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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마스크를 쓴 남자는 모든 오메가들 앞에서 나를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학대하며 하얗게 웃겠지. 내가 내지르는 비명은 오메가들의 귓가에 생생히 박힐 터고, 갖은 기구로 잘 다져져 곤죽이 되어 버린 내 육신은 오메가들에게 선연히 각인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일었다.
긴장감 때문에 뒷목이 굳고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땀에 젖어 축축한 손을 몇 번이나 유니폼에 문질러 닦았다. 시야는 초점이 흐리게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만큼이나 내 옆에 선 차영민도 불안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침을 삼키는 차영민의 목울대가 자주 꿀렁였다. 긴장될 때면 으레 보이곤 하던 차영민의 버릇 중 하나였다.
서로의 체온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손을 잡고,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위로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나 야밤에 손을 꼭 맞잡은 가드 두 명의 모습이란 의심을 사기 딱 좋을 것이다. 하여 우리는 말없이 한 걸음, 한 걸음, 텅 빈 중앙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차영민의 말처럼 늦은 새벽의 중앙 홀은 퍽 고요하여 직원은 고사하고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달린 무인 카메라만이 바쁘게 움직이며 우리를 찍고 있었다. 그럼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중앙 홀을 벗어나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곳은 거대한 철문 앞이었다.
위압감이 깃들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켰다. 끔찍한 고통의 시작점이었던, 길고 긴 터널 안을 다시 헤매고 싶지 않았다.
“다른 길은 없을까? 꼭 여기로 나가야 돼?”
나의 절박한 물음에 차영민은 고개를 저었다. 바깥과 이곳 백신 연구소 겸 오메가 수용소를 잇는 통로는 단 하나, 바로 저 터널뿐이라고 술 처먹은 친척 형이 주사를 부리며 흘리듯이 애기했던 것을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했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 한 다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철문을 열고, 침침한 주황색 조명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걸어 나갈 수 있는 길이의 터널이 아니야.”
내 말에 차영민은 씨익 웃으며 철문 옆에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손바닥으로 밋밋한 벽 한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가벼운 기계음이 울리며 벽의 일부분이 위로 올라가고 안쪽 공간에 숨겨져 있던 가드 전용 바이크 네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하나를 골라잡은 차영민이 냉큼 시트에 앉아 내게 손짓했다.
“야, 타!”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목을 조여 오고 있는 이 순간에조차 차영민은 세기말 유행어를 내뱉으며 산뜻하게 깐죽거렸다. 그런 너를 보며, 나 역시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기밀이란 기밀은 조카한테 다 불었네.”
“어쩌겠어, 우리 사촌 형 주사가 술 처먹고 입 털기인데. 사람이 죄냐? 술이 죄지. 야, 헬멧 없어서 위험하니까 내 허리 잘 잡고 있어.”
나는 얼른 차영민의 뒷좌석에 앉아 두 팔로 차영민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새끼한테 오토바이 면허증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으나, 차영민은 이미 가드 유니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를 꽂아 시동을 걸고 있었다. 하긴, 무면허 운전의 위험성에 대해 따질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시동이 걸린 것을 확인한 차영민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바이크를 몰아 철문의 개폐 장치에 다가갔다. 심장이 또다시 쿵, 쾅, 쿵, 쾅.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차영민이 모는 바이크를 탄 채 터널을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몇 달간 지속되었던 악몽이 비로소 끝나는 거야.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겁니까?”
철문의 리더가 차영민이 긁은 카드 키를 읽고 있는 찰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화드득, 고개를 돌렸다. 중앙 홀 저 멀리서 우리와 같은 가드 유니폼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씨발. 차영민이 욕을 씹었다. 중앙 홀은 넓었으나 남자는 빠른 속도로 우리와 가까워졌다. 나와 차영민의 얼굴이 가시거리에 들어오자, 남자의 표정은 ‘미심쩍다.’에서 ‘저 새끼들 잡아야 된다.’로 바뀌었다. 남자가 화통을 삶아 삼킨 목소리로 우리에게 외쳤다.
“두 사람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인데. 가드 코드를 대십시오!”
철문이 열렸다. 차영민이 지지 않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꽉 잡아!”
끼기기기긱. 미끄러운 바닥과 바이크의 바퀴가 거세게 마찰하며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일었다. 동시에 나와 차영민을 실은 바이크가 튕기듯이 철문 사이를 통과했다. 갑작스러운 출발의 반동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티며 차영민의 허리를 감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실었다.
터널의 끝에 박혀 있는 철문이 미친 속도로 멀어졌다. 나와 차영민의 주변을 흐르는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깊게 눌러썼던 모자는 이미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빨간색의 계기판 바늘이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치달아 갔다.
좌석에 제대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차영민은 용케도 바이크를 터널 한구석에 꼴아박지 않고 죽어라 액셀을 밟았다.
나는 목을 꺾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쫓아오던 가드가 반 넘게 닫힌 철문 너머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으나 귀를 찢는 바이크 소음에 먹혀 들리지 않았다. 이내 철문은 완전히 닫혔다. 추적의 징조는 없었다. 가드는 우리를 포기한 것일까.
저만치, 터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만 빠져나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
이상한 일이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패륜적인 비밀을 품고 있는 연구소치고는 경계가 지나치게 허술했다. 모든 것이 너무 싱겁고, 너무 쉬웠다.
뭘까. 탈주라는 것이 원래도 이리 간단한 거였나? 우리에게 소리친 가드는 왜 우리를 끝까지 따라오지 않는 거지?
“어? 뭐야, 뭐야, 저거? 저 괴물 같은 거 뭐야?!”
앞에 앉은 차영민이 무언가를 본 듯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문제없이 곧게 잘 달리던 바이크가 눈에 띄게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뭔데? 뭘 봤는데?!” 발작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검은 터널의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눈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습기에 젖은 터널 벽이 전부였다.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불투명한 기시감 같은 것이 정수리 끝을 스쳐 지났다. 예전에도 분명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래, 기억난다. 영문도 모른 채 관광버스에 실려 처음 이 터널을 지나던 때. 1학년 녀석 하나가 창밖을 보며 차영민처럼 외쳤지. 창밖에 괴물이 있어요, 하고.
당시엔 1학년 녀석이 단순히 환각을 본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 녀석도 멀미약을 받아 마시며 제 두 눈의 오작동을 순순히 인정했고.
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환각을 보는 일도 있는 걸까. 만약에 두 사람 모두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키이이이이이익!”
고막을 갈기고 내장을 뒤흔드는 짐승의 포효 같은 것에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머리 위, 느리게 돌아가고 있는 환풍구 옆에 무언가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비단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그것’이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터널의 주황 등을 받아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수 미터에 달하는 긴 몸통에, 사람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을 갖고 있었다. 기형적으로 길고 관절 부분이 기이한 각도로 굴절된 여덟 개의 팔로 천장에 붙어 있는 그것은 흡사 지네처럼 보였다.
아, 아, 너무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입만 벙긋거리는데 뭔지 모를 그것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것은 우리를 보며 또 한 번 찢어지도록 울었다.
“키이이이이익!”
그것의 포효를 출발 신호로, 차영민은 잠깐 세웠던 바이크의 액셀을 다시 있는 힘껏 밟았다. 쿵쿵쿵쿵. 그것은 천장을 타고 기어 오며 우리 뒤를 쫓았다.
“씨발! 뭐야, 저거?! 사람이야? 사람은 아니지?”
“모르겠어……. 어, 어, 어?! 차영민, 앞에!”
빠른 속도로 우리를 추월한 그것은 천장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려 나와 차영민이 탄 바이크를 덮쳤다.
끼기긱, 쾅. 벼락이 치는 것과 같은 폭음과 함께 바이크가 터널 벽에 박히고 나와 차영민은 허공에 튕겨 올랐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아아악!”
단단한 땅바닥에 충돌하며 살이 쓸리고 내장이 뭉개지고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격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이 발끝부터 손가락 끝까지 퍼져 나갔다. 목구멍 부근에서 비릿한 냄새의 피가 역류했고 폐는 뜨거운 쇳물로 가득 차 출렁이는 듯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골이 울렸다. 귀에서 쉴 새 없이 이명이 났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 보려 해도, 초점이 나가 버린 시야는 안개가 껴 있는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한없이 무거워진 몸은 바닥으로 함몰해 가고 있었다.
영민이, 영민이, 차영민…….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으나 차영민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 채 누워 있었다. 관절이 기괴하게 뒤틀린 그것이 끼걱끼걱, 뼈마디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이대로 죽는가 보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치켜떴다.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인 그것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들어, 왔는데…….
“……너, 너…… 너!”
그것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낯익은 얼굴에 달린 눈알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에서 폭탄 하나가 펑 하고 터졌다. 기함할 충격에 침이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네처럼 징그럽게 길어진 몸통을 끌고 터널을 더듬으며 키이익 키이익 우는 그것은, 그 괴물은, 그래, 유독 울음소리가 크고 날카로웠던 옆방의 울보였던 것이다.
흉하게 일그러져 있긴 했으나 그것의 목 위에 붙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옆방 울보의 얼굴이었다. 배양실로 끌려갔다가 2주가 지난 후에도 제 방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옆방 울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머릿속에 문득 돌아오지 않는 옆방 주민을 두고 안경남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죽은 걸까?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죽었냐고? 아니. 하지만,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거야.’
설마, 설마……. 돌아오지 못했던 오메가들은 죽어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괴물로 개조가 된 거였을까.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옆방 울보처럼.
“키이이이이이익!”
울보는, 아니, 과거에 울보였던 그것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팔들을 위로 치켜들었다. 여덟 개의 손과 마흔 개의 손가락, 그리고 손가락 끝에 달린 칼날 같은 손톱들.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쫘악 벌리곤 수십 개의 길고 서슬 퍼런 손톱을 세워 휘두르는 그것은 훌륭한 살인 병기였다.
아아, 수용소의 가드가 왜 철문을 빠져나와 터널을 달리는 탈주범들을 뒤쫓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방이 막혀 있는 터널에 살아 움직이는 단두대를 풀어 놓았으니 우리를 굳이 추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터다.
도망치는 오메가를, 괴물이 된 오메가로 처형한다. 우리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알파와 베타는.
시퍼렇게 갈린 칼날들이 머리 위에서 번뜩였다. 반넝마가 된 몸으론 도망치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얌전히 누워 한 번에 싹둑 목젖을 따이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체념하는 기분으로, 혹은 안도하는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키이이이익!”
“진우야, 도망쳐! 빨리!”
단두대의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가 차영민의 다급한 목소리에 내리깔았던 눈을 떴다. 얼굴 반쪽이 이마의 환부에서 흐르는 피에 흠씬 젖어 있는 차영민이, 그것의 등에 붙어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키이이이익!”
차영민의 손에 목을 압박당하는 그것이 고통에 젖은 피울음을 토했다. 그것은 내 머리를 내려찍으려던 손들을 휘젓고 몸통을 미친 듯이 뒤틀며 차영민을 떼어 내려 했으나, 차영민은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그것의 숨통을 졸랐다.
쉬이익, 소름 끼치는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른 손톱들이 차영민의 등을 사정없이 찌르고 벴다. 차영민의 어깻죽지와 옆구리, 등에서 피가 터지고 살점이 찢겨 나왔다. 촤악. 털어 낸 붓에서 물감 방울이 튀듯, 손가락 끝에 달린 칼날이 차영민의 몸을 정신없이 휘몰아칠 때마다 핏덩이가 바닥에 튀었다.
영민아, 안 돼, 차영민, 영민아, 안 돼, 위험해, 죽지 마, 안 돼, 그만둬, 제발…….
헐떡헐떡 울면서 몸에 힘을 주었다. 기어이 피를 한 움큼 입 밖으로 토해 내고서야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나는 거기서 더 움직일 수 없었고, 그것과 한데 뒤엉켜 사투를 벌이는 차영민은 뜯기고 찢겨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 가고 있었다. 바닥엔 차영민의 살가죽들이 피에 젖은 채 널려 있었다.
키이익, 우드드득. 최후의 단말마의 비명과 목뼈가 부러지는 파열음의 참혹한 앙상블이 귓전을 갈겼다. 사지를 들썩이며 발작을 하던 그것은 이윽고 바닥에 푹 고꾸라졌다.
그 위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된 차영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의 옆에 누운 차영민의 주변으로 점차, 점차, 피 웅덩이가 넓게 번져 나갔다. 부드럽게 퍼져 나가는 액체 위로 주황빛 조명 입자가 내려앉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차영민, 안 돼, 안 돼…….
팔꿈치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질질 끌며 차영민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차영민을 흔들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죽어라 차영민의 이름을 불렀다. 영민아, 영민아, 영민아……. 차영민의 몸을 흔드는 손바닥에 피가 찐득하게 묻어났다. 차영민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차영민에게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내 무릎을 축축하게 적셨다. 심장이 압착기에 짜여 문드러지는 것처럼 아팠다. 차영민이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계속 흔들고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처럼 벌떡 일어나 ‘안진우’, 나를 부르고, 웃으면서 병신 같은 장난을 칠 것 같았다. 제발, 부탁이야, 영민아.
차영민의 몸을 흔드는 손등 위에 손 하나가 나른하게 겹쳐졌다. 차영민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꾹 감겨서, 다시는 안 뜨일 것만 같았던 눈도 어느새 가늘고 희미하게 벌어져 있었다. 쿨럭쿨럭, 내 손을 잡은 채, 차영민은 피거품이 섞인 잔기침을 해 댔다. 아아,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나는 놀랍고, 벅차고, 감사하고, 기뻤다.
“영민아, 괜찮아? 응?”
차영민은 내 말에 대답을 못 하고 등뼈가 부러지도록 격렬한 기침을 토해 냈다. 그때마다 길게 찢어져 내장이 비치는 차영민의 옆구리에서 핏물이 덩어리째 콸콸 쏟아져 내렸다.
“……살아. 진우야, 살아서…… 나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과 턱을 타고 툭툭 흘러내렸다. 혼자서는 안 나가, 못 나가. 너도 같이 살아서 나가야 돼. 같이 나가자고 했잖아, 같이 나가자고 네가 그랬잖아.
이런 건 반칙이다. 뒤통수를 까면 앞이마도 까달라며 실실 쪼개는 병신 새끼 주제에 되도 않는 비운의 주인공 따위를 흉내 내는 건 못 할 짓이다. 그러지 마,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마, 영민아……. 나 혼자 두고 가 버리지 마, 제발……. 제발 영민아…….
“……살…… 살아서…… 쿨럭, 쿨럭…… 살아서…….”
나의 손을 감싸고 있던 차영민의 손에서 희미하게나마 펄떡이던 삶의 기운이 천천히 사위어 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고개를 저으면서 미친 듯이 부정했으나 차영민의 피에 젖은 손은 기어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격렬하게 토해지던 기침 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다. 피에 물들어 있는 차영민의 얼굴은 이제야 평온해 보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차영민의 손을 다시 모아 쥐었다. 붉게 물든 손, 심심하면 괜히 내 팔을 툭툭 건드리곤 했던 네 손…….
아직 체온이 다 가시지 않아 따스한 차영민의 손을 더 잡고 있고 싶었고, 차영민의 옆에 더 붙어 있고 싶었다.
“키익, 키익.”
그러나 저 멀리서 또 다른 그것이 배를 끌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이 입 밖으로 토해 낸 울음소리는 터널 벽에 부딪혀 음산한 메아리로 부서졌다.
한쪽 손으로 터널 벽을 짚고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없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 있는 차영민을 돌아보았다. 찬 바닥에, 이 낯설고 끔찍한 터널에, 너를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차영민의 죽음이 개죽음이 되든 말든 그냥 차영민 옆에 나란히 누워 죽고 싶었다.
아아, 안 돼, 안 될 말이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차영민 말대로, 살아서 여기를 나가야만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중심이 잡히지 않는 몸은 좌우, 앞뒤로 흔들리며 몇 번이나 무너져 내릴 뻔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벽을 짚은 손에 의지하여 앞으로 걷고 걸었다. 나의 걸음을 따라 벽과 바닥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가물가물 감기려 하는 눈에 힘을 줬다. 신물이 올라오는 입으로 쉴 틈 없이 ‘영민아, 살게, 살아서 나갈게, 영민아.’를 주문처럼 읊었다.
수용소에서도, 그리고 터널에서도, 뭉개지기 직전의 나를 버티게 만드는 것은 결국 차영민이었다.
흐리게 번진 시야에 이슬비가 내리는 하늘이 들어왔다. 아, 코끝에 젖은 나무 냄새가 닿았다. 타닥타닥. 빗방울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걷자 손을 지탱하던 터널 벽의 단단한 감촉이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물방울이 손끝을 적셨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속눈썹 끝이 연약한 새벽 비에 금세 젖어 들었다. 앞머리 끝에 빗방울이 맺혔다, 얼굴을 툭툭 치며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빗방울이 다시 맺혔다.
어느덧 나의 등 뒤에 온 터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오메가들을 삼키고, 차영민을 삼킨 그곳은 여전히 주황빛으로 어둡게 타오르고 있었다.
터널 옆 풀숲으로 기어들었다.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녹음이 짙고 둥치가 넓은 나무에 등을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