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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테라스
2화
1.
3년 전.
“뭐?”
건우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되물었다. 핸드폰을 턱과 귀 사이에 끼우고 테이블 위로 서류봉투를 막 꺼내려던 참이었다. 같은 건축사무소 직원인 대학동기 도훈이, 건우의 질문에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 되물을 것도 없어. 우선 사무소로 돌아와. 그런 다음에 김 차장을 죽일 건지 살릴 건지 의논해보자고. 윤 소장.
“그래서 김 차장이 오늘 이 약속자리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야? 지금?”
-. 그렇다니까. 그 능글맞은 늙은이가 이렇게 깜찍하게 뒤통수를 칠 줄 누가 알았겠어?
도훈이 화를 삭이며 겉으로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건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신뢰가 느껴지지 않았던 김정수와의 첫 대면을 상기하며 다소 덤덤하게 통화를 끝냈다.
대기업의 차장인 김정수라는 사람이 경기도 쪽에 8층짜리 쇼핑몰 건물을 짓는데, 며칠 전 건우의 사무소와 구두로 계약을 한 후, 오늘 본격적으로 만나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몇 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 대규모 공사여서 도훈을 비롯한 직원들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건축사무소 대표인 건우만이 유일하게 김정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정수는 대화 내내 핵심을 피해가는 모습이었다. 안전공사는 뒷전이고 건축 소요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빨리 오픈해야 한다는 둥 하청업체를 자신이 아는 쪽에 부탁해보겠다는 둥, 계약에 있어 예의와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 건우의 예상이 맞아 들어갔는지, 김정수가 다른 업체와 이미 계약을 해버렸다는 연락을 방금 도훈이 받았다는 것이다. 이쪽 세계야 워낙 대표들끼리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어, 전화 한 통이 곧장 소식통과 직결된다.
건우는 실소와 함께 봉투를 다시 챙겼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머금은 채 외투와 가방을 차례로 손에 쥐었다. 겨울의 한복판에 와 있는 바깥 날씨와 씨름하지 않으려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여자를 발견한 건 가방 속에 넣어둔 머플러를 막 빼내었을 때였다. 고급 호텔의 라운지 커피숍인 이곳과 더없이 어울리는 세련된 차림새의 여자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등을 덮는 긴 머리칼은 웨이브 하나 없는 생머리였고, 와인색의 하프코트 아래로 떨어지는 다리는 남자의 눈길을 충분히 사로잡을 만큼 늘씬하고 육감적이었다. 의도치 않게 서늘한 긴장감이 복부 아래를 간질였다.
여자를 보며 오감이 반응한 건 처음이라 건우 자신도 당황했다. 처음 본 여자를 상대로 불순한 상상을 하는 모습 또한 익숙하지 않았다. 저 여자의 늘씬한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허리를 움직이는 …….
“빌어먹을…….”
잇새로 나직이 욕설을 씹을 정도로 그 자신의 모습이 반갑지 않았다.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사업체를 가지고 계신 부모님의 도움 없이 일구어 놓은 지금의 자리였다. 한 해 매출이 백억이 넘는 젊고 유능한 건축가로, 업계의 후한 평판에 젊은 건축가 상을 2년 연속 수상 한 바도 있다. 서른 한 살의 남자치곤 상당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셈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여자는커녕 모든 대인 관계를 일에 맞추어 개선해갔다. 그랬는데 지금 처음 본 여자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미루어두고 외면해두었던 가슴 한 쪽의 뜨거움이 촛농처럼 흘러내릴 때, 건우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커피숍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카운터 직원에게 다가가는 여자의 모습에서, 건우는 이 커피숍이 주로 남녀의 맞선 장소로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건우의 추측이 확신으로 돌아왔다. 카운터의 여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안내 멘트를 날린 것이다.
“손님 중에 박기현 씨, 박기현 씨 계십니까.”
커피숍은 조용했다. 간간이 사람이 든 테이블은 직원의 안내 방송을 완벽하게 무시하며 자기들만의 대화에 다들 빠져 있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찾는 박기현이라는 사람은 이곳에 없는 것이다. 사진도 못 봤을 것이 뻔했다.
“네.”
그래서였다. 건우는 자신이 박기현인 양 오만한 얼굴로 카운터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순간적인 충동이 여자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채근했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슴의 떨림을 이대로 놓아버리기엔, 그는 꽤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선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선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잘 조련된 미소를 띠며 앞자리에 앉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백은 옆자리에 두고,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하는 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앉으시죠.”
“많이 늦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약속 시간이 지금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면 박기현이라는 남자가 먼저 가버린 건가.
“그다지. 차, 드시겠습니까?”
“차를 마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말을 다 들으시면 아마 입맛이 뚝 떨어지실 거예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얼마쯤 미안한 기색을 얼굴에 올리고 있었다. 홍조가 번진 갸름한 얼굴이 일부러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작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건우는 한 쪽 눈썹을 짓궂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군요. 제 입맛을 떨어뜨릴 그 말이.”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에겐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고 저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할 생각이거든요. 하지만 이 자리를 주선해준 분께는 죄송하니 우선은 나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기분이 아주 나쁘실 테지만 제 처지를 이해해주시길 바랄게요.”
여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마치 며칠 동안 외운 것 같은 말을 쉬지도 않고 내뱉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 아닌, 말 그대로 메모지에 적어두고 달달 외운 것 같은 기계적인 모습이었다. 뭐지, 재밌는 여자네.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다 라……. 그런데 어쩌죠? 나 역시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드는데.”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건우가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 그제야 시선이 닿았다. 껌뻑껌뻑 크고 동그란 눈이 당혹감을 머금은 듯 흔들렸다. 그녀는 건우의 한 마디에 수분 째 어떤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내성적인 성격임이 분명하리라.
그녀가 여전히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건우는 손가락을 튕겨 직원을 불렀다. 다가온 직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한 후,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잠시만 앉아 계시겠습니까?”
사무소로의 복귀가 늦어질지도 모르겠다고 도훈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여자가 있는 자리에서 통화를 할 수는 없으니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여자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아름답게 그려진 턱 선이 당황하며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난생처음으로 일고 있는 뜨거운 감정에, 건우는 흐트러진 숨결을 정리하며 커피숍을 나섰다.
하지만 수 분후 도훈과의 통화를 끝낸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여자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옆 의자에 두었던 백도 테이블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그녀의 존재감도,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탁자 위 지갑만이 건우의 상실감을 달래줄 뿐이었다.
지갑을 놓고 갈 정도로 당황 한 거였나. 사귀는 남자가 따로 있는 상태에서 처음 만난 놈이 들러붙으려 하니 어지간히 정신이 없을 수도 있겠다.
건우는 지갑을 펼쳐보았다. 주민등록증을 눈으로 훑다가 이내 미간을 구겼다. 사진은 영락없이 그녀가 맞는데 이름이 달랐다.
정여진. 1985년 생.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린 건우는, 포켓에 꽂힌 여러 개의 똑같은 명함 중 하나를 꺼내어보았다.
정여진. 은하수 약국. 약사.
빙고. 건우는 빙긋 웃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김선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 남자가 있다는 말도 거짓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머릿속으로 수 백 가지의 생각이 오갔다.
2화
1.
3년 전.
“뭐?”
건우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되물었다. 핸드폰을 턱과 귀 사이에 끼우고 테이블 위로 서류봉투를 막 꺼내려던 참이었다. 같은 건축사무소 직원인 대학동기 도훈이, 건우의 질문에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 되물을 것도 없어. 우선 사무소로 돌아와. 그런 다음에 김 차장을 죽일 건지 살릴 건지 의논해보자고. 윤 소장.
“그래서 김 차장이 오늘 이 약속자리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야? 지금?”
-. 그렇다니까. 그 능글맞은 늙은이가 이렇게 깜찍하게 뒤통수를 칠 줄 누가 알았겠어?
도훈이 화를 삭이며 겉으로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건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신뢰가 느껴지지 않았던 김정수와의 첫 대면을 상기하며 다소 덤덤하게 통화를 끝냈다.
대기업의 차장인 김정수라는 사람이 경기도 쪽에 8층짜리 쇼핑몰 건물을 짓는데, 며칠 전 건우의 사무소와 구두로 계약을 한 후, 오늘 본격적으로 만나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몇 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 대규모 공사여서 도훈을 비롯한 직원들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건축사무소 대표인 건우만이 유일하게 김정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정수는 대화 내내 핵심을 피해가는 모습이었다. 안전공사는 뒷전이고 건축 소요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빨리 오픈해야 한다는 둥 하청업체를 자신이 아는 쪽에 부탁해보겠다는 둥, 계약에 있어 예의와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 건우의 예상이 맞아 들어갔는지, 김정수가 다른 업체와 이미 계약을 해버렸다는 연락을 방금 도훈이 받았다는 것이다. 이쪽 세계야 워낙 대표들끼리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어, 전화 한 통이 곧장 소식통과 직결된다.
건우는 실소와 함께 봉투를 다시 챙겼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머금은 채 외투와 가방을 차례로 손에 쥐었다. 겨울의 한복판에 와 있는 바깥 날씨와 씨름하지 않으려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여자를 발견한 건 가방 속에 넣어둔 머플러를 막 빼내었을 때였다. 고급 호텔의 라운지 커피숍인 이곳과 더없이 어울리는 세련된 차림새의 여자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등을 덮는 긴 머리칼은 웨이브 하나 없는 생머리였고, 와인색의 하프코트 아래로 떨어지는 다리는 남자의 눈길을 충분히 사로잡을 만큼 늘씬하고 육감적이었다. 의도치 않게 서늘한 긴장감이 복부 아래를 간질였다.
여자를 보며 오감이 반응한 건 처음이라 건우 자신도 당황했다. 처음 본 여자를 상대로 불순한 상상을 하는 모습 또한 익숙하지 않았다. 저 여자의 늘씬한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허리를 움직이는 …….
“빌어먹을…….”
잇새로 나직이 욕설을 씹을 정도로 그 자신의 모습이 반갑지 않았다.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사업체를 가지고 계신 부모님의 도움 없이 일구어 놓은 지금의 자리였다. 한 해 매출이 백억이 넘는 젊고 유능한 건축가로, 업계의 후한 평판에 젊은 건축가 상을 2년 연속 수상 한 바도 있다. 서른 한 살의 남자치곤 상당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셈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여자는커녕 모든 대인 관계를 일에 맞추어 개선해갔다. 그랬는데 지금 처음 본 여자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미루어두고 외면해두었던 가슴 한 쪽의 뜨거움이 촛농처럼 흘러내릴 때, 건우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커피숍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카운터 직원에게 다가가는 여자의 모습에서, 건우는 이 커피숍이 주로 남녀의 맞선 장소로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건우의 추측이 확신으로 돌아왔다. 카운터의 여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안내 멘트를 날린 것이다.
“손님 중에 박기현 씨, 박기현 씨 계십니까.”
커피숍은 조용했다. 간간이 사람이 든 테이블은 직원의 안내 방송을 완벽하게 무시하며 자기들만의 대화에 다들 빠져 있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찾는 박기현이라는 사람은 이곳에 없는 것이다. 사진도 못 봤을 것이 뻔했다.
“네.”
그래서였다. 건우는 자신이 박기현인 양 오만한 얼굴로 카운터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순간적인 충동이 여자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채근했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슴의 떨림을 이대로 놓아버리기엔, 그는 꽤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선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선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잘 조련된 미소를 띠며 앞자리에 앉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백은 옆자리에 두고,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하는 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앉으시죠.”
“많이 늦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약속 시간이 지금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면 박기현이라는 남자가 먼저 가버린 건가.
“그다지. 차, 드시겠습니까?”
“차를 마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말을 다 들으시면 아마 입맛이 뚝 떨어지실 거예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얼마쯤 미안한 기색을 얼굴에 올리고 있었다. 홍조가 번진 갸름한 얼굴이 일부러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작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건우는 한 쪽 눈썹을 짓궂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군요. 제 입맛을 떨어뜨릴 그 말이.”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에겐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고 저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할 생각이거든요. 하지만 이 자리를 주선해준 분께는 죄송하니 우선은 나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기분이 아주 나쁘실 테지만 제 처지를 이해해주시길 바랄게요.”
여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마치 며칠 동안 외운 것 같은 말을 쉬지도 않고 내뱉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 아닌, 말 그대로 메모지에 적어두고 달달 외운 것 같은 기계적인 모습이었다. 뭐지, 재밌는 여자네.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다 라……. 그런데 어쩌죠? 나 역시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드는데.”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건우가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 그제야 시선이 닿았다. 껌뻑껌뻑 크고 동그란 눈이 당혹감을 머금은 듯 흔들렸다. 그녀는 건우의 한 마디에 수분 째 어떤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내성적인 성격임이 분명하리라.
그녀가 여전히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건우는 손가락을 튕겨 직원을 불렀다. 다가온 직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한 후,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잠시만 앉아 계시겠습니까?”
사무소로의 복귀가 늦어질지도 모르겠다고 도훈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여자가 있는 자리에서 통화를 할 수는 없으니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여자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아름답게 그려진 턱 선이 당황하며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난생처음으로 일고 있는 뜨거운 감정에, 건우는 흐트러진 숨결을 정리하며 커피숍을 나섰다.
하지만 수 분후 도훈과의 통화를 끝낸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여자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옆 의자에 두었던 백도 테이블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그녀의 존재감도,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탁자 위 지갑만이 건우의 상실감을 달래줄 뿐이었다.
지갑을 놓고 갈 정도로 당황 한 거였나. 사귀는 남자가 따로 있는 상태에서 처음 만난 놈이 들러붙으려 하니 어지간히 정신이 없을 수도 있겠다.
건우는 지갑을 펼쳐보았다. 주민등록증을 눈으로 훑다가 이내 미간을 구겼다. 사진은 영락없이 그녀가 맞는데 이름이 달랐다.
정여진. 1985년 생.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린 건우는, 포켓에 꽂힌 여러 개의 똑같은 명함 중 하나를 꺼내어보았다.
정여진. 은하수 약국. 약사.
빙고. 건우는 빙긋 웃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김선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 남자가 있다는 말도 거짓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머릿속으로 수 백 가지의 생각이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