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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어젯밤부터 시작된 눈은 오전이 되도록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월의 한복판. 뒤늦은 폭설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간간이 돌긴 했지만 뉴스의 보도는 늘 그랬듯 오락가락했고, 마을 사람들은 수 십 년 동안 몸이 익히고 있는 날씨감각에 의존하여 제방을 보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약국에서 가장 바쁜 10시대가 지나자, 여진은 가운 위에 코트를 걸친 후 잠시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며 뭉친 어깨를 툭툭 쳤다. 건축사무소에서 오전 중으로 사람이 온다고 했으니 이제부터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집 공사를 위해 저축한 돈은 이제 만족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여진은 허전한 목을 손등으로 감쌌다.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약하게 켜두고 사용하고 있는 히터는 추위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틈이 날 때마다 가운 위에 코트를 걸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추위를 달래는데 최선이었다. 약국 카운터를 돌아나가 입구 옆에 있는 조그만 쪽창을 열었다. 비릿한 바다의 냄새가 눈송이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다.
내리고 있는 눈송이 사이로 멀리 바다가 보였다. 눈 때문에 꼼짝없이 발이 묶인 고기잡이 배 몇 척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제법 그녀의 눈에 익기 시작한 풍경들이다.
남도의 끝. 관광지로 유명한 이 섬마을에 정착한 지 1년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고향에다가 부모님의 묘도 근처에 있어 그리 생경한 장소는 아니었다.
바닷가 마을치곤 규모가 있는 편이어서 고기잡이가 아니어도 생계유지는 가능했다. 두 개의 작은 병원을 이고 시작한 조그만 이 약국은, 때로는 긴급하게 때로는 쉬어가는 용도로 마을 주민들에게 한창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방인에게 선뜻 온기를 건네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약국 안 의자들을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몸은 주변의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가고 있지만, 여진의 시계는 여전히 1년 전에 멈추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몇 몇 순간들이 실사처럼 그려지곤 했다. 동생 여정과 함께 다급히 서울을 떠났던 순간, 어슴푸레한 새벽에 탔던 첫 기차, 그리고 도착한 이 마을의 간이역.
그를 버렸던 순간, 여진은 그녀의 가슴도 함께 버렸다. 폐허가 된 가슴 밑바닥을 처음으로 쏘삭거리다가 들쑤시다가 때때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던 남자의 체온은 이제 없다. 주제도 모르고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아버린 그녀 자신이 어리석었고 염치가 없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모진 후회 끝에 얻게 된 값진 깨달음은 그녀로 하여금 일방적인 이별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느끼지 말아야 할 무거운 미련 속에서, 바깥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지나간 사랑이 뾰족한 파편처럼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감정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딸랑.
입구 문이 열리고 방울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을 맞기 위해 기계적으로 입을 연 여진은, 황급히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코트를 벗으려 했다. 깊은 상념에 빠진 눈빛을 손님에게 들킬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여전하군. 사람 눈도 마주치지 않는 거.”
팔 하나를 벗던 순간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다 해도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가 온기를 다 잃은 채 건너왔다. 그러곤 여진이 차마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눈앞에 고급 명함이 들이밀어졌다.

Y&T 건축사무소 소장 윤건우

“내가, 잘 찾아온 건가?”
한쪽 팔이 여전히 꿴 채 코트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명함 속 이름 석 자를 내려다보는 여진의 가슴이 파열음을 내며 어그러졌다. 믿을 수 없는 그 순간에, 미처 닫지 못한 쪽창에서 한 차례 이는 파도소리만이 가득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