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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해가 중천에 떴지만 아침잠을 방해받기 싫어하는 루인지라 햇빛이 두꺼운 커튼을 뚫고 새어 들어올 일은 없었다. 열 시간도 넘게 잤을까, 시온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시온은 단단한 팔뚝에 휘감겨져 루의 품에 찰싹 붙어 있었다.
“하아암―”
하품을 한 시온이 조금 풀려 있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 밤인가? 왜 이렇게 어둡지? 보아하니 루는 미동도 없이 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한 품에 갇혀 그 체온을 만끽하던 시온은 문득 느껴지는 요의에 꼬물꼬물 몸을 움직였다.
“쉬 마려…….”
화장실 가야지. 혼자서도 잘하는 네 살 시온은 돌덩이처럼 꿈쩍도 안 하는 루의 팔에서 끙끙거리며 빠져나왔다. 푹신한 침대는 팔다리로 기어갈 때마다 몸이 푹푹 빠졌다. 재미쪄. 실실 웃음을 걸친 시온은 커다란 침대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거기서부터였으니.
“…….”
침대가…… 너무 높았다.
어제는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막상 올라와서 보니 제 키보다도 높은 바닥과의 거리에 시온은 고개만 쏙 내밀고 아래를 살폈다. 높다. 루의 침대는 보통보다 훨씬 크고 높은 것이었다. 사실 반대쪽에 작은 계단이 붙어 있었지만 시온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
어떡하지. 루 님을 깨울까? 눈썹을 일그러뜨린 시온이 뒤를 돌아봤다. 루는 품을 채우던 시온이 없어져서 그런지 자면서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나름대로 잘 자는 모습에 차마 깨우기가 미안해진 시온은 다시 밑을 내려다봤다.
“아니야. 할 수 이, 이쪄.”
나는 가짜 네 살이니까! 애써 당차게 마음을 굳힌 시온은 몸을 돌려 밑으로 발 한쪽을 내렸다. 허우적거리며 다리를 휘저어 봤지만 발끝에 닿는 것이 없었다. 다른 쪽도 내리면 닿겠지? 단순하게 생각한 시온이 나머지 다리도 침대 밑으로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닿는 것은 없었다.
몸을 반으로 접고 침대에 걸쳐진 시온은 바닥이 느껴지지 않자 걱정스런 마음이 차올라 손에 힘을 꽉 주고 시트를 잡았다.
이건 안 될 것 같아. 시온은 방금 전의 무모했던 자신을 탓하며 다시 올라가 루를 깨우기 위해 발을 침대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순간 몸이 미끄러져 발을 올리기는커녕, 시온은 가슴께만 겨우 침대에 걸친 상황이 되었다.
주륵, 떠내려갔음에도 발이 허공에 떠 있자 시온이 울상을 지었다. 이 밑으로 끝없는 절벽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루 님―”
결국 시온은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잠시 주저하다가 루를 부르는 목소리는 나름 희망에 차 있었다. 루 님이 날 구해 줄 거야, 하는 작은 희망에. 그러나 루는 일어나지 않았다. 깊게 주무시나 봐. 시온은 좀 더 소리를 높였다.
“루 님!”
안 일어난다. 왜지? 소리가 작은가? 잠귀가 밝다 못해 인기척만 느껴지면 벌떡 일어날 듯한 루가 이 정도의 소리에도 깨지 않자, 시온은 불안함에 숨이 조금 가빠졌다. 때마침 힘이 빠진 팔로 인해 밑으로 더 내려가서, 시온은 이젠 팔과 턱으로만 침대 시트를 잡아야 했다.
“루 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루가 잠에서 깨어나는 기색은 없었다. 어떠케! 겨우 침대도 못 내려가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무서움을 어쩔 수 없어, 시온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기 전 봤던 침대 높이는 상상 속에서 이미 몇 배로 부풀려진 상태였다.
“루 니임― 살려 주떼여― 히끅.”
숫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시온이 애절하게 루를 불렀지만, 그는 도무지 벌떡 일어나서 시온을 구해 줄 기색이 없었다.
무셔. 어떠케.
핏기가 가실 정도로 시트를 잡고 있는 손에선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시온은 절벽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루에게 작별을 고했다.
저 먼저 가께여, 루 님. 꼬기 정말 마싯서쪄요.
마침내 시온의 손이 풀렸다. 지탱하던 힘이 사라져 그대로 미끄러진 몸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크지 않은 소리가 조용한 아침을 울렸다.
“…….”
엉덩이에 충격을 받은 시온은 멍한 얼굴로 앞을 쳐다봤다. 아무리 높아도 사람이 쓰는 침대인지라 많이 아프진 않았지만, 떨어지는 순간 놀라서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한 시온이었다. 힘이 풀린 시온은 부끄럽게도 바닥에 오줌을 싸 버렸다.
화, 화장실 가려 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시온은 잠옷이 젖어 버리자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붉게 물든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으아아아앙―”
쉬싸쪄― 무서움이 가시자 서러움이 북받친 시온이 엉엉 울면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제만 해도 멋지다고 감탄했던 방이건만, 지금은 쓸데없이 넓게 느껴졌다.
문에 다다른 시온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크고 무거운 문은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가 않았다. 시온은 문을 콩콩 두드리며, 서럽게 엉엉 소리를 내면서 끝없이 울었다.
루가 일어날 시간에 적당히 맞춰 아침 식사와 시온의 옷을 가지고 온 집사 이안이 아니었다면, 울다 지쳐서 다시 잠들었을 정도로 엉엉.
“아니, 시온 님! 왜 이러십니까?”
밖에서부터 들리는 아이 우는 소리에 놀란 이안이 급하게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시온이었다. 문이 열리고 어른이 들어오자 안심한 시온은 여전히 서럽게 울면서 이안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쉬 싸쪄여― 흐으, 흡, 흐끅!”
“이런, 주인님께선…….”
이안은 우선 시온을 안아 진정하라며 등을 토닥였다. 베테랑 집사로서 어린아이 쉬야가 묻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므로.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시온을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며 그는 의아한 얼굴로 힐끗 침대를 살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주인이 아이가 이렇게 우는데도 깨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는 그 무렵, 이대로 가긴 아깝다며 자신을 기억도 못 하는 동생의 꿈에 침범해 괴롭히는 분노의 여신 세이라키아와 싸우느라 자면서도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야, 꿀덩어리.”
루가 나름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에도 시온은 대답하지 않고 휙 돌아앉았다. 어제의 그 이유식 비슷한 음식이 담긴 그릇을 꼭 잡고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는 얼굴에는 삐쳤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혼자서 울고 있던 시온을 달래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이안은 식당으로 시온을 데리고 왔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고 인상을 구긴 채 꿈에서 깬 루도 시온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식당에 도착했는데, 그가 보게 된 것은 한껏 토라진 아이의 얼굴이었다.
루는 시온의 옆자리에 앉아 빵빵한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부드러운 음식을 오물오물 삼키던 시온은 그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이안이 가져온 숱한 옷 중 앙증맞은 곰돌이 모자가 달린 옷을 입고 그러니까 마치 아기 곰 같아 보였다.
시온의 머리 위에 있는 곰의 코 부분을 보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은 루는, 잘 익은 베이컨 말이를 콕 찍어 시온의 앞에서 흔들었다.
“이거 줄까?”
“…….”
어젠 분명 고기에 제대로 홀려서 보채더니 지금은 어째서인지 본 척도 안 한다. 이것 봐라. 영 소용없는 낚시에 포크를 내린 루는 미간을 좁히고 집사에게 물었다.
“이 녀석 왜 이래?”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자는 이안이니 뭔가 알고 있을 터다. 주인의 물음에 조심스레 시온을 살핀 이안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대답을 했다.
“……아침에 침대가 너무 높아서 매달렸다가 떨어지시고, 그때 놀라서 바닥에 지도를 그리셨습니다.”
“하.”
한 번도 침대가 높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루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침대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지도를 그려서 삐쳤다 이거지.
피식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시온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웃음을 걸친 루는 곰돌이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진짜 아기네. 기저귀 차야 하는 거 아냐?”
스물세 살까지 찍고 네 살로 다시 돌아와 버린 시온에겐 참으로 수치스러운 말이었다. 눈썹을 찌푸린 시온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 루의 손을 털어 내고 그를 올려다봤다.
“루 님이 자꾸 안 일어나짜나여!”
“내가?”
억울하게 외치는 말에 루의 눈썹도 찌푸려졌다. 이안은 당시 상황을 모르는 그를 위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침대에서 떨어지기 전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주인님께서 듣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기적인 마법에 짐승 같은 감각까지 지닌 터라 적이 넘침에도 호위 하나 달지 않은 루이건만, 어찌 그 소리를 못 들었을까. 자신도 의아한 듯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문득 떠오른 이유에 찌푸린 눈썹을 폈다.
“아아, 웬 이상한 게 나타나서.”
그 시뻘건 여자. 깨지 못했던 것이 납득이 가자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해 못 할 말을 하며 시비를 걸어서 상대하느라 얼마나 귀찮았는지. 묘하게도 생생한 꿈이었다. 그런 루를 보며, 시온은 그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루 님이 안 구해 죠서 떠러져떠여―”
눈썹을 축 내려뜨리고 징징거리는 모습은 신기하게도 전혀 밉지 않았다. 자연스레 입꼬리를 올린 루는 특별히 다리가 긴 의자에 앉아 있던 시온을 들어 품에 안았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살 달래자 삐친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그래, 미안해. 화 풀어.”
처음 만났을 때완 정반대로 다정함이 담긴 목소리에 시온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제 신뢰가 생긴 건지 잘만 안겨 오는 아이의 변화가 뿌듯한 루였다.
그러고 보니 이런 아가에게 침대가 높긴 하지. 그러나 좀 낮은 침대로 바꿀까 하는 생각은 곧 사라졌다. 이 잔망스러운 녀석이 아침마다 내려 달라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시온은 그의 속도 모르고 작은 짐승처럼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식사 후엔 저택을 둘러보는 시간이었다. 첫날에야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대충 넘어갔다 해도, 앞으로 살게 된 집인데 적어도 어디에 뭐가 있고 누가 있는지는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루는 아기 곰돌이가 된 시온을 안고 저택을 누볐다. 시온이 혼자 걸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다리도 짧은 게 어느 세월에 쫓아올 거냐며 내려 주지 않는 그였다.
“애초에 고용인이 별로 없어. 집사 하나랑 요리사 하나, 정원사 하나, 청소부 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심부름꾼 하나.”
이만한 저택을 관리하는 인원치곤 턱없이 적은 수였다. 루가 말하는 대로 손가락을 꼽아 본 시온은 전부 여섯 명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놀라며 루에게 물었다.
“왜케 쪼금이에여?”
“귀찮으니까. 아, 애완동물은 꽤 있군.”
“멍뭉이?!”
악덕 마법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애완동물이 여럿인가 보다. 예전부터 강아지나 고양이라면 크든 작든 환장하는 시온은 표정을 활짝 폈다.
그치만 지금은 몸이 작으니까, 이왕이면 동물도 작은 아기들이면 좋겠다. 당장 보고 싶다는 듯 들뜬 얼굴로 쳐다보는 시온의 볼이 상기돼 있었다.
루는 어째서인지 그 시선을 은근히 피했다.
“뭐…… 개 세 마리랑 말 두 마리, 늑대 두 마리 정도.”
“늑대두 이쪄여?”
“으음.”
시온의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무려 늑대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루에게 존경의 눈빛까지 보내는데, 답지 않게 루는 조금 난감해 보였다. 그의 말에 한껏 기대에 찬 시온이 멍뭉이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청소부들 먼저 보여 주지.”
“어…… 멍뭉이 먼저 보면 앙대여?”
“지금 아마 식사 중일 테니 이따가 보자.”
곰돌이 모자를 쓴 시온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은 루는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가 퐁― 나타났다. 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루와 시온의 앞에 작은 두 꼬마가 서 있었다. 시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 보이는 둘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지만, 쌍둥이인 듯 꼭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시온에게 콕 박혀 있었다.
“집요정인 ‘우’와 ‘랑’이다. 계약자인 내게서 마력을 얻어 가는 대신 저택의 청소를 일체 담당하고 있지.”
“요정?”
어쩐지 표정 없는 얼굴이며 묘한 분위기가 그 나이대의 사람 같지 않다 했더니, 말로만 듣던 요정이었다. 전설 속의 존재는 처음 만나 보는 시온은 멍뭉이를 보고 싶어 하던 마음은 싹 잊은 채 그들을 쳐다봤다.
집요정들도 이 저택에서 어린아이는 처음 보는지라 호기심 어린 얼굴로 시온을 보고 있었다. 루는 어디 말이라도 걸어 보라는 듯 시온을 바닥에 내려 줬다.
“아, 안녕…….”
왠지 부끄러. 우물쭈물하며 다가간 시온이 슬쩍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작아진 뒤로 눈높이가 비슷한 상대는 처음 봐서 반가웠다. 집요정들이 처억, 손을 내밀었다.
“우입니다.”
“랑입니다.”
우는 남자 요정, 랑은 여자 요정이었다. 요정도 성별이 있던가? 난데없이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동시에 내밀어진 손 중 누구의 것을 먼저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곤란한 얼굴로 두 손을 번갈아 보던 시온은 빤히 쳐다보는 두 쌍의 눈에 못 이겨 결국 양손을 다 뻗었다.
“저는 시오닌데, 이러케 잡아서 미안해여.”
최선책으로 한 손에 하나씩 잡고 흔들자 그들의 시선은 이제 시온의 손으로 향했다. 귀엽기만 한 외모와는 달리 과묵하기 그지없는 두 요정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온은 악수하는 손도 놓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눈길에 루가 피식 웃었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시온을 번쩍 들어서 품에 안았다.
“이제 가 봐.”
말은 안 하면서 저 눈빛 공격은 떨어지지 않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두 시선에 루의 옷깃을 잡고 눈만 도록, 굴리던 시온은 잘 가라는 의미로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요정들이 나타났던 때처럼 퐁 하고 사라졌다.
굉장히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느새 긴장까지 해 버린 시온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휴…… 말이 엄써서 무서워쪄요.”
“원래 저래.”
“제가 싫은 건 아닐까여?”
“마음에 들어 하더만, 뭐.”
루가 데려온 아이인데 싫어할 리가 없고, 그랬다면 시온을 빤히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다. 괜한 걱정을 하는 시온의 볼을 잡아 약하게 꼬집은 루가 걸음을 옮겼다. 이제 뭘 보여 줘야 하나. 루는 아직 요정들을 생각하고 있는 듯 얌전히 안겨 있는 시온을 보며 고민하다가, 금방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 미리 보여 줘야겠다.
“아가.”
“아가 아닌데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대답은 불쑥 튀어나온다. 이 쪼그만 녀석이 어디서 다 컸다고 주장이야. 우습고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굳이 시비를 걸지 않은 루는 시온이 좋아할 말을 꺼냈다.
“애완동물 볼까?”
“징짜여?”
밥 다 머근 거야? 아가 아니라고 항변하느라 미세하게 좁혀졌던 미간이 대번에 원상 복귀 됐다. 하여튼 단순하다니까. 젖살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을 보며 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온이 몸을 들썩거리며 좋아했다.
“멍뭉이 보고 시퍼여―”
“자.”
돌연 루가 볼을 불쑥 내밀었다. 어? 낯설지 않은 상황에 시온이 들썩이던 것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전에는 뺨 때리라고 내민 건 줄 알았지만, 이젠 확실히 안다. 개 보고 싶으면 뽀뽀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뜻에 시온이 조그만 손을 펴 루의 볼을 꾹꾹 밀었다.
“이 나이에 어떠케 뽀뽀를 해여.”
그리 말하는 시온의 볼이 먹음직스럽게 물들어 있었다. 이 나이에? 그저 황당하게만 들리는 말에 루가 헛웃음을 지으며 팔에 걸쳐진 시온의 엉덩이를 톡톡 쳤다.
“몇 살인데?”
“어…… 모, 몰라여.”
반사적으로 스물셋이라 대답하려 했던 시온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도리질을 쳤다. 그냥 네 살이라고 해도 되지만 순간 혼란이 와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루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끽해야 셋 아니면 넷일 텐데 빼기는. 어서 해.”
까짓 뽀뽀쯤이야 눈 딱 감고 하면 끝이지만, 아직 ‘난 어른이야!’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시온으로선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루도 나이와 다르게 할아버지는커녕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시온은 빨갛게 볼을 물들인 채 손으로 입을 탁 덮고 도리질 쳤다. 루의 눈썹이 삐뚤어졌다.
“안 해?”
“…….”
아기 곰돌이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귀엽기 짝이 없었지만, 한편으론 괘씸한 마음이 든 루는 한 팔로 시온을 받쳐 들고 휘익 손가락 피리를 불었다. 그렇게 보고 싶다면서 고작 뽀뽀도 안 해 줬지만 바라는 대로 불러 줄 생각이었다, 그의 애완동물들을.
짧지만 선명한 신호를 보내자마자 갑자기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일곱 마리가 동시에 달려오는 소리였지만 알 턱이 없는 시온은 그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이게 머지?”
“멍뭉이 오시는 소리다.”
그치만…… 너무 큰데……. 시온은 눈을 깜빡거리며 루를 올려다봤다. 그린 듯 뚜렷하면서도 차가운 얼굴의 남자는 뭔가에 심통이 났는지 미간에 주름이 조금 잡혀 있었다.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그러자 루는 ‘무슨 짓이야’라는 의미를 담아 쳐다보다가 금세 표정을 풀어 버렸다. 잔망스런 꼬마 같으니.
정체불명의 소리가 가까워지는 시간은 상당히 짧았다. 이젠 지척에서 울리는 소리에 무서워져서 루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은 시온은 곧,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거대한 존재들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것들이 루의 앞에서 딱 멈춰 섰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동물들의 모습에 훈련을 잘 받았구나― 하고 감탄할 만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 여유조차 없었다.
“개 세 마리가 저거. 음, 아홉 마린가?”
루가 가리킨 자리에는 새카맣고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개가 앉아 있었다. 그냥 평범한 개가 아닌, 덩치는 집채만 하고 머리가 셋이나 달린 괴물에 가까운 개. 마치 책에서나 나오던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와 흡사한 외양이었다. 그것도 세 마리.
시온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머리로 세야 할지, 몸으로 세야 할지 모를 ‘개’를 쳐다보자, 루는 이번엔 그 옆의 것을 가리켰다.
“저건 말.”
개와 마찬가지로 새카만 털을 가진 말이 발을 들썩이며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덩치는 집채만 하고, 이마 한가운데에 살벌한 뿔이 솟아 있으며, 발에 채였다간 그대로 저세상 행일 튼실한 다리를 가진 ‘말’ 두 마리였다. 루의 손이 또 움직였다.
“저건 늑대.”
그나마 늑대 두 마리는 나름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덩치는 보통 늑대의 세 배는 돼 보였고 얼핏 드러난 이가 흉기처럼 날카로웠다.
다 괴물이자나. 시온은 겁먹은 얼굴로 루의 가슴팍에 착 달라붙었다. 비록 뽀뽀는 못 받았어도 아이가 의지할 곳이 그 하나뿐이라는 듯 안겨 오는 것에 그나마 만족한 루는, 마지막으로 소개할 자를 가리켰다.
“저건 정원사.”
“……?”
동물이 아니라는 말에 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루가 가리킨 곳에, 늑대와 함께 자연스럽게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커다란 체구는 옆의 늑대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날렵해 보였다. 회색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잘라서 눈까지 덮어 버린 남자는 말없이 시온과 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늑대인간이다.”
“힝…….”
어떻게 평범한 게 없어. 정원사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 버리는 남자의 정체에 시온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루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웬만한 자들은 접근도 못하는 마법사의 저택이 평범할 리 없었다.
시온이 가슴팍에 붙어 꼬물거리자 입꼬리를 올려 웃은 루는 조그만 등을 쓰다듬었다. 이대로 그의 애완동물들을 무서워하게 둬서 옆에 붙어 있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하지만,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낼 텐데 그럼 꽤나 불편할 터다.
침대를 모른 척하기로 했으니 이건 봐주자 결정한 루는 시온을 쓰다듬어 주다가, 저만치에서 얌전히 대기 중인 ‘개’ 중 한 녀석을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러자 머리가 셋 달린 ‘개’는 진짜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그들의 근처로 다가왔다.
톡― 무언가가 어깨를 건드리자 화들짝 놀란 시온이 루의 옷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들었다. 뒤를 돌아본 시온의 눈앞에는 개인 척하는 거대한 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지척에서 마주친 새빨간 눈에 아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을 했다.
“루, 루 님―”
“괜찮아. 안 물어.”
간절하게 찾는 시온에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 루는 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개는 내밀어진 손 위에 순한 태도로 얼굴을 터억 올렸다. 그러자 시온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