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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남자의 벗은 몸은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마법사인데도 탄탄하게 박혀 있는 근육.
시온은 물렁물렁한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린애라서 비교할 것도 없지만 예전 자신의 모습이었다면 비교되다 못해 고개를 못 들었을 테니까.
“후우.”
남자가 시온을 안은 채 커다란 탕에 들어갔다. 시온의 눈이 또 정신없이 돌아갔다. 개인의 저택 욕실이 왕궁 못지않게 크고 화려했다.
‘사자 입에서 물이 나와! 천사 상이 네 개나 있어!’
휙휙 움직이던 고개는 만족할 만큼 구경을 한 뒤에야 정면으로 돌아왔다. 네 살 정도 되는 아이가 혼자 들어가기엔 욕조가 깊은지라 남자는 소파에서처럼 시온을 제 다리 위에 앉혀 놓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의 널따란 가슴팍이 시온의 바로 앞에 있었다.
마법산데 기사처럼 근육이 멋지다. 순수한 감탄을 한 시온의 눈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가슴을 지나서, 복근을 지나서, 그 밑의…….
“흐아.”
이럴 수가! 말 거시기가 사람에게 달려 있어요! 상상을 뛰어넘는 크기에 시온의 입이 툭, 벌어졌다. 물에 잠겨서 아른거리게 보이는 하체의 중심부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이즈였다. 지금까지 봤던 거시기 중에 제일 크다. 앗, 역시 밑에 털도 빨갛구나.
“뭐야.”
눈치채지 못하려야 못할 수 없는 시온의 눈빛에 욕조의 턱에 팔을 걸치고 천장을 바라보던 남자가 눈을 돌렸다. 제 무릎에나 닿을까 싶은 작은 아이가 남의 성기를 보며 우와아아아, 감탄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저 놀라움만 담긴 표정에 우월감보단 재미를 느낀 남자는 시온에게로 불쑥 손을 뻗었다.
“이건 풋고추냐?”
남자의 집게손에 시온의 아기 고추가 덥석 잡혔다. 이, 이런 성희롱이라니! 자신이 남자의 중심부를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킨 시온은 창피함에 얼굴을 물들이며 남자의 팔을 착착 때렸다. 물론 그에겐 아프기는커녕 재롱으로밖에 안 보였다.
“하지 말아여!”
“나도 구경 좀 한다는데 왜.”
남자는 짓궂음이 담긴 얼굴로 계속해서 시온의 고추를 주물주물 만졌다. 작달막한 아기에게 뭘 느끼랴. 성적인 느낌은 전혀 없는 괴롭힘인지라 분위기가 묘해지는 등의 일은 없었지만 시온의 입장에서 수치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만해요! 그만! 남자는 시온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튼튼한 팔뚝을 어린아이의 힘으로 치워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이도저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던 시온은 옆으로 미끄러져 그만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어푸!”
“아.”
애가 미끄덩― 하고 물속으로 사라지자 놀란 남자가 곧장 시온을 건져 올렸다. 그러나 이미 한바탕 물을 먹은 시온은 콜록콜록 잔기침을 하며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손으로 대충 닦아 내더니 울먹거리면서 두서없는 말을 했다.
“잘못해쪄요. 물에 빠지기 시러여.”
그러면서도 남자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착착 치는 것이, 갑자기 물을 먹은 덕에 정신은 없어도 억울하긴 했나 보다.
뭐 이런 생물체가 다 있어.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킨 남자는 축축 늘어지는 시온의 머리카락을 한 번에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동그란 이마와 젖살 포동한 볼이 훤히 드러났다.
시야가 탁 트였음에도 자꾸만 도리질을 하며 정신 못 차리는 모습에, 남자는 기어코 실없는 웃음을 흘려야 했다.

꼬질꼬질한 시온을 씻기는 것에 중점을 뒀던 목욕을 끝낸 남자는 커다란 수건을 꺼내 시온의 몸을 닦아 주고 집사가 가져다 놓은 작은 목욕 가운을 입혔다. 시온은 어린아이가 절대 없을 것 같은 이 저택에서 작은 가운을 어떻게 구해 왔는지 궁금했지만, 그 신기한 할아버지라면― 하고 저 혼자 납득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 악명 높은 마법사의 이름이 뭐였더라? 시온은 보드라운 가운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젠 자신의 몸을 닦고 있는 남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형아는 이름이 머에여?”
“음?”
남자의 외모는 어떻게 봐도 서른을 넘기지 않은 듯했지만 시온은 그가 적어도 백 년 이상을 살았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호칭은 일단 가장 듣기 좋을 형이라 하자.
시온의 물음에 남자는 한참이나 밑에서 얌전히 서 있는 꼬꼬마를 내려다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루아잔 아델하이트.”
“루잔 님이에여?”
“루아잔이라니까.”
“루아, 아, 잔 님.”
길지 않은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멋대로 줄여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원래 저 나이대 애들이 이렇게 발음을 못하나 잠깐 고민한 남자는 그냥 시온의 발육이 더딘가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스물셋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시온으로선 원하는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이젠 몸은 물론이고 알맹이까지 확연히 어려졌음을 시온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안 되는데. 네 살 아가의 얼굴이 수심으로 어두워졌다.
“그냥 루라고 불러.”
“루 님.”
내가 왜 이렇게 관대해졌지? 남자는 스스로에게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고개가 꺾여라 올려다보고 있는 시온을 안아 들고 욕실에서 나갔다.
방 한쪽에 놓인 탁자에는 씻으러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세로로 긴 큰 컵은 남자, 그러니까 시온이 루라고 부르게 된 악덕 마법사가 목욕 후에 항상 마시는 음료였다. 그것도 알코올 도수가 상당히 높은.
반면 시온의 것임을 모를 수 없게 아기자기한 그림이 새겨진 작은 컵은 섬세한 집사가 일부러 준비한 게 분명했다. 루는 자유분방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시온의 자리는 이번에도, 왠지 고정석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 위였다.
“자, 마셔.”
“고맙쯤니다.”
예의 바른 시온의 행동이 마음에 든 루는 금방 마를 듯한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고 자신의 잔을 들었다. 차갑고 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그의 얼굴에 만족의 빛이 서렸다.
시온은 혹시 음료를 엎어 남자의 몸에 쫙, 부어 버리는 사달이 일어나지 않도록 양손으로 컵을 꼭 쥐고 꼴깍꼴깍 음료를 마셨다. 달달한 포도 맛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루는 자신의 가슴께에서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뺏겼다. 옅게 그을린 색의 피부나 선명한 금색 눈과 머리카락. 이거 꼭……. 그는 아래쪽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를 탐색하듯 살펴보다가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깜둥아.”
사실 그렇게 부를 정도로 까맣진 않지만, 루의 성격은 곱지 않았기에 듣기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시온은 처음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포도 맛 주스만 열심히 마시다가, 루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울컥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자 루가 기다렸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깜둥이 아니에여!”
“네 피부색 봐. 나랑 비교되잖아.”
그리 말하며 자신의 손을 시온의 자그마한 손 옆에 갖다 댔다. 확실히 루는 피부가 하얀 편이라 시온의 색이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그렇지만 깜둥이는 아니다. 흔하지 않은 피부색이어서 그에 대해 상당히 예민한 시온은 연거푸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부정했다.
“그러케 부르지 마여―”
“흐음, 그럼 꿀덩어리.”
꿀덩어리? 난데없이 튀어나온 호칭에 시온이 도리질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루의 눈이 시온의 피부부터, 금색 머리카락, 금색 눈동자를 샅샅이 살폈다. 꽤나 특이하면서도 은근 잘 어우러지는 색의 조합은 꼭 꿀단지 속에 든 달콤한 꿀 같은 인상을 줬다. 그것 참 핥고 싶게 생겼네. 루의 손이 말랑한 볼을 꼬집었다.
물론 시온은 깜둥이든 꿀덩어리든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시오닌데…….”
“그래, 꿀덩어리.”
아니래도 계속 그런다. 몰캉한 감촉에 중독된 듯 연신 제 볼을 주물거리는 루의 다리 위에서, 시온이 불퉁한 표정으로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때마침 방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집사 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단순한 디자인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있는 유아용 잠옷이 들려 있었다.
입고 벗기 편한 원피스 잠옷을 가져온 이안은 삐죽삐죽 모난 표정의 시온을 발견하고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허허, 웃었다.
“시온 님은 왜 그러는지요.”
내 편이다! 사실 이안은 이 저택의 집사이므로 따지고 보면 루의 편이었지만, 그래도 심술궂은 루와 다르게 기분을 물어보는 이안 덕에 시온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시오닌데 자꾸 꿀떵어리라고…….”
“예?”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운한 것을 줄줄이 말하는 아이처럼 하소연이 나온 것은.
루에게 괴롭힘당하는 볼을 구출해 낸 시온이 꿍얼거리자, 이안은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놀라며 제 주인을 쳐다봤다. 언제나 마이페이스에, 자존심 강하고, 성격은 개차반인 루아잔 아델하이트가 남에게 애칭(?)을 붙여 주는 일은, 이안의 집사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는 귀찮다며 싫어하던 분이 작디작은 꼬마를 데려온 것도 놀라웠지만, 벌써 저런 친근한 관계가 되다니. 놀람의 연속이었다.
루는 시온의 고자질에 피식 웃고는 이안에게 설렁설렁 손짓을 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그 뜻을 알아들은 이안은 문 옆의 탁상에 잠옷을 올려 두고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지원군으로 여기고 있던 이가 사라지자 시온은 고개를 모로 돌려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루가 우습다는 표정으로 시온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뭐, 이, 꿀덩어리야.”
콕, 콕, 콕.
말에 맞춰서 루의 손가락이 시온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그 손짓에 따라 덜컥덜컥 흔들리던 시온은 애써 잘 버티다가 결국 세 번째에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아코!”
다행히 루가 의자를 돌려놓고 앉아서 테이블에 머리를 찧을 일도, 어느새 발목이 잡힌 탓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었지만, 시온은 그의 길쭉한 다리 위에 누운 꼴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컵을 든 손을 수직으로 뻗어 음료를 사수해 낸 시온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루가 눈을 빛내며 작은 손에서 컵을 빼내 테이블에 올리자, 시온은 꾸물꾸물 몸을 돌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는 루 니믄 불떵어리자나여―”
“뭐?”
서러워서 못 살겠어. 엉엉! 시온이 징징거리면서 루에게도 별명을 붙여 버리자 황당한 얼굴로 시온을 쳐다보던 그는 곧 푸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이라 불덩어리라고? 물론 시온은 그 소리에 더 슬퍼진 듯 울음소리를 높였다.
“내 소중한 이름인데― 끕, 크응!”
“하하! 미치겠네, 진짜.”
이렇게 예상 못 한 짓만 하는 것도 재주다. 대체 얼마 만에 이렇게 웃는지 모를 정도로 한참 동안이나 웃음을 흘린 루는, 힘겹게 웃음을 멈추고서 제 다리 위에서 발랑 뒤집어진 채 훌쩍이는 시온을 안아 들었다.
“그래, 시온. 뚝.”
비죽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루가 둥기둥기 달래며 시온의 등을 토닥이자 서러움이 좀 가신 건지 시온이 눈물을 슥슥 닦고 고개를 들었다.
“이, 이제 시오니라고 불러 줄 거에여?”
“싫은데.”
“……!!”
망설임 없는 대답에 시온이 마치 큰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쿵― 하는 효과음이 들려야 할 것 같은 표정에 루는 또 폭소했다. 조그만 아이를 품에 꽉 안으며 크흐흐흐, 웃자 시온은 루의 가운 등 쪽을 잡아당기며 억울함을 표했다.
“그럼 나도 불떵어리라고 하꺼야!”
“뭐라고?”
그 순간이었다, 루가 돌연 정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멈추더니 시온과 똑바로 눈을 마주친 것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얼음이 되어 버린 시온은 루의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체감상으론 길게만 느껴지는 정적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는 다시 입매를 끌어 올리며 시온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방금 전의 무표정한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장난이다. 뭘 그리 굳어 있어.”
“…….”
“이건 왜 이렇게 놀리고 싶냐.”
정말 장난이었는지 도로 가벼워진 말투에도 시온은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며 아무런 말도 못했다. 어느새 남자의 장단에 맞춰 투닥거리다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강렬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지금 이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무서운 자이고, 자신을 죽였던 장본인이라는 것이.
시온이 거주하던 왕궁은 왕비의 패악질만 아니면 대체로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루의 존재가 어찌 두렵지 않으랴. 인간의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는 태도와 어우러진 방대한 힘은, 시온에게 있어서 죽음의 신과도 같았다. 피해 갈 수도 없고 이겨 낼 수도 없는. 그의 강함을 알기에 부질없이 저항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지 않고 데려왔다 해도 언제 뒤바뀔지 모르는 결정이었다. 방금 전엔 장난이었다지만, 만약 루가 진심으로 기분 나빠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현실을 파악하고 겁먹은 시온이 여전히 굳어 있자 루가 미간을 좁혔다.
“아가?”
“…….”
“시온.”
“…….”
“꿀덩어리.”
“…….”
대답해야 하는데. 안 하면 화나서 죽일지도 모르는데. 다급한 마음과 다르게 바짝 굳어 버린 입은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고, 몸은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시온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루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후우. 한숨을 내쉰 루는 시온을 들어 테이블 위에 앉혔다. 얼어붙은 인형처럼 수동적으로 루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그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했다. 툭 건드리면 빽 반응하며 잘 놀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루와 테이블에 앉은 시온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 비슷해지자 루는 동그란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왜 그래. 응?”
조곤조곤 묻는 말에도 시온은 입만 달싹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화를 내지 않는 루는 지금, 인생 최초로 기나긴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답지 않은 관대함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종알거리며 웃음이 나오게 하던 꼬마가 이렇게 겁먹은 얼굴로 눈을 피하니까 아주, 굉장히, 매우,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이젠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루를 힐끗거리던 시온은 주저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서워여…….”
“……?”
무섭다고? 남자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그가 생각하기엔 지금까지 시온에게 딱히 무서워할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던 터다. 그렇지만 무섭다고 말하는 시온의 얼굴이 정말 기가 확 죽은 표정이라 루는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었다.
저택 내부로 들어온 뒤로는 루 본인도 믿기지 않을 만큼 친근하고 다정하게 굴었다.
실내로 들어오기 전 정원에서는? 웬 어린애가 있기에 그냥 죽이려 했지. 그게 겨우 한 시간쯤 전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순하고 귀여운 아이라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다른 이도 아닌 루아잔의 경계를 다 허물었다? 말이 안 될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을 되짚다가 위화감을 느낀 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쳐다봤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은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부드럽게 풀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그만 손을 꼬물거리는 시온의 앞에서 더 이상은 냉정한 얼굴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호감이 좀 과하게 느껴지면 뭐 어떠랴, 어차피 그의 감정인 것을. 허리를 숙여 시온과 눈을 마주친 루는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가 널 죽일까 봐?”
끄덕― 어린아이답게 몸에 비해 큰 편인 얼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처음에 괜히 죽이네 뭐네 해서는. 쯧, 혀를 찬 루가 시온의 볼로 손을 옮겨 부드럽고 말랑한 볼살을 주물거리면서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라.”
“…….”
악덕 마법사임에도 듣는 이에게 믿음을 주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시온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벌써 한 번 죽였으면서.
비록 남자가 시온을 몰랐을 때에 본래의 개차반 성격에 따라 저지른 일이라 해도 불신감을 심어 주기엔 충분했다. 조금만 심사가 틀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인 사건도 귀에 넘치도록 들었다. 게다가 마지막엔 본인이 직접 겪기도 했으니 말 다한 것이리라.
반면 루는 일부러 낮게 깔아서 낸 목소리에도 아이가 영 기분을 풀지 않자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손을 쑥 내밀었다.
“어?”
“자, 약속하자.”
깜빡, 깜빡. 시온은 순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내밀어진 손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주먹 쥔 손에서 새끼손가락만 핀 상태의 저것은 분명……. 멍한 얼굴로 루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던 시온은 우물쭈물 자신의 손을 뻗었다.
루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짧은 아기 손에 자신의 소지를 걸었다. 새끼손가락∼ 손에 거얼고∼ 꼭, 꼭, 약속해∼ 귀여운 동요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해치지 않아.”
도장 꾹. 시온의 엄지를 잡아 반강제로 도장을 찍은 루가 “약속.” 하고 중얼거리며 시온의 손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루의 손바닥보다 훨씬 작은 손은 주먹을 쥐니 더 작아져서, 마디 굵은 남자의 손에 잡히니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가려졌다.
주먹이 먹힌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루가 한결 진지해진 얼굴로 시온을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
하지만…… 어떻게 그를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였던 남자가, 어린아이라고 이렇게 관대한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잠깐의 변덕일 가능성이 큰데 구두로 하는 약속으론 근본적인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내리깐 시온이 우물쭈물거리며 루의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답지 않게 초조함을 느낀 루가 미간을 좁히며 시온의 양 볼을 잡았다. 커다란 손에 잡혀 고개를 들게 된 시온이 피할 곳이 없어 불안하게 눈을 맞춰 왔다.
“어떻게 해야 믿을래?”
“미, 미더여.”
“안 믿고 있잖아.”
얼굴 가득 두려움이 덮여 있는데 속는 이가 바보일 것이다. 루는 시온이 제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빤히 그 얼굴을 응시했다. 떨리는 금색 눈동자에 루의 얼굴이 비춰졌다.
작고 동그란 얼굴을 보며 어떻게 해야 이 꼬마를 구슬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루는, 눈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넋을 놓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음에도 요물에게 홀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팔 하나에 완전히 가둘 수 있는 조그만 꼬마의 존재감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뭐야, 이 기분은?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에 루가 당황스런 낯을 했다. 그의 변화를 코앞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던 시온도 덩달아 당황할 정도였다. 시온은 혹시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루, 님……?”
“아.”
작은 목소리에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린 루가 멍해졌던 눈빛을 원 상태로 돌렸다. 의문 어린 얼굴을 본 루의 입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미안.”
“네?”
“처음에 무섭게 한 거.”
예상치 못한 사과에 놀란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악명과 성격으로 보아, 설령 어떠한 큰 죄를 지었더라도 사죄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위인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루에게 있어서 첫 만남인 정원에서도 그가 시온을 무섭게 만들긴 했지만, 그보다는 왕궁에 불을 질러 시온을 비명횡사하게 만든 일이 더 문제였다.
하지만 시온은 루에 대한 두려움이 한결 가셨음을 느꼈다. 이 무서운 마법사가 고작 가벼운 흥미 때문에 당황에 사과까지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시온이 더 이상 떨지 않자 루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안 무서워할 거지?”
왕궁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뭔가 다른 인상의 루를 보며,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쪄여…….”
―꼬르륵.
그리고 대답은 시온의 입과 배에서 동시에 나왔다. 하, 하필 이럴 때! 부끄러움에 얼굴이 상기된 시온이 남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살짝 튀어나온 아기 배가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작게 울리며 음식을 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풉, 크흠.”
포동포동한 볼에 홍조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뱉어 낸 루는, 곧장 헛기침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처음보다도 더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기다려. 금방 올 테니.”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이 애매해서 식사를 하기엔 좀 이르지만, 무려 루아잔이 아가의 끼니를 챙겨 주겠다는데 항의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루가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방을 나가자 시온은 엉거주춤하게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런데 문제는, 시온이 아직 테이블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든든하게 잡아 주는 남자가 없으니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불안정한 느낌이 들어 싫었다.
“루 님, 저 내려가께여―”
루가 없음에도 저 혼자 허락을 구한 시온이 몸을 돌려 발 한쪽을 내렸다. 높게만 느껴지는 테이블에서 의자로 발을 옮기자니 혹여 떨어질까 겁나기도 했다. 허우적허우적 허공을 저어 대던 발이 의자에 닿았다.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쉰 시온은 반대쪽 발도 마저 의자로 내리고, 의자에서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혼자서도 척척 잘해 낸 것에 작고 동그란 얼굴 가득 뿌듯함이 떠올랐다.
―촤악!
“……어?”
뭐지, 이 불길한 소리는? 시온의 얼굴이 천천히 뒤쪽으로 돌아갔다. 바닥으로 내려오면서 실수로 팔로 쳤는지 테이블 위에 아까 시온이 마시던 주스 컵이 데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 담겨 있었던 진한 보라색 액체는 바닥에 흩뿌려진 상태였다.
“앙대!!”
내가 쥬스를 쏟아쪄! 화들짝 놀란 시온은 점점 면적을 넓혀 가는 주스를 보며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금방 다시 나온 시온의 손에는 용케도 찾아낸 남색 수건이 들려 있었다. 흰색으로 닦으면 물든 걸 빼는 게 더 힘드니까. 짧은 순간에 시종으로서의 기지가 발휘되었다.
그래도 테이블 밑이 카펫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시온이 조막만 한 손으로 열심히 바닥을 닦았다. 수분 흡수율이 뛰어난 수건은 금방 젖은 흔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나 쏟아진 것은 물이 아니라 주스였으니…….
“끈적해…….”
바닥을 탁탁 쳐 본 시온은 불쾌하게 남아 있는 끈적함에 눈썹을 팔(八)자로 늘어뜨리고는 축축해진 수건을 들고 또 욕실로 들어갔다. 수건을 빨아서 물걸레로 만들어 바닥을 닦아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