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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인삼과 대추, 은행, 감초가 들어간 오골계 삼계탕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우혁은 그녀의 회사 근처에 있는 커피숍을 찾아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연예인이 된 뒤로는 외출이 쉽지 않았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극성팬들은 모자를 쓰고 있어도 금방 알아보고는 우혁을 향해 달려와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 일쑤였다. 사인을 해주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잠시라도 쉴 틈을 주지 않으니 그게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부러 젊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은 피해서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물론 인터넷에는 우혁이 사인을 해주지 않아 싸가지 없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그 소문 역시 우혁 자신이 아니라 우혁을 닮은 그녀가 원인이지만.
지금 우혁이 앉은 커피숍 역시 젊은 사람들의 취향과는 먼 조용한 커피숍이었다. 귓전으로 흘러들어오는 오래된 팝송을 들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우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스모키와 앨튼 존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멜로디에 졸음이 쏟아진 것이다.
“형님, 주무십니까?”
종수의 커다란 목청에 우혁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우혁은 곧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 자신을 꼭 빼닮은 젊은 여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것이다. 놀라기는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여자가 조심스레 맞은편 의자에 앉자 우혁 역시 자리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닮긴 했지만 정면에서 여자를 보고 있으면 그녀는 누가 봐도 여자였고 하는 행동 역시 여성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묘한 신비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많이 닮았군.”
우혁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감탄을 하듯 그렇게 내뱉었다. 우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하은은 불편한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당신하고 닮아서?”
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여 우혁은 종수를 향해 턱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곰, 잠시만 나가 있어.”
“네. 형님.”
종수를 밖으로 보내고 난 뒤, 우혁은 다시 한 번 여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이며 코, 입술, 얼굴의 선까지 그녀는 우혁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치고는 상당히 큰 키인데다 하필이면 헤어스타일까지 우혁의 짧은 머리와 비슷했다.
그녀는 옷차림 또한 보이시한 매니시룩 차림이었다. 헐렁한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그리고 짙은 남색 카디건, 뒷모습만 본다면 그녀는 영락없이 남자로 보일 게 분명했다. 조금 마른 체형의 남자.
그녀와 자신이 비슷하지 않은 것이라곤, 우혁보다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그녀의 여성적인 행동과 목소리, 조금 작은 키, 마른 체형 정도였다. 우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일부러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는 겁니까? 여자 치고는 너무 짧은 것 같은데.”
하은은 반박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쪽이 내 헤어스타일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이유라도 있나요?”
“날 사칭하기 위해서 따라했을 수도 있겠지.”
사칭? 하은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원하지 않은 만남이라 그런지 두 사람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하은의 입장에선 그랬다. 천하의 톱스타가 자신을 찾는다는데도 하은은 썩 내키지가 않은 것이다. 물론 하은이 연예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연예인이란 게 하은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니……. 인터넷에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우혁이 자신을 찾는다는 생각에 하은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미용실에 가서 짧게 잘라달라고 했어요.”
“남우혁과 똑같이 해달라고?”
하은은 어이가 없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자른 머리에요. 당신이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뉴질랜드 현지인 헤어디자이너가 알아볼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우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은을 다시 힐끔 쳐다보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에 짧은 머리. 그녀가 화장을 하고 다른 여자들처럼 머리가 길었다면 그나마 우혁이라고 착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혁을 빼닮은 여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은은 자신이 왜 이 자리까지 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인기 연예인인 남우혁과 닮았다는 이유로? 덩치가 곰 같은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꼭 한 번만 만나달라고 사정사정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우혁을 찾은 자리였다.
우혁의 첫 인상은 하은이 매체에서 익히 보아왔던 그대로였다. 조각 같은 외모에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 그리고 싸가지 없는 이미지까지 똑같았다. 하은은 우혁을 가까이서 본 것이 처음이라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은 역시 자신이 남우혁을 닮았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아니, 남우혁인 줄 알고 자신에게 다가와 사인을 해달라는 여고생들이 있으니 그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은 역시 우혁이 얼마나 자신과 닮았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긴 했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놀랍게도 하은 자신과 많이 닮아있었다. 정말 눈썰미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헷갈릴 정도였다.
우혁이 자신과 닮은 건 닮은 거고, 어쨌든 하은은 이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그의 거친 말투하며, 마치 하은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우혁이 대하니 하은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혁이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만 듣고 난 뒤, 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으로 본론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만 말씀해 주시죠.”
건조한 하은의 목소리에 우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개 우혁과 마주 앉은 여자들은 우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거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통인데, 이 여자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혁이 자신을 불러낸 사실에 귀찮아하는 그런 표정이다. 우혁은 그녀의 눈동자를 넌지시 응시했다. 깊은 흑갈색의 눈동자마저 자신과 닮아 있었다. 우혁은 마치 거울을 보며 이야기 하듯 하은에게 말했다.
“우선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죠.”
하은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별로 생각 없습니다. 본론만 말씀해 주세요.”
“좋습니다. 혹시 요즘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는 보십니까?”
하은은 관심 없다는 듯 눈만 멀뚱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혁은 미리 준비해 둔 기사의 사진들을 그녀의 앞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번 보시죠! 분명한 사실은 그 사진 속 주인공은 절대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본인이 찍혔으니 본인이 잘 알겠군요.”
하은은 그가 던지듯 내민 사진을 쳐다보았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함께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하은이 이미 알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찍혀 있는 사진을 보고 남우혁이라고 기사가 나오는 바람에 어이없어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중엔 처음 보는 사진들도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의 옷차림을 보니 하은은 자신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 장소며, 누구와 같이 있었는지도 어렴풋이 떠오를 정도였다. 여자 친구와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은 남우혁의 연인이라는 식으로 기사가 나갔고, 남동생인 하진의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는 사진에는 남우혁이 게이라는 기사가 씌어 있었다. 그게 재미있어 하은은 혼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하은은 곧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사진은 분명 제가 맞네요. 그래서 저 때문에 엉뚱한 기사가 나와서 그쪽이 피해를 봤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우혁은 이제야 그녀가 상황을 제대로 인식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고 계시네. 당신 때문에 내 이미지에 커다란 피해를 입고 있으니, 당신이 좀 해명해 줘야겠어.”
하은은 어이가 없어 입술을 실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더러 기자회견이라도 하란 말이에요? 아니면 기자들 찾아다니며 해명 기사라도 내주길 바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고.”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을 닮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난 언론에 내가 노출되는 거 별로 관심 없어요.”
우혁은 피식 웃으며 응수했다.
“이미 언론에 다 나왔는데.”
“그거랑은 다른 거죠. 미안하지만 난 연예인도 유명인도 아니거든요. 대중들이 날 알아보는 거 싫습니다.”
우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과 외모뿐 아니라 고집까지 그대로 닮아 있었다.
‘이 여자의 고집을 어떻게 꺾어야 한단 말인가.’
우혁은 이번에는 다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득시키듯 그녀에게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정 싫다면 몇 가지만 부탁합시다. 모자 같은 거 쓰고 얼굴을 좀 가리는 건 어때요?”
“모자 쓰는 거 싫어합니다.”
“그럼, 화장이라도 좀 하든지.”
“화장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단호한 그녀의 음성에 우혁은 화가 치밀었지만 억지로 화를 삼키며 말했다.
“그럼 여성적인 옷을 입는 건 어때요? 보아하니 몸매도 괜찮은 것 같은데, 스커트라도 입고 다니시죠.”
“남의 옷 입는 취향까지 그쪽이 간섭할 필요는 없잖아요.”
휴우. 우혁은 이 고집불통 여자 앞에서 한숨만 내쉬었다. 우혁은 많이 양보를 해준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가발이라도 씁시다.”
“모자 쓰는 것도 답답한데 가발을 쓰라고요? 그렇게는 못합니다.”
결국 우혁은 참지 못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당신 때문에 정작 피해를 보는 쪽은 난데. 이미지로 먹고 사는 게 연예인인데 지금 당신 때문에 내 이미지가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은은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화가 치솟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의 이런 행동이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난 지금까지 내가 살던 대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쪽이 편하자고 제게 불편을 감수하라는 건 좀 말이 안 된다고 보는데요.”
우혁의 입에서 다시 우울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우혁은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그쪽한테 부탁하겠습니다. 제발 나하고 헷갈리지 않게 하고 다녀주세요.”
하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생긴 게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그와 헷갈리지 않게 다니란 말인가.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마저 하은은 거울을 쳐다보는 듯 헷갈리기만 한데. 이번에는 하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닮았다는 이유로 불편한 건 하은도 마찬가지였다. 이왕이면 참고 넘어가려 했지만 하은 역시 그를 만난 김에 한 소리 해야 될 것만 같아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불편한 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거리 거닐다 사인해달라는 여고생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어요. 어딜 가도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짜증나거든요. 누구 닮았다는 소리 듣는 것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요. 내 입장에선 당신이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좀 얼굴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우혁은 입을 헤, 벌린 채로 쳐다만 보았다.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하나. 우혁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러니까 헷갈리지 않게 여성스럽게 하고 다니면 될 것 아닙니까?”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죠?”
“그러니까 부탁하는 겁니다.”
하은은 흘기듯 그를 쳐다보았다. 부탁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치곤 다분히 협박성이 짙은 그의 말투가 하은은 귀에 거슬렸다. 그가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어도 대충 알았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건 고사하고 그의 표정은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탁하는 사람이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고 부탁합니까?”
휴우, 다시 이어지는 우혁의 한숨소리.
우혁은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하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집 센 아가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서로 닮은 것도 인연인데, 우리 조금씩 양보하고 삽시다. 누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시원하게 대답만 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리자면 제가 기자를 불러 해명기사를 낼까 합니다. 저하고 닮은 여자가 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하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제 인적사항은 공개하지 마세요. 뭐, 그쪽에서 아는 것도 없겠지만. 그리고 머리카락은 조만간에 기를 테니까 앞으로는 오해를 살 일도 없을 거예요.”
“좋습니다.”
우혁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자신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예쁜데다 눈꺼풀이 훨씬 더 길었다. 눈 밑 애교 살도 자신보다 훨씬 두터워 전체적으로 차가운 우혁 자신보다는 훨씬 인상이 부드러웠다. 얼핏 보면 똑같이 생겼지만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확실히 차이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녀가 우혁보다는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다. 남자들처럼 짧은 헤어스타일이 이 정도로 아름다운 거라면 그녀가 머리를 기른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지을 때는 우혁의 심장이 멎을 정도였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녀가 웃은 건 딱 두 번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어 웃는 웃음. 그 미소마저 그녀는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