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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내가 있는 방을 축으로 오른쪽에 붙어 있는 방이 비워졌다. 뺨이 푹 꺼지고 신경질적인 인상을 한 내 또래의 남자애가 바로 어제 아침까지 들어앉아 있던 방이었다. 유독 새된 비명과 앓는 소리가 거대한 울림으로 터지던 방이기도 했다.
유약한 성미를 가졌던 것일까. 옆방 주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송곳 같은 흐느낌을 터뜨렸었다. 철창 밖 복도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가드들에게 붙들려 심한 학대를 당해도 강요된 침묵은 이틀을 채 가지 못했었다.
옆방 주민은 알파를 저주하며 울고, 수용소 사람들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울고, 온몸의 수분을 모조리 쥐어짜 내 울며 자지러지곤 했다.
모두의 심경을 대신하여 발악하며 울던 옆방 주민의 방이, 대변된 울음의 진원지였던 그곳이 간밤에 비워진 것이다.
두 달여 간을 이곳, 연구소에 틀어박혀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약’의 제조에 성공한 오메가의 방이 비워진다는 것은 내가 알게 된 사실들 중 하나였다.
예상하건대 옆방 울보 주민의 아랫배는 끝끝내 체내 수정에 성공하고야 만 것일 터다. 마스크 남자의 손에 들린 측정기를 통해 임신이 확인된 그는 ‘제조실’에서 ‘배양실’로 신속히 넘겨졌겠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다가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곤 슬그머니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 들었다. 내 방을 둥그렇게 비추던 광원은 저만치 물러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낸 후 맨발로 창살 근처에 다가가 밖을 살폈다.
C 구역의 순찰을 마치고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가드의 등판이 희끗한 탐조등 불빛을 만나 복도에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끼이익, 쿵. 구역과 구역을 나누는 게이트가 열렸다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열을 센 뒤 몸을 굽히고 앉아 침대 밑을 더듬었다. 여기쯤일 텐데 어디 있지, 생각하는 찰나 손가락 끝에 매끈한 감촉의 물체가 닿았다. 매트리스 밑에 테이프로 붙여 고정해 뒀던 유리병을 힘주어 뜯었다.
손에 들린 유리병의 무게는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여 절반도 채 나가지를 않았다. 박카스 크기만 한 유리병에 담긴 억제제는 두 번의 히트사이클을 거치며 반 이상이 동나 버린 거였다.
병 속에서 가볍게 찰랑이는 억제제의 표면이 유리병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한 번의 주기에 한 병이 정량인 것을 감안한다면 죽어라 아껴 마시고 있는 거였으나, 비워져 가는 병을 보며 나는 나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 주기 때 조금 덜 마실걸, 반 정도 남았을 때 물을 조금 채워서 양을 늘려 놓을걸.
담수에 농도가 희석된 억제제가 과연 온전한 효능을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유리병을 두 손에 꽉 쥐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만치의 양이라면 다음 주기 때엔 결국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적량을 쪼개고 쪼갠 한 모금의 억제제조차 마시지 못한 나는 오메가로서 완전히 각성하여 몸을 활짝 열겠지. 길이 열린 몸 안으로 알파의 씨가 들어오고, 체내 수정이 되고, 나는 살아 있는 캡슐이 되어, 수 달 후 온전히 알파와 베타에게만 허락된 세상에게 약을 주게 되겠지.
끔찍한 일이었다. 부성애 같은 것을 알 만한 나이도 처지도 아니었으나, 그런…… 그런 건,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 번에 마시는 양을 조금 더 줄여야겠다, 생각하며 접착력이 많이 떨어진 투명 테이프를 유리병 표면에 다시 붙이곤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 유리병은 원래 붙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침대에서 몸을 떼어 낸 후 어두운 방 안을 무릎과 두 손으로 기어 벽에 다가갔다. 눈을 가늘게 떠 어둠에 묻힌 달력을 살폈다. 다음 히트사이클 주기는, 사흘 뒤였다.



여러분, 여러분의 노고 덕에 감염자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답니다. 하늘엔 흰 비둘기가 날고, 백신에 의지하여 병마를 이긴 이들이 퍼레이드를 벌인 거리는 그들이 뿌린 꽃비로 화사하게 물들었지요. 악몽의 찌꺼기가 물러간 자리엔 봄이 들어찼고, 방역 연기에 묻혔던 마을 바닥에 깔린 벽돌 사이에 연두색 떡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답니다. 여러분, 그러니 기뻐하세요.
마스크를 걸친 남자는 방마다 돌며 오메가들에게 그리 말했다. 물론 바깥세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의 말에 미소 지은 오메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알파와 베타가 돌려받은 천국은, 우리가 갇혀 있는 무간지옥을 밑동 삼아 재건된 낙원이었다.
하얀 마스크 남자는 오메가 수용소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2주에 한 번씩,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우리를 진찰했다. 흰 마스크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라텍스 장갑을 낀 남자의 손엔 오메가의 체내 수정 여부를 알 수 있는 측정기가 들려 있었다.
가드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웃통을 까인 오메가의 하복부에 마스크 남자는 측정기를 갖다 댔다. 삐이, 측정기에서 나는 알림음은 배 속 수정체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였다. 달걀을 품은 닭으로 신분이 격상된 오메가들은 새벽에 조용히 배양실로 옮겨졌다.
배양실에서 3주 만에 돌아온 통로 맞은편 방 주민, 예의 그 용감한 안경남이 창백한 얼굴로 배양실에서의 일을 얘기해 줬다.
“배양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열 달이나 기다릴 수 없다면서…… 연구원 몇 명이 붙어 오른팔에 링거를 꽂는 거야. 나는 또 무슨 포도당이나 비타민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관을 통해서 내 팔에 주입된 그게 뭔지 알아? 촉진제였어, 촉진제……. 열 달 걸릴 것을, 단 2주로 말도 안 되게 압축해 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을 재앙으로 적신 바이러스의 감염 속도는 날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 형국이라 했다. 오메가의 출산까지 열 달을 손 놓고 기다렸다간 세상이 붉은 반점으로 괴멸해 버릴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 이들이 꺼낸 해결책이 바로 촉진제였다.
오메가의 배 속에 태를 안고 들어앉은 ‘약’이 한시라도 빨리 알파와 베타의 입에 들어가도록 도울 촉진제. 열 달에 거쳐질 일을 단 2주 만에 마치고 세상 밖에 나온 ‘약품’들은 출생과 동시에 공장으로 운반되어 곱게 갈린다고 했다.
안경남은 텅 비어 납작해진 배를 안고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그러나 안경남의 먹먹한 울음소리는 때마침 히트사이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잡아먹혀 이내 스러졌다.
귓구멍을 쑤시고 들어오는 위협적이고 가혹한 파동의 경고음. 사이렌이 울리면 백색 등으로 희게 발하던 공간에 붉은 빛이 소나기처럼 내렸다. 예전에 옆방 주민 울보는 빨갛게 변한 조명이 쏟아 낸 빛으로 일렁이는 오메가 수용소가 꼭 홍등가 같아서 토 나온다는 애기를 했지.
나는 가드를 선두로 앞세운 알파 무리가 오기 전, 서둘러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유리병을 꺼내 억제제를 반 입 정도 털어 넣고 혀를 굴렸다. 몸 깊숙한 어딘가에서 살그머니 피어오르던 불씨가 가라앉았다. 워낙 적은 양을 섭취한 탓에 열기의 여진이 조금 남아 있는 것도 같았으나 다행히도 각성하지 않을 정도의 양은 되는 듯했다.
우우우우우웅.
고개를 들어 핏빛 소리를 온 곳에 뿜어내고 있는 사이렌을 바라보았다. 사이렌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바쁘게 돌며 외치고 있었다.
히트사이클이 왔어요. 오메가들이 몸을 열고 다리를 벌려 발정하는 날이 왔어요.
이곳에 오메가가 있으니, 임신시키세요.
일정한 간격으로 텀을 두고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잦아들 무렵, 곳곳에서 열기에 젖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은 양의 억제제로 간신히 발열을 억누른 나를 제외한 오메가들이 히트사이클의 주기에 들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정 주기에 몸이 묶인 오메가들은, 마스크 남자의 작품이었다. 원래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이란 개개인마다 발생 시기도, 주간의 길이도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체계적인 관리’를 외치며 어린애 팔뚝 굵기의 주사를 오메가들의 혈관에 꽂아 넣고 그 안에 든 약을 남김없이 투여했었다.
강제로 투약된 액체는 극심한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일주일간 이마에 신열이 붙었다. 약을 맞은 직후 이틀 동안은 진득한 토기가 계속 올라와 물 한 모금 넘길 수도 없었다. 그 독한 약은 맥을 타고 사지를 돌며, 제각각 다르던 오메가들의 발정 주간을 마스크 남자의 입맛대로 재배열해 놓았다.
바깥세상에 살 땐 알파에게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억제제를 마셨다. 이곳으로 끌려와선 제때제때, 정해진 시간에 알파의 체액을 받고 약을 제조하기 위해 주사바늘을 맞았다. 배에 잉태한 약을 조금이라도 빨리 출산하기 위해 우리의 혈관은 촉진제를 받아 마셨다.
성분이 의심스러운 약물에 몸이 사위어 가는 만큼 영혼에도 금이 갔다. 깨어지고 부서진 영혼 파편들은 사이렌이 뿜어내는 붉은 빛에 흔적도 없이 갈려 나갔다.
나는 아직 미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차영민을, 차영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부질없는 희망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오래전 광증에 정신을 내줬을 거였다.
저 멀리서 게이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여러 명의 질서 정연한 발소리가 차츰차츰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알파 군인들로 이루어진 종마 무리. 천한 소수 인종 오메가의 배에 인류를 구원할 약의 씨앗을 친히 심어 줄 고결한 태생의 이들이었다.
내밀한 과정을 거쳐 차출돼 이곳까지 온 알파 군인들은, 사방에서 퍼져 나오는 오메가의 체향에 취해 헐떡이고 으르렁거렸다. 욕망에 감겨 사납게 번들거리는 눈알 몇 개가 철창 너머의 나를 더듬었다.
오메가들의 방이 닭장처럼 촘촘히 붙어 있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여러 명의 오메가가 한꺼번에 뿜어내는 발정의 체향은 넓지 않은 C 구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달콤하고 진득한 향취의 회오리는 내 체향의 부재를 덮고도 남을 터였다.
향에 취한 군인들은 당장이라도 철창을 깨부수고 우리를 안고 싶어 했으나 아직 남은 절차가 있었다.
가드는 열쇠로 문을 따고 안에 들어와 나를 침대에 눕히고 두 손목을 철제 헤드에 사납게 결박했다. 혹, 우리의 날카롭게 선 손톱 끝이 알파 군인들의 살에 연약한 열상이나마 남길까 하여. 내 손목에 칭칭 감긴 끈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가드는 밖에 서 있던 알파에게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나치게 조금 마신 억제제가 제발 제 몫의 효과를 해내 주기를 기도했다.
삐걱, 알파 군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철제 침대가 날카롭게 울었다. 양옆으로 넓게 벌어진 무릎 사이에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자리 잡았다. 끼익, 끼익, 녹슨 스프링 소리가 귀를 긁었다.
으으으, 앓는 소리가 옅게 샜으나 얼른 아랫입술을 물어뜯어 가며 참았다. 아아, 금이 가 있던 영혼 한 조각이 기어이 쭈욱 찢어져 나갔다. 눈을 감았다. 물에 젖은 속눈썹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천천히, 의식을 놓았다.



2주가 지났으나 옆방 울보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수용소 주민은 울보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즈음에는 체내 수정이 확인되어 배양소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오메가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죽은 걸까?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가드가 떠난 틈을 타, 맞은편 방에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텅 빈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안경남에게 말을 붙였다. 안경남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나를 나직이 바라보았다. 무기물 같은 두 눈동자와 시선이 맞물렸다.
눈을 뜨고 있으나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나를 보고 있으나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검은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벌써 두 번이나 배양실에 끌려갔다 나온 안경남은,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어 있었다.
“죽었냐고? 아니. 하지만,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거야.”
안경남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으나 아는 것을 내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오메가들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탁. 수용소를 환히 비추고 있던 백색 등이 소등되고, 폐쇄된 공간 특유의 묵직한 어둠이 깔렸다. 느린 속도로 침대 위에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취침 시간에 침대 위를 이탈했다가 야간 순찰을 도는 가드에게 재수 없이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어김없이 교육을 빙자한 학대를 받았다.
힘주어 눈꺼풀을 닫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차영민은 잘 지내고 있을까. 행여 병에 걸리지는 않았을까. 아니, 원래도 용가리 통뼈에 건강 체질이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차영민도 백신을 먹었을까, 우리가 이곳에서 알파와 몸을 섞어 조제한 그 백신을.
내가 여기 누워 청승을 떨고 있듯, 차영민도 나를 생각하며 청승을 떨어 줄까. 나는 네가 보고 싶은데. 너도 내가 보고 싶을까, 영민아.
눈가를 타고 옆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이불로 닦았다. 차영민의 이름을 부르며 옅게 흐느꼈다. 눈물을 뽑아낸 몸에 만성처럼 붙어 있던 신열이 떨어지고 한기가 몰려왔다. 이불을 둘둘 말고 옆으로 누워 몸을 구겼다. 팔과 입술이 병자처럼 으슬으슬 떨렸다.
피가 몰려 매운 코끝을 쿨쩍거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오로지 꿈만이 나를 위로했다. 운이 좋다면 오늘 꿈에선 차영민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복도 저편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야간 순찰을 맡은 가드의 발소리가 타박타박 울렸다.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 날이면 가드들은 복도를 두어 번 걷는 것을 끝으로 야간 순찰을 대충 마친 뒤 다른 구역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내 방 근처까지 걸어온 가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삐빅.
카드 키가 읽히는 기계음이 적막을 깼다. 무슨 일이지. 나는 분명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감았던 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가드가 잠금이 해제된 문을 손으로 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몸을 벽 쪽에 붙였다. 뚜벅뚜벅. 어둠과 모자의 그늘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드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한 손으로 모자를 벗었다.
“아……!”
모자의 그늘이 물러가며 드러난 얼굴에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던가.
거기에는 가드 유니폼을 입은 차영민이 서 있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차영민의 두 팔이 내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차영민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자 그리운 차영민의 냄새가 내게 확 끼쳤다.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재회는 고요했으나 내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아주 잠깐, 이대로 차영민의 품 안에서 문드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뜩이나 축 늘어져 있던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이었을 터다. 그러나 나는 그저, 그저, 차영민의 몸이 따뜻해서 좋았다.
나를 얼마간 안고 있던 차영민은 몇 분이 지난 후에야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제 품에서 나를 떼어 냈다. 그러곤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매트 위에 얹어져 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영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너 데리러 왔어, 진우야.”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친척 형이 여기 가드야. 이 옷도, 카드 키도 친척 형이 비번인 날 슬쩍한 거고. 자세한 얘기는 나간 다음에 해 줄게. 일단 나가자, 진우야. 여기서 나가자.”
차영민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그 안에서 제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가드 유니폼을 꺼냈다. 차영민의 도움을 받아 입고 있던 죄수복을 벗고 가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가짜 카드 키를 목에 걸고, 모자까지 꼼꼼하게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옷을 다 갈아입자 차영민이 서둘러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제 곧 교대 시간이야. 다음 조 순찰 가드가 오기 전에 얼른 나가야 돼.”
차영민이 이끄는 대로 잘 걸어가다가 활짝 열린 감방 문을 앞에 두고 잠시 멈췄다. 감방의 가장 마지막 지점을 딛고 있는 발이 바닥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달 전 이곳에 끌려와 처넣어진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감방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었다. 타성이 나를 감방에 묶어 놓은 거였다.
벌어진 문을 앞에 두고 주춤거리는 나를 차영민이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안진우!”
나지막하지만 날카로운 차영민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나가야만 했다, 차영민을 따라서, 차영민과 함께.
늦은 밤과 새벽 언저리에 걸쳐진 시간. 매일이 고되고 무기력한 오메가들은 모두 잠의 수렁 깊은 곳에 빠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감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려는 차영민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왜? 눈으로 묻는 차영민에게 잠들어 있는 안경남을 가리켰다.
“저 녀석도 데려가자.”
차영민은 잠시 갈등하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일단은 우리부터 나가야 돼.”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정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서글프고 미안한 심정으로 안경남을 한 번 돌아본 뒤에 군말 없이 차영민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나의 손목을 틀어잡은 차영민의 손바닥이 타는 듯 뜨거웠다.
두 다리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여전히 감금되어 있는 오메가들의 닭장이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수용소의 복도에도 끝은 있었다. 차영민은 목에 걸고 있던 친척 형의 카드 키를 리더에 긁었다. 삐빅, 스캔을 마친 리더가 승인 사인을 내자 게이트가 벌어졌다.
게이트를 걸어 나오는데 가슴이 묘하게 요동쳤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그 안에서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싱겁게 오메가 수용소, 지옥의 한 자락 같은 C구역을 빠져나온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직원들을 만날 수도 있어. 물론 야간 조는 인원이 적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차영민은 꽉 붙들고 있던 내 손목을 놓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뒤 최대한 각 잡힌 걸음을 유지하려 했으나 차영민을 따라 걷는 중간중간 무릎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허공을 잘못 디딘 발이 옆으로 꺾여 속으로 신음을 삼킨 것도 두어 번. 갖은 독물을 흡수하여 녹슨 몸은 여기저기 맛이 가 있었다. 두려움도 한몫했다. 만약 탈출에 실패하고 붙잡힌다면 수용소의 오메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터였다.
‘여러분, 도망가다 잡히면 이렇게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된답니다. 그러니 얌전하게 다리 벌리고 누워 알파 좆이나 물고 약이나 낳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