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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화
1. 밤비 18단
내 이름은 손희빈. 내 소개를 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유도 2단, 태권도 4단, 합기도 7단, 주부 9단, 눈치 100단, 구구단, 외인 구단, 고추 단단, 내숭 50단. but 생긴 거랑 다르게 입에 18을 달고 사는 밤비 18단이다. 깝죽거리면 큰일 나는 수가 있다. 저번에 스무 명이 깝죽거리길래 20대 1로 싸웠는데 그중 몇 명은 심장마비(stop to sim jang)에 걸렸고, 다른 놈은 나한테 각목(tree)으로 맞아서 호흡곤란(i need air)에 걸렸고, 또 한 놈은 식물인간(tree man)이 됐다.
여기까지가 내 소개 끝. 얼굴 잘난 맛에 사는 나 손희빈은 제법 졸부인 할아버지 덕에, 부족함 없이 자라난 안하무인 도련님이다. 위에는 누나 둘에, 철없는 막내로 군림한 덕에 그 성격은 철없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막내둥이로 금지옥엽 키우던 것이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면 변명하지는 않겠다. 어렸을 적부터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과 화려한 외국 생활이 잦았던 누나들 덕에 나는 집에서 방치되는 막내였다. 그래서 나는 개차반처럼 이리저리 절제 없이 자라 왔다. 풍족한 집안 덕에 용돈은 쓰고 싶은 대로 펑펑 쓸 수 있었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나에게 유난히 관대했다. 신은 참 공평하지 않게도 이런 내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한 이목구비까지 주셨다. 조금 오뚝한 콧날.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새빨갛고 오동통한 입술. 조금 예쁜 이목구비가 언뜻 보면 유약한 이미지를 풍기긴 하지만 짙은 눈썹으로 커버가 된다. 더군다나 내 눈빛은 유약한 이미지를 다 잡아먹을 만큼 강렬하다. 조금 볼살이 있는 것이 콤플렉스지만, 그걸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뚜렷한 내 눈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눈은 마치 사슴 눈망울이라 할 정도로 촉촉하고 초롱초롱하고, 속눈썹은 지나치게 풍성하고 길다. 낙타처럼 긴 속눈썹은 온전히 엄마를 닮았다. 빼어난 외모와 잘난 집안 덕에, 나는 잘난 맛에 살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자한테조차 아쉬움 또한 없었다. 돈 좀 있는 자제였으니-성격이 안하무인인 걸 빼면-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인기 있는 희대의 카사노바였다. 그렇다. 나는 바이다. 내 우월한 외모에 걸맞게 박애주의적인 사랑을 했다. 내 외모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먹혔고, 그래서 남녀 가릴 것 없이 화려한 연애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잘생겼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항상 어디를 가나 어른들은 ‘고놈 참 한인물 하네.’라는 소리를 밥 먹듯 했다. 그리고 커서는 항상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그런 배경답게, 철저히 막내 왕자로 자라 온 나 손희빈은 조금 성격이 까칠하고 오만할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지성이와 오토바이 뒷좌석을 하늘까지 치솟게 해 놓은 채 광폭한 질주를 해 대며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다. 무서운 게 없었다. 아무도 나를 건들지 못했다. 돈도 있지, 잘생겼지, 게다가 인기 많지. 더구나 성격도 화끈하지. 게다가 난 어여쁜 외모와는 다르게 주먹은 다부지고 거세기까지 했다. 인생은 아우토반 위를 달리는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고, 까칠한 성격은 정점을 찍었다. 난 외모만 보면 전혀 안 그렇게 생긴 주제에 한 학교의 통을 먹었다.
항상 오는 시비 막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매번 패싸움에, 어깨라도 부딪히면 당장 주먹부터 나갔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더욱더 그랬다. 말리는 이도 없었고, 적당한 합의금만 쥐여 주면 모든 게 끝이 났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성격으로 일대에 유명했다.
그래, 희원고 미친 밤비, 그게 바로 내 별명이었다. 유치하고 웃겼지만 사실이었다. 사슴같이 순박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악랄한 놈으로 나는 유명했다. 돈다발을 들고 다니며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미친 밤비.
그런고로, 나는 집안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오죽하면 보수적이었던 할아버지가 날 유배 보내듯 미국에 보냈을까. 그러나 그곳에서도 내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백인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섹스를 하고 다녔고, 코카인을 배우기도 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나의 승리였다. 결국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정신병원에 처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셨고, 결국에는 냉정한 결단을 내렸다. 그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게.
“네 오토바이 압수할 줄 알아.”
청천벽력 같은 그 말에 나는 당황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 엄한 표정 앞에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할배. 왜 그래, 노망났어?”
사색이 된 얼굴로 묻자, 가만히 담배를 입에 문 할아버지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크리스털 재떨이를 붙들었다.
“노망? 그래, 너 때문에 노망나기 일보 직전이지. 그래서 네놈 용돈도 끊을 거고 네 아비 명의로 된 카드도 압수할 거란다.”
헐. 할아버지의 선언에 입을 쩍 벌렸다. 오토바이 키와 블랙카드 압수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버럭 소리쳤다.
“할아버지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정신 못 차리는 네놈 새끼 호적에서 파고 싶은데 참는 거야.”
난 할아버지의 말에 완전히 볼멘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발, 그렇다고 더럽고 치사하게 카드랑 오토바이를 뺏어?! 그럴 거면 차라리 내 호적을 파 버려!”
퍽, 말과 동시에 크리스털 재떨이가 정확히 내 이마에 박혔다. 참, 말 안 할 뻔했다. 나이 80에 여전히 찬물로 등목을 할 만큼 할아버지는 체력이 좋고 체격이 건장하다. 20대 때는 온갖 격투기 경기 상을 휩쓸었던 전적이 있던 사람이다. 솔직히 지금도 그다지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 외양도 노인은 무슨, 원피스의 흰 수염에 가까운 인간이지. 괴물 할배. 나는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다. 그다음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조금 비싼 것으로 추정되었던 청자와 다기, 붓과 벼루 같은 것이 곧바로 날아왔다.
온갖 세간이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난 겨우 그것들을 피했지만 할아버지가 집어 던지는 병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아악!”
난 병풍에 깔린 채 파리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에서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눈물이 찝찌름하게 흘렀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사신처럼 흉흉했다.
“잘 들어. 네 버릇 고치긴 전까진 전의 혜택은 없을 거다. 이 집안의 부와 명예, 누릴 생각 하지도 마.”
할아버지는 씩씩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새하얀 수염이 숨소리에 따라 파르르 떨린다. 나는 주르륵 흐르는 피를 겨우 삼킨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할아버지. 진정하고 우리 담배 한 대 피우고 얘기하자.”
내가 쓰러진 채 담배 한 대를 내밀자, 할아버지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졌다.
“이 썅노무새끼가!”
그 말과 동시에 할아버지는 옆에 있던 장기판을 집어 들었다.
“어, 하, 할아버지, 잠깐만!”
병풍 아래 깔려 사색이 된 나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가 손에 들린 장기판은 장인이 하나하나 세공한 향백나무 판으로, 그 두께와 무게가 어마어마한 물건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천만 원짜리 원목 장기판이 고대로 내 머리로 직행했다는 것이다.
‘퍽!’
묵직한 타격음과 동시에 내 목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내 시야는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그걸 끝으로 완전히 기절하고 말았다.
***
“으윽.”
목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난 고통스러움에 끙끙거리며 완전히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터진 상처에서 찝찔한 피 맛이 났다. 제기랄. 또 여기구나. 낮게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창고 안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있던 손거울을 꺼내 보니 얼굴이 가관이다. 눈두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를 으드득 갈며 분노를 삭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만 믿고 사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그 무엇보다 내 얼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 탓에 그동안 지나쳐 온 애인들이 내 뺨을 때릴 땐 나도 가차 없이 때렸다. 물세례까지 서슴없었다. 난 그만큼 내 얼굴이 소중했다. 개차반 같은 거친 성정에 그나마 장점이 되는 건 이 잘생긴 얼굴 하나밖에 없었다. 쌍욕을 달고 살아도, 상대방을 욕보이고 살아도 용서가 되는 것은 다 이 외모 덕분이었다.
근데 그 잘난 외모에 오점처럼 자리 잡은 상처라니. 짜증 나는 일이었다.
난 그동안 누군가 내 얼굴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내면 망설임 없이 상대방을 전치 20주로 만들어 놨다. 병명은 다양했다. 장 파열, 뇌진탕, 어깨 탈골, 늑골 골절, 경추와 요추 염좌, 인대 파열, 등등. 그러나 지금 어쩔 수 없는 건, 날 이렇게 만든 게 할아버지라는 것 때문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할아버지뿐이다. 우리 집 터줏대감. 전에 한 번 늙으면 뒤져야 된다고 했다가 거꾸로 밧줄에 묶여서 매타작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뒤로 난 할아버지에게 개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난 차가운 뒤뜰 창고에 갇혀 있다. 난 뿌드득 이를 갈고는 더는 해결되지 않는 굶주림과 공포에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아주 간당간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흡.”
나는 분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꾀죄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강경하게 나오는 할아버지에게 난 결국 지고 말았다. 뚜르르.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찌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흐흡! 시키는 대로 할게요! 당장 나 여기서 꺼내 줘!”
집안 뒤뜰 창고에 손자를 방치시키는 할아버지가 어딨어! 꺼내 줘! 내 오열에 할아버지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을 건 안 봐도 뻔했다.
***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보다도 제일 밉고 싫은 건 가족들이다. 막내아들이 얻어터지건 말건, 금이야 옥이야 할 땐 언제고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나쁜 방관자들. 나는 달걀로 멍든 얼굴을 문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에서 할아버지는 담담히 차를 마셨다. 입을 뗀 것은 한참 뒤였다.
“희빈이 너 지금 당장 전학 가. 선화국제학교로.”
“네?”
난 순간 할아버지가 진짜 노망났나 싶어서 쳐다봤다. 내 되물음에 할아버지는 엄한 얼굴로 대답했다.
“더는 네가 하는 꼴 못 보고 산다.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으니, 거기 가서 정신 차리고 공부해.”
난 할아버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정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할아버지. 상식적으로 내가 거길 어떻게 가요?”
난 눈물 자국도 마르지도 않은 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언급하는 선화국제고등학교는 전국에서 모인 엘리트들만 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따지자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답했다.
“손은 다 써 놨어.”
역시. 졸부영감이 하는 짓이 그렇지. 나는 할아버지의 당당한 대답에 허를 찔렸다. 역시 그 학교 재단에 뭐라도 바친 게 분명해. 그 학교에 잔디밭이라도 깔아 준 게 분명하다고. 내가 의심쩍은 얼굴로 쳐다보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딴 표정 짓지 마라. 또 장기판으로 맞고 싶니?”
나는 할아버지의 냉철한 물음에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크흠. 뭐 어쨌든 학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전과 같은 행동은 용서 안 돼. 네가 누군지도 모르게 조용히 다니는 게 조건이야. 모범생으로 완벽하게. 성적은 전교 30등 안에 들면 된다.”
“뭐라고요?”
난 할아버지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진짜 불가능한 미션이잖아.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누려 왔던 혜택 다 돌려줄 거야. 너의 오토바이도, 블랙카드도.”
할아버지는 멍해지는 내 얼굴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사악하고도 악랄한 미소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럼.”
그렇게 난 울며 겨자 먹기로, 악마 같은 계약을 맺은 것이다.
***
“어이구. 많이 아프냐.”
둘째 누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 열 받아. 귀한 막둥이 취급할 땐 언제고 내가 얻어터지든 말든 다들 제 할 일 하기에 바빴던 게 서운하다. 여유작작하게 뉴스를 보는 아버지부터, 사과를 깎기에 여념 없는 엄마, 그리고 얼굴에 팩하는 누나까지. 나는 이를 뿌드득 갈며 대꾸했다.
“말 걸지 마. 아무도 나 안 도와줬어.”
내 불퉁한 대꾸에 누나는 쯧쯧 혀를 찼다.
“삐치기는. 괜히 끼어들었다가 불똥 튀면 어쩌라고?”
그 말에 나는 반박도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 집안의 보스는 할아버지다. 감히 누가 말리겠어.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금세 서글픈 울분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가 전학 가래. 누나, 나 어떡해?”
나는 울듯이 되물었다. 차라리 미국으로 강제 유학 당했을 땐 자유롭기라도 했지. 이건 정말 지옥이야. 내 울컥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누나는 차 열쇠를 꺼냈다.
“가자.”
난 훌쩍거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어딜 가?”
“따라와.”
누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잔뜩 절뚝거리며 누나를 따라나섰다. 워낙 맷집이 센 까닭에 조금 두들겨 맞아도 멀쩡했던 내 몸이 고장 났다. 할아버지의 재떨이와 병풍, 다기, 그리고 장기판에 맞아 놓고도 멀쩡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정말 처량한 내 신세. 난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누나가 모는 차를 탔다. 차가 멈춘 곳은 미용실이었다.
“뭐야, 여기 뭔데?”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누나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너를 변신시켜 줄 곳.”
무슨 렛미인도 아니고, 뭔 변신?! 벌써부터 치미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느끼하게 생긴 남자 원장이 누나를 반겼다.
“어머~ 이거 누구야, 예쁜이 아니야~”
지랄. 나는 낮게 욕을 중얼거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나를 쳐다본 남자가 물었다.
“혹시 요 프리티 보이는 예쁜이 동생?”
그 말에 누나는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머리를 바꿔야 할 것 같아. 못생기게.”
그 특별한 주문에 원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당연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도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음. 너무해. 이런 화려한 얼굴을 못생기게 만들라니. 너무 어려운 임무잖앙!”
아, 짜증 나. 저 새끼 말투 좀 어떻게 해 봐. 내 표정을 읽은 누나는 가만히 손짓하며 원장에게 말했다.
“빨리 가 봐야 돼서. 얼른 해 줘.”
누나의 원장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알았어. 일루 와, 쟈기~!”
시발. 내가 왜 네놈 자기야?! 나는 헥토파스칼 킥을 날리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미용실 원장은 느물거리는 미소를 띠며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어머, 모발 색이 끝장나네. 아, 지금 파마머리도 너무 괜찮은데. 이걸 못생기게 만들라니, 너무 괴로워, 하아.”
신음을 내뱉는 원장의 숨결이 머리통에 닿은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씰룩거리는 내 얼굴을 보고 원장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뭐, 내가 괜히 디자이너겠어. 날 믿어, 자기. 철저히 못생기게 만들어 주지.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말이지.”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어디 가고, 원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내 머리칼을 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실로, 암담한 시간이었다. 나는 차마 마주하기 싫은 현실에 도 닦는 스님처럼 눈을 감았다. 커트를 하고, 스트레이트로 쫙 펴는 시간까지 합해서 두 시간은 걸린 듯하다.
“자, 거울을 봐.”
나는 삐딱하게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거울을 쳐다봤다. 굽실거렸던 내 갈색 머리칼은 어두운 오징어 먹물 색으로 염색된 채 생머리가 완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어두운 앞머리는 눈꺼풀 바로 위까지 칙칙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뭐야. 엽기인 걸 스나코를 모방한 머리 모양인가. 우울하게 내려앉은 바가지 머리는 마치 패션왕 우기명의 시각 포기 컷과 닮아 있었다. 소름 끼쳐. 이따위 꼴로 어딜 나가란 거야!
새카만 머리카락 커튼에 찔린 눈이 따끔거렸다. 미친.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누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시크하게 속삭였다.
“완벽해.”
진짜 지랄!
“장난해, 나랑?!”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누나는 타이르듯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손희빈. 네 그 튀는 얼굴로 다른 학교에서 모범생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일대 사람들이 다 너는 알아보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넌 잘생기고 예쁘장한 얼굴이야. 날라리 생활 청산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누나는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말했고, 나는 반박하지도 못한 채 한숨만 쉬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찌질이 같잖아.
누나는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낙담한 나를 끌고 교복 전문점으로 갔다. 완전히 스타일링을 망치고 나니 마음을 내려놓는 건 쉬웠다. 그저 누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누나는 내 평소 교복보다 두 치수는 큰 듯한 헐렁하고 볼품없는 옷을 권했다. 젠장. 통은 통대로 크고, 길이도 엄청 긴 게 꼭 아빠 양복 훔쳐 입은 새끼 같다.
누나는 완전히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잠자리 안경을 내밀었다. 난 누나가 건넨 엄청난 패션 소품에 소름이 끼쳤다. 시커먼 검정 뿔테라니. 정말 이 찌질한 교복이랑 걸맞은 완벽한 패션이었다. 과연 누가 날 손희빈이라고 알아볼까. 안경을 쓰니, 신기하게도 그 사슴 같은 눈망울이 사라졌다. 미친. 나는 거울을 보며 쌍욕을 내뱉었다.
“씨발.”
완벽했다. 완벽한 버섯 머리 왕따 새끼 하나가 거울에 있었다.
***
“으하하, 그 꼬락서니 뭐야? 존나 웃겨.”
우리 집에 들어와서 정중하게 인사하던 지성이는 내 몰골을 보자마자 배를 잡고 뒹굴었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서 지성이를 발로 걷어찼다.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놈의 얼굴을 보니 조금 화가 가라앉는다. 그러나 홍지성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 얼굴이 그게 뭐야? 스타일은 또 뭐고! 완전 똥이야! 푸하하하!”
“조용히 해, 입을 귀까지 찢어 버리기 전에!”
내 일갈에 지성이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고는 눈물을 닦아 냈다. 어지간히 웃긴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이 꼴은 코미디였다. 그 잘나고 위대했던 손희빈이 거적때기 같은 교복과 바가지 머리 한 방에 미모를 잃었다. 완전히 추악한 추남이 되어 찌질이의 운명에 섰다.
“할배가 진짜 노망이 난 게 분명해. 어떻게 이런 짓을 해!”
나는 다시 한 번 울컥해서 소리쳤다. 지성이는 내 꼴을 안쓰럽다는 듯 가만히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창고에서 죽지 않은 게 어디냐.”
나는 지성이의 말에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화려한 일진 생활은 이제 정말 끝이다. 이제 희원고의 미친 밤비는 없다. 내 멍든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지성이가 말했다.
“참, 선화고등학교면 유명한 새끼 하나 있는데 괜찮겠냐?”
“뭐가?”
내가 되묻자 지성이는 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 뭐냐, 선화고에 리얼돌 같은 얼굴로 소문난 새끼 있잖아.”
“리얼돌? 그게 뭐야. 바위야?”
“와. 무식한 새끼. 리얼돌(Real doll) 말이다. 단백질 인형처럼 엄청 예쁘대.”
선화국제고등학교의 예쁜 리얼돌. 난 지성이의 설명에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여자야?”
통을 여자가 먹었다는 건가. 내 의아한 물음에 지성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그 예쁜 놈이 남자라서 문제지. 듣자 하니 이름이 백인형이라던데? 이름이랑 얼굴은 인형인데, 하는 짓은 지옥에서 온 처키래.”
“지랄.”
나는 지성이의 말에 코웃음 쳤다. 사내새끼야말로 무서울 일은 절대 없다.
“어차피 난 거기서 죽은 척 지내야 해. 부딪칠 일은 없을걸.”
이렇게 왕따 분장까지 한 마당에 뭐가 두려울까. 그저 죽어라 버텨서, 내 애마와 카드를 돌려받을 거다. 나는 흘긋, 지성이 놈을 보며 말했다.
“나 혹시 삥 뜯기고 있으면 구해 줘.”
내 말에 지성이는 끔찍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뭔 개소리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내게 일어날, 지옥 인형과의 만남을.
1화
1. 밤비 18단
내 이름은 손희빈. 내 소개를 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유도 2단, 태권도 4단, 합기도 7단, 주부 9단, 눈치 100단, 구구단, 외인 구단, 고추 단단, 내숭 50단. but 생긴 거랑 다르게 입에 18을 달고 사는 밤비 18단이다. 깝죽거리면 큰일 나는 수가 있다. 저번에 스무 명이 깝죽거리길래 20대 1로 싸웠는데 그중 몇 명은 심장마비(stop to sim jang)에 걸렸고, 다른 놈은 나한테 각목(tree)으로 맞아서 호흡곤란(i need air)에 걸렸고, 또 한 놈은 식물인간(tree man)이 됐다.
여기까지가 내 소개 끝. 얼굴 잘난 맛에 사는 나 손희빈은 제법 졸부인 할아버지 덕에, 부족함 없이 자라난 안하무인 도련님이다. 위에는 누나 둘에, 철없는 막내로 군림한 덕에 그 성격은 철없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막내둥이로 금지옥엽 키우던 것이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면 변명하지는 않겠다. 어렸을 적부터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과 화려한 외국 생활이 잦았던 누나들 덕에 나는 집에서 방치되는 막내였다. 그래서 나는 개차반처럼 이리저리 절제 없이 자라 왔다. 풍족한 집안 덕에 용돈은 쓰고 싶은 대로 펑펑 쓸 수 있었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나에게 유난히 관대했다. 신은 참 공평하지 않게도 이런 내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한 이목구비까지 주셨다. 조금 오뚝한 콧날.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새빨갛고 오동통한 입술. 조금 예쁜 이목구비가 언뜻 보면 유약한 이미지를 풍기긴 하지만 짙은 눈썹으로 커버가 된다. 더군다나 내 눈빛은 유약한 이미지를 다 잡아먹을 만큼 강렬하다. 조금 볼살이 있는 것이 콤플렉스지만, 그걸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뚜렷한 내 눈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눈은 마치 사슴 눈망울이라 할 정도로 촉촉하고 초롱초롱하고, 속눈썹은 지나치게 풍성하고 길다. 낙타처럼 긴 속눈썹은 온전히 엄마를 닮았다. 빼어난 외모와 잘난 집안 덕에, 나는 잘난 맛에 살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자한테조차 아쉬움 또한 없었다. 돈 좀 있는 자제였으니-성격이 안하무인인 걸 빼면-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인기 있는 희대의 카사노바였다. 그렇다. 나는 바이다. 내 우월한 외모에 걸맞게 박애주의적인 사랑을 했다. 내 외모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먹혔고, 그래서 남녀 가릴 것 없이 화려한 연애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잘생겼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항상 어디를 가나 어른들은 ‘고놈 참 한인물 하네.’라는 소리를 밥 먹듯 했다. 그리고 커서는 항상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그런 배경답게, 철저히 막내 왕자로 자라 온 나 손희빈은 조금 성격이 까칠하고 오만할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지성이와 오토바이 뒷좌석을 하늘까지 치솟게 해 놓은 채 광폭한 질주를 해 대며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다. 무서운 게 없었다. 아무도 나를 건들지 못했다. 돈도 있지, 잘생겼지, 게다가 인기 많지. 더구나 성격도 화끈하지. 게다가 난 어여쁜 외모와는 다르게 주먹은 다부지고 거세기까지 했다. 인생은 아우토반 위를 달리는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고, 까칠한 성격은 정점을 찍었다. 난 외모만 보면 전혀 안 그렇게 생긴 주제에 한 학교의 통을 먹었다.
항상 오는 시비 막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매번 패싸움에, 어깨라도 부딪히면 당장 주먹부터 나갔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더욱더 그랬다. 말리는 이도 없었고, 적당한 합의금만 쥐여 주면 모든 게 끝이 났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성격으로 일대에 유명했다.
그래, 희원고 미친 밤비, 그게 바로 내 별명이었다. 유치하고 웃겼지만 사실이었다. 사슴같이 순박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악랄한 놈으로 나는 유명했다. 돈다발을 들고 다니며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미친 밤비.
그런고로, 나는 집안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오죽하면 보수적이었던 할아버지가 날 유배 보내듯 미국에 보냈을까. 그러나 그곳에서도 내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백인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섹스를 하고 다녔고, 코카인을 배우기도 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나의 승리였다. 결국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정신병원에 처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셨고, 결국에는 냉정한 결단을 내렸다. 그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게.
“네 오토바이 압수할 줄 알아.”
청천벽력 같은 그 말에 나는 당황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 엄한 표정 앞에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할배. 왜 그래, 노망났어?”
사색이 된 얼굴로 묻자, 가만히 담배를 입에 문 할아버지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크리스털 재떨이를 붙들었다.
“노망? 그래, 너 때문에 노망나기 일보 직전이지. 그래서 네놈 용돈도 끊을 거고 네 아비 명의로 된 카드도 압수할 거란다.”
헐. 할아버지의 선언에 입을 쩍 벌렸다. 오토바이 키와 블랙카드 압수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버럭 소리쳤다.
“할아버지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정신 못 차리는 네놈 새끼 호적에서 파고 싶은데 참는 거야.”
난 할아버지의 말에 완전히 볼멘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발, 그렇다고 더럽고 치사하게 카드랑 오토바이를 뺏어?! 그럴 거면 차라리 내 호적을 파 버려!”
퍽, 말과 동시에 크리스털 재떨이가 정확히 내 이마에 박혔다. 참, 말 안 할 뻔했다. 나이 80에 여전히 찬물로 등목을 할 만큼 할아버지는 체력이 좋고 체격이 건장하다. 20대 때는 온갖 격투기 경기 상을 휩쓸었던 전적이 있던 사람이다. 솔직히 지금도 그다지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 외양도 노인은 무슨, 원피스의 흰 수염에 가까운 인간이지. 괴물 할배. 나는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다. 그다음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조금 비싼 것으로 추정되었던 청자와 다기, 붓과 벼루 같은 것이 곧바로 날아왔다.
온갖 세간이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난 겨우 그것들을 피했지만 할아버지가 집어 던지는 병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아악!”
난 병풍에 깔린 채 파리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에서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눈물이 찝찌름하게 흘렀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사신처럼 흉흉했다.
“잘 들어. 네 버릇 고치긴 전까진 전의 혜택은 없을 거다. 이 집안의 부와 명예, 누릴 생각 하지도 마.”
할아버지는 씩씩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새하얀 수염이 숨소리에 따라 파르르 떨린다. 나는 주르륵 흐르는 피를 겨우 삼킨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할아버지. 진정하고 우리 담배 한 대 피우고 얘기하자.”
내가 쓰러진 채 담배 한 대를 내밀자, 할아버지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졌다.
“이 썅노무새끼가!”
그 말과 동시에 할아버지는 옆에 있던 장기판을 집어 들었다.
“어, 하, 할아버지, 잠깐만!”
병풍 아래 깔려 사색이 된 나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가 손에 들린 장기판은 장인이 하나하나 세공한 향백나무 판으로, 그 두께와 무게가 어마어마한 물건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천만 원짜리 원목 장기판이 고대로 내 머리로 직행했다는 것이다.
‘퍽!’
묵직한 타격음과 동시에 내 목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내 시야는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그걸 끝으로 완전히 기절하고 말았다.
***
“으윽.”
목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난 고통스러움에 끙끙거리며 완전히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터진 상처에서 찝찔한 피 맛이 났다. 제기랄. 또 여기구나. 낮게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창고 안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있던 손거울을 꺼내 보니 얼굴이 가관이다. 눈두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를 으드득 갈며 분노를 삭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만 믿고 사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그 무엇보다 내 얼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 탓에 그동안 지나쳐 온 애인들이 내 뺨을 때릴 땐 나도 가차 없이 때렸다. 물세례까지 서슴없었다. 난 그만큼 내 얼굴이 소중했다. 개차반 같은 거친 성정에 그나마 장점이 되는 건 이 잘생긴 얼굴 하나밖에 없었다. 쌍욕을 달고 살아도, 상대방을 욕보이고 살아도 용서가 되는 것은 다 이 외모 덕분이었다.
근데 그 잘난 외모에 오점처럼 자리 잡은 상처라니. 짜증 나는 일이었다.
난 그동안 누군가 내 얼굴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내면 망설임 없이 상대방을 전치 20주로 만들어 놨다. 병명은 다양했다. 장 파열, 뇌진탕, 어깨 탈골, 늑골 골절, 경추와 요추 염좌, 인대 파열, 등등. 그러나 지금 어쩔 수 없는 건, 날 이렇게 만든 게 할아버지라는 것 때문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할아버지뿐이다. 우리 집 터줏대감. 전에 한 번 늙으면 뒤져야 된다고 했다가 거꾸로 밧줄에 묶여서 매타작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뒤로 난 할아버지에게 개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난 차가운 뒤뜰 창고에 갇혀 있다. 난 뿌드득 이를 갈고는 더는 해결되지 않는 굶주림과 공포에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아주 간당간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흡.”
나는 분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꾀죄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강경하게 나오는 할아버지에게 난 결국 지고 말았다. 뚜르르.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찌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흐흡! 시키는 대로 할게요! 당장 나 여기서 꺼내 줘!”
집안 뒤뜰 창고에 손자를 방치시키는 할아버지가 어딨어! 꺼내 줘! 내 오열에 할아버지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을 건 안 봐도 뻔했다.
***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보다도 제일 밉고 싫은 건 가족들이다. 막내아들이 얻어터지건 말건, 금이야 옥이야 할 땐 언제고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나쁜 방관자들. 나는 달걀로 멍든 얼굴을 문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에서 할아버지는 담담히 차를 마셨다. 입을 뗀 것은 한참 뒤였다.
“희빈이 너 지금 당장 전학 가. 선화국제학교로.”
“네?”
난 순간 할아버지가 진짜 노망났나 싶어서 쳐다봤다. 내 되물음에 할아버지는 엄한 얼굴로 대답했다.
“더는 네가 하는 꼴 못 보고 산다.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으니, 거기 가서 정신 차리고 공부해.”
난 할아버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정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할아버지. 상식적으로 내가 거길 어떻게 가요?”
난 눈물 자국도 마르지도 않은 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언급하는 선화국제고등학교는 전국에서 모인 엘리트들만 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따지자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답했다.
“손은 다 써 놨어.”
역시. 졸부영감이 하는 짓이 그렇지. 나는 할아버지의 당당한 대답에 허를 찔렸다. 역시 그 학교 재단에 뭐라도 바친 게 분명해. 그 학교에 잔디밭이라도 깔아 준 게 분명하다고. 내가 의심쩍은 얼굴로 쳐다보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딴 표정 짓지 마라. 또 장기판으로 맞고 싶니?”
나는 할아버지의 냉철한 물음에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크흠. 뭐 어쨌든 학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전과 같은 행동은 용서 안 돼. 네가 누군지도 모르게 조용히 다니는 게 조건이야. 모범생으로 완벽하게. 성적은 전교 30등 안에 들면 된다.”
“뭐라고요?”
난 할아버지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진짜 불가능한 미션이잖아.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누려 왔던 혜택 다 돌려줄 거야. 너의 오토바이도, 블랙카드도.”
할아버지는 멍해지는 내 얼굴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사악하고도 악랄한 미소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럼.”
그렇게 난 울며 겨자 먹기로, 악마 같은 계약을 맺은 것이다.
***
“어이구. 많이 아프냐.”
둘째 누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 열 받아. 귀한 막둥이 취급할 땐 언제고 내가 얻어터지든 말든 다들 제 할 일 하기에 바빴던 게 서운하다. 여유작작하게 뉴스를 보는 아버지부터, 사과를 깎기에 여념 없는 엄마, 그리고 얼굴에 팩하는 누나까지. 나는 이를 뿌드득 갈며 대꾸했다.
“말 걸지 마. 아무도 나 안 도와줬어.”
내 불퉁한 대꾸에 누나는 쯧쯧 혀를 찼다.
“삐치기는. 괜히 끼어들었다가 불똥 튀면 어쩌라고?”
그 말에 나는 반박도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 집안의 보스는 할아버지다. 감히 누가 말리겠어.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금세 서글픈 울분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가 전학 가래. 누나, 나 어떡해?”
나는 울듯이 되물었다. 차라리 미국으로 강제 유학 당했을 땐 자유롭기라도 했지. 이건 정말 지옥이야. 내 울컥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누나는 차 열쇠를 꺼냈다.
“가자.”
난 훌쩍거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어딜 가?”
“따라와.”
누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잔뜩 절뚝거리며 누나를 따라나섰다. 워낙 맷집이 센 까닭에 조금 두들겨 맞아도 멀쩡했던 내 몸이 고장 났다. 할아버지의 재떨이와 병풍, 다기, 그리고 장기판에 맞아 놓고도 멀쩡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정말 처량한 내 신세. 난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누나가 모는 차를 탔다. 차가 멈춘 곳은 미용실이었다.
“뭐야, 여기 뭔데?”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누나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너를 변신시켜 줄 곳.”
무슨 렛미인도 아니고, 뭔 변신?! 벌써부터 치미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느끼하게 생긴 남자 원장이 누나를 반겼다.
“어머~ 이거 누구야, 예쁜이 아니야~”
지랄. 나는 낮게 욕을 중얼거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나를 쳐다본 남자가 물었다.
“혹시 요 프리티 보이는 예쁜이 동생?”
그 말에 누나는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머리를 바꿔야 할 것 같아. 못생기게.”
그 특별한 주문에 원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당연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도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음. 너무해. 이런 화려한 얼굴을 못생기게 만들라니. 너무 어려운 임무잖앙!”
아, 짜증 나. 저 새끼 말투 좀 어떻게 해 봐. 내 표정을 읽은 누나는 가만히 손짓하며 원장에게 말했다.
“빨리 가 봐야 돼서. 얼른 해 줘.”
누나의 원장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알았어. 일루 와, 쟈기~!”
시발. 내가 왜 네놈 자기야?! 나는 헥토파스칼 킥을 날리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미용실 원장은 느물거리는 미소를 띠며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어머, 모발 색이 끝장나네. 아, 지금 파마머리도 너무 괜찮은데. 이걸 못생기게 만들라니, 너무 괴로워, 하아.”
신음을 내뱉는 원장의 숨결이 머리통에 닿은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씰룩거리는 내 얼굴을 보고 원장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뭐, 내가 괜히 디자이너겠어. 날 믿어, 자기. 철저히 못생기게 만들어 주지.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말이지.”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어디 가고, 원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내 머리칼을 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실로, 암담한 시간이었다. 나는 차마 마주하기 싫은 현실에 도 닦는 스님처럼 눈을 감았다. 커트를 하고, 스트레이트로 쫙 펴는 시간까지 합해서 두 시간은 걸린 듯하다.
“자, 거울을 봐.”
나는 삐딱하게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거울을 쳐다봤다. 굽실거렸던 내 갈색 머리칼은 어두운 오징어 먹물 색으로 염색된 채 생머리가 완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어두운 앞머리는 눈꺼풀 바로 위까지 칙칙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뭐야. 엽기인 걸 스나코를 모방한 머리 모양인가. 우울하게 내려앉은 바가지 머리는 마치 패션왕 우기명의 시각 포기 컷과 닮아 있었다. 소름 끼쳐. 이따위 꼴로 어딜 나가란 거야!
새카만 머리카락 커튼에 찔린 눈이 따끔거렸다. 미친.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누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시크하게 속삭였다.
“완벽해.”
진짜 지랄!
“장난해, 나랑?!”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누나는 타이르듯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손희빈. 네 그 튀는 얼굴로 다른 학교에서 모범생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일대 사람들이 다 너는 알아보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넌 잘생기고 예쁘장한 얼굴이야. 날라리 생활 청산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누나는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말했고, 나는 반박하지도 못한 채 한숨만 쉬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찌질이 같잖아.
누나는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낙담한 나를 끌고 교복 전문점으로 갔다. 완전히 스타일링을 망치고 나니 마음을 내려놓는 건 쉬웠다. 그저 누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누나는 내 평소 교복보다 두 치수는 큰 듯한 헐렁하고 볼품없는 옷을 권했다. 젠장. 통은 통대로 크고, 길이도 엄청 긴 게 꼭 아빠 양복 훔쳐 입은 새끼 같다.
누나는 완전히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잠자리 안경을 내밀었다. 난 누나가 건넨 엄청난 패션 소품에 소름이 끼쳤다. 시커먼 검정 뿔테라니. 정말 이 찌질한 교복이랑 걸맞은 완벽한 패션이었다. 과연 누가 날 손희빈이라고 알아볼까. 안경을 쓰니, 신기하게도 그 사슴 같은 눈망울이 사라졌다. 미친. 나는 거울을 보며 쌍욕을 내뱉었다.
“씨발.”
완벽했다. 완벽한 버섯 머리 왕따 새끼 하나가 거울에 있었다.
***
“으하하, 그 꼬락서니 뭐야? 존나 웃겨.”
우리 집에 들어와서 정중하게 인사하던 지성이는 내 몰골을 보자마자 배를 잡고 뒹굴었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서 지성이를 발로 걷어찼다.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놈의 얼굴을 보니 조금 화가 가라앉는다. 그러나 홍지성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 얼굴이 그게 뭐야? 스타일은 또 뭐고! 완전 똥이야! 푸하하하!”
“조용히 해, 입을 귀까지 찢어 버리기 전에!”
내 일갈에 지성이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고는 눈물을 닦아 냈다. 어지간히 웃긴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이 꼴은 코미디였다. 그 잘나고 위대했던 손희빈이 거적때기 같은 교복과 바가지 머리 한 방에 미모를 잃었다. 완전히 추악한 추남이 되어 찌질이의 운명에 섰다.
“할배가 진짜 노망이 난 게 분명해. 어떻게 이런 짓을 해!”
나는 다시 한 번 울컥해서 소리쳤다. 지성이는 내 꼴을 안쓰럽다는 듯 가만히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창고에서 죽지 않은 게 어디냐.”
나는 지성이의 말에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화려한 일진 생활은 이제 정말 끝이다. 이제 희원고의 미친 밤비는 없다. 내 멍든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지성이가 말했다.
“참, 선화고등학교면 유명한 새끼 하나 있는데 괜찮겠냐?”
“뭐가?”
내가 되묻자 지성이는 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 뭐냐, 선화고에 리얼돌 같은 얼굴로 소문난 새끼 있잖아.”
“리얼돌? 그게 뭐야. 바위야?”
“와. 무식한 새끼. 리얼돌(Real doll) 말이다. 단백질 인형처럼 엄청 예쁘대.”
선화국제고등학교의 예쁜 리얼돌. 난 지성이의 설명에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여자야?”
통을 여자가 먹었다는 건가. 내 의아한 물음에 지성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그 예쁜 놈이 남자라서 문제지. 듣자 하니 이름이 백인형이라던데? 이름이랑 얼굴은 인형인데, 하는 짓은 지옥에서 온 처키래.”
“지랄.”
나는 지성이의 말에 코웃음 쳤다. 사내새끼야말로 무서울 일은 절대 없다.
“어차피 난 거기서 죽은 척 지내야 해. 부딪칠 일은 없을걸.”
이렇게 왕따 분장까지 한 마당에 뭐가 두려울까. 그저 죽어라 버텨서, 내 애마와 카드를 돌려받을 거다. 나는 흘긋, 지성이 놈을 보며 말했다.
“나 혹시 삥 뜯기고 있으면 구해 줘.”
내 말에 지성이는 끔찍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뭔 개소리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내게 일어날, 지옥 인형과의 만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