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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벽의 구석에 붙어 있는 청소용인 듯한 수도꼭지를 발견한 시온은 물을 틀어 수건을 적셨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 물이 얼음장 같았지만, 다급한 시온으로선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아기로 회춘하기 전까지 청소의 베테랑이었던 시온에게 걸레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작아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이…… 물이…….”
돌돌 말아서 아무리 쥐어짜도 수건은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고 축 늘어지기만 했다. 몸이 작아짐과 비례해 힘이 약해졌음을 간과한 것이다. 어떡하나 하고 공황 상태에 빠진 시온은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게 떠올라 수건을 수도꼭지에 한 방향으로 꾹꾹 말았다.
그래도 수건은 축축했다.
“어떠케!”
걸레질도 못 하게 돼 버렸어요. 엉엉―
이렇게 헤매는 사이 루가 돌아올까 싶어 울상이 된 시온은 수건을 펴서 바닥에 깔았다.
“이걸로 닦으면 난 주글 거야―”
아무리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시온은 툭 건드리면 곧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바닥에 펼쳐진 수건을 착착 때렸다. 아직도 흥건한 물기가 시온의 손짓에 따라 찰박찰박 튀어 올랐다. 딱딱한 타일 위에 고작 수건 하나 깔아 놓고 연신 내려치는 손이 아플 만도 하건만, 끈적한 바닥을 발견하고 루가 야차로 변하는 상상 때문에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축축한 수건을 촉촉한 수건으로 만들려는 시온의 노력은 루가 사라져 버린 아이를 찾아 욕실로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온의 몸이 갑자기 번쩍 들렸다.
“뭐하냐.”
“앗!”
언제 온 거지?! 루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시온은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놀라며 수건을 뒤로 감췄다. 물론 누구에게나 들킬 만큼 어설픈 행동이었다.
아주 쉽게 수건을 빼앗아 바닥에 버린 루는 한 팔로 시온을 받쳐 들고 작은 손을 잡았다. 냉기와 마찰 때문에 여린 살결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것을 본 루가 인상을 쓰자 시온은 혼날까 봐 조마조마하며 먼저 자백을 시도했다.
“죄송해여. 주스 쏟아서…….”
“그래서, 저걸로 닦으려고 했어?”
“끈적끈적해져떠여.”
“놔둬.”
쯧. 혀를 찬 루가 차갑게 얼은 시온의 손을 주무르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안 혼내는 건가?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루의 눈치를 살핀 시온은 어디선가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테이블 위에 루가 가져온 음식이 놓여 있었다.
루는 이전처럼 의자에 앉아 제 다리 위에 시온을 앉혔다. 비싸 보이는 접시 위의 커다란 스테이크 조각에 시온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시온의 몫이 아니었다.
“네 건 이거.”
루가 그리 말하며 가리킨 것은 움푹 파인 그릇에 담긴 걸쭉한 음식이었다.
거의 이유식 수준인 내용물을 본 시온이 으엑―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른들의 입장에선 아이들이 쉽게 삼키고 소화도 잘 시키도록 공을 들인 것이지만, 시온은 이런 한두 살 난 애들이나 먹을 이유식(으로 보이는 음식)보다는 고기가 훨씬 좋았다.
시온이 루의 옷자락을 잡으며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저두 꼬기…….”
“안 돼.”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덕분에 시온은 아쉽고도 아쉬운 마음에 울상을 지어야 했다.
“입 벌려 봐.”
루가 가볍게 시온의 얼굴을 잡으며 말했다. 왜여? 눈으로 물은 시온은 순순히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남자의 눈이 작은 입안을 샅샅이 훑었다. 유치가 가지런하게 자라 있었다.
“이는 다 났군.”
“저 꼬기 먹을 수 이쪄여!”
“안 줄 건데?”
이를 확인하는 루의 행동에 퐁 솟아났던 기대가 다시 사그라졌다. 잘만 씹어 먹던 고기를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한다니! 시온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어려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밥을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기를 포기한 시온이 유아용 숟가락을 꼭 잡고는 비스듬하게 놓인 의자 때문에 거의 옆쪽에 있는 루의 얼굴을 향해 인사했다.
“잘 먹게쯤니다.”
합― 죽인지 뭔지 모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다. 그저 밍밍하기만 할 것 같았던 모양새와 다르게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고기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 시온의 얼굴이 완전히 펴졌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들과 정성이 가득 들어간 맛이라고 할까.
씹을 것도 없이 몇 번 입을 움직이다가 음식을 꿀꺽 삼킨 시온은 다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짭짤하면서도 달달하게 간이 된 맛이, 어려진 시온의 입에 딱 맞았다.
“…….”
루는 어째서인지 제 몫의 스테이크를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시온만 쳐다보고 있었다. 통통한 볼 사이에서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이 참 귀엽기도 했다. 게다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 때문에 더 아기 같아 보였다.
흐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짧은 숨을 내쉰 루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쓱쓱 고기를 썰었다. 성격이 더럽고 입이 험하다 해도,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배인 식사 예절과 품위가 어디 가지는 않는지라 행동이 귀족처럼 우아했다. 그런데 그가 자른 고기는, 성인이 먹기에는 턱없이 작은 크기였다.
“자.”
“으응?”
열심히 이유식을 먹던 시온의 입 앞에 포크에 찍힌 작은 고기가 내밀어졌다. 어? 안 준댔는데? 기대를 완전히 접고 있었던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 장난기나 놀리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마음이 바뀌었나? 그럼 먹어야지! 기회를 저버릴 리가 없는 시온은 냉큼 고기를 받아먹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육질과 풍부한 육즙에 입안 가득 행복이 퍼졌다.
“마싯쪄…….”
왕궁에서 일하며 쓰고 남은 고기를 성의 없게 익혀서 주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입을 오물오물 움직여 고기를 삼킨 시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시 루를 쳐다봤다. 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줄까?”
“주세여!”
웬일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안 줄 거라며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던 루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게 썰기 시작했다. 물론 시온은 그의 변심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고 활짝 핀 얼굴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기다릴 뿐이었다.
고기를 찍은 포크가 다시 시온의 입으로 다가왔다. 시온은 미리 입을 벌리고 고기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슬금슬금 다가오던 포크는 바로 입 앞에서 갑자기 뒤로 쑥 피해 버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어어!”
루의 장난에 안타까운 소리를 낸 시온이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쭉쭉 잡아당기는 약하기 그지없는 힘에 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가 주었다. 덕분에 가까워진 포크의 고기는 시온의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루의 입에서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시온에게 고기를 두 번 먹여 준 루는, 또 변심이라도 한 건지 ‘줄까?’라고 묻지도 않고 말없이 제 입으로만 포크를 움직였다. 루 님도 먹어야지, 하고 얌전히 기다리던 시온은 그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다 먹어 버리면 어떡하지? 나름 맛있게 먹고 있었던 이유식은 이미 뒷전이었다.
애타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시온을 모르는 척한 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크의 반절을 먹어 치웠다. 결국 시온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루의 옷을 잡아 꾹꾹 당겼다.
“루 님!”
“왜?”
“저두 꼬기 주세여.”
같이 목욕하고 밥도 먹고 하다 보니 더 가까워져서인지, 고기가 눈앞에 있어서인지, 시온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곧장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 점에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든 루는 일부러 고민스럽다는 듯 흐음― 하고 시온의 애를 태웠다. 그러더니 곧 포크로 조그만 고기 조각을 찍었다.
“내가 이걸 주면 넌 뭘 해 줄 건데?”
“네?”
루의 매정한 요구에 당황한 시온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식탁에 놓인 자신의 밥그릇을 쳐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저렇게 맛있는 고기를 갖고 있는 루에게 이런 이유식으로 협상에 성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보지 않아도 당연한 결과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시온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가진 게 엄쪄여.”
그리 말하는 아가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시온의 축 처진 어깨와 얼굴을 본 루는 황당함 반, 귀여움 반이 섞인 기분으로 웃음을 흘렸다. 쪼그만 녀석이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것처럼 늘어지는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입술을 깨물며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은 루는 본연의 목적을 위해 시온에게 차선의 방법을 제안했다.
“자.”
불쑥― 시온의 앞으로 내밀어진 것은 루의 볼이었다. 응? 시온이 의아한 얼굴로 날카로운 턱 선과 그 위의 살집 없는 볼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인 루의 얼굴이 시온의 조금 위쪽에 있었다.
때려 달라는 건가? 별다른 말도 없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최대한 머리를 굴린 시온이 도출해 낸 결과였다. 이걸 어떡하지, 하고 고민에 빠진 시온의 손이 저길 때릴까 말까 움찔거렸다. 그러자 보채는 것은 루였다.
“빨리.”
“징짜여?”
“응.”
왜, 왜 뺨을 치라고……. 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혹시 이건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는 시온이었다. 그러나 왜 안 하냐고 압박하듯 루의 얼굴이 더 가까워지자 시온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좋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하는 거야.
“징짜 해여?”
루의 얼굴이 위아래로 짧게 끄덕여졌다. 죽이네 뭐네 할 때 어차피 죽을 거 뺨 한 대만 때리고 죽을까, 했었지만 정말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조금 떨리네. 경건하게 준비하는 마음으로 후― 하― 숨을 들이쉬고 내쉰 시온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찰딱!
“……?”
조그만 손이 남자의 볼에 부딪치며 귀여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아프진 않지만 전혀 예상했던 감촉이 아닌지라 잠시 눈을 깜빡인 루는 고개를 돌려 허한 얼굴로 시온을 쳐다봤다. 감히 제 얼굴을 때린 아기는 되레 자기 손이 더 아파서 호, 호, 입으로 바람을 불고 있었다.
뭐야. 루가 황당함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바람 불기를 멈추고 고개를 든 시온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꼬기 주꺼에여?”
“하?”
저절로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을 실감하며 짧게 소리 낸 루는 기대하고 있는 시온에게 고기 대신, 깨물기를 선사했다. 볼을 꽉 깨물자 말랑한 살이 이 사이로 물린다.
“아야!”
갑작스런 깨물기에 놀란 시온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루의 얼굴을 붙잡았다. 무슨 고기 씹듯이 질겅질겅 움직이는 이에는 힘이 실려 있진 않았지만 시온이 혼자 힘으로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아파여! 루 님! 그거 먹는 거 아닌데!”
이 괘씸한 것. 루는 시온의 항의를 들어주지 않고 감정을 담아 말랑한 볼을 성에 찰 때까지 실컷 깨물었다. 얼굴을 밀어내는 작은 손은 태풍 앞의 나뭇잎처럼 연약했다.
이제 됐다 싶을 때까지 볼을 씹은 루가 시온을 놔줬다. 결국 루가 힘을 빼고서야 풀려난 시온은 제 볼을 감싸고는 울먹울먹 눈물을 가득 매달았다.
“너므해…… 흐끕!”
손바닥 아래의 볼에 잇자국이 꽤나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일부러 살살 깨물었건만 피부가 뭐 이리 약해. 빨개진 얼굴을 보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 루는 슬쩍 혀를 차고 시온의 볼을 어루만졌다. 깨물던 것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에 시온이 뚝뚝 눈물을 떨궜다.
“뽀뽀하라니까 때리고 있어.”
그러던 중 루가 삐뚜름한 얼굴로 말하자 시온은 눈물을 매단 채 그를 쳐다봤다. 뽀뽀? 시온은 뺨을 치라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최초로 루아잔 아델하이트의 싸대기를 날린 꼬꼬마는 볼 깨물기라는 턱없는 앙갚음을 받고 찔끔 눈물을 뽑았다.
엄지로 시온의 볼을 살살 어루만진 루가 이제야 고기를 먹여 줬다. 훌쩍거리면서도 잘만 받아먹은 시온은 눈과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도 행복해했다. 이거 왜 이리 단순해. 또 피식거리는 웃음이 루에게서 새어 나왔다.
“맛있어?”
“마시쪄여.”
루의 입장에서야 뺨 맞은 것치고 응징은커녕 귀여워해 주기에 가까운 깨물기였지만, 시온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루는 아까와는 달리 시온이 재깍재깍 먹을 수 있도록 고기를 썰어 주며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귀여운 맛에 울리고 싶긴 한데, 또 그러고 나면 안쓰러워지는 것이다.
안쓰러움이라……. 루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특이한 감정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만할 정도로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루는 아주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세월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 후로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 아직 잠을 많이 자야 하는 시온이 졸린 듯 꾸벅꾸벅 고개를 떨궜기 때문이다.
“우아―”
폭신하고 부드럽다. 널찍한 침대에서 최고급임이 분명한 이불과 시트에 시온이 마구 몸을 비볐다. 깨끗한 시트가 볼에 닿고 포근한 이불이 몸을 덮자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그런 시온의 옆에는 루가 누워 있었다.
“얼른 자, 꼬맹아.”
“루 님도 자여?”
“넌 어린애니까 같이 자 줘야지.”
“아, 안 어린데!”
시온이 힘껏 부정했지만, 루는 강아지 재롱 보듯 웃고는 작은 몸을 끌어당겼다. 재우려고 침대에 올라왔더니 다시 기운을 차리려 해서 억지로라도 재울 심산이었다.
너른 품에 갇힌 시온은 생소한 느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루가 어서 자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아. 금세 노곤하게 풀린 눈을 느릿느릿 깜빡인 시온은 이렇게 어려진 것도 의외로 좋은 것 같다 생각했다. 강인하고 듬직한 누군가가 보호해 주는 것은 큰 안정감을 선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여― 실제로 말한 것인지 그저 생각만 한 것인지 모를 인사를 마지막으로, 시온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규칙적으로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마음이 놓였다.
개차반의 냉혹한 마법사의 품은 예상외로 굉장히 따뜻했다.

그리고 시온의 꿈에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침범했다.
당황한 시온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위로는 새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발아래엔 새하얀 구름이 가득했다.
구름? 눈을 동그랗게 뜬 시온이 탄성을 내뱉고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폭신한 솜뭉치 같은 구름은 탄력 있게 금방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왔다.
“우아, 싱기해!”
구름은 역시 발로 딛고 설 수 있는 거였어. 꼭 한 번쯤은 제 발로 구름을 밟아 보는 게 꿈이었던 시온의 얼굴에 감격이 가득 찼다. 덕분에 자동적으로 찬밥 신세가 된 여자는 그럼에도 웃는 얼굴로 시온에게 다가왔다. 길게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과 하늘하늘 늘어지는 흰색 드레스는 그녀를 마치 여신처럼 보이게 했다.
“안녕, 시온.”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고운 목소리에 시온이 구름 위에서 폴짝거리던 것을 멈추고 여자를 쳐다봤다. 아, 구름 때문에 잊고 있었네.
“누, 누구세여?”
“분노의 여신, 세이라키아.”
여신? 시온이 놀라며 아무런 말도 못 하자 그녀는 시온을 안아 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품에 안긴 시온은 묘하게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비교적 밝은 편인 붉은 눈동자는 시온이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루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붕노의 여신이여?”
“그래. 할 말이 있어서 네 꿈으로 찾아왔단다.”
다정한 누나처럼 웃으며 시온의 볼을 꼬집는 여자는 아무리 봐도 ‘분노’의 여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냥 단순한 꿈인 걸까? 조금 얼얼한 것 같은 뺨 때문에 진짠지 가짠지 긴가민가한 시온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루아잔과는 벌써 친해졌더구나.”
“어…….”
어떻게 알았지? 여신이라는 말이 진짜인가, 하고 놀라는 시온을 보며 자칭 여신이 후후 웃었다. 그녀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고급스러운 의자가 하나 떡하니 나타났다. 구름 위의 의자에 편하게 앉은 그녀는 어디의 누구와 꼭 닮은 행동으로 시온을 다리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파격적인 말을 했다.
“내가 널 다시 살려서 그 집으로 보냈거든.”
“징짜여?!”
그러엄. 시온이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말랑한 볼을 떡 만지듯 주무르는 여신님이었다. 이렇게 귀여울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징짜 주거썼나 바요…….”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어린애가 되어 있기에 혹시 과거로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지금은 멀쩡히 살아 있다 해도, 자신이 정말 죽었다는 것을 확인 받은 시온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기분에 조금 침울해졌다. 여자는 그런 시온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금기라서, 차라리 다시 살려 내는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한 거란다.”
“저를 왜 살려쪄여?”
이쯤 되니 그녀가 정말 여신이고 자신에게 새 생명을 부여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이유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건―” 하고 말을 끌던 그녀는 시온이 집중하는 얼굴로 빤히 올려다보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놈에게 약점을 만들어 줘야 했거든.”
“루 님이여?”
“응.”
약점? 어째서? 그리고 루의 약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왜 자신을 살린 건지도 모르겠다.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은 말에 시온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을 굴리고 있으니 부드러운 손길이 재차 머리를 쓰다듬었다.
“몰라도 된단다. 그냥 지금처럼만 지내면 돼.”
“으움…… 저 다시 안 주거여?”
“당연한 걸 묻는구나.”
사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려진 몸으로 지내기엔 은근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지내는 시간과 육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하여, 조만간 다시 빼앗겨 버리진 않을까 하는 마음. 이제야 완전히 안심이 된 시온은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마음이 안정되자 얼핏 보고 지나갔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잠들기 직전까지 봤던 루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
시온의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알아챈 여자는 말을 해 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루아잔은 내 동생이란다.”
“…….”
동생? 순간 머리가 제 기능을 멈춰 그 의미를 재깍 떠올리지 못한 시온은 거의 10초가 지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루 님 누나에여?!”
“어머, 누나라니 듣기 좋네.”
젊어진 기분이야, 호호. 눈을 접으며 웃는 모습에도 시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쩐지 닮은 것 같다 했지만 그에게 형제나 남매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 누나? 그렇지만…….
시온의 동그란 눈매가 찌푸려졌다.
“여신님인데…….”
어떻게 남매지? 악덕 마법사는 원래 인간이었지만 극한의 경지를 넘어서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이 되었다 했는데? 작은 머리통 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모르게쪄. 시온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자, 여자는 장난스레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시온을 구름 위에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볼을 꼬집고 멀어지는 손길에 시온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무튼, 이 정도만 알고 있으렴.”
“더 알려 주면 앙대여?”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야.”
그러쿠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온을 보며 여자의 붉은 입술이 휘어졌다. 운명의 신이 이 아이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기에 믿어 봤더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 이 귀여운 약점에게 팁이나 하나 알려 주고 갈까.
“아가.”
“저 아가 아니에여!”
“그래그래. 혹시 언젠가 루아잔이 널 속상하게 하면, ‘변태 할아버지, 미워!’ 하고 울어 버리렴.”
아마 시온이 그런 말을 할 때쯤이면 루는 저 마성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터다. 상상만으로도 통쾌한 광경에 그녀는 시온에게 그 말을 몇 번이고 새겨 줬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던 시온은 손을 꼬물거리며 주저했다.
“어, 어떠케 그래여.”
“괜찮아. 누나 믿지?”
“어어…….”
“못 믿는 거야?”
여자가 일부러 슬프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순진하게도 깜짝 놀란 시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미더여!”
귀여워라. 루만 아니라면 데려다 키우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가야겠다며 시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납치라도 할 것 같았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허리를 숙인 세이라키아가 시온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루아잔은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너한테 꼼짝 못 할 거거든.”
“왜, 왜여?”
시온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다. 잠들기 전까지 시온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꼼짝 못 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긴 했지만,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였다.
세이라키아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의뭉스런 미소를 띠었다. 운명의 여신에게 온갖 조공을 바쳐 알아낸 바, 시온은 루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존재다. 상세한 과정까지는 듣지 못했으나, 어쨌든 시온이 있어야 루가 살아날 수 있다.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그자에게로부터.
그래서 세이라키아는 약간의 꼼수를 써서 현재의 루와 미래의 루를 연결시켰다.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인 그들이 시온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공유할 수 있도록. 사적으로 시간을 건드리는 일, 그것도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정을 억지로 끌어와 현재를 바꾸는 짓은 금기에 가까운 행위지만, 뭐 어떤가. 주신이 묵인해 주었는데.
“너한테 뿅 갔거든.”
“네……?”
장난스러운 대답에 시온이 멍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후후, 웃으며 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놈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루와 시온은 여유를 즐겨도 될 터다.
“정말이야. 그럼 이제 정말 갈게, 아가.”
“어…… 저두 가께여. 안녕히 가세여∼”
그녀가 이 꿈을 깨워 주지 않는 이상 시온 스스로 나갈 방법은 없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한 듯 꾸벅 인사하는 아이의 모습이 웃겼다. 귀여워서 어떡해. 아무리 그녀가 손을 댔다지만, 루가 급속도로 빠져든 이유는 아이 자체의 사랑스러움도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다음에 보자. 루아잔에게 내 얘기는 하지 말고.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 같은 음성에 시온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적발의 여신이 안개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시온의 꿈과 정신도 까맣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