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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하니(19)(개정판)
1화
프롤로그
“사장님, 한국에서 소포가 한 통 왔는데 제가 뜯어서 확인해 볼까요?”
“제니퍼, 나한테 온 소포야. 언제부터 남의 소포에 관심을 가진 거지?”
딱딱한 경서의 말투에 제니퍼가 주눅 든 표정으로 소포를 경서에게 내밀었다.
“아뇨. 전 그냥 누구한테 왔는지 궁금해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제니퍼의 옆으로 경서가 다가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포 꾸러미를 받아 들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수한테서 왔나?”
“지수 씨라면 사장님 모니터 바탕화면에 보이는 그분 맞으시죠? 상당히 미인이시던데.”
“그건 또 언제 훔쳐본 거야?”
여전히 딱딱하고 건조한 말투에 제니퍼가 입술을 내밀었다.
매력적인 젊은 동양인 사장의 비서로 일한 지 벌써 이 년. 자상한 곳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늘 권위적인데다 강압적이고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가끔씩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소가 젊은 제니퍼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품었던 연정을 지수란 아름다운 동양인 아가씨에 의해 잘라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짝사랑에 제니퍼가 아쉬운 한숨만 내쉬었다.
“훔쳐본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 보였다고요.”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냐는 듯 불만 섞인 제니퍼의 대꾸에도 불구하고 경서는 별 미동도 없이 한국에서 보내온 소포를 뜯었다. 곱게 포장된 소포 꾸러미를 펼치자마자 경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경서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제니퍼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니퍼, 데니스 좀 불러줘.”
“네, 사장님.”
갑자기 차갑게 굳어버린 경서의 표정에 제니퍼가 급하게 데니스를 호출했다. 문을 열고 의아한 표정으로 들어온 데니스에게 경서가 물었다.
“내가 한 달 동안 회사를 비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한 번도 보지 못한 경서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질문에 데니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한 달 정도 회사를 비우겠다는 뜻이야. 내가 없어도 자네가 알아서 잘할 수 있겠냐고.”
“물론입니다, 사장님.”
회사 창업을 한 지 벌써 삼 년째, 그동안 휴가다운 휴가도 없이 일만 하던 경서였다. 그러니 데니스 입장에선 그도 좀 쉴 때가 되었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의 열정은 높이 샀지만 그의 건강이 늘 걱정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그냥 다 잊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그래.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것 같아서 말이야. 아마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거야. 제니퍼, 나한테 잡힌 개인 스케줄 모두 한 달 뒤로 미뤄줘. 그리고 중요한 안건은 메일을 보내. 내가 전화하면 승낙이고 전화하지 않으면 거절이야.”
이틀 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경서는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 지수가 보낸 소포, 그 안에 든 물건들과 엽서 한 장에 아직도 경서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뛰었다.
기대감에 열어본 소포 상자 안에는 지수의 부고를 알리는 엽서 한 장과 함께 그녀가 항상 손가락에 끼고 있던 사랑의 증표인 반지가 들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죽음이라니. 소포를 받자마자 지수의 지인에게 확인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그 현실 앞에 경서는 무릎을 꿇었다.
‘설마 아니겠지. 누군가의 실수로 내게 잘못 보낸 거겠지.’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소매로 훔치며 경서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파란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1. 당신 도움이 필요해
“감사합니다. 하니치킨입니다. 네? 지금 저희 배달 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게다가 거긴 너무 멀어서 배달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하니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꽃이 피었다.
“네? 열 마리요? 당연 연장 근무죠. 네, 당연하죠. 열 마리면 한 시간 거리도 배달 갑니다. 네, 해안도로 옆에 아파트 505호요. 네, 지금 바로 후다닥 달려가겠습니다.”
집들이를 하는데 안주가 모자란단다. 전화를 끊자마자 하니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먼저 기름 솥에 불을 지피고 냉장고에서 미리 튀김가루에 재워 숙성시켜 둔 닭을 꺼낸다. 그런 다음 기름이 끓으면 닭을 집어넣고 바삭하게 튀기면 끝이다. 한 번에 통닭 열 마리면 지금까지 하니가 가게를 물려받은 이후 한꺼번에 가장 많은 양의 주문이었다.
이 자식은 누나가 이렇게 바쁜데 뭐 하고 있는 거야?
“야, 엄희철!”
당연 혼자서 하는 게 무리였던지라 하니는 가게 뒤편에 딸려 있는 방에서 자고 있는 동생 희철을 흔들어 깨웠다.
“야, 빨리 일어나! 한 번에 열 마리 주문 들어왔어.”
“장난치지 마!”
엉덩이에 꽂히는 하니의 매운 손매에 희철이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니?”
“아니. 그런데 누나. 나 술 마시고 들어온 거 알잖아. 오늘 하루만 봐줘라.”
“안 돼! 한 번에 열 마리라서 혼자 하려니까 힘들어. 너, 이번 달 용돈 받기 싫은 건 아니겠지?”
“아, 정말! 알았어. 치사하다. 할게! 대신 술 마셨으니까 배달은 시키지 마!”
희철에게 최고의 협박은 용돈 동결이다. 하니는 방긋 웃었다. 귀여운 자식!
열 마리의 닭을 몽땅 튀겨내고 그중 절반에 소스를 묻혀내고 양배추 샐러드를 담고 절인 무와 오이피클까지 담아내면 끝이다.
하니가 머리에 헬멧을 눌러쓰고 팔꿈치와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하는 동안 희철이 치킨을 실었다.
“수고했어, 철! 이 누나는 돈 벌러 갈 테니까 가게 잘 보고 있어. 이번 달 용돈 0.5% 인상이다.”
“아, 뭐야! 그건 티도 안 나잖아!”
“티끌 모아 태산이다, 이놈아!”
“누나, 조심해!”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하니가 안타까운지 희철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하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헬멧과 보호 장비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갈 때 필수 조건이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하니는 헬멧과 보호 장비 착용을 절대 빼먹지 않았다. 배달을 하는 도중에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 몸이 성한 곳이 없던 아빠 생각에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니가 양손에 각 다섯 개씩 치킨을 들고 505호의 벨을 누르자 어디서 많이 본 칙칙한 얼굴 하나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가시나, 맞네. 혹시나 하고 시켜봤더마는. 내다, 승규.”
그의 얼굴을 보자 하니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꿈에 볼까 두려운 하승규! 하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승규! 네가 여기 웬일이냐?”
“웬일은. 니가 통닭집한다 해서 내가 시켰다 아이가. 오늘 이사 왔다. 그래서 우리 동생들하고 술 한잔한다. 가시나 니는 내가 안 반갑나? 니는 뭐시 더 이뻐졌네.”
다시 이놈 면상을 보게 될 줄이야.
“승규야, 나 지금 바빠서 빨리 가봐야 돼!”
“알았다, 친구야! 가시나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하는 거 다 안다. 자, 돈이나 받아라! 다음에 같이 술 한잔하자! 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 아니다.’
하니가 억지로 방긋 미소를 짓고는 승규가 건네준 돈을 세어보지도 않은 채 치킨 열 마리를 승규에게 건네고 빛의 속도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하승규!
승규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듣도 보도 못한 시골 깡촌에서 전학 온 학생이다.
학생인지 건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외모를 소유하고 싸움이 있는 장소엔 꼭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런 존재. 고3이라기보다는 체육 교생의 포스가 더 강했던 승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하니가 좋다며 승규가 몇 개월 동안 하니 뒤를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그녀는 아직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다시 이놈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는 건가?
505호에 무사히 배달을 마친 하니는 해안도로 커브 길 한쪽에 세워둔 오토바이까지 털레털레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말이 치킨 열 마리지 양손에 들고 보니 팔이 빠질 정도로 무거워 배달을 마치고 나자 팔에 기운이 다 빠졌다.
오토바이 앞에서 하니는 치킨 값으로 받은 현금을 세어보았다.
“그래도 막판에 좀 짭짤한데.”
초여름이라 아직은 바다의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흘린 땀을 식히기에 알맞을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얼마 만에 바라보는 밤바다인지.
바람에 잔잔하게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를 바라보며 하니는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바다를 보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쉬움과 후회는 늘 지난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때 수영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 사고만 없었다면……. 지금쯤 전국체전에서 메달 하나는 따지 않았을까?’
지우고 싶은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다시 하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니야! 나 좀 살려줘!”
“수빈아!”
수빈이 하니를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를 하니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불어 닥친 비바람과 솟구쳐 오른 높은 파도에 수빈이 바다 한가운데 멀리로 떠밀려 가버렸다.
하니는 망설였다. 늘 우승을 놓치지 않는 수빈. 만약 수빈이 없다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하니는 얼른 지워 버렸다. 지금 수빈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남해의 밤바다에는 세찬 비바람과 파도만 존재할 뿐, 주위엔 수빈과 하니 외엔 아무도 없었다.
지금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빈이 익사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이 하니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출렁이는 파도 앞에 하니는 무기력하고 나약했다. 자신보다 더 수영을 잘하는 수빈마저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에 하니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하니야, 하니야!”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하니는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하니가 그녀에게로 다가가려는 순간, 집채만 한 파도가 하니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하니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니가 눈을 떴을 땐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있었다. 비도 그치고 바람도 잔잔해졌지만 세상은 여전히 캄캄했다.
하니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 떨어진 곳에 수빈이 쓰러져 있었다. 하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살았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곧 한기가 느껴졌다.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자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하니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하니의 귓가에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하니와 수빈이 구급차에 옮겨졌다. 그때 하니는 똑똑히 들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
“이미 숨졌습니다.”
“쯧쯧, 조금만 빨리 응급처치를 했어도 살았을 텐데.”
그렇게 수빈은 파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게 칠 년 전 여름의 일이었다.
그리고 곧 여름이 찾아온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상처.
‘그때 빨리 응급처치만 했었어도…….’
그 기억에서 하니는 자유롭지 못했다.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죄책감이었다. 트라우마였다.
과거로의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동차 한 대가 하니의 시야로 들어왔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급커브가 있는 이곳 해안도로에서 속도를 내는 차량은 없다.
그런데 지금 하니의 앞으로 다가오는 자동차는 전혀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동차는 마치 죽음을 각오하고 달리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하니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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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한국에서 소포가 한 통 왔는데 제가 뜯어서 확인해 볼까요?”
“제니퍼, 나한테 온 소포야. 언제부터 남의 소포에 관심을 가진 거지?”
딱딱한 경서의 말투에 제니퍼가 주눅 든 표정으로 소포를 경서에게 내밀었다.
“아뇨. 전 그냥 누구한테 왔는지 궁금해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제니퍼의 옆으로 경서가 다가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포 꾸러미를 받아 들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수한테서 왔나?”
“지수 씨라면 사장님 모니터 바탕화면에 보이는 그분 맞으시죠? 상당히 미인이시던데.”
“그건 또 언제 훔쳐본 거야?”
여전히 딱딱하고 건조한 말투에 제니퍼가 입술을 내밀었다.
매력적인 젊은 동양인 사장의 비서로 일한 지 벌써 이 년. 자상한 곳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늘 권위적인데다 강압적이고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가끔씩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소가 젊은 제니퍼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품었던 연정을 지수란 아름다운 동양인 아가씨에 의해 잘라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짝사랑에 제니퍼가 아쉬운 한숨만 내쉬었다.
“훔쳐본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 보였다고요.”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냐는 듯 불만 섞인 제니퍼의 대꾸에도 불구하고 경서는 별 미동도 없이 한국에서 보내온 소포를 뜯었다. 곱게 포장된 소포 꾸러미를 펼치자마자 경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경서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제니퍼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니퍼, 데니스 좀 불러줘.”
“네, 사장님.”
갑자기 차갑게 굳어버린 경서의 표정에 제니퍼가 급하게 데니스를 호출했다. 문을 열고 의아한 표정으로 들어온 데니스에게 경서가 물었다.
“내가 한 달 동안 회사를 비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한 번도 보지 못한 경서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질문에 데니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한 달 정도 회사를 비우겠다는 뜻이야. 내가 없어도 자네가 알아서 잘할 수 있겠냐고.”
“물론입니다, 사장님.”
회사 창업을 한 지 벌써 삼 년째, 그동안 휴가다운 휴가도 없이 일만 하던 경서였다. 그러니 데니스 입장에선 그도 좀 쉴 때가 되었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의 열정은 높이 샀지만 그의 건강이 늘 걱정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그냥 다 잊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그래.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것 같아서 말이야. 아마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거야. 제니퍼, 나한테 잡힌 개인 스케줄 모두 한 달 뒤로 미뤄줘. 그리고 중요한 안건은 메일을 보내. 내가 전화하면 승낙이고 전화하지 않으면 거절이야.”
이틀 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경서는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 지수가 보낸 소포, 그 안에 든 물건들과 엽서 한 장에 아직도 경서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뛰었다.
기대감에 열어본 소포 상자 안에는 지수의 부고를 알리는 엽서 한 장과 함께 그녀가 항상 손가락에 끼고 있던 사랑의 증표인 반지가 들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죽음이라니. 소포를 받자마자 지수의 지인에게 확인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그 현실 앞에 경서는 무릎을 꿇었다.
‘설마 아니겠지. 누군가의 실수로 내게 잘못 보낸 거겠지.’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소매로 훔치며 경서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파란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1. 당신 도움이 필요해
“감사합니다. 하니치킨입니다. 네? 지금 저희 배달 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게다가 거긴 너무 멀어서 배달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하니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꽃이 피었다.
“네? 열 마리요? 당연 연장 근무죠. 네, 당연하죠. 열 마리면 한 시간 거리도 배달 갑니다. 네, 해안도로 옆에 아파트 505호요. 네, 지금 바로 후다닥 달려가겠습니다.”
집들이를 하는데 안주가 모자란단다. 전화를 끊자마자 하니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먼저 기름 솥에 불을 지피고 냉장고에서 미리 튀김가루에 재워 숙성시켜 둔 닭을 꺼낸다. 그런 다음 기름이 끓으면 닭을 집어넣고 바삭하게 튀기면 끝이다. 한 번에 통닭 열 마리면 지금까지 하니가 가게를 물려받은 이후 한꺼번에 가장 많은 양의 주문이었다.
이 자식은 누나가 이렇게 바쁜데 뭐 하고 있는 거야?
“야, 엄희철!”
당연 혼자서 하는 게 무리였던지라 하니는 가게 뒤편에 딸려 있는 방에서 자고 있는 동생 희철을 흔들어 깨웠다.
“야, 빨리 일어나! 한 번에 열 마리 주문 들어왔어.”
“장난치지 마!”
엉덩이에 꽂히는 하니의 매운 손매에 희철이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니?”
“아니. 그런데 누나. 나 술 마시고 들어온 거 알잖아. 오늘 하루만 봐줘라.”
“안 돼! 한 번에 열 마리라서 혼자 하려니까 힘들어. 너, 이번 달 용돈 받기 싫은 건 아니겠지?”
“아, 정말! 알았어. 치사하다. 할게! 대신 술 마셨으니까 배달은 시키지 마!”
희철에게 최고의 협박은 용돈 동결이다. 하니는 방긋 웃었다. 귀여운 자식!
열 마리의 닭을 몽땅 튀겨내고 그중 절반에 소스를 묻혀내고 양배추 샐러드를 담고 절인 무와 오이피클까지 담아내면 끝이다.
하니가 머리에 헬멧을 눌러쓰고 팔꿈치와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하는 동안 희철이 치킨을 실었다.
“수고했어, 철! 이 누나는 돈 벌러 갈 테니까 가게 잘 보고 있어. 이번 달 용돈 0.5% 인상이다.”
“아, 뭐야! 그건 티도 안 나잖아!”
“티끌 모아 태산이다, 이놈아!”
“누나, 조심해!”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하니가 안타까운지 희철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하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헬멧과 보호 장비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갈 때 필수 조건이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하니는 헬멧과 보호 장비 착용을 절대 빼먹지 않았다. 배달을 하는 도중에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 몸이 성한 곳이 없던 아빠 생각에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니가 양손에 각 다섯 개씩 치킨을 들고 505호의 벨을 누르자 어디서 많이 본 칙칙한 얼굴 하나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가시나, 맞네. 혹시나 하고 시켜봤더마는. 내다, 승규.”
그의 얼굴을 보자 하니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꿈에 볼까 두려운 하승규! 하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승규! 네가 여기 웬일이냐?”
“웬일은. 니가 통닭집한다 해서 내가 시켰다 아이가. 오늘 이사 왔다. 그래서 우리 동생들하고 술 한잔한다. 가시나 니는 내가 안 반갑나? 니는 뭐시 더 이뻐졌네.”
다시 이놈 면상을 보게 될 줄이야.
“승규야, 나 지금 바빠서 빨리 가봐야 돼!”
“알았다, 친구야! 가시나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하는 거 다 안다. 자, 돈이나 받아라! 다음에 같이 술 한잔하자! 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 아니다.’
하니가 억지로 방긋 미소를 짓고는 승규가 건네준 돈을 세어보지도 않은 채 치킨 열 마리를 승규에게 건네고 빛의 속도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하승규!
승규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듣도 보도 못한 시골 깡촌에서 전학 온 학생이다.
학생인지 건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외모를 소유하고 싸움이 있는 장소엔 꼭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런 존재. 고3이라기보다는 체육 교생의 포스가 더 강했던 승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하니가 좋다며 승규가 몇 개월 동안 하니 뒤를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그녀는 아직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다시 이놈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는 건가?
505호에 무사히 배달을 마친 하니는 해안도로 커브 길 한쪽에 세워둔 오토바이까지 털레털레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말이 치킨 열 마리지 양손에 들고 보니 팔이 빠질 정도로 무거워 배달을 마치고 나자 팔에 기운이 다 빠졌다.
오토바이 앞에서 하니는 치킨 값으로 받은 현금을 세어보았다.
“그래도 막판에 좀 짭짤한데.”
초여름이라 아직은 바다의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흘린 땀을 식히기에 알맞을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얼마 만에 바라보는 밤바다인지.
바람에 잔잔하게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를 바라보며 하니는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바다를 보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쉬움과 후회는 늘 지난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때 수영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 사고만 없었다면……. 지금쯤 전국체전에서 메달 하나는 따지 않았을까?’
지우고 싶은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다시 하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니야! 나 좀 살려줘!”
“수빈아!”
수빈이 하니를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를 하니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불어 닥친 비바람과 솟구쳐 오른 높은 파도에 수빈이 바다 한가운데 멀리로 떠밀려 가버렸다.
하니는 망설였다. 늘 우승을 놓치지 않는 수빈. 만약 수빈이 없다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하니는 얼른 지워 버렸다. 지금 수빈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남해의 밤바다에는 세찬 비바람과 파도만 존재할 뿐, 주위엔 수빈과 하니 외엔 아무도 없었다.
지금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빈이 익사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이 하니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출렁이는 파도 앞에 하니는 무기력하고 나약했다. 자신보다 더 수영을 잘하는 수빈마저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에 하니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하니야, 하니야!”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하니는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하니가 그녀에게로 다가가려는 순간, 집채만 한 파도가 하니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하니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니가 눈을 떴을 땐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있었다. 비도 그치고 바람도 잔잔해졌지만 세상은 여전히 캄캄했다.
하니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 떨어진 곳에 수빈이 쓰러져 있었다. 하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살았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곧 한기가 느껴졌다.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자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하니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하니의 귓가에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하니와 수빈이 구급차에 옮겨졌다. 그때 하니는 똑똑히 들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
“이미 숨졌습니다.”
“쯧쯧, 조금만 빨리 응급처치를 했어도 살았을 텐데.”
그렇게 수빈은 파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게 칠 년 전 여름의 일이었다.
그리고 곧 여름이 찾아온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상처.
‘그때 빨리 응급처치만 했었어도…….’
그 기억에서 하니는 자유롭지 못했다.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죄책감이었다. 트라우마였다.
과거로의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동차 한 대가 하니의 시야로 들어왔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급커브가 있는 이곳 해안도로에서 속도를 내는 차량은 없다.
그런데 지금 하니의 앞으로 다가오는 자동차는 전혀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동차는 마치 죽음을 각오하고 달리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하니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