존에게 농사를 짓는 바라문이 뭐라고 힐난하였더냐?”
“스스로 밭을 갈아 씨앗을 뿌려 곡식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힐난하였습니다.”
“하면, 세존께서는 뭐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라문이 다시 ‘사문이여, 우리는 누구 하나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소. 대체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의 소는 어디에 있소? 당신이 밭을 간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나는 묻고 싶소’라고 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信仰]이요, 내 모습은 지혜가 그것이다. 나날이 악업(惡業)을 제어하는 것은 곧 김매는 작업이며, 내 소는 무엇이냐 하면 정진(精進)이 그것인 바, 이 소는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가 물러섬이 없고, 또 그 행한 결과에 대해 뉘우쳐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이 내 농사요, 그 수확은 감로의 열매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애대사와 장거운의 문답을 통한 설법이 끝이 나자 장거운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길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하가장의 일은 자신의 수양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었다. 어쩌면 최근에 자신의 무공이 급증하면서 한순간에 방일한 마음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청룡무사로서 자신의 행동이 정의롭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해 나간다면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아수라를 자신의 의지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곧 협사의 길이었고, 장거운에게는 아수라의 길이었다.
무애대사가 장거운의 표정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아수라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세존과 같이 남들이 어떠한 힐난을 하더라도 스스로의 행동에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정진하여, 매사를 행함에 물러섬이 없고 결과에 뉘우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아수라를 길들이는 것이다.”
“예, 한번 제 속에 사는 아수라를 이겨 내 볼게요. 그래서 제대로 아수라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래, 언제라도 다시 마라의 속삭임이 들려오거든 다음과 같이 외쳐 주어라.”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고는 무애대사는 마라의 속삭임에 대항하여 석가세존이 외쳤다는 구절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를 벗어났도다.
나는 악마의 사슬을 풀어 버렸거니
파괴자여, 그대는 패하였도다.
장거운은 무애대사가 들려준 구절을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그만 가자꾸나.”
무애대사가 장거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거운이 약간은 밝아진 표정으로 나란히 그 옆에서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이미 해가 져서 어둑해진 서호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다정한 두 조손의 대화가 서호의 잔잔한 물결이 부딪히는 소리에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네놈이 익힌 무공을 다 펼칠 수 있는 게냐? 말코의 삼재검법도 되더냐?”
“다른 건 대충 다 되는 것 같은데 말코 할아버지의 삼재검법은 안 해 봐서 모르겠어요. 근데 저 할아버지, 경공법 좀 가르쳐 주세요.”
“경공? 내가 능공천상제, 연대구품, 이런 거 안 가르쳐 줬냐? 다 가르쳐 줬을 텐데……?”
“한 번도 안 가르쳐 줬거든요!”
“그러냐? 쩝, 가자! 그까짓 거, 몽땅 다 가르쳐 주마!”
“헤! 진짜죠?”
장거운의 처리에 대한 집법회의가 오후에 있다는 말은 들은 곽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무림맹의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곽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장거운에 대한 악평들과 생각하기조차 싫은 집법회의 결과에 대한 예측들이었다.
혹자는 장거운이 청룡무사의 직위를 박탈당하는 선에서 끝날 것이라고도 하였지만, 지배적인 의견은 장거운이 사대금강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소림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심한 경우, 파문제자처럼 사지근맥을 자를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곽호는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에 죄 없는 바닥의 돌멩이들만 툭툭 차 보지만, 일개 위사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장거운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툭!
다시 돌멩이 한 개를 툭 차고는 자신이 찬 돌멩이를 따라가던 곽호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소림승들 때문에 열 받는데, 이마에 선명한 아홉 개의 계인을 찍은 두 명의 소림승들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곽호 앞에 나타난 눈썹이 하얗게 센 백미를 가진 노승은 바로 장거운의 할아버지였다. 그 뒤에 무거운 짐을 한 보퉁이 짊어진 건장한 체격에 피부가 까무잡잡한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년승이 한 명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는 장년승은 꽤나 먼 길을 왔는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보퉁이가 무거운지 땀을 뻘뻘 흘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백미의 노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범천아! 힘드냐?”
“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잔뜩 찌푸린 인상과는 정반대의 말을 외치고 있는 장년의 승려가 바로 백우선사의 대제자이자 십팔나한승의 수좌인 범천인 모양이었다.
다시 백미 노승의 말이 이어졌다.
“어째 끙끙대는 소리밖에 안 들리누. 이놈아! 내가 네놈 나이 땐 만 근의 바위를 지고 천산까지 갔다 오곤 했어!”
“그, 그렇습니까? 대, 대단하십니다.”
“지랄! 그런 공갈을 믿냐? 미련퉁이 같은 놈이 어째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라고 할까 봐. 두 놈 다 어찌 그리 곰탱이 같은지…….”
“끙!”
범천은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끙끙대기만 했다.
어느새 무림맹의 정문 앞에 다다른 백미 노승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곽호에게 말을 걸었다.
“거 말 좀 물어보겠네.”
“말은 마구간에 가서 물어보슈!”
곽호는 백미 노승을 삐딱하게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감히! 이분이 누구…….”
범천이 화들짝 놀라며 곽호에게 소리를 치려 하자 백미 노승이 손을 들어 제지를 하고는 다시 말을 건넸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손자를 좀 만나러 왔는데 말이야.”
“손자요? 혹시 성이 손(孫)에 이름이 자(子)요? 그 손자는 아주 옛날에 책 한 권 달랑 써 놓고 죽었는디요?”
“거참, 입담이 좋은 친구군.”
말을 하는 노승의 백미가 살짝 치켜 올라가자, 그제야 속으로 뜨끔해지는 곽호였다. 아마도 장거운의 일로 정신이 잠시 어떻게 되었는지 소림의 고승을 상대로 농을 뱉고 있었던 것이다.
곽호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었다.
“흠, 흠! 거 손자 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우?”
“혹시 장거운이라고 아나?”
“자, 장거운! 청룡무사 장거운?”
곽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말을 더듬자, 백미 노승은 반색을 하며 말을 했다.
“호! 아는군. 확실히 그놈이 덩치가 커서 눈에 잘 띄지!”
“아이고! 어르신,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곽호는 너무 반가워 백미 노승의 손을 덥석 잡으며 외치고 있었다. 장거운의 할아버지가 소림의 고승인 것 같으니 이제 살길이 열린 것이다.
곽호의 말에 백미 노승이 살짝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엉? 무슨 말인가? 우리 거운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무슨 일이 있습지요. 세상에 그 착하고 좋은 녀석을 소광룡이라며 미친놈 취급을 하지 않나, 소림 속가란 작자들이 사지근맥을 자른다고 하지 않나, 그게 말이 됩니까?”
“이, 이보게!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보게!”
곽호가 흥분을 하여 횡설수설하자 백미 노승이 곽호를 진정시켰다.
“사조님!”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백미 노승이 고개를 돌려 보니 백우선사가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범천아, 저놈 백우 아니냐?”
“마, 맞습니다만…….”
범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인 백우선사가 저렇게 빨리 신법을 펼치는 모습은 살아오면서 처음 봤던 것이다.
순식간에 다가온 백우선사가 황급히 백미 노승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을 건넸다.
“헉헉! 사, 사조님, 헉, 일단 저와 말씀 좀 나누시지요.”
“뭐야? 왜 이리 헐떡거려?”
“그, 그러니까 잠깐만 저와 먼저 이야기를 하시지요.”
백우선사가 다급하게 말을 건네자 노승이 살짝 백미를 찌푸리며 굳어진 얼굴로 말을 뱉었다.
“그만, 넌 이제부터 입을 다물어라. 그래, 위사 양반,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시오.”
백우선사의 출현으로 잠시 멍하니 있던 곽호가 정신을 차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예, 대사님, 저는 거운이의 의형인 곽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운이가 지금 감찰당의 금옥에 구금되어 있는데…….”
“곽 위사!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곽호의 말을 끊고 나선 것은 백우를 따라 달려온 남궁천호였다.
백미 노승이 남궁천호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청룡당을 맡고 있는 남궁천호입니다.”
“자네가 청룡당주군. 좋아, 그럼 자네가 말해 보게.”
“예, 지금 거운이가 구금된 것은……중략……그래서 오후에 집법회의를 통해 결정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남궁천호의 긴 설명이 끝날 때까지 눈 한 번 깜박거리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미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 혹시 근처에 조용히 이야기할 데가 없는가?”
“저희 청룡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맹 안에 말고 다른 곳 말일세.”
“그러면 조금만 가시면 진화루란 곳이 있는데 허름하지만 낮에는 조용합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그리하세.”
남궁천호가 앞장서자 백미 노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백우선사와 범천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엉기적엉기적 따르고 있었다.
몇 걸음 걸어가던 백미 노승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다보며 말을 건넸다.
“백우야! 넌 왜 따라오느냐?”
“그야 사조님이 가시니까…….”
“멍청한 놈! 네놈은 가서 사대금강 그놈들을 데리고 와야 할 것 아니냐!”
“아, 예. 알겠습니다.”
백우선사가 황급히 무림맹으로 향하자 백미 노승은 혀를 차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진화루로 들어선 백미 노승과 남궁천호는 이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낮인지라 진화루는 투덜거리며 차를 내어 온 왕팔을 제외하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백미 노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궁천호라고 하였는가?”
“예, 그렇습니다.”
백미 노승은 대답을 하는 남궁천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남궁수를 많이 닮았군.”
“할아버님을 아십니까?”
“그래, 제법 친했지.”
백미 노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호는 눈가에 잠시 이채를 띠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대사님의 법명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이 땡초는 무애라고 하네.”
“무애…… 광불 무애!”
백미 노승의 법명을 되뇌어 보던 남궁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백미 노승의 정체가 바로 광불광도(狂佛狂道)라고 하는 절대이광(絶代二狂) 중 한 명인 광불 무애대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광불 무애대사와 광도 곡운자, 절대이광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각기 소림과 무당의 최고수이자 이마삼군오왕으로 대표되던 무림의 십대고수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이었다.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무림에서 자취를 보이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절대이광은 여전히 무림의 절대자들이었다.
남궁천호의 격한 반응에 무애대사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뱉었다.
“크흠! 그래, 남들이 나를 광불이라고 하지.”
“죄, 죄송합니다, 대사님.”
“죄송할 게 뭐 있나?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거운이 그놈한테 내 법명을 말해 준 적이 없군.”
무덤덤하게 말을 건네던 무애대사는 남궁천호의 격한 반응을 보고 자신이 장거운에게 한 번도 자신의 법명을 가르쳐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자신이나 광도라고 불리는 곡운자로서는 법명이니 도명이니 하는 것을 뱉어 본 지도 오래고 들어 본 적도 오래되었기에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셨군요. 저도 거운이의 솜씨로 봐서는 할아버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은데도, 거운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이상하였습니다. 대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남궁천호는 무애대사가 장거운에게 절대로 자신의 법명을 말하지 않도록 지시를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장거운이 무애대사의 진전을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림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애대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알지를 못하니 할 말이 없었겠지. 그래, 그놈은 청룡무사 일은 제대로 하는가?”
“예, 잘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도 너무 잘해서 생긴 일이지요.”
“허허허! 그 녀석, 용케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군.”
청룡당주인 남궁천호가 장거운을 칭찬하자 무애대사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기야 손자가 잘하고 있다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 이후로도 남궁천호와 무애대사는 백우선사와 사대금강이 올 때까지 장거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같이 동석한 범천도 오랜만에 남궁천호를 만나 기분이 좋은지 웃는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거들었다.
연신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좌중은 백우선사와 사대금강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등장하자 다시 싸늘하게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무애대사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무애대사를 향해 사대금강이 반장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그래, 수고들이 많구나. 자리에들 앉아라.”
백우선사와 사대금강이 자리할 때까지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무애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우야! 먼저 한 가지 물어보자. 내가 너한테 조림사를 속가연명록에 올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 말씀하셨습니다. 금강당의 백인 사형께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백우선사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무애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대금강을 슬쩍 보고는 다시 말을 뱉기 시작했다.
“한데 어찌 이 아이들은 거운이를 보고 속가를 사칭한 놈이라고 했단 말이냐? 내 새끼인 거운이가 속가 자격이 없단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조님의 진전을 물려받으신 분인데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무애대사의 말에 백우선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뱉었다.
백우선사가 무애대사를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애대사의 대제자로 소림의 전대 방장이었던 방원대사가 바로 백우선사의 스승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우선사는 무애대사의 직계 사손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백우선사의 대제자인 범천이 무애대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엄밀하게 따지면 장거운이 백우선사의 막내 사숙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백우선사가 무애대사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광불이라고 불리게 된 무애대사의 과격한 성정 때문이었다. 삼십육방을 통과할 때 목인들을 모조리 다 박살 내 버린 일화도 유명하거니와, 소림의 고승들 가운데 무애대사에게 뼈마디 한두 군데 부서져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무애대사가 광불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사십 년 전에 광도 곡운자와 함께 둘이서 무림맹을 뒤집어엎어 버리고는 맹주를 끌어내서 볼기를 친 일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에 전 무림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해야 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무림에서 절대이광의 비위를 건드린다는 것은 자살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무애대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뭐냐? 백인이가 내 말을 씹은 거냐?”
자신의 사부인 금강당주 백인선사의 이름이 거론되자 범각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사, 사조님,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본산을 떠난 지가 제법 되어 새로운 연명록을 받지 못하여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제 놈 사부라고 변명은…….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범각 네놈은 내 새끼가 본의 아니게 대환단 한 알 먹은 게 그리 고깝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고지식한 범각이 내규를 떠올리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백우선사가 황급히 나섰다.
“아이들이 몰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분이라면 대환단이 아니라 더한 것도 가질 수 있지요!”
“흠흠, 그렇지?”
“그럼요. 방장이신 백원 사형이 아셨다면, 남아 있는 소환단까지 바리바리 싸 가지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그깟 소환단, 어디 쓰려고!”
백우선사의 아부가 마음에 드는지 무애대사는 입가에 흡족한 웃음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모두들 무애대사의 웃음을 보고 다소 안도를 하는 순간, 무애대사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네놈들이 그 아이하고 싸웠다고 하던데…….”
“싸, 싸운 것은 아니고, 범호와 잠시 손속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범호가 밀렸습니다.”
“지랄! 사대금강씩이나 되어 가지고 어디 가서 맞은 것이 자랑이냐?”
범각이 다급하게 변명을 하자 무애대사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의 입 꼬리는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장거운이 대외적으로 소림을 대표하는 사대금강의 한 명인 범호에게 이겼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 그게…….”
범각이 무애대사의 비위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자 무애대사가 다시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각설하고, 당장 달려가서 집법회의인지 지랄인지 못하게 하고 내 새끼 원상복귀 시켜 놔! 멀리서 이 할아비가 찾아왔는데 금옥인가 하는 곳에 갇혀서 만나게 되면 그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냔 말이다.”
“알겠습니다!”
사대금강이 이구동성으로 진화루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외치고는 벌떡 일어서자, 무애대사가 다시 냉랭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내가 여기 왔다는 말이나 그놈이 내 손자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돌면, 니들 금강당은 모조리 승적에서 파 버린다.”
“헉! 아, 알겠습니다.”
그냥 뼈마디를 부숴 버리겠다는 말도 아니고 아예 승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무애대사의 협박에 사대금강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달려 나가고 있었다.
“휴! 아미타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큰 소동 없이 넘어가는 듯하자 백우선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애대사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백우야! 어린놈이 왜 한숨을 쉬냐?”
“아니, 그게 저…….”
“왜? 내가 전처럼 무림맹을 뒤집어엎을까 봐 걱정했냐?”
“그건, 뭐…… 그렇습니다.”
무애대사가 정곡을 찌르자 백우선사는 쭈뼛거리며 대답을 했다.
무애대사의 말이 이어졌다.
“지랄! 그날은 광도 그놈이 술 처먹고 술주정을 부려서 그런 것이고. 그래도 내 새끼가 일하는 곳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때려 부술 수야 없지 않겠느냐? 내가 그래도 명색이 할아비인데 손자 녀석이 출세하는 데 방해가 되면 쓰겠냐?”
“……!”
광불이라고 불리는 무애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에 백우선사는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제10장 아수라(阿修羅)
감찰당의 금옥에서 풀려난 장거운은 영은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애대사와 함께 서호의 산책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장거운이 이곳 서호로 온 것은 지난번에 와 본 서호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나중에 꼭 두 분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저기 봐요. 석양이 정말 아름답죠?”
장거운이 가리킨 곳에는 뇌봉탑을 뒤로하여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서호의 풍경을 수도 없이 본 무애대사이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당당한 청룡무사가 된 장거운과 함께 바라보는 뇌봉석조는 흐뭇한 마음 탓인지 새삼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다시 장거운의 말이 이어졌다.
“아쉽다. 말코 할아버지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죠?”
“흠, 그러고 보니 그놈 면상 본 지가 꽤 오래되었구나. 하도 성질이 지랄 맞아서 무당산에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사는지 모르겠구나.”
무애대사도 둘도 없는 친구인 광도 곡운자가 은근히 걱정이 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곡운자를 떠올린 무애대사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장거운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에이, 말코 할아버지도 무당파에서 높으신 분이라면서요. 밥은 꼬박꼬박 챙겨 드실 거예요.”
“하기야 워낙에 식탐이 강한 놈이라, 천주봉 꼭대기에 있는 금전(金殿)의 기둥을 팔아서라도 밥은 챙겨 먹을 게다.”
“에이, 설마요. 무당파 도사님들이 잘 챙겨 주시겠죠.”
“글쎄다, 거운이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놈 원래부터 사문에서 구박을 많이 받는 모양이던데……. 에구, 늙으면 죽어야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무애대사의 표정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광불이라고 불리던 그도 장성한 장거운과 같이 서호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감상적인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두 분 다 정정하시잖아요.”
“정정하기는 이놈아, 성질머리만 정정하지, 이제는 온 뼈마디가 죄다 욱신거린다. 원래가 사물의 법이란 게 성할 때가 있으면 이지러질 때도 있는 법이야. 저기, 저 석양처럼 말이다.”
무애대사의 진지한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 장거운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헤,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하시니까 왠지 안 어울려요.”
“이놈이, 나라고 천년만년 살 것 같냐?”
“예, 할아버지는 그러실 거 같아요.”
“허, 이놈이……. 그래, 지내 보니 무림이란 곳이 어떠냐?”
무애대사의 물음에 장거운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요, 처음엔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조금 힘들어요.”
“왜? 대환단 먹고 이젠 내기도 제대로 뿜어낸다며? 그러고 보니 네 녀석 기도가 많이 달라졌구나.”
“그래서 더 힘들어요.”
늘 쾌활하고 밝은 모습의 장거운이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을 하자 무애대사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장거운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해 보아라.”
“사실 저도 몰랐는데요, 싸움을 하다 보면 가끔 제가 정신을 놓아 버릴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싸움이 끝난 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 말이에요.”
“그야 네놈이 역근경과 같은 동공을 익혔으니 싸우는 중에도 무아지경에 들 수가 있는 게지.”
“저도 처음엔 그게 검전무아(劍前無我)의 요체를 깨달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는데요…… 지금은 점점 제 자신이 무서워져요.”
장거운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하자, 무애대사는 장거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장거운의 눈에는 살짝 고통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무애대사는 남궁천호에게 장거운이 얼마 전에 힘든 경험을 했음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애대사가 자애로운 눈빛으로 장거운을 보며 물었다.
“이번에 있었던 하가장의 일 때문에 그러느냐?”
“예, 그냥 처음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는데, 문득 깨어 보니 제가 아수라가 되어 있었어요. 그저 싸움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젠 내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더 많은 사람을 해하게 될까 봐 무서워져요.”
“아수라의 길이라…….”
무애대사는 장거운의 말을 듣고 나서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장거운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가지게 되는 것으로, 무공을 익히게 되면 싸움을 좋아하고 파괴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장거운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할아버지도 그걸 아세요? 전 제 자신 속에 아수라가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사람은 누구나 아수라를 품고 살아가지.”
“모든 사람이요?”
“비록 그 형태나 발현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아수라는 잠들어 있다. 그 아수라가 마라의 속삭임을 듣고 깨어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한 세상이 곧 아수라장인 것이지.”
묵묵히 무애대사의 말을 듣고 있던 장거운이 여태껏 보지 못한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그 아수라를 없앨 수는 없나요?”
“너는 아수라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싸움과 파괴의 귀신요.”
무애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수라를 두고 다툼의 신이라고 하지. 하면 다툼은 왜 일어나느냐?”
“그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좋다. 가령 네 옆에서 굶어 죽어 가는 가난한 아이가 간신히 한 접시의 만두를 구하여 먹으려고 할 때, 배불리 먹은 부잣집의 아이가 그 만두를 뺏으려 한다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그야 당연히 부잣집 아이를 나무라야지요.”
장거운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무애대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러면 넌 다툼을 벌여야 하겠구나. 다툼은 왜 일어났느냐?”
“흠, 부잣집 아이가 욕심을 부려서요.”
장거운은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무애대사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네가 그냥 모른 체했다면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그것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면 그 가난한 아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래, 힘없는 그 아이가 불쌍하지. 그래서 넌 힘이 센 부잣집 아이와 다툼을 벌였고. 그러한 다툼도 결국은 아수라의 다툼이지 않느냐?”
“그건…….”
무애대사의 말에 장거운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당한 다툼이라고 하더라도 다툼인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무애대사의 말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한 다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다툼 역시 아수라의 다툼이라는 것이 무애대사의 말이었다.
장거운이 자신이 말하는 바를 알게 된 것 같아 보이자 무애대사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러한 아수라의 길이라면 걸어 볼 만하지 않겠느냐?”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수라가 제 뜻대로 길을 가지 않으면요?”
대답을 하는 장거운의 표정에는 여전히 두려운 빛이 남아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여 위안을 삼기엔 하가장에서의 살육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애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스스로 아수라를 길들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우냐?”
“조금은 그래요.”
장거운이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말을 하자 무애대사가 갑자기 불경의 한 구절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가 저를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불경의 한 구절을 듣고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며 무애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이 시구가 불방일(不放逸)을 하라는 가르침임을 알 것이다. 아수라를 길들이는 것 또한 그러하다. 네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방만한 마음이 생긴다면, 마라의 속삭임은 언제든지 너를 찾을 것이다.”
“불방일…….”
장거운이 불방일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방일(放逸)이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러한 방일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계속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무애대사의 설법이 이어졌다.
“그래,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정진을 해야 한다. 또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행동에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아함경에 이르기를, 탁발을 떠난 석가세존에게 농사를 짓는 바라문이 뭐라고 힐난하였더냐?”
“스스로 밭을 갈아 씨앗을 뿌려 곡식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힐난하였습니다.”
“하면, 세존께서는 뭐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라문이 다시 ‘사문이여, 우리는 누구 하나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소. 대체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의 소는 어디에 있소? 당신이 밭을 간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나는 묻고 싶소’라고 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信仰]이요, 내 모습은 지혜가 그것이다. 나날이 악업(惡業)을 제어하는 것은 곧 김매는 작업이며, 내 소는 무엇이냐 하면 정진(精進)이 그것인 바, 이 소는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가 물러섬이 없고, 또 그 행한 결과에 대해 뉘우쳐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이 내 농사요, 그 수확은 감로의 열매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애대사와 장거운의 문답을 통한 설법이 끝이 나자 장거운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길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하가장의 일은 자신의 수양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었다. 어쩌면 최근에 자신의 무공이 급증하면서 한순간에 방일한 마음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청룡무사로서 자신의 행동이 정의롭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해 나간다면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아수라를 자신의 의지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곧 협사의 길이었고, 장거운에게는 아수라의 길이었다.
무애대사가 장거운의 표정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아수라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세존과 같이 남들이 어떠한 힐난을 하더라도 스스로의 행동에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정진하여, 매사를 행함에 물러섬이 없고 결과에 뉘우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아수라를 길들이는 것이다.”
“예, 한번 제 속에 사는 아수라를 이겨 내 볼게요. 그래서 제대로 아수라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래, 언제라도 다시 마라의 속삭임이 들려오거든 다음과 같이 외쳐 주어라.”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고는 무애대사는 마라의 속삭임에 대항하여 석가세존이 외쳤다는 구절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를 벗어났도다.
나는 악마의 사슬을 풀어 버렸거니
파괴자여, 그대는 패하였도다.
장거운은 무애대사가 들려준 구절을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그만 가자꾸나.”
무애대사가 장거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거운이 약간은 밝아진 표정으로 나란히 그 옆에서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이미 해가 져서 어둑해진 서호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다정한 두 조손의 대화가 서호의 잔잔한 물결이 부딪히는 소리에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네놈이 익힌 무공을 다 펼칠 수 있는 게냐? 말코의 삼재검법도 되더냐?”
“다른 건 대충 다 되는 것 같은데 말코 할아버지의 삼재검법은 안 해 봐서 모르겠어요. 근데 저 할아버지, 경공법 좀 가르쳐 주세요.”
“경공? 내가 능공천상제, 연대구품, 이런 거 안 가르쳐 줬냐? 다 가르쳐 줬을 텐데……?”
“한 번도 안 가르쳐 줬거든요!”
“그러냐? 쩝, 가자! 그까짓 거, 몽땅 다 가르쳐 주마!”
“헤! 진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