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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발까지 동동 구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는 주연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따갑게 두드려댔다.

“어떻게 아는데?”

수빈의 목소리가 더해지자, 그녀는 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몰라! 모른다니까!”

“알았어, 인마. 하여간 승질은.”

어이없다는 투로 툭 내뱉은 수빈이 자리를 뜨자, 한조는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다시금 주연에게 발길을 돌렸다.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곧장 그녀 앞에 섰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른 탓에 들고 있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가방에서 쏟아진 휴대전화, 메모노트, 그 밖에 잡다한 필기도구 등이 콘크리트 바닥에 즐비했다.

“보면 참 에너지틱 해.”

픽 웃으며 그가 말하자, 주연의 얼굴이 더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그 얼굴을 하고서 죽일 듯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수빈이를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지만!”

떨어진 물건들은 대충 주워 넣은 주연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형이야. 사촌 형.”

“사촌이든 뭐든 난 끝까지 당신 몰라.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후우, 허튼소리 하지 마요. 절대.”

이를 앙다물고 차갑게 내뱉는 말에는 조금, 성이 나는 것 같다.

“난 허튼소리 따윈 안 하는 사람이지. 워낙에 진실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부러 더 삐딱한 투로 말했더니,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을 끔뻑인다.

“미친놈이지 내가.”

한조가 짧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자, 질끈 아랫입술을 깨문다. 난처해 죽을 지경인 거다. 근데 그거 알려나 모르겠다. 여태까지 앞의 이 여자를 찾아 헤매면서 자신은 매번 매순간마다 그렇게 난처한 기분이었다. 어이없고, 기막혔다. 하루하루 미친놈 소리를 골백번도 더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봐줄게.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거.”

“뭐, 요?”

금세 또 목소리가 통하고 튀어 오른다. 맞다. 이 여자는 본래 이런 여자였던 거다. 숨죽여 우는 여자는 애초부터 아니란 얘기다. 대체 그날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리 없이 그렇게 기운 빠지도록 울 수 있는지 몰랐다. 눈물만 방울방울 흘러내릴 뿐, 가까스로 흐느끼던 주연이 안타까워 가슴이 다 뻐근했다.

“곧 또 볼 수 있을 거야. 일단 좀 놀란 것 같으니까 그만 사라져 줄게. 어차피 만났잖아? 다음번엔 좀 유연하게 굴어 주면 좋겠는데?”

“기막혀.”

“그건 당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그날 아침에 내가 느꼈던 기분이고.”

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 혹시 잊어버린 건 아니지? 내 이름. 한조야. 이한조.”



[이름?]

그가 다정하게 키스하며 물었었지. 답하지 않았더니 먼저 얘기를 해 주었다.

[한조야. 이한조. ……이름?]

거기다 말해 줬던 것 같다.

[주연. ……은주연.]

남자가 설핏 웃었던 것 같다.



“난 기억해. 똑똑히. 은주연.”

한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이 여자의 눈빛이 어땠는지, 목소리가 어땠는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그런데 이렇게 모른 척하고 나온다면 반칙이잖아.

“또 보자. 은주연.”

주연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는 인사에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내 발길을 돌려 가버리는 그를 보면서는 두 눈이 흔들렸고, 그의 검은색 승용차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에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미친 거지, 아주?”

질끈 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계집애가 맨날 축구는.”

수빈이 중얼거렸다. 혀까지 쯧 소리 나게 차면서.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연은 프리미어리그 시청에 한창이었다. 축구공이 휙휙 날아다닐 때마다 그녀의 눈도 그 공을 따라다녔다. 양반다리를 하고서 쿠션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이기고 있냐?”

“아니, 아직 0:0이야.”

“박지성은 선발이야?”

“아니, 후반에 나올 모양이야. 준흰?”

“자. 피곤하겠지.”

“응. 자구 갈래?”

“어. 집에 가기 귀찮아서.”

그의 대꾸에는 별 답이 없다. 워낙에 툭툭 던지는 타입이었다. 이 녀석은. 굳이 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난 대로 얘기하면 그 뿐인. 답 없는 녀석. 수빈은 여전히 뚫어져라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그녀를 찌릿 째렸다. 뭐, 역시나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겠지만.

“맥주 마실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수빈이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물었다.

“응.”

“근데 한조 형은 어떻게 아는 거냐?”

지나가는 물음에 한 큐에 굳어져 버리는 꼴이라니. 수빈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뭔가 있는 거지. 뭔가 있어야 말이 되지. 한조 형은 자신의 일이 아닌 다음에야 티끌만큼이라도 관심 쏟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 눈에 정확히 주연이 담겼다. 흥미롭게 흔들리던 눈이라니. 입술 끝에 문 미소라니. 흥미진진했다, 아주.

“……몰라.”

“한 템포 늦었어. 무슨 생각 한 건데?”

수빈이 장난스럽게 빙글거리며 물었다.

“아무것도.”

대답은 그래 놓고 입술은 잘근 씹는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거 알아? 한조 형, 부자야. 잘생겼지. 돈 많지. 내가 알기로 여자관계도 나름 깨끗해.”

부자겠지. 수빈의 집이 알 만한 모 그룹이니, 당연히 수빈의 사촌도 부자일 거다. 그러니 돈이야 많을 테고, 여자관계라…… 거야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고.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너 빼고, 준희 빼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한테 나 유부녀야. 사람들 죄다 불러다 놓고, 올 1월에 나 딴딴따단 했다고.”

“뭐, 그랬지.”

주연의 옆자리로 풀썩 소리가 나게 앉는 수빈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잠시 머물다 이내 사라졌다. 알지. 모를 리가 있나. 그 결혼, 추진하자던 선봉장이 자신인데. 모를 수가 있나. 지금 가장 발등 찍고 싶은 게 그건데.

우습지도 않게 연적 비슷한 걸 주연에게 느끼고 있었다. 준희가 사랑하는 것이 분명 자신이라는 것도 알고, 녀석이 그녀에게 느끼는 그 감정은 그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희가 주연을 보는 게 싫어지고 있다. 그가 그녀를 염려하고, 사소한 하나라도 챙기려는 게 못 견디게 미웠다. 질투라니. 정말로 어이가 다 없을 지경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은주연에게 질투하다니.

“어쩌다 얼굴을 좀 익혔어. 그게 다고, 더 어쩌고 싶은 맘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마.”

똑 부러진다. 가끔 정말 안 어울리게.

“그렇다면 뭐.”

수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빈아.”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수빈의 입에서 후우, 짧게 한숨이 터져 나온다. 한 톤 다운된 목소리로 저렇게 자신을 부를 때면 녀석은 꼭 속 아픈 소리를 해대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힘들어. 나. 첨엔 멋모르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점점 힘들어져. 사람들 속이는 거, 생각보다 버거운 일이야. 특히 준희네 부모님…… 뵐 때마다 정말 죄짓는 기분 들어 미치겠어. 알아. 각오했던 일인 거. 너나 나나 또 준희나, 우리 입장들에서 나름 최선이었단 것도. 근데……. 어쩔 수 없나 봐. 켜켜이 싸여서 나중엔 그 무게에 내가 짓눌릴지도 모르겠어. 단박에 동의했던 것도 난데, 가끔 준희랑 빈이 너흴 원망한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뭐 그런.”

그렇지. 거짓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어느 순간 후회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이 애가 그런 것처럼. 또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빈은 가만히 주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켜켜이 용기가 쌓일지도 몰라. 거짓이라는 굴레를 덮어쓰고 있지만, 나랑 준흰 분명히 사랑하니까. 그 누가 뭐래도.”

작은 어깨의 토닥임도, 담담하게 쏟아내듯 하는 다짐도 어쩜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까. 정작 자신이 붙잡고 있는 그 사랑은, 준희는 여전히 겁쟁이인 것을.

“한 캔 더 딸래?”

부러 더 쌩쌩하게 말했다. 밉디미운 녀석이지만, 저렇듯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은 더 싫다. 누구보다 웃는 게 어울리는 녀석이 은주연이니까.

“응.”

주연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의 바람대로. 하지만 어쩌나. 밝게 웃는 낯에 다시금 밸이 꼬이니. 픽. 수빈의 입에서 바람 빠지듯 기운 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야, 은주연!”

늦게 잠든 탓에 한창 꿈나라에 있던 그녀를 끈질긴 전화 끝에 여기로 불러낸 것이 저 여자다. 지금 시각이 12시 30분. 점심 식사나 같이 하자며 가볍게 불러낸 것과는 다르게 여자는 이른 아침부터 집요하게 전화를 해 댔다. 부재중 전화가 4통.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끄고 다시 잠들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준희가 제 휴대전화를 들고 들어왔다. 저 여자의 전화라면서. 정말 대책도 없지. 세상에 대책 없이 사는 이는 저 하나라고 생각했던 걸 단박에 바꾸어 버린 것이 바로 저 여자다. 저렇게 어여쁘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서하 씨, 나 어제 새벽 4시에 잠들었어. 그냥 저녁 먹자니까.”

자리에 앉으며 툴툴대자 빙글 더 웃으며 말한다.

“막 보고 싶잖아, 그대가.”

더 뭐라 말할까. 훗, 주연은 그저 웃어 버렸다.

“참 간만이다. 그치?”

배시시 웃는 양이 정말 어여쁘다. 저러니 배우 하지 싶다.

이서하. 모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한, 그야말로 인정받는 여배우. 거기다 잘나가는 여배우들이라면 꼭 하나씩 한다는 화장품 CF를 장장 5년 동안 찍고 있는 톱스타. 최근엔 그녀가 찍은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뭐 이만하면 그녀가 톱스타라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고작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력 하나만 딸랑 있는 자신과는 여타 비교가 필요 없다. 하지만 요는 그녀가 자신을 못 견디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 참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서하와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직전까지 문정선 작가의 보조, 이를테면 새끼작가였던 때에 심부름으로 서하의 집에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드라마엔 출연하지 않던 서하였기에, 그녀는 드라마 작가인 문정선 작가의 러브콜을 단박에 거절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문정선 작가의 작품을 단박에. 저는 영화배우라면서. 그때 작가님이 뭐랬더라.

[이것만 해결해. 그 여자 생각하고 쓴 드라마였는데, 아니면 엎어야 돼. 어디 해결해 봐. 그럼 내가 미니 하나 만들어 준다. 어때?]

생각할 게 뭐 있었을까. 냅다 튀어나갔지. 그때만 해도 자신은 고작 단막 두 작품을 썼을 뿐이었다. 그것도 문 작가님의 후광을 입고. 그리고 줄기차게 거절하는 서하를 역시나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그 작품에 출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요즘 어때?”

“그냥 뭐 그렇죠. 머리 쥐어뜯으며 쓰다가 또 지우다가, 그러다 짜증나면 마시다가, 졸리면 자다가.”

“대충 그림 나오네. 하하하.”

참 시원하게도 웃네. 기분 나쁘게.

“그럼 곧 나오겠다. 좋은 작품.”

하지만 또 서하가 이렇다. 금세 사람 마음을 잡아 놓는다.

“전에도 말했지? 그대 작품에 나 출연하고 싶다고. 단역이든 뭐든 그냥 출연해 줄게.”

“출연해 줘? 뭐 적선해요?”

“하하하. 또 발끈한다. 그거 아닌 거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