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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화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듯 코를 박고 자판을 두드리는 여자. 그녀는 혼자 히죽 웃다가 또 혼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다, 그것도 모자라 옆에 놓인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씩씩대기도 했다. 카페 창가 맨 구석자리, 특별한 일이 없다면 늘 펼쳐지는 새삼스러울 것이 전혀 없는 풍경이었다.

“사이다 리필해 줘라.”

주연이 사이다를 다 마시곤 탈탈 털며 빈 잔을 탁 소리가 나게 탁자 위에 놓음과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수빈이 곁을 지나가던 지환을 향해 말했다. 쿡쿡 소리 나게 웃으며 지환이 유리잔에 사이다를 따랐다.

“사장님, 저거 찍어서 보여 주면 어떨까요?”

“누구한테?”

수빈이 눈썹을 홱 치켜 올리며 묻자, 흐흐흐 괴상하게 웃어대며 지환이 답했다.

“준희 형한테요.”

“준희가 저걸 모를 것 같아? 뭐 하루 이틀이어야 말이지.”

성의 없게 중얼거린 수빈이 지환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았다.

탁!

부러 더 세게 놓은 잔인데, 녀석은 여전히 코를 박고서 열중한 모습이다. 수빈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야! 안 돼!”

보물인 양 노트북을 감싼다. 정신없이 두들겨대더니 곁으로 온 건 금세 또 알아차린 모양이다.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러게 뭐 대단한 거라고 슬금슬금 와서는 훔쳐보는데?”

“사이다 대령이다.”

“훠이.”

두 손을 나풀거리며 그를 쫓는다. 내참 별.

수빈이 그런 주연을 보며 혀를 쯧 소리 나게 찼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다시금 노트북에 코를 박는다.

탁탁탁.

손가락이 다시금 노트북을 두드린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어대며 여자는 다시금 히죽 웃는다. 아마도 글이 잘 풀리는 모양이었다. 수빈의 입술에서 피식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근데 준희 형은 언제 온대요?”

“1시간 후에 도착이야.”

“근데 주연 누난 왜 저러고 있는 건데요? 꽃단장 안 하고.”

“꽃단장은 무슨.”

실은 전하지 않았다. 일정이 바뀌어 하루 먼저 한국에 들어온다는 녀석의 말을.

[일이 좀 빨리 끝났어. 하루 일찍 들어가. 주연이에게도 그렇다 전해 줘.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분명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한데 자꾸만 그 이면을 들춰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보고 싶다는 말속에 자신이 아닌 주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의구심. 의심!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서 자판을 두드리는 주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수빈은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가 만든 덫에 제가 빠진 꼴이다. 결단코 준희가 원치 않던 결혼을 고집했던 건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 이기심이란 덫에 빠져 버린 것도 결국 자신 혼자였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문제로 혼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꼴이었다. 정말이지 저 여자가 싫다. 말간 얼굴로, 맑은 두 눈으로, 그보다 더 순수한 마음으로 준희의 가슴에 발 한쪽을 담가 버린 저 여자가 미치도록 싫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금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정말 거슬려.”

수빈은 싸늘한 눈으로 주연을 씹었다.

“무심한 녀석.”

한조는 카운터에 삐딱하게 기대서 카페를 둘러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선언한 지 꼭 3개월 만이다. 그로 인해 집안에서 깔끔하게 내쳐진 것 역시도 3개월째. 허나, 녀석은 불행하거나 음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

딸랑 소리와 함께 열린 카페 문 사이로 한조가 들어오자, 수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형!”

웬일이냐는 거지. 커밍아웃 전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걸 직감한 것이다.

“나쁘지 않아 보이네.”

“나빠지길 바랐던 모양?”

장난스럽게 눈을 접고 하는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형은 여전히 좋아 보이네. 근사해.”

수빈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아서. 나도 보는 눈은 있으니까.”

그는 미간을 찌푸리는 한조를 향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좀 앉자.”

실없는 소리는.

“안 좋은 일이야?”

금세 얼굴을 굳히고 창가 쪽 자리로 걸음을 옮기는 한조를 따라가며 수빈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좋은 일이었음 안 왔겠지. 알아.”

수빈이 삐딱하니 날이 선 목소리로 저 혼자 대꾸했다.

“고모, 아프셔.”

그러거나 말거나, 한조는 자리에 앉자마자 툭 내뱉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왔는데, 안 아플 리 없겠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수빈의 얼굴엔 금세 수심이 가득해졌다. 안다. 적어도 제 어머니와는 죽이 잘 맞던, 그래서 누가 보기에도 부러울 만한 모자지간이었으니까. 늘 부러워했을 만큼.

“수술 잡혔어. 육종이라고 암인데 장기 암이 아니어서, 발견을 못했었던가 봐.”

“진행……. 얼마나 된 건데?”

대번에 떨리는 목소리. 무섭게 흔들리는 눈동자. 안타깝다. 고모인 이중연 여사의 초췌하고 마른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만큼.

“아직 많이 진행된 건 아니라는데, 그래도 일단 열어 봐야 확실히 알 거라고 얘기해, 김 박사님.”

“빌어먹을.”

테이블 위로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괜한 죄책감 한 자락에 더 가슴이 아플 것이다.

“수술 전에 한 번 들러. 고모부야 어차피 저녁에나 오시니까, 낮에.”

“음.”

“쓸데없는 죄책감에 몸살하지 말고. 니 탓 아니야.”

한조의 단단한 말에도 수빈은 쉬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고마워, 형.”

애써 입술을 늘이는데, 참 뭐라 해줄 말이 없다. 한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저 어깨만 툭툭 쳐 주었다.

“가게?”

“가야지. 전할 말 전했고. 다음에 보자.”

“음.”

그때였다.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주연이 테이블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중얼거린다.

“죽자. 죽어, 그냥.”

금세 어이없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수빈. 그리고 그 옆으로 한조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주연에게로 걸어갔다.

“형?”

고작 옆모습. 그것도 제대로도 아니다. 테이블에 쿵쿵 머리를 박는 모습이 다였으니까. 그런데 번쩍 머리로 불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다리가 먼저 움직여 버린 것이다.

“빈아. 나 바본가 봐. 갑자기 암전이야. 미친 듯이 써졌었는데. 꽉! 막혀 버렸어. 이런 돌 머 리!”

다시 한 번 쿵쿵 머리를 박던 주연이 고개를 돌려 한조를 쳐다보았다.

“빈아, 나 사이……!”

사이다를 달라고 말하려던 여자는 수빈으로 착각한 남자의 모습, 얼굴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유난히 까맣고 큰 동공이 얼어 버린 듯 순식간에 굳어졌다. 어지간히도 충격인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지?”

삐딱하니 입술을 끌어올리는 한조를 보던 주연이 잘근 입술을 깨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마치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둘이 알아?”

수빈이 한조와 주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은주연. 너, 한조 형 알아? 형, 형이 어떻게 주연일 알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꽉 막혀서 한 자도 못 써. 먼저 들어갈게.”

하지만 수빈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주연은 제 할 말만 하며 허둥지둥 노트북과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주연!”

그리고 그보다 더 허겁지겁 카페를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피식. 한조의 입술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주연이 나간 문을 쳐다보던 수빈이 한조를 쳐다본다

“찾았네, 드디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한조가 중얼거렸다.

“이만 간다. 고모는 한시라도 빨리 찾아뵙고.”

한조가 다시 한 번 수빈의 어깨를 토닥이고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갔다.

“뭔 거 같냐?”

“안타깝네요.”

수빈이 대뜸 묻자마자, 지환에게서 심드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

그런 지환을 향해 수빈이 되물었다. 안타깝다고?

“우리의 은 여사는 이미 특허권을 가진 사람이 있잖아요. 김준희라고. 형네 형님은……. 임자 있는 여자한테 혹한 모양인데 안타깝죠, 뭐.”

그러니까……. 그 남자 여자다?

수빈의 입술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잠깐 외출할게. 준희 오면 그렇게 말해.”

하지만 그건 일단 다음에 생각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급한 건, 어머니다. 못난 아들 덕에 가슴 쥐어뜯는 날들을 보냈을 이중연 여사.

“왜 모른 척하는데?”

긴 다리로 성큼성큼 주연을 따라잡은 한조가 떡하니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나 알아?”

미간을 찌푸린 주연이 대뜸 그렇게 묻는다. 쏘아보는 눈이 제법 맵다.

“모른 척 하시겠다?”

아니!

몰랐으면 좋겠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면 좋겠다.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 남자가.

그날은, 그날은 그저 꿈같은 날이었다. 깨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꿈. 그런데 그저 한낱 꿈이었던 그날이 현실로 툭 튀어나와 버리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떠벌리며 아는 척 할 사인 아니잖아, 우리가?”

“인정했네? 우리, 아는 사인 거.”

“그래서?”

노선을 정했는가 보다. 깔끔하게 무시하는 걸로. 한데 어쩌나. 흔들리는 저 눈은. 잔뜩 힘만 준 채 쏘아볼 뿐, 누가 보아도 혼란스러운 것이 분명한 듯 그녀의 두 눈은 무섭도록 흔들리고 있었다.

“찾았었어. 찾고 싶었어.”

“당신이 왜 날 찾아? 나에 대해 뭘 알아서 찾아?”

“나 아는 거 많아. 여기서 하나하나 열거해 봐?”

부러 느물거리며 말했더니, 주연이 좀 전보다 배는 더 씩씩대며 그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꺼져요, 당장.”

“안 그래도 꺼질 생각이야. 소재 파악 됐으니까 꺼져 줘도 무방하지 싶어.”

이까지 사리물고 사납게 뱉은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한조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또 봐.”

한조는 여전히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씩씩거리고 있는 그녀를 뒤로한 채, 느긋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미치겠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