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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기억하는 사랑
1화
프롤로그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두고 프로리그 상위 두 팀의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은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예비 엔트리 발표를 앞둔 시점인 만큼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자세 역시 남달랐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한 염원으로 축구를 시작했던 모든 선수들의 꿈이 바로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상위 두 팀의 선수들 중에는 예비 엔트리에 이미 이름을 올린 선수들도 있어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들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삼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수들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은주와 유진의 시선은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영민에게 향해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국가대표였던가. 거의 십 년이 넘는 그의 프로 생활에서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 뽑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 최종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포지션과 경쟁자들을 생각해보면 이변이 없는 한 영민이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은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영민이 뛰는 모습만 보아도 그녀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던 남편의 땀방울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은주의 눈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그의 꿈을 이룬 성취감에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그동안의 고생을 눈물 한 방울에 씻겨내듯 은주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 왜 울어? 아빠가 국가대표 되니까 좋아서 우는 거야?”
“응. 아빠가 국가대표 되니까 너무 좋구나. 엄만 아빠가 너무 자랑스럽단다.”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며 유진이 말했다.
“나도 아빠가 자랑스러워. 그럼 우리 아빠 월드컵에도 나가는 거야?”
“그렇단다.”
눈물을 훔치며 은주가 유진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영민의 모습을 은주는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아빠 보이네. 오늘은 꼭 아빠가 한 골 넣었으면 좋겠구나. 그렇지?”
“응.”
은주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 유진이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그의 동료가 영민의 앞으로 패스한 공을 영민이 잡아서 단독으로 드리블을 하며 상대방 골에어리어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상대편 선수의 거친 태클이 영민의 발등을 향해 들어왔다. 영민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의 태클에 걸려 넘어져 그라운드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곧 주심이 고의적인 태클을 건 상대팀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꺼내들었고 관중들의 야유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고통이 심한 듯 영민이 발목을 잡고서 아픔을 호소하자 들것이 들어와 영민을 싣고 운동장 밖으로 나갔다.
영민이 태클에 걸려 넘어지자 지켜보고 있던 은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아빠 많이 다친 거야?”
“모르겠어. 아마 많이 안 다쳤을 거야.”
유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은주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태클을 거는 상대팀 선수의 발이 높은데다 부딪치고 난 뒤 이어지는 영민의 고통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귓가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아찔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나자 유진은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영민은 들것에 실려 갔고 운동장에는 그 대신 다른 선수가 교체되어 들어왔다. 생각보다 영민의 부상이 심한 것이 분명했다.
“유진아, 엄마하고 같이 아빠에게 가 보자.”
은주가 유진의 손을 잡고 관중석을 빠져 나오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은주가 라커룸에 도착했을 때 영민은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 택시를 타고 코칭스태프가 일러준 병원에 도착한 은주는 병원에 있던 팀 동료의 표정을 보고는 절망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지금 단층 촬영을 하고 있으니까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동료의 위로에 은주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그의 표정은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국가대표는 이미 포기하라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다쳐서 월드컵 못나가는 거야?”
유진의 말에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은주가 입을 열었다.
“아닐 거야. 아빠 그렇게 많이 안 다쳤어. 월드컵 나갈 거야. 그래서 꼭 골을 넣을 거야.”
은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홉 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동안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던 은주는 결국 의사의 한마디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십자인대 파열입니다. 아마도 재활 기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은주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염원하고 기다렸던 국가대표였던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게 꿈이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의 꿈.
하지만 이제 모든 꿈은 날아가 버렸다. 다음 월드컵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마지막이 될 국가대표의 꿈. 찢길 대로 찢겨져 있을 그의 가슴을 생각하자 은주의 가슴 역시 찢어졌다.
“엄마, 의사 선생님이 뭐래? 아빠 곧 낫는대? 월드컵 나갈 수 있대?”
은주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유진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아빤 그라운드에선 뛰지 못하지만 가슴속에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뛸 거야. 그 누구보다도…….’
1. 잃어버린 꿈
모처럼 열린 사내 체육 대회를 유진은 스탠드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곧이어 벌어질 축구 시합에 유진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꿈을 포기하고 살아간 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는 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한 떨기 꿈이 아스라한 기억처럼 남아 있었다.
아빠가 물려 준 유일한 꿈. 그 꿈과 맞물린 아빠의 추억.
축구 시합은 생산직 근로자들이 한 팀을 이루고 또 하나의 팀은 관리직과 영업직으로 한 팀을 구성했다. 포상금과 회식이 걸린 게임이라 시합에 임하는 선수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유진의 옆에 앉아 있던 수연은 현우의 등장에 호들갑스럽게 입을 뗐다.
“사장님도 참가하신다더니 정말이네. 우리 사장님 정말 멋있지 않냐?”
수연의 호들갑에 유진은 운동장 중앙으로 향하는 현우의 모습을 넌지시 보았다. 위아래로 걸친 붉은 유니폼이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평소 과묵하고 근엄한 그의 태도가 성큼성큼 보폭을 크게 걷는 걸음걸이에 그대로 드러났다.
“사장님 운동은 잘 하시려나? 몸매로 보면 어지간한 운동선수 뺨치는데.”
수연의 호들갑에 유진이 대답했다.
“너 사장님 좋아하는구나.”
“우리 회사에 사장님 좋아하지 않는 여직원들이 있겠어?”
유진은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를 알고 있는 사내의 여직원들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은 이성적인 호감을 가슴에 품을 정도로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공격수로 나선 현우가 볼을 뒤로 돌리고 나이가 지긋한 김 부장이 공을 받았지만 퍼스트 터치가 너무 길어 상대편 선수에게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을 빼앗은 젊은 직원이 빠르게 공을 몰고 나가자 지켜보던 양 팀의 직원들이 동시에 야유와 환호를 보냈다. 뺏고 뺏기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고 상대편 골대를 향한 슛도 각각 한 차례씩 있었다.
지켜보던 유진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빠의 시합을 지켜보던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름다운 추억과 동시에 찾아오는 슬픈 기억. 자상하게 축구를 가르쳐 주었던 당신.
유진이 잠시 추억에 빠져 있을 때쯤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현우가 혼자 공을 몰고 가며 수비수 두 명을 발재간으로 따돌린 뒤 골대 그물 구석을 향해 발등으로 공을 힘차게 차 넣은 것이다.
잠시 후 그물이 출렁거리고 곧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현우가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 높이로 들어 보이며 승리의 세리모니를 펼쳤다.
“사장님 운동도 끝내주게 잘한다. 정말 멋지다. 혼자서 두 명이나 제치고 골까지 넣었어. 멋있지 않냐?”
“응. 멋있어.”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모습을 넌지시 보았다. 타이트한 유니폼이 땀에 젖어 그의 가슴과 등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탄탄하고 다부진 그의 몸매를 보자 한눈에 보아도 그가 만능스포츠맨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가 방금 보여준 환상적인 플레이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전반전 종료 직전, 생산직 팀에서 한 골을 따라 붙어 일대일 동점으로 전반전 경기를 마쳤다. 후반전이 막 시작될 무렵, 현우가 속한 팀의 선수 중 김 부장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무리하게 근육을 쓰는 바람에 다리에 쥐가 난 것이다.
선수 교체를 하기 위해 현우는 응원석을 보았다. 사내 체육 대회이다 보니 인원이 부족했다. 열 한 명이 뛰어야 되는 경기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인원으로 인해 열 명으로 경기를 했었는데 그 와중에 한 명이 빠졌으니 현우는 난감하기만 했다.
“사장님, 김 부장을 대체할 선수가 없습니다. 생산직에도 남자들이 별로 없어서 말입니다,”
이 과장의 말에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생산직 팀에도 한 명을 더 빼서 아홉 명으로 맞추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과장의 말에 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안 됩니다. 그 빠진 한 명의 기분을 생각해 보세요. 단합도 하고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체육 대회입니다. 갑자기 제외된 그 직원 한 명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응원석에 물어서 한 명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네.”
이 과장이 응원석으로 찾아가 둘러보았지만 몇 명 남아 있는 남자 직원들은 나이도 지긋한데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 과장이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기가 잠시 지연되면 선수들이나 응원하는 직원이나 지치게 마련이라 이 과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리 봐도 뛸 사람이 없는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이 과장의 뒤에서 그를 불렀다.
“이 과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모자라는 한 명 제가 채우겠습니다.”
유진의 목소리에 이 과장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족구 같은 경기면 몰라도 축구 경기를 여자가 선뜻 하겠다고 나서자 이 과장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서유진 씨, 지금 진심입니까?”
“네.”
이 과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남자들이 해도 힘든 경기인데 여자가 한다고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기 앉은 나이 많은 직원에게 부탁하는 게 낫겠습니다.”
돌아서는 이 과장에게 유진은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제가 여자라서 그런 건가요?”
귀찮다는 듯 이 과장이 유진을 쳐다보는데 현우가 한 손에 공을 들고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 과장님, 무슨 일이죠?”
황당한 얼굴을 하고서 이 과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 서유진 씨가 시합을 뛰겠다고 하잖습니까?”
“서유진 씨가 말입니까?”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현우는 유진을 보았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그녀가 축구 경기를 하겠다니……. 현우가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는데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당찬 그녀의 표정에 현우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화
프롤로그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두고 프로리그 상위 두 팀의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은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예비 엔트리 발표를 앞둔 시점인 만큼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자세 역시 남달랐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한 염원으로 축구를 시작했던 모든 선수들의 꿈이 바로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상위 두 팀의 선수들 중에는 예비 엔트리에 이미 이름을 올린 선수들도 있어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들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삼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수들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은주와 유진의 시선은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영민에게 향해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국가대표였던가. 거의 십 년이 넘는 그의 프로 생활에서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 뽑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 최종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포지션과 경쟁자들을 생각해보면 이변이 없는 한 영민이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은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영민이 뛰는 모습만 보아도 그녀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던 남편의 땀방울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은주의 눈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그의 꿈을 이룬 성취감에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그동안의 고생을 눈물 한 방울에 씻겨내듯 은주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 왜 울어? 아빠가 국가대표 되니까 좋아서 우는 거야?”
“응. 아빠가 국가대표 되니까 너무 좋구나. 엄만 아빠가 너무 자랑스럽단다.”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며 유진이 말했다.
“나도 아빠가 자랑스러워. 그럼 우리 아빠 월드컵에도 나가는 거야?”
“그렇단다.”
눈물을 훔치며 은주가 유진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영민의 모습을 은주는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아빠 보이네. 오늘은 꼭 아빠가 한 골 넣었으면 좋겠구나. 그렇지?”
“응.”
은주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 유진이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그의 동료가 영민의 앞으로 패스한 공을 영민이 잡아서 단독으로 드리블을 하며 상대방 골에어리어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상대편 선수의 거친 태클이 영민의 발등을 향해 들어왔다. 영민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의 태클에 걸려 넘어져 그라운드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곧 주심이 고의적인 태클을 건 상대팀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꺼내들었고 관중들의 야유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고통이 심한 듯 영민이 발목을 잡고서 아픔을 호소하자 들것이 들어와 영민을 싣고 운동장 밖으로 나갔다.
영민이 태클에 걸려 넘어지자 지켜보고 있던 은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아빠 많이 다친 거야?”
“모르겠어. 아마 많이 안 다쳤을 거야.”
유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은주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태클을 거는 상대팀 선수의 발이 높은데다 부딪치고 난 뒤 이어지는 영민의 고통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귓가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아찔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나자 유진은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영민은 들것에 실려 갔고 운동장에는 그 대신 다른 선수가 교체되어 들어왔다. 생각보다 영민의 부상이 심한 것이 분명했다.
“유진아, 엄마하고 같이 아빠에게 가 보자.”
은주가 유진의 손을 잡고 관중석을 빠져 나오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은주가 라커룸에 도착했을 때 영민은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 택시를 타고 코칭스태프가 일러준 병원에 도착한 은주는 병원에 있던 팀 동료의 표정을 보고는 절망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지금 단층 촬영을 하고 있으니까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동료의 위로에 은주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그의 표정은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국가대표는 이미 포기하라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다쳐서 월드컵 못나가는 거야?”
유진의 말에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은주가 입을 열었다.
“아닐 거야. 아빠 그렇게 많이 안 다쳤어. 월드컵 나갈 거야. 그래서 꼭 골을 넣을 거야.”
은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홉 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동안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던 은주는 결국 의사의 한마디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십자인대 파열입니다. 아마도 재활 기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은주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염원하고 기다렸던 국가대표였던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게 꿈이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의 꿈.
하지만 이제 모든 꿈은 날아가 버렸다. 다음 월드컵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마지막이 될 국가대표의 꿈. 찢길 대로 찢겨져 있을 그의 가슴을 생각하자 은주의 가슴 역시 찢어졌다.
“엄마, 의사 선생님이 뭐래? 아빠 곧 낫는대? 월드컵 나갈 수 있대?”
은주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유진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아빤 그라운드에선 뛰지 못하지만 가슴속에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뛸 거야. 그 누구보다도…….’
1. 잃어버린 꿈
모처럼 열린 사내 체육 대회를 유진은 스탠드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곧이어 벌어질 축구 시합에 유진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꿈을 포기하고 살아간 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는 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한 떨기 꿈이 아스라한 기억처럼 남아 있었다.
아빠가 물려 준 유일한 꿈. 그 꿈과 맞물린 아빠의 추억.
축구 시합은 생산직 근로자들이 한 팀을 이루고 또 하나의 팀은 관리직과 영업직으로 한 팀을 구성했다. 포상금과 회식이 걸린 게임이라 시합에 임하는 선수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유진의 옆에 앉아 있던 수연은 현우의 등장에 호들갑스럽게 입을 뗐다.
“사장님도 참가하신다더니 정말이네. 우리 사장님 정말 멋있지 않냐?”
수연의 호들갑에 유진은 운동장 중앙으로 향하는 현우의 모습을 넌지시 보았다. 위아래로 걸친 붉은 유니폼이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평소 과묵하고 근엄한 그의 태도가 성큼성큼 보폭을 크게 걷는 걸음걸이에 그대로 드러났다.
“사장님 운동은 잘 하시려나? 몸매로 보면 어지간한 운동선수 뺨치는데.”
수연의 호들갑에 유진이 대답했다.
“너 사장님 좋아하는구나.”
“우리 회사에 사장님 좋아하지 않는 여직원들이 있겠어?”
유진은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를 알고 있는 사내의 여직원들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은 이성적인 호감을 가슴에 품을 정도로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공격수로 나선 현우가 볼을 뒤로 돌리고 나이가 지긋한 김 부장이 공을 받았지만 퍼스트 터치가 너무 길어 상대편 선수에게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을 빼앗은 젊은 직원이 빠르게 공을 몰고 나가자 지켜보던 양 팀의 직원들이 동시에 야유와 환호를 보냈다. 뺏고 뺏기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고 상대편 골대를 향한 슛도 각각 한 차례씩 있었다.
지켜보던 유진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빠의 시합을 지켜보던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름다운 추억과 동시에 찾아오는 슬픈 기억. 자상하게 축구를 가르쳐 주었던 당신.
유진이 잠시 추억에 빠져 있을 때쯤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현우가 혼자 공을 몰고 가며 수비수 두 명을 발재간으로 따돌린 뒤 골대 그물 구석을 향해 발등으로 공을 힘차게 차 넣은 것이다.
잠시 후 그물이 출렁거리고 곧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현우가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 높이로 들어 보이며 승리의 세리모니를 펼쳤다.
“사장님 운동도 끝내주게 잘한다. 정말 멋지다. 혼자서 두 명이나 제치고 골까지 넣었어. 멋있지 않냐?”
“응. 멋있어.”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모습을 넌지시 보았다. 타이트한 유니폼이 땀에 젖어 그의 가슴과 등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탄탄하고 다부진 그의 몸매를 보자 한눈에 보아도 그가 만능스포츠맨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가 방금 보여준 환상적인 플레이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전반전 종료 직전, 생산직 팀에서 한 골을 따라 붙어 일대일 동점으로 전반전 경기를 마쳤다. 후반전이 막 시작될 무렵, 현우가 속한 팀의 선수 중 김 부장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무리하게 근육을 쓰는 바람에 다리에 쥐가 난 것이다.
선수 교체를 하기 위해 현우는 응원석을 보았다. 사내 체육 대회이다 보니 인원이 부족했다. 열 한 명이 뛰어야 되는 경기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인원으로 인해 열 명으로 경기를 했었는데 그 와중에 한 명이 빠졌으니 현우는 난감하기만 했다.
“사장님, 김 부장을 대체할 선수가 없습니다. 생산직에도 남자들이 별로 없어서 말입니다,”
이 과장의 말에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생산직 팀에도 한 명을 더 빼서 아홉 명으로 맞추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과장의 말에 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안 됩니다. 그 빠진 한 명의 기분을 생각해 보세요. 단합도 하고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체육 대회입니다. 갑자기 제외된 그 직원 한 명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응원석에 물어서 한 명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네.”
이 과장이 응원석으로 찾아가 둘러보았지만 몇 명 남아 있는 남자 직원들은 나이도 지긋한데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 과장이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기가 잠시 지연되면 선수들이나 응원하는 직원이나 지치게 마련이라 이 과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리 봐도 뛸 사람이 없는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이 과장의 뒤에서 그를 불렀다.
“이 과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모자라는 한 명 제가 채우겠습니다.”
유진의 목소리에 이 과장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족구 같은 경기면 몰라도 축구 경기를 여자가 선뜻 하겠다고 나서자 이 과장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서유진 씨, 지금 진심입니까?”
“네.”
이 과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남자들이 해도 힘든 경기인데 여자가 한다고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기 앉은 나이 많은 직원에게 부탁하는 게 낫겠습니다.”
돌아서는 이 과장에게 유진은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제가 여자라서 그런 건가요?”
귀찮다는 듯 이 과장이 유진을 쳐다보는데 현우가 한 손에 공을 들고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 과장님, 무슨 일이죠?”
황당한 얼굴을 하고서 이 과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 서유진 씨가 시합을 뛰겠다고 하잖습니까?”
“서유진 씨가 말입니까?”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현우는 유진을 보았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그녀가 축구 경기를 하겠다니……. 현우가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는데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당찬 그녀의 표정에 현우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