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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온
1권
1화
프롤로그
옛날 옛적에, 늠름한 왕자님과 아리따운 공주님이 살았어요. 모든 백성들에게도 축복을 받는 왕자님과 공주님은 서로를 아끼며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그런데 왕국에는 300년이나 묵은 아주 못된 마법사가 있었어요. 마법사는 기분이 나쁠 때마다 죄 없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였어요. 결국 참다못한 왕자님은 용감하게 마법사와 싸웠어요. 나쁜 마법사는 굉장히 강했지만 왕자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마법사를 무찌를 수 있었지요. 왕자님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돌아와 공주님과 결혼했어요. 그리고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행복하게 살았어요.
아주 행복하게 살았대요.
둘도 없는 잉꼬부부였답니다.
보는 사람들 질투 날 정도로 행복하게.
“―는 무슨…….”
시온의 입에서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한 시간 전 광이 날 정도로 닦아 놓은 창문과 복도는 그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하아아아아― 길게 늘어지는 한숨은 왕궁 시종 인생 15년 차인 시온도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 다시 배치한 장식품들은 모조리 부서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겨울맞이로 바꾼 두꺼운 커튼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이걸 언제 다 치우지. 시온이 참담한 얼굴로 멀거니 복도를 쳐다보는 와중에도, 저 멀리서 무언가를 와장창 부수는 소리와 성이 떠나가라 악을 쓰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함께 뒷수습을 하러 온 시녀와 시종들에게서도 불만이 잔뜩 튀어나왔다.
“어휴, 왕비님은 성격이 너무 지랄 맞다니까.”
“어차피 또 이렇게 될 텐데 그냥 두면 안 돼?”
“야, 시녀장님에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맞아, 왕비님은 지랄 맞아! 절대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시온이었다. 임금님과 왕비님이 결혼하고 어언 8년째. 내숭을 집어던진 왕비님의 횡포로 인해 왕궁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온갖 흉기들이 날아다니는 부부 싸움은 예삿일이요, 사소한 실수로 뺨을 맞은 시녀와 시종도 넘쳐 났다. 사치는 또 얼마나 부리는지, 이 돈 많은 왕국의 예산 중 상당량이 왕비님의 품위유지비로 낭비되었다. 그래, 그건 낭비였다. 그런데 임금님은 천성이 유약하고 소심한지라 왕비님의 횡포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잡혀 살기만 하는 것이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었다.
“일단…… 치우자.”
양손으로 빗자루를 꽉 움켜쥔 시온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 다른 이들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별수 있나. 시녀장이 검사하러 오기 전에 치우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달이 날 터였다. 슥삭슥삭― 빗자루와 걸레질 소리가 작게 투덜거리는 수다와 맞물려 복도를 메웠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인어의 눈물은 8백 년이나 된 엄청난 보물이란 말이야! 그걸 왜 못 사! 왜!
아니 왕비, 잠시만 내 말 좀 들어 보―
필요 없어! 당장 구해 오지 못해?!
신경질적인 음성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거 아닐까 하고 움찔거리던 것도 다 오래전 이야기. 이제 숙달될 대로 된 그들은 그냥 짜증만 가득한 얼굴로 열심히 손발을 움직였다. 그중 시온의 빗자루질은 단연 돋보였다. 비록 요리는 못할지라도 청소만큼은 1등 신랑감! 나름대로 매사에 열심을 다하는 시온은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훌륭하게 빗자루질을 해내었다.
그런 시온의 모습을 지켜보는 시녀들은 뒤에서 입맛을 다셨다. 저 옅게 그을린 것 같은 커피색 피부. 근육만 더 키우면 사내다운 맛이 훨씬 강해질 텐데 거의 성내의 잡일만 해서 그런지 영 근육이 안 붙는다. 그래도 적당히 잔근육이 박힌 탄탄한 몸매가 꽤나 탐스러웠다.
“……?”
왜 이리 등이 따끔거리지. 시온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그를 보고 있었던 시녀들의 눈이 단번에 휙 돌아갔다. 고로 시온의 뒤에는 각자 맡은 본분을 다하는 시녀들밖에 없었다.
착각인가? 눈을 굴리며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인 시온은 다시 빗자루질을 했다. 물론 시녀들은 틈틈이 시온을 힐끔거렸다.
“이봐.”
그렇게 한창 청소를 하던 도중 들려온 목소리는 참으로 이질적인 것이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소름이 돋게 하는 낮은 저음과,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위압감. 청소 중이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헉.”
순간 누군가에게서 나온 탄성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기척도 없이 대체 언제 온 건지, 커다란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채도가 어두운 붉은 머리에, 마찬가지로 붉은 눈동자. 시온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는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남이었지만, 그의 외모가 잘났든 못났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왕비년 어디 있어.”
남자의 입에서 보기 좋은 외모와 듣기 좋은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상스런 말이 나왔다. 시온은 아까 자신이 중얼중얼 읊었던 동화를 되새기며 꿀꺽 침을 삼켰다.
용감한 왕자님이 물리친 나쁜 악당 마법사? 동화는 동화일 뿐. 현재 왕국의 왕자님은 이제 겨우 7살이 되었고, 임금님은 고사하고 저기 저 제국의 황제님도 손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 나쁜 마법사였다.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인다는 문장이 동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서술되었지만, 실제로 그 당사자가 되어 보라지. 흔해 빠진 내용이라며 힐끗 보고 넘어갈 수 있나!
“저, 저, 저쪽에…….”
하필 운 없게도 남자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시종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복도의 저편을 가리켰다. 물론 굳이 알려 줄 필요 없이도 왕비님의 고음은 여전히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복도가 더러워서 기분 나쁘다고 죽이면 어떡하지? 시온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숨까지 참아 가며 상황을 주시했다. 시종의 말을 들은 남자가 그의 손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마저 숨 막히게 잘생겼지만 역시나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이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시끄러운 계집 같으니.”
남자가 쯧 혀를 찼다. 아, 왕비님에게로 관심이 쏠리면 무사히 지나갈지도 몰라. 슬쩍 고개를 드는 희망에 시온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기대는 곧 장렬하게 무너졌다.
“사람이 많아서 기분 나쁜데.”
짜증스런 얼굴로 중얼거린 남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왕궁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기급 마법이 복도 위로 펼쳐졌다.
지옥의 불. 다른 말로 헬 파이어. 닿는 즉시 모든 것들을 태워 버리는 못돼 처먹은 마법이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눈을 깜빡이며, 시온은 먼지 때문이 아니라 사람 많다고 죽이는 경우는 생각 못 했다고 한탄했다. 물론 살아 보겠다며 남자를 보자마자 도망쳤어도 죽었을 것이 분명하니 이래도 저래도 결과는 하나였으리라.
왕비님보다 지랄 맞은 악당 같으니! 그렇게 파릇파릇한 스물세 살 시온은 일만 하다가 죽었다.
1. 마법사 저택의 시온
“…….”
아니, 죽었어야 하는데?
시온은 멀뚱하게 서서 눈을 깜빡거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피부를 때려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지옥의 불은 한 번 걸리면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면서요? 누군지 모를 이에게 묻는 말은 당연히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아무것도 못 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굉장히 잘 가꾸어진 정원은 끝이 안 보일 정도였고, 겨울임에도 아랑곳 않는 분수대의 묘기가 화려했다. 천천히 돌아간 시온의 시선이 마침내 자신의 뒤에 있는 거대한 저택에 닿았다.
“…….”
허어.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왕궁보다 규모는 작아도 고고하고, 아름답고, 웅장하고, 좋아 보이고, 하여튼 이런 엄청난 저택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시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택을 올려다봤다.
“머시따…….”
진짜 멋있, 응?
이게 무슨 소리야. 혹시 주위에 다른 이가 있었던 건가, 하고 시온이 양옆으로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 목소리는 누구지?
“머야…… 어?”
왜 내 입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지?
“아, 아―”
재차 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한 시온이 기절할 듯 놀라며 입을 터억, 막았다. 그런데 입에 닿는 손마저 느낌이 이상했다.
이, 이러지 마. 불안함에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양쪽 다 펼쳐서 들자 시온의 눈에 보인 것은…… 고사리같이 작고 귀여운 아기 손이었다.
“이럴 순 업떠!!”
으악, 악! 악! 혀 짧은 소리 나오지 말란 말이야! 거울이 없으니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시야가 너무 낮아진 기분이다.
설마, 설마 내가 예상하는 그런 건 아닐 거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리기만 하던 시온은 문득 든 생각에 열심히 발을 놀려 분수대로 뛰어갔다. 그리고 물의 표면에 비춰지는 모습은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허, 흐어.”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벌꿀 같은 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본인은 모르지만 시녀들이 침 삼키던 커피색 피부는 그대로인데, 스물세 살의 청년에서 네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말도 안 돼…….
시온은 멍하니 수면 위를 쳐다보다가 제 몸으로 시선을 내렸다. 작은 몸과 짧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웬 넝마 같은 후줄근하고 커다란 상의만 덜렁 걸쳤을 뿐이지만.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조물딱조물딱 만진 시온은 처절하게 무릎을 꿇으며 절망했다. 그 성깔 더러운 마법사가 불난리를 냈을 때 ‘아, 난 죽었구나.’ 했는데 갑자기 어린애가 되어서는 어딘지 모를 곳에 들어와 있다니. 물론 죽는 것은 싫지만 이렇게 이해 못 할 상황도 달갑진 않았다.
아기? 진짜 아기야? 기껏 20년 넘게 살아 놨더니 다시 초반부로 돌아가서 또 살아야 하는 거야? 비록 특출 날 것 없는 시종 인생이었지만 아까워서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엣취!”
그렇게 망연자실하던 시온은 재채기를 한 뒤에야 현재 날씨가 체감되었다. 왕궁의 겨울맞이 단장을 한 지 3주는 흘렀으니까 이제 한창 추워질 때.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치고 나오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
코를 훌쩍인 시온은 이대로 있다가는 또 죽겠다고 생각하며 벌떡 일어났다. 발목까지 가리는 상의는 바람에 힘없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추어…….”
이유는 모르지만 살아났는데 벌써 죽을 순 없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시온은 조금 전 자신이 서 있었던 저택의 현관 앞으로 달렸다. 그러나 짧은 다리로는 아무리 열심히 뜀박질을 해도 느리기만 했다. 게다가 옷은 쓸데없이 길었으니. 결국 얼마 못 가서 자신의 옷을 밟고 철푸덕 엎어지는 시온이었다.
“끄응―”
아프다. 돌부리에 채인 무릎을 잡고 끙끙거리던 시온은 엎어진 자세 그대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모르는 장소에서 다치기까지 하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시온은 찔끔 눈물이 나온 눈을 먼지 묻은 손바닥으로 가리며 훌쩍거렸다.
“흐읍― 엄마아…….”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으니까 다시 살아나 줘요…… 엉엉. 이제는 어렴풋하게만 생각나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자 더욱 감정이 북받친 시온이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어릴 때부터 혼자 자라 왔던 터라 뭐든 스스로 해내려는 성격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치 겉모습뿐 아니라 속까지 네 살 먹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아니, 내가 정말 성인이긴 했나? 원래 어린아이였는데 기나긴 꿈을 꿔서 헛된 망상을 하는 건 아닐까?
시온의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어린 육체에 조금 적응이 되자 정신연령도 그에 따라 맞춰지려 하는데, 성인이었을 적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 괴리감의 원인을 알 턱이 없는 시온은 그냥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꿍얼거렸다.
그냥 이대로 얼어 죽을 거야. 차라리 그 못돼 먹은 마법사가 불을 질렀을 때 죽었으면 이런 당황스러움은 겪지 않았을 텐데. 대상 없는 원망까지 들었다.
그렇게 작은 몸뚱이를 가진 아이가 널따란 정원에 엎어져 우는 모습은 참으로 처량했다.
그러나 세상은 시온이 동사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뭐야, 이건.”
급작스럽게 묵직한 저음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시온은 그 목소리를 이미 한 번 들어 본 적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에 움찔한 시온은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생각도 못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만 않길 바랐는데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덥석― 시온의 목덜미를 잡은 커다란 손이 그대로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현재 자신의 키로는 턱도 없는 곳까지 올라간 시온이 얼굴에서 손을 뗐다. 아니, 어쩌면 원래의 키였어도 턱없는 높이일지도 몰랐다.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짙은 붉은색의 눈동자를 본 시온은 히끅, 숨을 삼키며 몸을 사렸다.
못된 마법사이자 바로 조금 전 시온을 죽인 남자가 냉랭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찬바람에 흩날렸다. 시온의 눈에는 그게 전부 피바람처럼 보였다.
‘설마 이 저택의 주인이!’
시온은 최악의 상황에 얼어붙듯 경직되어 금방이라도 흘러내리려던 눈물이 싹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진 막막함을 없애 줄 어른을 만나고 싶긴 했지만 이런 걸 바라지는 않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가던 모습이 떠올라 본능적인 두려움이 시온을 장악했다.
“어떻게 들어왔지?”
“저…… 저는…….”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이 느끼기론 약 10분 전에 죽었는데 눈 떠 보니까 여기에 있었어요? 아니면 그냥 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어떤 대답도 목숨을 연명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시온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자의 얼굴에 의심이 깃들었다. 허락도 받지 않은 어린아이가 정원에서 울고 있는 것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실 굳이 추궁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죽일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온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시온이 몸을 움찔했다. 아무리 고통을 인식하기 전에 죽어서 현실감이 부족하다곤 해도, 또 그런 일을 겪을 수는 없었다.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시온은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음에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전 시오니에여!”
“시오니?”
“아니, 시, 시온…….”
“아, 시온.”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손으로 잡아 올려도 가볍기만 한 아이를 죽이는 것은 인간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짓이었지만, 남자의 사전에 남녀노소 차별은 없었다. 그가 친절하게 자신의 사연을 묻지 않을 것임을 아는 시온은 그래도 변명이나 해 보자며 애써 머리를 굴렸다.
“눈 뜨니까 여기 있어쪄여.”
“어떤 미친년이 내 집에 애를 버리고 가.”
“버린 거 아닌데…….”
진짜 네 살 난 아이가 들으면 으앙, 울어 버릴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남자는 영 관심 없는 얼굴이었다.
아직 성인이었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 무색하게 순간 울음을 터뜨릴 뻔한 시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울어서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설움을 억눌렀다.
남자는 오래지 않아 태연한 얼굴로 결정을 내렸다.
“그냥 죽어라.”
“앙대여!!”
시온은 팔을 뻗어 남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위치상 그의 멱살을 잡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시온은 차마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을까? 그냥 어차피 죽을 거, 억울하니까 싸대기 한 대만 때리고 죽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못된 마법사가 처음 보는 어린애를 오래 기다려 줄 턱이 없었다. 그가 서서히 미간을 좁히는 것을 목격한 시온은 마침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저 청소 완전 잘해여!!”
그리고 싸한 바람이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청소? 남자의 반듯한 미간이 아예 구겨졌다. 이게 무슨 소린가 훑어보는 눈이 영 떨떠름했다. 덕분에 시온은 헛소리를 나불거린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려 주고 싶었다.
“엣취!”
앗, 이렇게 중요할 때 재채기가. 이제 진짜 끝장이구나, 하고 찔끔 눈물을 매단 시온이 자꾸 떨어지는 체온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은 몸으로 살이 에일 듯한 추위를 견디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흐음.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긴 남자는 잠시 후 시온을 덜렁 든 채 자신의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서 자책하다가 재채기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훌쩍거리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심심할 틈이 없는 웃기는 아기였다.
남자의 손에 매달린 시온에게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났다.
저택의 내부는 외관과 마찬가지로 눈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멋졌다. 남자는 어느새 눈물이 마른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구경에 정신이 팔린 시온을 든 채 1층 홀의 소파에 앉았다. 범상치 않은 광택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소파도 엄청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그간의 시종 경험으로 단련한 자신의 눈썰미를 신뢰하며 가구의 가치를 추정하던 시온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호랑이 앞에서 다른 것에 한눈을 팔다니, 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흐음.”
남자는 시온을 제 무릎 위에 앉히고 젖살로 볼이 통통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괜히 무서워서 또륵 눈을 피해도 남자의 눈빛은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그 상황이 계속되자 시온의 볼이 점차 불그스름해졌다.
아무리 사악하고 무서운 마법사라 해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시온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케 보면 창피하자나여.”
아기 손으로 겨우 눈만 가려 놓고 하는 말이 잔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 보게.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린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온의 겨드랑이 밑에 팔을 넣어 그 작은 몸을 쑥 들어 올렸다. 그제야 손을 치운 시온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눈을 맞춰 왔다.
남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울음 참으면 안 죽이마.”
“……?”
무슨 소리에여? 그러나 시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을 새도 없이, 남자가 시온을 공중으로 휘익 던졌다. 힘이 얼마나 센지 가볍게 던졌는데도 시온의 몸은 거의 샹들리에에 닿을 정도로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난생 처음으로 공중을 날았지만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부우웅 떨어진 시온은 남자의 팔에 무사히 안착했다. 아직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눈이 아이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빠르게 두근두근 뛰는 심장에도 벙찐 얼굴로 눈만 깜빡이던 시온은 뒤늦게 몰아치는 충격에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울음 참으면 안 죽이마.’ 했던 남자의 말이 떠오르자 우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울면 안 돼. 애써 울음을 참아 낸 시온은 그 반작용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남자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의지할 곳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장본인뿐이라니! 차마 엉엉 소리 내지는 못하고 울먹거리기만 하는 모습에, 남자가 크크크, 이상한 소리로 웃더니 시온을 품에 안았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물건이라 생각한 것이다.
“흡, 끅…….”
은근히 다정한 손놀림에 남자의 목에 덥석 매달린 시온은 끅끅 숨을 삼키며 울듯 말듯 한껏 울상을 지었다. 남자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시온의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무서웠어?”
“무서워쪄여―”
엉엉― 남자의 장난기 어린 말에 마음이 탁 놓인 시온이 울음을 터뜨리며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갑자기 다정하게 대해 주니 남자에 대한 공포심이고 뭐고 놀란 마음을 달래는 게 먼저가 되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감에도 웬일인지 그 더러운 성격을 접어 둔 남자는 작은 아이의 엉덩이를 팔로 받쳐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집사.”
“예, 주인님.”
응? 돌연 나타난 낯선 이에 시온은 훌쩍거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등장한 자는 반백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깨끗한 정장을 입고 있는 70대 외관의 노인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꽤나 인지한 인상의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남자는 익숙한 얼굴로 그에게 용건을 꺼냈다.
“밖에서 주워 왔는데 그냥 여기 둘 생각이야. 이름은 시온.”
“귀여운 아기로군요.”
빙긋 웃는 눈이 시온과 마주쳤다. 다행히 저분은 착한 것 같아. 정상인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시온은 눈물을 슥슥 닦고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떼여.”
“허허, 반갑습니다.”
실컷 운 뒤라 그런지 발음이 더 뭉개졌다. 그래도 시온은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확신에 온몸의 긴장을 풀고 축 늘어졌다. 생사의 기로에 서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더니 진이 다 빠졌다. 남자는 흐물흐물해진 시온을 들고 살펴보더니 간단한 감상을 뱉었다.
“꼬질꼬질하군. 씻어야겠어.”
“주인님의 방에 이미 목욕물을 준비해 뒀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집사, 이름은 이안이라. 완벽한 자신의 집사에게 만족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자 시온이 슬쩍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씻는 거에여?”
“응.”
정말 안 죽일 거구나.
굳이 여기서 지내도 되냐고 다시 묻지 않은 시온은 남자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 괜히 물었다가 남자가 결정을 번복할까 고민할 기회도 주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방은 2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내부 장식은 지나치게 호화스럽지 않으면서도 딱 보기 좋게 자리 잡아 있었고, 하나하나가 다 고가인 듯했다. 그러나 시온은 방을 제대로 살펴볼 틈도 없이 걸치고 있었던 누더기 옷이 훌렁 벗겨진 채 욕실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