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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화창한 날씨. 나는 날씨와 대비되는 똥 같은 기분으로 등굣길에 올랐다. 할아버지는 애마를 뺏었으면서, 기사가 딸린 벤츠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버스를 탔다. 아, 정말 짜증 난다. 나는 짜증 섞인 숨소리를 쉭쉭 내뱉으며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하필 후져 먹은 마을버스는 한참이나 삐걱거리며 고비를 맞이했고, 거북이 같은 속도로 골목을 지나쳤다. 쿵. 방지턱에 걸리고, 급정거에 몸이 흔들린다. 고생 끝에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지각이었다.
“망할, 짜증 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버스를 탔는데도 이 모양이다. 구시렁거리며 조용히 학교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곧 후문 앞에 세워진 야마사키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어떤 미친놈이 신성한 학교에 오토바이를 끌고 와?”
불과 얼마 전까지 오토바이를 몰았던 주제에, 나는 딴 놈이 오토바이를 몬다는 사실에 배알이 꼴렸다.
“짜증 나.”
심지어 오토바이는 신형 모델이다. 튜닝도 잔뜩 했고. 여러모로 맘에 안 들어. 금세 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난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앞에 있는 오토바이를 걷어찼다.
퍽!
버스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엄한 데에 풀었다. 퍽 걷어차자마자 오토바이가 쾅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에 고꾸라졌다. 크크. 어떤 놈인지 속 좀 상하시겠구만. 오토바이를 보며 속 시원하게 웃었다. 그제야 아침 내내 얹혀 있던 울화가 풀리는 기분이다. 손을 탁탁 털어 내고는 자리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그때였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 것이.
“야, 너 죽고 싶냐?”
내가 몇 발짝 걸었을까, 내 바로 뒤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본능적인 감각은 내게 불길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설마. 난 등골이 서늘해졌다. 난 설마설마하는 얼굴로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순간 숨이 멎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뒤에는, 마치 아폴론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엄청난 외모와 아우라를 지닌 놈이 떡하니 서 있었다. 대천사장 미카엘이라도 되는 걸까. 흰 우유를 부은 듯한 매끈한 피부, 옅은 머리카락, 신이 공들여 빚은 것 같은 조각 같은 얼굴. 살아생전 처음으로 나보다 잘생긴 놈을 봤다. 심장이 쿵쿵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나보다 잘생긴 놈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시발. 지금 내 말을 씹어?”
내 뒤에 있는 놈은 오토바이 주인이 분명하다. 분명 입에서 나오는 말은 화려한 육두문자일 뿐인데 마치 시조를 읊는 것처럼 우아하다. 빨간 체리 같은 입술을 벙긋거리던 놈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보다 더 잘생긴 놈이라니. 불과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손거울을 보며 내가 제일 잘생긴 줄 알았는데.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내 취향을 그대로 빼다 박은 놈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보다 잘생긴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외모가 지나치게 내 취향이라서 자존심이 상했다. 난 남의 얼굴을 넋 놓고 침 흘리며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놈은 충격 먹은 내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슬링백을 어깨에 멘 채 느슨한 표정이다. 나는 순간 대답도 잊었다. 미친. 오지게도 잘생겼다. 안 그래도 조각이 말하는 것 같아 경악할 지경인데, 그 조각 같은 놈이 싸늘한 미소까지 지으니 심장이 쿵덕거렸다. 지나치게 잘생긴 놈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백인형 애마를 건드리다니 배짱도 좋군. 네 식도를 뽑아서 리코더 불어 줄까?”
난 놈의 말에 정신 줄을 놓고 입을 쩍 벌렸다. 뭐, 뭐라고? 백인형?! 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삼류 대사를 읊는 놈의 얼굴이 인형 같아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놀란 이유는 하나였다. 녀석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이름.
“듣자 하니 이름이 백인형이라던데? 이름이랑 얼굴은 인형인데, 하는 짓은 지옥에서 온 처키래.”
엊그저께 들었던 지성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니까, 내 앞에 있는 이놈이, 그 얼굴이 인형 같기로 유명한 백인형이라고?! 난 멍청한 얼굴로 눈앞의 놈을 쳐다봤다. 백인형이 서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나는 놈의 작살나는 미소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현실을 깨달았다. 미친. 좆 됐다. 상황 판단이 끝나자, 내 몸은 머리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채 죽어라 반대편으로 뛰었다. 듣는 소문으로는 저놈이 척추의 순번을 바꾸는 것에 일가견이 있단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난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여기서 조용히 살아야 해!’
필사적으로 교무실로 뛰었다. 그러곤 헉헉 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 사악하기로 유명한 백인형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 악명 높은 소문만 보더라도 당장 날 도륙 내러 오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지금 놈이 쫓아오지 않는 여유가 자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난 잠시나마 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해서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사실 이놈은 지가 알아내려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날 찾아낼 수 있으니까 여유로웠던 것이었다. 제기랄, 그때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

교무실. 전학 온 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담임의 얼굴색이 어둡다. 지나치게 수심이 깊은 그 얼굴에 나까지 눈치를 보게 될 지경이었다. 담임은 나를 마주한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희빈 군. 자네가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어.”
나는 담임의 근심 어린 얼굴에 불편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죠?”
담임은 내 물음에 한참이나 믹스커피를 들이켠 뒤 대답했다.
“알다시피 선화국제고등학교는 영재들만 모이는 엘리트 학교라네. 하지만, 그……. 내가 맡은 반은 달라.”
“네?”
담임은 내 되물음에 다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가 맡은 반은 전교의 문제아만 모아 놓은 반이라네.”
뭐라고?! 놀라서 쳐다보는 나를 보며 담임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분명히 동정이었다. 나를 향한 동정. 칙칙하고 찌질한 녀석이 희생양이 될 것이 눈에 선하기에 건네는 동정. 담임은 지금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담임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 나는 이미 손을 놓은 상태라. 녀석들을 저지할 방법이 없네.”
“네? 아니 그게 무슨.”
“미안하네.”
헐. 나는 담임의 말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지금 날 방관하겠다 이거지?! 뭐 이런 무책임한 새끼가 다 있어. 나는 왈칵 인상을 구긴 채 한숨을 쉬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을 늑골 나갈 때까지 후려쳤던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됐지.
담임이 손을 쓰지 못하는 점은 이해했다. 특히 이 학교는 사립학교인 만큼 부자 놈들의 뇌물을 알게 모르게 똥구멍으로 챙겨 먹었을 테니 담임들이 깨갱 하는 것도 당연했다. 애초에 난 GTO의 오니즈카 같은 선생을 원한 것도 아니었고, 고쿠센의 야마구치 쿠미코 같은 선생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학생들을 바르게 인도할 의지조차 잃은 담임에게 동정을 받는 것은 불쾌했다. 제까짓 게 뭔데 나를!
나는 멍청이 같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걱정 마시죠.”
담임이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응시했지만, 난 의연하게 교실로 향했을 뿐이다.


수업 시작하기 전, 어수선한 교실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조용해졌다. 내가 교단 앞에 등장하니 반 녀석들이 괴상한 생물체 보듯 쳐다본다. 개중 껄렁한 놈들의 표정이 보인다. 학교가 엘리트일 뿐이지 어딜 가나 양아치는 있구나. 난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반의 분위기에 눌린 담임은 잔뜩 쭈그러든 목소리로 날 소개했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전학 온 친구 손희빈이에요.”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고개를 드나 안 드나 망할 커튼 같은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의 반은 음영이었다. 칙칙한 머리칼 아래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손희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와, 나 진짜 찌질이 같애. 내 호구 같은 모습에 치가 떨렸다. 그리고 역시나, 내 완벽한 연기가 빛을 발한 건지 교실 맨 앞자리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뭐야, 저 독버섯같이 생긴 놈은.”
그와 동시에 와하하, 하고는 웃음이 터진다. 그래. 내 머리가 좀 버섯 같긴 하지. 짜증이 났지만 애써 참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장하게 나섰다. 나도 버섯 같은 내 머리가 짜증 나 죽겠는데 쟤들은 오죽하겠냐. 참자, 손희빈.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뚜벅뚜벅 교실 뒷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책상 옆으로 발이 나와 있었다.
“악!”
쿵. 난 다리에 걸려 교실 바닥에 엎어졌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난 망신스럽게 고꾸라졌다. 나는 무릎의 욱신거리는 통증에 이가 갈렸다. 시발! 이런 유치한 초딩 같은 새낀 누구야!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면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발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결국 발의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사악하게 웃는 화려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악한 지옥 인형. 조각 같은 백인형. 바로 그였다.
“안녕, 찌질이.”
난 그 사악한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손희빈, 본격적인 왕따 생활 시작이다.

***

나는 어제 1교시가 끝나자마자 도망쳤다. 느긋한 백인형이 날 잡아 족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오늘조차 1교시부터 수업을 뺄 수는 없기에, 사자 먹이로 던져진 기분으로 나는 오늘 아침 다시 등교했다.
하필 배정받은 반이 백인형이 있는 반이라니. 더욱더 우울한 건 문제아 반에, 고갤 돌려도 죄다 메주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봐 줄 만한 얼굴이 백인형밖에 없다는 사실이 내 속에 화를 부채질했다. 심지어 백인형이 내 이상형에 가깝다는 사실은 더 끔찍했다.
나는 뿌드득 이를 갈며 멍든 무릎을 감싸 쥐었다. 창문에 다닥다닥 붙은 계집애들은, 연신 창밖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인형이 자신의 애마를 끌고 화려하게 궤적을 남기며 교문 앞에 멈춰 섰기 때문이다. 새끼, 겉멋 존나 들었네.
잔뜩 속이 꼬인 채로 창밖을 째려봤다. 백인형은 3교시가 지나서야 온 주제에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무슨 지가 왕자라도 되는 것처럼 헬멧을 벗고 손을 흔들며 교정을 가로질러 오기까지 했다. 미친, 지가 모델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여기가 런웨이야? 존나 재수 없어.
나는 백인형의 자신만만한 모양새가 짜증 났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내가 저놈보다 더 화려했는데. 이가 뿌득뿌득 갈린다. 백인형이 교정으로 걸어오자 어느새 놈의 양옆에는 웬 놈 둘이 따라붙었다. 그러자 창밖을 쳐다보던 여자애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어쩜, 저 MP3 삼인방은 저렇게 잘생겼을까!”
MP3? 그게 뭐야? 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여자애 말을 엿들었다.
“이름하야 MILK PRINCE 삼인방. 하, 정말 심장 녹을 거 같아.”
뭐? 밀크 프린스? 진짜 지랄! 나는 충격적인 축약어 풀이를 듣고 머리끝까지 닭살이 돋았다. 여자애들은 놈의 빠순이 집단인지 창밖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인형이 웃는 거 봤어? 아, 죽을 거 같아!”
“그 옆에 은후랑 소율이는 어떻구! 너무 멋있어!”
시발. 나는 여자애들의 줄줄이 쏟아지는 찬사에 치를 떨었다. 하필 저놈들 이름은 또 왜 죄다 인터넷 소설 주인공 이름 같은 거야, 열 받아. 여자애들의 듣기 거북한 찬사에 치를 떨며 책을 펼쳤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라면서. 정작 내가 온 반은 정신병자 집단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가만히 백인형 옆에 붙어 있는 놈들을 응시했다. 듣자 하니 저 서은후란 놈은 겉만 멀쩡한 괴짜, 한소율은 괴상한 부두교 신자란다.
아, 역시 미친놈들이 분명해. 벌써부터 학교생활이 하기 싫어졌다.

***

꿀꿀한 기분을 전환이라도 할 겸 매점으로 향했다. 더는 그 정신병자 같은 놈들을 향한 찬사를 듣다간 정신이 못 버틸 것 같아서였다.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입에 물고는 우적우적 씹어 댔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우울했던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나는 유유히 중앙 계단을 내려가며 나름 그 맛에 심취했다. 그래서 너무 맛에 심취한 나머지 앞을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할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뒤로 덜 아문 발이 삐끗한 것은.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
“우, 우아악!”
나는 스스로 듣기에도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우당탕 고꾸라졌다. 억. 속으로 신음이 먹혀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예상했던 딱딱한 대리석 바닥이 아닌 푹신함이 느껴져 당황했다. 뭐지. 난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차마 마주하기 싫은 추악한 현실에 이를 갈아야 했다. 정말 눈앞의 상황이 사실이라면 신은 나에게 너무도 잔인했다.
“이 망할 버섯 대가리가.”
백인형이 사나운 얼굴로 내 밑에 깔려 있었다. 오, 지저스. 내 손에 있던 아이스크림은 처참하게 백인형 교복 재킷에 뭉개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신이시여. 그동안 내가 저지른 악행을 그대로 돌려주시는 겁니까. 난 그 뒷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퍽. 백인형이 주먹으로 내 턱을 날렸기 때문이다.
“악!”
난 그대로 얻어맞아 구석에 날아갔다. 내 오뚝한 콧날에서는 코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시발! 나는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 고꾸라졌다. 할아버지에게 장기판에도 두들겨 맞은 나는 이따위 주먹에 기절하지 않는다. 나는 코피를 뿜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악한 표정의 백인형이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인형의 뒤에는 서은후와 한소율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백인형은 아이스크림 묻은 교복 재킷을 보더니 욕설을 내뱉으며 재킷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체리보다도 빨간 입술로 말했다.
“너, 오늘부터 사람처럼 살 생각 접어.”
그것이 백인형이 내게 한 첫 통보였다. 백인형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무자비하게 밟기 시작했다. 악. 악. 나는 연신 발길질을 받으며 설움을 삼켰다. 성질 같아서는 같이 쳤겠지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연신 귓가에 울렸다.
“모범생이 되면, 블랙카드와 오토바이를 돌려주지.”
제기랄! 제기랄! 망할! 바닥에 짓눌린 채 이를 사리물었다. 그래, 시발. 더러워도 참자. 그냥 쭈구리로 살자.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백인형의 구타를 참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든 말든 별 감흥 없이 쳐다보는 MP3 멤버 놈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이 현실을 깨달았다. 그저 ‘은따’로 굳어졌을 수도 있었던 나는, 지금 완벽하게 백인형에게 찍힌 것이다.
꽃보다 남자에 F4 리더 구준표가 있다면, 여기 선화고등학교에는 MP3 리더 백인형이 있다. 소란스러움에 금세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난 그 수많은 인파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모두들 내가 얻어터지는 걸 구경했을 뿐, 그 누구도 말리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 완벽한 왕따가 되었다.

***

완벽한 왕따. 나는 애초에 내가 왕따를 당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경험은 새로웠다. 항상 위에서 군림할 줄만 알았지-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는 것은 너무 치가 떨리는 경험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희원고에서 날아다니던 손희빈은, 지금 선화고의 ‘전따’가 되었다.
이 학교의 실질적 리더 백인형에게 찍힌 인간은 그 대다수가 일주일도 못 버티고 자살 시도를 하든지 전학을 간다고 한다. 나는 백인형의 외모만큼이나 유명한 악명에 기가 질렸다. 난 백인형의 괴롭힘 대상이 되었고, 전학 온 지는 고작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본격적인 왕따의 생활에 접어들었다. 첫 번째로, 나는 구시대의 유물로만 여겼던 양동이 물세례를 받아야 했다. 인간적으로, 화장실에서 똥 쌀 때 물세례라니 너무하잖아. 이 씨발놈들아. 나는 이를 뿌드득 갈며, 미역 요괴의 몰골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내 몰골을 보며 지나가는 녀석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선화고등학교는 명문고인 주제에 왕따 당하는 학생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했다. 애초에 담임 태도를 보고 큰 기대는 안 했다만 너무한 거 아니냐. 사람이 이렇게 괴롭힘당하는데 선생들조차 무관심하다니. 학생 놈들이 죄다 돈줄이라 함부로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쉬며 교실에 들어섰다. 퍽. 그와 동시에 얼굴로 칠판지우개가 날아들었다. 시발. 한 번 괴롭혔으면 좀 쉬엄쉬엄 괴롭히면 안 되니. 이 부지런한 개새끼들아. 나는 후두두 떨어지는 분필 가루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뇌에 빠졌다.
그냥 미친 척하고 칼부림이나 해 버릴까. 미약한 이성의 끈이 간당간당하게 풀리려는 걸 억지로 잡았다. 씨발. 씨발. 씨발. 욕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다. 정말 억울해 죽겠다. 내가 음침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자, 한 뚱보 녀석이 와서 내 머리통을 내리쳤다. 퍽.
“이 새끼, 야, 억울하냐, 응?”
그리고는 연신 내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놈이 때리는 걸 잠자코 맞았다. 억울한 내 인생. 진짜 거지 같다.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 이 뚱보 녀석은 중소기업의 자제라고 들었는데, 백인형의 하수를 자처하고 사는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자기보다 약하고 찌질한 놈한텐 지랄맞게 군다. 내가 백인형에게 찍히자마자 제일 먼저 나선 게 이놈이었다. 놈은 두꺼비 같은 손으로 내 머리를 퍽퍽 후려쳤다. 내가 끝까지 아무 말도 없자 뚱보가 비웃으며 말했다.
“병신, 넌 자존심도 없냐?”
뚱보가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나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 참은 나 자신이 스스로 기특할 지경이다. 꽤 욱신거리는 잔뜩 부은 볼을 한 번 만지고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얼굴로 열이 오른다. 이내 뚜벅뚜벅 걷는 발소리가 내 옆으로 와서 멈췄다. 한소율이었다. 내가 백인형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때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한소율. 한소율은 마치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몸을 수그리고는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아프겠다.”
내가 흘긋, 고개를 틀고 쳐다보자 한소율은 희미하게 웃었다. 한소율은 부두교 비슷한 주술에 미쳐 있는 광신도라고 들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음울한 취미다. 한소율은 손에 있는 방울을 딸랑거리더니 마치 고주파라도 느끼는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대뜸 눈을 부릅뜨며 내게 말했다.
“너, 기가 느껴져.”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내가 미친놈 보듯 쳐다보자 한소율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기가 아주 세. 보통 기가 아닌데 이건.”
한소율은 손에 든 방울을 흔들더니 수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대체 이 새낀 무슨 개수작이야. 박수무당 새끼. 저리 꺼져 버려! 한소율은 내 찡그린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쯧, 업보를 받는구먼.”
나를 보고 한소율이 곰살맞게 웃었다. 그리고 나한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지금 내숭 떠는구나.”
순간 오싹해졌다. 내가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한소율이 말했다.
“넌 날 속일 수는 없어.”
아무 말도 대꾸 못 한 채 쳐다보는데, 곧 백인형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그 버섯 대가리 옆에서 뭐해?”
백인형의 말에 한소율은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한소율은 멍한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팔뚝엔 여전히 소름이 돋아 있었다. 저 새끼. 저거 뭐야, 진짜. 분명 나를 간파한 것 같았어.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인형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야, 따라와. 독버섯.”
백인형은 살벌한 얼굴로 나를 화장실로 불러냈다. 그리고 아주 오만하고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
“야, 너 내 친구들이랑 말하지 마. 알겠어?”
그 유치하고 개초딩 같은 말도 어이가 없었지만, 난 억울하게도 말 한마디 못 했다. 억울하다. 그 미친 무당 새끼가 먼저 말 건 거야, 이 씨불놈아! 그러나 난 끓는 속과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차 없이 날아오는 발길질에 숨죽이며 얻어터질 뿐이다. 이쯤 되니 내가 바닥에 뭉개지는 종이쪼가리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이 악랄한 새끼 같으니라고. 내가 피 맺힌 얼굴로 휙 노려보자, 백인형은 기분 나쁜 벌레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눈 깔아, 확 창자 빼서 젓갈 담그기 전에.”
나는 그 말과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다. 시발. 개새끼. 치욕스럽다. 잠시나마 저놈 얼굴에 멍청하게 넋 놓고 있던 거랑, 이상형에 가깝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다. 시발놈. 너 그거 아냐. 내가 이 학교 졸업하는 날, 네놈부터 죽일 거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며, 복수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