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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챕터 2. 거리

“1,200원입니다.”
내 또래로 보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정삼각형 모양의 김밥 포장지 아랫부분에 붙어 있는 바코드를 삑 찍으며 말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곤 거스름돈과 데우지 않아 차가운 삼각 김밥을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안에 뭉쳐 놓은 밥알들을 빈틈없이 봉쇄하고 있는 비닐을 아무렇게나 뜯어 버린 뒤 뾰족하게 솟아 있는 김밥의 모서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깔끄럽게 돌아다니는 밥알들을 천천히 씹어 먹으며 걷는 나의 뒤편으로 시선의 기척이 따라붙은 게 느껴졌다. 몇 주 전부터인가, 나를 주시하기 시작하는 눈알들이 두어 쌍 생겨난 거였다.
어디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걸까. 창문이 짙은 고동색으로 마감된 차 안에서? 고릿적 형사들처럼 벤치에 앉아 펼쳐 든 신문 틈 사이로? 온몸에 날아와 꽂히는 시선의 연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싶었지만 그리했다간 괜히 의심만 더 살 것이 분명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들을 의식하고 있음에도, 나의 의식은 표출되는 순간 나를 범인으로 찍어 누르는 족쇄가 될 터였다. 나는 터널을 나온 그날부터, 모든 것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는 무엇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김밥을 천천히 먹어 치우며 약속된 장소를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뒤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 때문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적마다 묵직한 통증이 하지를 엄습했다. 그러나 내 행적을 따라 움직이는 검은 눈동자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무릎에 힘을 줘 흐트러지려 하는 걸음걸이를 다그쳤다.
늦겨울과 초봄의 경계선에 걸려 있는 날의 저녁은 아직 쌀쌀했으나 내 이마엔 마른땀이 조금 스며 있었다. 앞머리를 적시는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시가지 쪽으로 발길을 틀었다.
약속한 장소와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시가지는 이 시간쯤이면 학원을 파하고 나온 학생 무리와, 평일 저녁 약속을 위해 한껏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이 여러 갈래의 물줄기처럼 쉼 없이 흘러가는 곳이었다. 검은 눈동자를 따돌리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한 무리를 지은 학생들의 백 팩에 어깨를 치이고, 담배를 든 채 조심성 없이 손을 휘두르는 중년 남성의 붉게 지져진 꽁초 끝을 피한 뒤, 세 명이 한 덩어리처럼 딱 붙어 있는 원피스 군단의 엮이고 엮인 팔짱 사이를 헤집고 지나길 두어 번인가 반복하자 나를 꿰뚫던 기척은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스르륵 물러가듯 사라졌다.
방패막이 되어 준 인파 사이에서 느리게 빠져나온 후, 코너를 돌아 눈길이 따라붙기 힘든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얼마 남지 않은 김밥을 입에 전부 쑤셔 넣어 삼키곤 빈 껍질을 전봇대 옆 쓰레기봉투 더미들 위에 던졌다.
간판이 쏟아 내는 화려한 빛의 장막들로 물든 시가지와 달리, 두 팔을 쭉 뻗으면 양손 손바닥에 빌라의 벽이 닿을 만큼 좁아터진 골목길을 밝히는 것은 어둑한 가로등 몇 개가 전부였다.
광도가 낮고 침침한 주황색의 불빛. 터널을 연상시키는 불빛은, 내 발목을 붙잡아 그날의 기억으로 끌고 가려 했다. 죄책감이 오른쪽 발목의 복숭아뼈를, 그리움이 왼쪽 발목의 복숭아뼈를 칭칭 감아 강한 인력으로 나를 빨아 당기는 것이다.
처음 몇 번은 반항도 못 하고 기억의 블랙홀, 그 가장 어두운 중심부까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곤 했다. 빨려 들어간 그곳에서 차영민을 만나면, 익숙한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나를 보며 빙구같이 웃는 너를 보는 날이면, 나는 숨도 못 쉰 채 꺽꺽 울다 탈진하다 울다 탈진하다를 반복했다.
아, 가벼운 현기증이 일기에 팔을 뻗어 전봇대를 붙잡았다. 불시에 엄습해 온 블랙홀의 인력을 떨치려 고개를 휘젓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등에 흡착했던 시선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시가지를 몇 바퀴 휘저은 탓에 약속 시간은 이미 한 시간가량 지나 있었다. 한 소리 들을 생각에 골이 살짝 아렸다. 하아.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전봇대에 반쯤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올려다본 연보라색의 하늘은 어지러이 엉킨 전깃줄에 조각나 있었다.



“하도 안 오기에 물건 들고 나른 거라 생각했습니다. 10분만 더 늦었더라면 사람을 풀었을 거요.”
업자의 낮은 목소리가 창문 하나 없는 밀실을 울렸다. 소파에 느긋이 등을 기대고 앉은 업자는, 길고 투박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 놓은 담배를 양 뺨이 움푹 패도록 한 모금 빤 뒤 씨익 웃었다.
“경찰들을, 따돌리느라…….”
말을 뱉는 아래턱과 입술이 잘게 떨렸다. 애써 의연한 척을 하려 해도, 위험한 야생동물의 페로몬을 분비하는 업자 앞에선 혈관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듯 손끝이 파릇파릇 뒤채이고 관자놀이에 맥이 뛰는 것이다.
업자는 한쪽 손을 허공에 터는 것으로 내 말허리를 끊었다. 그건 됐고, 물건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업자는 재떨이 바닥에 담배 끝을 지지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업자는 내 옆을 스쳐 지나, 밀실의 한쪽 구석에 놓인 작고 허술한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나 또한 그를 따라 밀실 안의 또 다른 밀실에 몸을 들였다.
철컥. 문이 닫히고, 잠금쇠가 걸렸다. 사방이 싸구려 철판으로 막혀 한 평의 방이 된 컨테이너 박스 안은 길쭉한 3, 4인용 소파와 표면에 먼지가 쌓인 협탁 하나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상의 눈을 피해 한시적으로 뭉쳐 필요한 업무만 본 뒤, 흔적 하나 남기지 말고 사라져야 하는 장소였다. 스스로 은폐된 공간, 힘주어 꾸미는 것이 이상할 곳이었다. 폐쇄된 채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공간의 퀴퀴한 냄새가 호흡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업자는 선이 굵은 턱을 치켜들어 협탁을 가리켰다. 무언의 몸짓이 뜻하는 바를 아는 터라 말없이 협탁으로 다가섰다. 몸을 기역 자로 꺾어 상체와 얼굴을 협탁의 표면에 붙였다.
머리칼과 창백한 뺨에 자잘한 먼지 알갱이들이 들러붙었다. 개중 반 움큼 정도는 콧속으로 들어와 쿨럭쿨럭, 등을 들썩이며 마른기침을 두어 번 토했다. 가만히 있어. 어깨 너머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물자 매캐한 열기는 눈가에 몰렸다. 작은 물방울이 눈꼬리 끝에 맺혔다. 달칵, 업자의 손에 버클 풀린 바지는 속옷과 함께 허벅지까지 쑥 내려갔다. 수치심으로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감았다. 맺혀 있던 눈물이 속눈썹을 적시곤 미간과 반대편 눈가에 주르륵 길을 트며 옆으로 흘러내렸다.
“……윽……!”
갑작스레 살을 가르며 안으로 들어오는 이물감에 앓는 소리를 터뜨렸다. 업자의 마디가 굵직한 손가락 세 개가, 젤에 젖은 하지 내부를 휘젓고 있었다. 라텍스 소재의 봉투에 꽁꽁 싸여 내 신체 안에 숨어 있던 물건이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물건을 곧바로 빼내는 대신 손가락 끝으로 어딘가를 찌르고 안쪽 깊은 곳을 더듬으며, ‘아아, 윽……! 하아, 아…….’ 내가 괴로움에 허덕이는 것을 느긋이 관조했다. 상체를 뒤틀며 붕어처럼 뻐끔뻐끔 입을 벌려 고통을 호소하다, 업자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서야 비로소 공기 한 줌을 들이켤 수 있었다.
팔에 힘을 주어 협탁에 눌어붙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바지춤을 추스르는 동안 업자는 내 신체를 이용하여 밀수해 온 물건에 하자는 없는가를 꼼꼼히 살폈다.
“안에서 터뜨리지 않고 잘 가져왔군.”
검지 두 마디 정도 굵기의 고무 용기 안에는 헤로인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텅 빈 눈으로 업자의 손에 놓인 흰 가루를 바라보았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백신의 재료가 될 신생아를 출산하는 닭이 되고 싶지 않아 차영민의 시신을 버려두고 탈출했건만. 결국 도망쳐 나온 곳에서조차 나는 스터퍼(stuffers)가 되어 뼛가루처럼 하얗고 고운 가루를 밑구멍에 품고 있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협탁 옆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업자가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약속한 억제제를…….”
주세요, 제발…….



오메가들이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억제제는 박카스나 가스활명수처럼 약국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알파와 베타의 땅, 감금된 오메가의 땅으로 반쪽 난 시점에서 온전히 오메가들만이 수용하는 억제제 또한 자연스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수용소로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거나, 아주 드물게 나처럼 그곳에서 탈출해 온 오메가들은 베타 행세를 하기 위하여, 때가 되면 거스를 수 없이 분비되고야 마는 체향을 가리고자 피눈물을 머금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볐다.
검은 거래의 암류가 흐르는 골목에 포진한 업자들은 오메가들을 향해 억제제 병을 흔들며 웃었다. 오메가들은 그들에게 손을 벌리고 처절히 외쳤다. 억제제를 파세요, 제발 저에게 팔아 주세요.
재산을 팔건, 몸을 팔건,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득바득 긁어모아 팔아 넘겨 박카스 유리병에 담긴 억제제 한 병이나마 구하면 다행인 일이었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직후 몸을 사리며 거리를 방황하던 중. 진득한 체향을 사방 온 곳에 질질 흘리고 다니는 오메가를 본 날이 있다.
발정해 버린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비틀 걷는 오메가는 히트사이클의 열기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메가의 향에 취한 알파들에게 붙잡혀 시내 한복판에서 윤간을 당하겠구나, 하는 나의 예상은 그러나 엇나갔다.
발정한 듯 보이는 알파들은 그의 주변을 서성이기나 할 뿐, 어째서인지 달려들지는 않는 거였다. 발정 난 오메가에 발정한 알파보다 먼저 그를 덮친 것은 푸른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혼곤하게 풀린 눈으로 젖은 숨을 토하던 오메가는 검은 장갑을 낀 경찰들의 손에 붙들렸다. 그들은 즉시 그의 입에 억제제를 물렸다. 발정 난 오메가가 아닌, 그 주변을 부유하는 알파들을 위한 응급조치였을 터다. 삽시간에 열기가 식은 오메가의 상체가 여러 개의 손에 의해 거칠게 탈의되었다.
뭐하는 걸까. 당장 몇 시간 뒤의 내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거리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가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반항하는 오메가를 찍어 누르고 있는 사이 한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서 테이저건처럼 생긴 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몸체부터 검지를 거는 방아쇠, 손잡이까지 전부 테이저건과 흡사하게 생겼으나 다만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그것의 끄트머리엔 오메가 표식 모양의 쇠굽이 달려 있었다.
총을 든 남자가 둥그런 어깨를 훤히 드러낸 오메가의 뒤편에 섰다. 남자의 검지가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이 튕겨 나가는 대신 오메가 표식으로 생겨 먹은 돌출부는 마치 담금질을 당하기 직전의 쇳덩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급속도로 달궈진 그것을 오메가의 어깨에 철썩 붙였다. 살가죽과 쇠의 표면이 맞닿은 부근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아악! 생살이 지져지는 격통에, 끔찍한 비명이 그의 목젖을 찢고 나와 허공에 튀었다. 단백질 타는 불쾌한 냄새가 공기 중에 섞였다.
토기가 치밀어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으나, 어쩐지 나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모든 것들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그의 어깨에서 등으로 넘어가는 완만한 살색 둔덕엔 오메가 표식이 화인으로 남았다. 진한 갈색의 표식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 또한, 머지않아 그 창백하고 마른 어깨에 나와 모양이 같은 낙인을 찍히게 될 것이라.
살이 지져지는 고통을 못 이긴 무명의 오메가는 끝내 기절한 듯 남자들의 손에 축 늘어졌다. 피거품이 뒤섞인 비명도 뚝 끊겼다. 남자들은 엿가락처럼 너부러진 그를 밴에 실었다.
몸에 오메가 낙인이 찍힌 그는 아마도 예전의 나처럼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백신 배양실에 처박히겠지. 하얀 마스크를 쓴 남자가 희락하게 웃으며 오메가들의 몸에 갖은 약품을 들이붓는, 그곳으로.
기절한 오메가의 몸뚱이를 뒷좌석에 실은 뒤, 제복을 입은 남자들도 차례로 밴에 올라탔다. 개중 가장 마지막으로 운전석에 오르던 남자가 문득, 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고 있던 내 시선을 감지한 듯 고개를 틀어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였으나, 나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음을 확신했다.
초 단위로 셀 수 있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왜인지 나와 우묵하게 시선이 맞물렸던 남자의 모습은 긴 여운의 꼬리를 그렸더랬다.
그렇게 몰려든 인파 너머에 서 있던 나를 바라보던 남자는 동료들의 재촉을 받고 밴에 올랐고, 이내 사라졌다.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알파와 베타들은 금세 흩어졌다.
허공에 희미하게 남아 떠도는 탄 냄새, 선연한 후각으로 남은 기억은, 나 또한 여타의 오메가들처럼 골목과 골목을 떠돌며 억제제를 구걸하도록 나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내겐 한 병의 억제제와 교환할 돈도, 귀중품도, 집도 없었다.
수용소를 탈출한 직후 나는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낡은 철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일면식 없는 신혼부부였다. 그들은 몇 달 전, 나와 나의 부모님이 함께 살았던 이 집에 이사 온 것이라 했다.
나는 전 주인의 행방을 묻는 대신 조용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키가 조금 작고 화초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던 나의 엄마는 오메가였다. 엄마와 같은 대학을 나왔으며, 일평생 엄마만을 사랑했던 나의 아버지 또한 오메가였다. 그리고 나는, 수십 년간 서로만을 위해 살았던 금슬 좋은 오메가 부부가 낳아 기른 오메가였다.
외아들이 버스에 실려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과 비슷한 시기,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래도 행복하게 살던 오메가 부부 또한 갑작스레 들이닥친 군인들에 잡혀 터널 안으로 끌려갔겠지. 두 분은 그곳에서 나와 결코 만날 일 없는 형제를 몇 명이나 배태하셨을까. 두 분 모두 살아는 계실까.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날이 다시 오기는 할까.
그날. 나는 아파트를 등 뒤에 둔 채, 놀이터에 쪼그려 앉아 오래도록 울었다.
돈은커녕 나를 돌볼 가족 하나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내가 팔 수 있는 것이라곤 상아색에 가까운 희멀건 몸뚱어리가 전부였다.
“반반하게 생겼군. 다섯 번에 50ml.”
처음 찾아간 골목길의 어느 밀실에서, 업자는 내 오른뺨에 두터운 손을 얹고 엄지로 섬약한 속눈썹을 쓸어내리며 내 몸에 가격을 매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이 성사된 직후, 밀어 넣어진 방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있는데, 남자 너덧 명이 방 안으로 한꺼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 중엔 업자도 있었다.
“한 번에 한 명을 상대하는 거라 말한 적 없소만.”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씨발!”
악에 받쳐 소리치는 날 바닥에 깔아뭉갠 업자는, 벽돌처럼 단단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곤 그리 말했다. 몇 번 더 팔과 다리를 흔들기는 했으나 결국엔 반항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몸을 벌리는 손을 따라 순순히 길을 내줬다.
타는 냄새, 달궈진 쇳덩이에 짓눌린 생살이 노릇노릇 타던 냄새가 코끝에 걸렸다. 등허리에 찍힌 진한 갈색의 오메가 표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귓가에 찢어지는 그의 비명 소리가 맴돌았다. 갖가지 감각으로 체득된 공포는 분노, 증오, 수치스러움, 그따위 감정들을 모조리 누르고도 남더라.
그렇게 다섯 번을 굴러야 두어 모금어치의 억제제가 손아귀에 떨어졌다. 벌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 들곤, 조금이라도 더 줄 수 없느냐 묻는 내게 업자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한 번에 300ml어치 일도 있기야 한데……”
300ml면 이 짓을 열 번을 하고도 못 받을 양이였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할게요, 그게 뭐든 할게요.
업자의 손에 붙잡혀 엎어진 몸, 그 밑으로 바셀린을 치덕치덕 바른 고무 뭉치가 쑤욱 밀려 들어왔다.
“조심해서 움직여야 될 거요. 이게 똥구멍 안에서 터지기라도 하는 날엔, 숑 가기도 전에 쇼크로 뒈질 테니까.”
백신 품은 닭에서 헤로인을 품은 닭으로의 변화를,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약속한 억제제를…… 주세요…… 제발.”
업자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매끈한 유리병을 꺼냈다.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남자의 손을 따라, 억제제의 표면이 맑게 일렁였다.
“걱정 마쇼. 물건을 잘 운반해 줬으니 나도 약속한 대로 저걸 드리지.”
그러나 업자는 그것을 내 손에 쥐여 주는 대신 소파 옆 협탁에 올려 두었다. 유리병을 향해 뻗친 손이 업자에게 붙잡혀 소파에 짓눌렸다. 그는 내 위에 저의 무거운 몸을 얹었다. 그는 솟아오른 윤곽이 선연한 바지춤을 끌어 내리며 이빨을 드러내 웃었다.
“그 전에, 내가 밑구멍을 좀 넓혀 드려야겠어. 한 번에 더 많은 양의 뽕을 운반할 수 있게 되면 나도 억제제 양을 좀 더 늘려 드리죠.”
행여 안에서 맴도는 개새끼, 시발 새끼가 입 밖으로 튀어나갈까 송곳니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미처 닦지 못해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에 또다시 물이 고였다, 넘쳐, 주욱 호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가죽 소파는 내가 값싸게 뽑아낸 체액과 눈물의 무덤이었다. 지지리도 궁상맞다, 나.
두 다리를 제 넓은 어깨에 걸친 업자는 아직 바셀린이 남아 있는 내게 어려움 없이 들어섰다. 살이 밀려 올라가는 통증에 흑, 윽, 아프게 흐느꼈다. 그의 허벅지에 부대껴 강파르게 흔들리는 내 몸을 고정하기 위해 업자는 오른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땀에 젖은 맨살이 소파의 싸구려 가죽 시트에 눌어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통에 찌직찌직 기괴한 마찰음이 났다. 나는 붙잡히지 않은 쪽의 손목으로,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눈을 덮었다.
고작 이렇게 살아갈 나를 위해……. 이런 더럽고 무가치한 나의 하루를 연장시키기 위해 너는 그 끔찍한 터널에 너를 묻은 걸까, 차영민, 영민아, 영민아…….
흐윽, 타의로 치달은 절정의 순간 숨을 멈추자 세상도 멈추었다. 모든 것이 하얗게 발한 백색 정지의 순간 온 세상은 차영민, 영민아, 너였어. 그러나 눈이 시리도록 하얀 순간이 지나자 다시금 너 없는 세상이 나를 덮쳐 왔다.
후우.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 업자는 내 위에서 몸을 떼어 냈다. 텅 빈 공간으로 밀려들어 오는 허망한 한기에 사지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업자는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유리병을 집어 들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손에 들어찬 유리병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차영민의 시체를 구더기처럼 갉아먹고 살이 오른 생존 본능이 유리병을 움켜쥔 손의 연녹색 힘줄 안에서 맥박치고 있었다.



아무런 마크도 붙어 있지 않은 갈색의 유리병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거머쥐었다. 허벅지 사이를 대여해 준 대가로 받은 그것의 무게가 새삼스레 가벼웠다. 유리병의 표면은 늦겨울의 희미한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안에서 출렁이는 억제제의 양은, 업자가 애초 약속했던 300ml에 약간 못 미쳤다. 눈대중으로 짐작하건대 200ml나 조금 넘을까.
하지만 나는 푸른곰팡이로 단과 단 사이의 이음새가 얼룩진 계단을 밟고 밀실로 돌아가 업자를 붙잡고 악을 쓰는 대신, 유리병을 후드 티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수용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수돗물을 조금 섞은 뒤 몇 번에 걸쳐 나눠 마신다면 적어도 서너 번의 발정기 주간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