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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런 편견은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기이니만큼 기본적인 실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번에는 유진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유진이 그렇게 말하자 현우가 손에 들고 있던 축구공을 땅바닥에 힘차게 튀겼다. 땅바닥에 튀겨진 공이 정확하게 유진의 무릎 정도의 높이로 향했다.
그러자 유진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올려 무릎으로 공을 받았다. 무릎으로 공을 툭툭 건드린 뒤에는 발등으로 공을 차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과장과 현우의 표정이 곧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공 다루는 실력에 현우는 감탄을 자아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아버지께 배웠어요. 그리고 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축구선수였어요.”
“그렇군요. 좋아요. 합격입니다. 서유진 씨, 우리 팀으로 오게 된 걸 환영합니다. 포지션은 어디가 편하죠?”
“공격수요.”
공격수라는 그녀의 말에 현우는 방긋 미소를 짓더니 유진의 주먹 쥔 손을 들어 보이고서 말했다.
“파이팅!”
유진은 탈의실로 들어가 이 과장이 건네 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남자들 몸에 맞춰 나온 거라 유니폼이 유진에게 헐렁했다. 건네준 축구화는 가장 작은 사이즈였지만 그것 역시 유진이 신자 발이 축구화 안에서 남아돌았다.
“이것 밖에 준비한 게 없는데……. 공장에 들어갔다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고. 그냥 이거 신고하세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뒤를 따라 운동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공을 잡아본다는 생각에 유진은 가슴이 설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것, 그리고 동료들과의 호흡, 온몸의 기를 발끝에 집중시켜 만들어내는 환상의 골, 그 뒤에 찾아오는 환희와 기쁨, 성취감. 그 느낌은 축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느낄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걸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유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진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유진의 예상대로 스탠드에 앉은 직원들이 일시에 웅성거렸다.
“디자인 팀에 서유진 아냐? 선수가 그렇게 없어? 저런 여자를 선수로 쓰고.”
“저건 뭐야? 생산 팀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저 여자, 공이나 제대로 차려나? 차라리 저 예쁜 얼굴에 응원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냥 사람이 부족해서 채워 넣었겠지.”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진은 당당하게 운동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자 곧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둥근 축구공이 쉴 새 없이 운동장 안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러던 중에 상대 진영 중앙에서 천천히 압박해오는 공을 공격수인 현우가 따 내고는 골 에어리어로 향하는 유진에게 패스를 했다.
패스를 받은 유진이 힘차게 오른 발로 감아 골대를 향해 슛을 했지만 아쉽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관중석에서는 일제히 놀란 눈을 하고서 아쉬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유진 역시 아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세와 각도는 정확했지만 타이밍이 너무 늦은데다 발목에 너무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직 몸이 덜 풀렸나?’
아쉬워하는 유진의 옆으로 현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쉽지만 무척 좋았어요. 정말 웬만한 남자보다 훨씬 낫군요. 다음에는 꼭 성공시켜야 합니다.”
“네.”
유진이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공을 잡은 상대팀 선수의 앞으로 달려들어 밀착 마크를 했다.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지 유진은 금방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런 가쁜 호흡과 땀, 입에서 나는 단내가 유진은 너무도 그리웠다.
경기는 계속 일진일퇴를 하며 치열한 공방전으로 치달았다. 생각지도 못한 유진의 활약에 상대팀 선수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모두가 체력이 고갈되어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중에 현우가 볼을 잡고 상대방 진영으로 단독 돌파를 시도했다. 현우가 뛰는 반대 방향으로 유진 역시 빠르게 뛰어갔다.
현우가 상대 진영 골에어리어 안에 도착하자 어느새 수비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상황에서 공격수는 먹이를 쫓는 치타처럼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먹이가 도망치는 방향을 미리 파악하고 한 번에 달려들어 먹이를 제압하는 치타의 민첩한 판단. 상대 수비수를 피해 슛을 때릴 것이냐, 아니면 더 좋은 공간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할 것이냐.
현우는 잠시 공을 멈춘 채 예리한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 상대방 진영을 향해 뛰어가는 유진이 보였다. 현우는 달려오는 그녀의 속도에 알맞게 그녀의 발 앞에 패스를 찔러 넣었다.
현우가 패스를 해 준 공을 받은 유진은 곧바로 스텝을 가다듬고는 오른 발로 침착하게 슛을 때렸다. 두 번의 실수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유진의 발에 맞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상대방 골대의 구석에 정확히 꽂혔다.
골키퍼가 옆으로 넘어지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유진이 찬 공으로 인해 그물이 심하게 출렁거린 뒤였다. 그물의 출렁거림과 동시에 관중석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오고 유진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희열이었다. 이 한 번의 희열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공을 돌리며 얼마나 많이 뛰어다녔던가.
“골이에요. 유진 씨, 정말 멋졌어요.”
가장 가까이서 골을 지켜 본 현우가 유진에게로 달려왔다. 현우는 기쁜 마음에 그녀를 안으려 두 팔을 내밀고 달려오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잔뜩 벌린 두 팔을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골을 넣으면 그 기쁨에 동료와 끌어안는 것이 보통인데 그녀가 여자인지라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현우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정말 멋졌어요.”
유진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아니에요. 사장님 패스가 너무 기가 막혔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그와 기쁨을 함께 나누던 유진은 그와 잡고 있는 손에서 짧지만 강한 파장이 이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손을 떼어내었다. 그 느낌이란 분명 동료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느낌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에게서 아주 강한 남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골을 넣은 기쁨에 마구 벅차오르던 가슴보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유진의 가슴이 더욱 벅차올랐다.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진은 센터 서클 주위를 맴돌았다. 주심이 시계를 쳐다보며 경기가 종료하기까지 3분 남았다며 크게 외쳤다. 상대팀의 마지막 공격이 이어지고 공격수가 날린 중거리 슛이 수비수의 발을 맞고 나가는 바람에 코너킥이 주어졌다. 상대편의 마지막 코너킥. 그 코너킥이 어이없이 골대 위로 넘어가는 바람에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났다.
현우와 유진이 속한 팀이 한 골 차로 승리를 거두었다. 현우는 기분 좋게 전체 회식을 제안했다.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에 상관없이 회식을 가질 예정이라 운동장 한쪽에 마련해놓은 천막에 미리 음식과 술을 준비해 놓은 터였다.
백여 명의 직원들이 천막 안에 모여 들어 각자 친한 사람들과 자리에 앉아 모처럼 가지는 회식을 즐겼다.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테이블 위에는 맥주와 소주, 막걸리까지 잔뜩 놓여 있었고 안주로는 돼지고기 수육과 치킨, 김밥과 각종 음료수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유진이 자리에 앉다보니 공교롭게도 그녀의 맞은편에 현우가 앉아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현우에게선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느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을 향해 회식의 취지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하고는 술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우신 상사의 무한한 발전을 위하여!”
현우의 말에 모두가 각자 앞에 놓인 술잔을 높이 들어 잔을 부딪치며 외쳤다.
“위하여!”
유진이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자마자 현우가 맥주병을 들어 유진의 앞에 내밀었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네.”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우가 유진의 잔에 맥주를 채웠다.
“오늘 정말 대단했습니다. 전 여태까지 유진 씨처럼 축구를 잘 하는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현우의 칭찬에 유진의 볼이 붉게 타올랐다. 현우의 칭찬이 끝나자 이번에는 동료들의 칭찬이 끊이지가 않았다. 평소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같이 일을 하는 직원들 모두 놀란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가 공을 차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유진은 그저 그런 평범한 여사원이었다. 하지만 곧 유진이 회식 자리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올랐다. 그녀의 여리고 청초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축구 실력에 평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던 남자 직원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진의 단짝인 수연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직장 내에서 유진과 가장 친한 동료라고 자부하는 수연이건만 정작 그녀가 그런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너 정말 대단하다. 도대체 축구는 언제 배웠던 거야?”
“아빠에게 배웠어.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때 축구부도 했었고.”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남자들보다 네가 훨씬 잘하는 것 같던데.”
유진이 수연을 보며 방긋 미소를 짓고는 생각 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는데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을 보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그와는 이미 오고가며 자주 부딪혔었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저 오너와 직원의 관계였었는데 그와 같이 경기를 뛰며 호흡을 맞추고 나자 그 감정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현우가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예전 그녀의 아버지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진은 현우를 볼 때마다 살며시 뛰어 오르는 심장 박동 때문에 현우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맥주 한 잔을 들이켠 후에 현우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고 넌지시 유진을 쳐다보았다. 어지간한 남자보다 축구를 잘하는 여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우는 유진에게 호감이 갔다.
가끔 그녀 옆을 지나칠 때마다 꽤 괜찮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녀에게선 향기로운 향수 냄새가 아니라 땀 냄새가 났다. 그 땀 냄새가 현우는 싫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한 그녀의 태도에 현우는 존경심까지 일 정도였다. 그리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호기심. 유진의 눈동자와 잠시 마주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현우가 질문을 던졌다.
“어떤 계기로 축구를 시작하신 거죠?”
계기? 그 질문 하나에 유진은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답을 하려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도대체 오늘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
“죄, 죄송해요. 다음에 말씀 드릴게요.”
유진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는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수연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리고는 자리를 빠져 나왔다. 치밀어 오르는 술기운과 함께 지난 과거가 아픔으로 다가와 유진의 가슴을 긁었다. 축구를 사랑했던 아빠,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 그 충격으로 유진 또한 축구를 포기했었다.
‘다시는 축구할 생각도 하지 마.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잘 알잖아. 남자도 아니고 여자야! 엄마가 살아있는 한 절대 축구는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울먹이며 말하는 엄마의 말을 유진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는 축구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
유진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에 유진은 눈물을 닦아내었다.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시작했던 축구. 축구는 어린 유진에게 또 다른 희망이고 꿈이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던 꿈. 하지만 그 꿈은 현실에 부딪치며 날아가 버렸다. 열악한 여자 축구 인프라에서 느낀 한계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엄마의 극심한 반대.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 어릴 적 꿈을 잃고 살았던 세월이 너무 아쉬워서, 다시 또 그 꿈을 꾸지 못할 겉 같아 안타까워서, 꿈을 잃어버린 아빠의 모습이 너무 가여워서, 그 고통을 엄마 역시 같이 짊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서글퍼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릴 적 꿈. 추억과 맞물린 그 어릴 적 꿈을 유진은 잠시 회상했다. 모든 것을 잃은 듯 체념한 아빠의 모습이 유진의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