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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오메가 1권
1화


돼지 축사에서 업무를 보던 30대 농장주가 급사했다.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보건 당국은……으로 첫 문을 뗀 단신은 그날 뉴스의 말미에나 스치듯 보도됐었다. 단신이 보도되던 당시, 타이밍 참으로 나이스하게도 나와 차영민은 기세 좋게 제육볶음을 해치우고 있었다.
양념에 벌겋게 비벼진 밥 한술을 퍼서 입에 넣던 차영민은, ‘돼지를 통한 감염 어쩌고’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입안으로 반쯤 들어갔던 숟가락을 꺼내 밥알 위에 얹은 돼지고기 한 점을 슬그머니 그릇 옆에 버렸었다. 차영민의 어머니가 손 크게 만들어 주신 제육볶음 접시가 이미 반 이상 비워진 후였지, 아마.
족히 한 근은 먹어 치워 놓고선 이제 와 어쩌지 어쩌지, 갖은 유난을 떠는 꼴이 모르고 보면 딱 죽을 날짜를 손에 쥔 시한부 꼴이었다. 하는 짓이 우스워 숟가락으로 차영민의 이마빡을 한 대 갈겼더니 악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차영민은, 합의는 꿈도 꾸지 말라면서 눈을 부라렸었다.
가운뎃손가락을 한 번 내민 뒤 차영민의 앞짱구에 닿았던 숟가락을 교복 셔츠에 대충 문지르곤 제육볶음을 크게 한술 펐었다. 맛만 좋다, 빙구야. 차영민은 찝찝하지도 않느냐고 입을 삐죽였으나 결국엔 둘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남은 제육볶음을 모조리 싹싹 비운 다음 남은 것 더 없냐며 빈 그릇을 내밀었더랬다.
그때엔 나도, 차영민도, 아니 세상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34세 박 모 씨의 시신이 재앙의 숙주가 되리라는 것을, 그의 죽음이 세상을 반쪽으로 갈라놓으리라는 것을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으로 묶이지 못하고 떠내려 가 버린 젊은 돼지 농장주의 죽음이 돋을새김처럼 세상에 다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농장주가 급사한 채로 발견되었던 돼지 축사, 그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교외에서 살던 부부가 돌연사를 했다고 한다.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두 건의 의문사가 남긴 시신에는 뚜렷한 공통분모가 있다고도 했다. 성별도, 나이도 다른 사자(死者)들의 온몸엔 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괴질이 찍고 지나간 발자국이었다.
말미에 단신으로 보도되는 대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두 번째 돌연사는 이내 세 번째, 네 번째…… 후엔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속보로 이어졌었다. 돼지 축사를 중심으로 거대한 반경의 원을 그리며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21세기 흑사병이 창궐했다. 당국은 백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하 생략……. 병원체도, 감염의 경로도 뚜렷하지 않은 신종 바이러스엔 듣는 약도 없었다. 붉은 반점으로 얼룩진 목덜미는 괴질이 보내는 죽음의 메시지였다.
감염자의 대부분은 발병 직후 수 시간 내에 사망했고, 그보다 질기게 숨을 이어 온 이들도 채 나흘을 넘기지 못했다. 치사율은 한없이 100에 수렴해 갔다. 병원으로 실려 갔던 감염자 중 생의 구역으로 되돌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붉은 반점은 한 번 붙잡은 제 숙주의 몸을 기어이 땅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희망이라곤 개미 담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기사들이 연일 쏟아졌다. 전이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으나 보건 당국에서 내놓는 대응책이라곤 손을 깨끗이 씻어라, 당분간은 각종 모임을 자제해 달라 등의 시원찮은 것들뿐이었다. 요컨대 우린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지키란 말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 서서 목덜미부터 살폈다. 뒷머리에 덮인 살갗이 하얀 것을 확인해야만 밤 동안 어깨에 이고 있던 불안증이 가셨다.
연이어 입고 있던 잠옷 상의를 훌렁훌렁 벗어 눈에 보이는 모든 부위를 샅샅이 더듬었다. 침대에 눌린 자국이나 실금처럼 죽죽 가 있을 뿐 여전히 허여멀건 한 맨살의 탐사가 끝나면 그제야 휴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루 연장된 행운에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 교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걷다 보면 저쪽에서 차영민이 나타나, 이 판국에 왜 휴교는 안 하냐, 삼겹살을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어언 두 달 전이다 하며 징징거렸다.
나는 교복 주머니에서 꺼낸 두 개의 마스크 중 하나를 차영민 귓바퀴에 걸어 주었다. 차영민은 숨 쉬기 답답하다고 찌질거리면서도 한쪽 귀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마스크를 똑바로 고쳐 썼다. 마스크 끈이 걸린 나와 차영민의 귓바퀴 위로 여름 아침의 더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주 7일 근무에 연차도 모르는 부지런한 병마는 첫 사망자를 낸 지 수 달 만에 소지역 주민의 반을 집어삼켰다.
생존자들이 전부 빠져나와 망령의 헛헛한 신음만이 휘돌던 그곳엔 방역을 위한 연무가 짙게 깔렸다고 한다. 소독차 꼬리에서 폭포처럼 터져 나와 대기를 뿌옇게 채색한 연기. 유백색의 독한 안개에 감긴 마을 위로 장대비가 무겁게 쏟아지는 전경의 사진이 이틀간 포털의 메인을 장식했다. 지각할세라 빠르게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나와 차영민의 우산 위에도 굵은 빗방울이 타닥타닥 튀었다.
지루한 장마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전염병이 그러하듯, 붉은 반점의 괴질 역시 습한 날엔 전이 속도가 한층 더 빨랐다. 꽉 뭉친 더위와 꿉꿉한 습기에 등 떠밀린 병원체는 꽃 달고 질주하는 광년이처럼 널을 뛰었다.
비에 젖은 길을 걷다 보면 스산한 사이렌 소리를 사방으로 뿜으며 질주하는 응급차의 릴레이 행진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래 지역에 위치한 학교들엔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우리 반에도 하나둘, 조회 시간에 가방이 걸리지 않는 책상의 수가 늘었다. 담임선생님은 결석자들이 며칠 안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 말했지만 한번 생긴 교실의 공백은 끝내 채워지지 못했다.
공고된 바는 아니었으나 우리 학교에도 이번 주 내로 휴교령이 떨어지리란 것은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줄초상을 겪은 거리엔 그늘이 드리웠다. 마스크를 콧대까지 올리고 성마른 걸음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선 짙은 불안의 냄새가 났다. 아직은 비감염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기에 폭동이 도시를 덮치는 일은 없었으나 사람들은 시시각각 부패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당장 몇 시간 뒤의 안녕을 장담하지 못했다. 어찌 손써 볼 틈도 없이 호흡을 뚫고 몸 안으로 번져 드는 전염병 앞에서, 생존자들은 죽음을 한시적으로 유예받은 시한부에 불과한 거였다.
꼬박꼬박 학교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긴 했으나, 옆 반 누구누구가 오늘 아침 호흡기를 뗐다더라, 교감 선생님도 아까 실려 갔다더라 하는 말들이 오가는 중에 교과서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러다 총각 딱지 떼기 전에 죽으면 천국도 못 가고 몽달귀신으로 천년만년 구천이나 떠돌게 될 텐데, 흑흑, 하고 책상에 엎드려 우는 시늉을 내자 옆에 앉은 차영민이 나를 따라 뺨을 책상에 바짝 붙여 시선을 맞추곤 빙구같이 웃었다.
소수 인종 오메가의 주변에 둘러쳐진 유리 벽을 기꺼이 뚫고 들어와 나를 감싼 차영민의 빙구 웃음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그럼 이 형이 우리 안진우 숫총각 딱지 좀 떼 줄까?”
“오냐, 오늘 어디 차영민 등짝 좀 보자.”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느물거리자 차영민이 빙구 표정을 지으며 넙죽 웃었다. 그러곤 상체를 일으켜 의자에 제 등을 기댄 뒤, 밑으로 축 늘어져 있는 내 팔을 괜스레 툭툭 치대기 시작했다.
“됐고, 억제제 간수나 잘 하셔. 나한테 뺏기고 난 뒤에 울고불고하지나 말고.”
“그거 가져가서 뭐하시려고. 어차피 넌 마시지도 못하는 거.”
문득 팔 언저리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책상에 묻었던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커다랗고 까무잡잡한 두 손에 붙들린 팔뚝에 차영민의 가지런한 치아 끝이 살짝 박혀 있었다.
“뭐하긴. 발정 나서 따먹어 달라고 엉엉 우는 안진우 잡아먹어야지이.”
남의 팔뚝 하나 물고 웅얼거리는 통에 다 뭉개진 발음으로 차영민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지랄 말라며 손가락으로 엿을 날렸건만, 내 허연 팔뚝에 딱 꽂힌 차영민은 물러설 기색 없이 제 이빨에 박힌 살갗을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씹어 댔다.
“야야야, 침 묻었잖아. 아, 진짜 더러워 죽겠네.”
가볍게 신경질을 부리며 차영민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던 때, 갑자기 교실 앞문이 열리며 담임선생님과 두어 명의 낯선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입장해 교탁 부근을 차지한 낯선 남자들은 크고 작은 녹색 무늬가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고 거북이 등껍질 같은 군모를 쓰고 있었다. 한 일 자로 입을 꾹 다문 채, 교실 전면을 주욱 훑어보는 남자들의 두 눈에는 서슬 퍼런 이채가 고여 있었다.
낯선 이들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소란이 일었던 교실은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쓰다듬고 지나는 고압적인 시선에 금세 조용해졌다.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남자 한 명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오메가들은 지금 즉시 운동장으로 집합합니다.”



어림해도 한 시간은 족히 달린 것 같은데 관광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사위는 여전히 침침한 오렌지빛 조명에 잠겨 있었다.
구렁이 십이지장처럼 어둑한 터널 내부를 희미하게 비추는 조명등이 주홍색의 긴 선을 그리며 뒤로 물러가고, 나타나고, 물러가고를 반복했다. 천장에 딱 붙어 무기력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 환기구도 드문드문 보였다. 없던 폐소공포증이 생길 만큼 징그럽게 길고 긴 터널이었다.
창문에 딱 붙였던 이마를 들어 버스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나처럼 사전 예고 없이 갑작스레 불려 나온 듯, 다른 오메가들 역시 불안한 낯빛으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좀 더 꺾어 버스 뒤에 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남고의 오메가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모아 태운 버스 뒤로, 아마도 타교의 오메가들이 실려 있을 버스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 딸려 따라오고 있었다.
조용히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위장이 파도를 탄 듯 꿀렁였다. 멀미를 할 것만 같았다.
차영민에게 전화라도 할까 싶어 핸드폰을 들었으나 버튼을 눌러 활성화한 화면엔 통화 불가능 지역이란 알림 창이 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길쭉한 터널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여태껏 핸드폰은 계속 불통 상태였다. 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곤 눈을 감았다.
두어 시간 전인가.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차영민의 얼굴이, 감은 눈 위에 파르라니 떠올랐다.
‘오메가들은 지금 즉시 운동장으로 집합합니다.’
거리의 주를 차지하는 알파 혹은 베타와 달리 오메가는 그 수가 적었고, 우리 반에는 오직 나 한 명뿐이었다.
남자의 말에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려 하는 나를 차영민이 얼른 붙잡아 앉혔다. 그러나 시선의 폭이 넓고 시야의 각이 날카로운 군인은 내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학생, 오메가입니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니라 발뺌한들, 생활기록부에 퍼런 잉크로 찍혀 있는 ‘오메가’ 날인마저 위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두 번 말하게 하지 않습니다. 운동장으로 집합합니다.’
찍어 누르는 듯한 그 명령에 뭐라 입 한번 벙긋 못한 채 가방을 주섬주섬 갈무리했다. 바지 주머니에 덜렁 넣어 뒀던 억제제를 꺼내 휴지에 돌돌 만 다음 가방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억제제는 오메가가 가장 소중히 챙겨야 할 물품 1순위였다. 가방을 추스르는 손끝이 잘게 떨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야밤에 떨어진 부당한 집합을 따져 묻기는 고사하고, 왜요? 그 한마디를 꺼낼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느린 동작으로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데, 차영민이 손을 번쩍 들고 내 대신 남자들에게 물었다.
‘갑자기 오메가들은 왜 부르는 건데요?’
차영민의 다소 신경질적인 질문을 묵묵부답으로 치워 버린 남자 옆에서, 담임선생님이 앞니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따가 말해 주겠지만, 굉장히 좋은 일이란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려무나.’
나와 타 반의 오메가들을 운동장에 줄지어 세웠을 때에도, 그리고 길쭉한 관광버스에 짐짝처럼 태우는 도중에도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좋은 일이라고요? 그게 뭔데요?
그러나 버스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그녀의 불분명한 태도에서 나는 불길한 징조를 본능처럼 읽어 냈다.
별일이야 있겠어, 기껏해야 단체 방역 정도나 하고 말겠지. 고개를 털어 불안을 떨치려 해도 자꾸만 뒷목이 긴장감으로 뻐근하게 당겼다.
애초 알파도 베타도 아닌, 세상의 유리 천장 아래에 위치한 오메가들만을 불러 놓고 할 수 있는 좋은 일이라는 게 있을까 싶었다. 사념은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잔가지를 뻗어 갔다.
“어? 뭐야, 저거?”
누군가의 둔탁한 비명 소리에 눈을 떴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1학년 한 놈이 창문에 얼굴을 들러붙인 채 연신 저거 뭐야, 저거 뭐야 하며 신음을 흘렸다.
“밖에 이상한 게 돌아다녀요. 괴물 같은 거.”
그의 헛소리는 방아쇠였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모두가 각자의 좌석 칸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오렌지빛이 벽을 타고 흐르는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낱낱이 살폈다. 그러나 조명등은 여전히 침침했고 환기구는 여전히 답답한 속도로 돌고 있을 뿐, 그 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멀미 때문에 잘못 본 것입니다. 그리 확답을 내린 뒤 군인은 1학년에게 멀미약을 건넸다. 그는 찰나 머뭇거렸으나 이내 그것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제가 잘못 본 것임을 얌전히 시인했다. 꿀떡꿀떡.
1학년의 입에 물린 멀미약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끼워진 병목을 지나 축축한 혀를 거쳐 목젖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갈 즈음 창문에 날파리처럼 붙어 있던 오메가들은 전원 제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차례의 소동을 겪은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지금껏 달려온 만큼, 그 이상, 오래도록 긴 긴 터널을 가로질러 달렸다.
끼이익.
버스의 냉방이 끌고 온 약간의 한기와 몸을 뒤덮은 불안감으로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는데, 영원히 달릴 것만 같았던 버스가 스르륵 멈춰 섰다. 창밖엔 여전히 광도가 낮은 오렌지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터널 중간쯤 온 것일까. 바뀐 것이 없는 풍경에 설마 도착했으리란 생각은 못 하고 얌전히 있었다.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아 무전기를 통해 치직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고 뭐라 뭐라 대화를 주고받던 예의 그 군인이 무전을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좌석 사이의 통로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라 했다.
‘터널 한가운데? 왜?’라는 의문은, 버스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해결되었다. 멈춰 선 버스 앞에는 거대한 크기의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가시거리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컸기에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다섯 걸음을 후퇴하고 나서야 철문의 전체 형상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터널 말미를 콱 틀어막고 있는 문은 어떠한 이물질의 침입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굳건히 닫혀 있었다.
버스에서 마지막 오메가까지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군인은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 문 옆에 달린 리더에 긁었다. 삐빅, 리더에 파란 글씨로 승인 표시가 뜨자 꽉 닫혀 있던 철문이 옆으로 부드럽게 밀려났다.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헐…….”
수만 가지 감정이 압축된 음절 하나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초현실적인 광경에 놀란 것은 나뿐이 아니었던 듯 등 뒤가 소란스러웠다.
군인은 이번에도 우리를 움직이는 짐짝 취급했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곳, 철문 너머의 세상에서 흘러나온 백색 빛이 우리의 발치를 적시고 있었다.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운동장에서 버스로 순순히 자리를 옮겼던 오메가들도 이번만큼은 쉬이 발을 떼지 않았다.
탄도 미사일을 때려 부어도 멀쩡할 것 같은 철문 안, 저곳으로 몸을 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다. 저 안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면 다시는, 다시는 제 의지로 밖에 나올 수 없으리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관통했다. 위험해. 저 안은 위험해. 몸 어딘가에서 날카롭게 돋아난 촉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습니까? 내 말 못 들었습니까? 빨리 들어갑니다!”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널 벽을 두드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무서운 기세로 다그치는 군인 앞에서도 우리는 운동화 바닥을 땅에 붙박은 채 버텼다. 무엇보다, 우린 아직도 반강제적인 연행의 이유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 버스의 뒤차에서 내린 타교의 안경남 하나가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넓게 벌어진 철문 안쪽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등지고 선 군인은, 우리의 미약한 반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울퉁불퉁한 미간 가운데 굵은 빗금이 움푹 파이는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고생했어요. 이곳은 백신 연구소랍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입에도 그 비슷하게 하얀색 마스크를 걸친 장신의 남자 하나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입술이 천근만근인 남자를 대신하여 용감한 안경남의 질문에 답한 것은 연구원이나 의사처럼 보이는 그 남자였다. 백신은 뭐고 연구소는 또 무슨 개소리야. 등 뒤의 웅성거림이 한층 더 크고 사나워졌다. 남자의 대답은 우리의 혼란만 더욱 가중시킨 셈이었다.
백신 연구소와 오메가.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의 극점에 있을 것만 같은 두 단어의 상관관계를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에 안경남이 다시 손을 번쩍 들었으나 닥치고 있으란 군인의 일갈에 그의 질문은 기각당했다.
옅게 일었던 소란이 사그라지자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마스크의 표면이 남자의 입술을 따라 울룩불룩 너울을 쳤다. 한 겹 막힌, 낮고 축축한 목소리엔 검푸른 희열이 녹아 있었다.
기뻐하세요,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문의 안쪽으로 들어간 뒤에야, 우리 등 뒤로 문이 굳게 닫힌 뒤에야, 사방이 막힌 오메가 수용소에 밀어 처넣어진 뒤에야, 그가 뱉은 장엄한 문장의 밑에 깔린 원 뜻을 알았다.
여러분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가 말한 세상의 온전한 주민은 알파와 베타였다. 알파와 베타의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란, 오메가의 배를 빌려 태어난 신생아들이었다. 아아, 아니, 그도 아니었다. 그들의 세상을 구하는 것은, 오메가가 출산한 신생아의 희고 뽀얀 뼛가루로 만들어진 백신…… 그것이었다.
저곳에 오메가가 있으니, 임신시키세요.
그들의 출산은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
촘촘하게 엮인 창살 너머에서 하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군인 무리를 향해 더없이 희락한 눈빛으로 그리 외쳤다. 나는 벌벌벌 떨리는 팔을 겨우 가누어 품 안의 가방을 꽉 끌어안고 등을 굽혔다.
영민아, 차영민, 차영민, 영민아…….
갈증에 타는 입으로 차영민을 쉼 없이 찾았다. 깨끗하게 정제된 백색 등이, 잔뜩 구겨진 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