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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올해로 천년하고도 백번의 해를 더 넘긴 환운국의 주민들은 약탈의 설움에 놓인 적 없고, 침략의 고통을 겪은 적도 없다. 그저 자애로운 왕들의 비호 아래 늘 평화로운 세상을 누리는 것이 백성들의 일이었다.
하나 이제는 그것도 모두 옛말이다.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강을 가득 채우던 비님이 그 모습을 감춘 것이다. 15년이란 시간동안 전대미문의 기근이 계속 되었다. 오죽하면 선대왕이 서거 직전까지 태룡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민심은 갈수록 흐트러져만 가고, 이웃을 해하는 건 기본이요, 절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또한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고 걷는 걸음마다 백성의 시체가 늘어섰다. 이 모든 것은 하늘님의 뜻이라며, 백성들은 환운국도 곧 운명이 다하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왕궁의 움직임은 달랐다. 그들은 이 가뭄의 원인과 해결 방법이 왕족에게 있으리란 것을 알았고, 그것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것은 왕도, 왕자도 아닌 나라의 단 하나뿐인 공주, 월령이었다.
“막내야, 우리 아가. 정말로 그곳으로 갈 작정인 게냐.”
평소에는 잠행을 나가는 문으로 쓰이기에 사람의 발길이 뜸한 별궁의 쪽문 앞. 그곳에서 충효왕과 월령이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껏 궁 안에서 입던 비단옷이며 신발은 벗어 두고, 무명옷에 봇짐을 둘러멘 딸의 모습이 안쓰러워 충효왕은 자신의 마른 손으로 월령의 볼을 쓰다듬는다. 깊은 시름에 시달린 탓에 움푹 파인 아바마마의 눈가가 애달파 월령은 더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시어요. 아바마마. 이제껏 선조들이 외면했던 언약을 제가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비님이 다시 내려만 준다면 아까울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던 왕은 한숨을 내쉬고는 딸의 무명옷을 바라보았다.
“시집오는 공주의 모습이 이래서야 태룡께서도 싫어하실까 걱정되는구나.”
환운국은 대대로 용이 보우하는 나라이다. 때문에 이제껏 전래되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 중에는 용감무쌍하고 정의로운 용에 관한 내용이 많다. 다만, 그 중에도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태초의 왕비와 태룡에 관한 이야기다.
강의 신의 딸이 환운국의 왕비로 오고 얼마 안 있어, 태룡이 찾아와 그녀를 며느리로 맞고자 한다. 하지만 이미 지아비가 있는 왕비는 태룡의 제안을 거절하며 자식 중 딸이 태어나면 며느리로 보내마 약속하고, 일 년이란 세월이 흘러 왕비는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러자 다시 찾아온 태룡을 향해 왕비가 말하길 ‘이 아이는 나라를 이어받을 튼튼한 남자 아이입니다. 후일에 갖게 될 딸을 며느리로 맞으심이 어떠신지요.’라고 했다.
왕비의 제안에 그러마하고 대답한 태룡이 떠나고, 다시 몇 해가 흘러 왕비는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이번에는 딸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다시 찾아온 태룡에게 아쉽게도 이번에도 남자를 출산하였다 속이고 후일을 기약한다. 그렇게 몇 번이나 왕비의 꾀로 약속이 어그러지지만 태룡은 한 톨의 의심도 없이 왕비를 믿는다는 이야기다.
언뜻 태룡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듯한 이 얘기가 실제 역사임을 아는 이는 왕족뿐이다. 월령이 말한 대로 선조들은 이 언약을 쭉 지키지 않았다. 선대 태룡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리고 300년 전부터 태룡이 왕궁을 찾는 일은 없었다.
월령은 나라의 수호신인 태룡이 노여워하여 비님을 내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약속을 지켜 그의 신부로 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지금은 산을 올라야 하니 이 옷이 편합니다. 흙먼지에 괜히 비단을 상하게 하면 더 보기가 사나울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어요. 태룡님께 말씀드려 훗날 어엿한 혼례식을 올리자 할 것입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가뭄이 해갈되면 온 백성들의 축하 속에 네 혼례를…….”
딸의 대답이 과히 대견해, 목이 멘 충효왕은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바마마의 약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듯, 월령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왕의 품에 안기어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해가 더 기울기 전에 가야만 합니다. 부디 소녀의 걱정은 접으시고 존체 무탈히 계시어요, 아바마마.”
“그래, 월령아. 네 말 잘 들어 무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마. 그러니 너도 궁 걱정일랑 말고 조심히 다녀오너라. 꼭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충효왕의 품에서 떨어진 월령은 몸을 숙여 큰절을 한 번 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쪽문을 나섰다.
궁 밖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메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발끝에는 물기 잃은 풀이 버석거렸다. 이대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면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 나올 것이나, 월령은 북쪽으로 올라가 천문산(天門山)으로 향할 것이다.
그 산 꼭대기에는 상서로운 금빛 구름이 띠처럼 둘러져 있는데, 나라의 이름이 환운국(晥雲國)인 것 또한 천문산의 저 구름 덕분이다. 태룡이 사는 저곳에서 비가 시작되고, 끝도 난다. 이를 모르는 이는 환운국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비님을 내리고자 한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야 할 것이다. 태룡을 만나기 위해서는 해가 지기 전에 구름 너머 정상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 ⁂ ⁂
방금 전까지 주황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먹물을 푼 듯 까만 밤하늘로 둔갑하였다. 지금쯤이면 정상에 도달했어야 정상이건만,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 탓인지 앞도, 뒤도 쉽사리 구분하기 힘들다. 그저 하늘에 뜬 달빛을 길잡이 삼아 지친 걸음을 계속해 옮길 뿐.
“제법 온 것 같은데, 아직도 먼 건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습한 기운 덕분에 월령은 자신이 천문산의 구름 속에 갇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정상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제자리만 뱅뱅 도는 것 같아 미칠 노릇이었다.
새조차 울지 않는 적막 속에서 봇짐 속 수통의 물이 찰랑이는 소리만 들린다. 이제까지 길잡이 삼던 달빛마저 야속하게 느껴져 잠시 걸음을 멈춘 월령은 눈앞의 큰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봇짐을 풀어 하나 남은 다식을 베어 물었다. 이 순간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외롭고 서글프며 무서웠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괜한 폐가 될 거 같아 궁녀며 호위를 무른 것이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된다. 말벗이라도 있다면 지금의 막막함이 덜할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바스락’하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무언가에 의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소리란 것을 듣지 못했던 산속에서 드디어 자신 이외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기쁜 마음에 당장 몸을 일으킨 월령은 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옥색의 한푸(汉服)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자기의 신장보다 한참이나 큰 대문을 지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여인이 들어간 대문 너머 보이는 것은 웬만한 양반집보다 훨씬 큰 청기와 집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이 지내던 40칸짜리의 궁보다도 큰 것 같았다. 그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이 산속 한복판에 지어져 있다니……. 상상도 못 했던 광경에 월령은 홀린 듯이 방금 전 여인이 지난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오니 바깥 풍경만큼이나 넓은 내부에 기가 눌린 월령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방들도 컴컴하기만 했다.
“계십니까?”
용기 내어 좀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간 월령은 혹여 귀신에게 홀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방금 여인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아니 계십니까?”
넓은 마당 어디에도 좀처럼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대답을 기다리던 월령은 안채에서부터 행랑채까지 서서히 불이 밝혀져 오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흡사 도깨비불이 몰려드는 듯하여 등골이 서늘해졌다.
“초대받지 않은 주제에 목소리만 크구나.”
예상과는 달리 대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옥색 한푸를 입은 여인이 아닌, 옷고름을 풀어헤친 사내였다. 하얀 적삼을 입은 남자는 탄탄한 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채라 월령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며 저 사내는 무어란 말인가. 자신이 산길을 헤매다 귀신이나 도깨비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저것들을 물리고 나면 아마 이곳은 산속의 공터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월령은 크게 소리쳤다.
“사, 사람이면 머물고 귀신이면 물러가거라!”
“날 보고 지금 귀신이라 했느냐? 이런 황당할 데가 있나. 아닌 밤중에 나타난 네가 오히려 귀신같단 생각은 아니 드느냐?”
당황한 월령이 말을 고르는 사이, 남자는 잽싸게 대청에서 내려와 월령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신기(神氣)에 버티는 것을 보니 너도 귀신은 아니구나.”
“이게, 대체 무슨……!”
놀란 월령이 손을 뿌리치려 하자 남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러고선 다른 한 손으로 월령의 턱을 잡고 끌어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 요망한 입을 놀려 다시 귀신 취급이나 해 보지 않으련?”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는 맑고 고요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빛깔을 띠기도 했다. 어떡하면 이렇듯 신비스런 빛을 낼 수 있을까. 흡사 금을 박은 듯도 하고, 마노를 박은 듯도 하다. 무언인가 모를 보석을 발견하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생김새는 또 어떠한가. 간간이 비추는 촛불마저 그 반짝임을 가릴 줄 모른다. 짙고 바른 눈썹과 쌍꺼풀진 날카로운 눈매, 거기에 높은 콧대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은 하얀 피부와 어울려 요매(妖魅)함을 더한다. 입술을 통해 들려오는 낮은 음색은 월령의 혼마저 홀릴 듯했다.
“어찌……. 사람이 이런 눈을 지니고 있겠습니까.”
한 풀 기가 꺾인 월령이 답했다. 그러자 좀 전보다는 다정한 음색으로 남자가 묻는다.
“네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과 귀신만 존재하느냐.”
“사람과 동물이 존재하지요.”
“정말로 그것만이 존재한단 말이냐? 환운국에는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을 터인데, 네가 잊은 듯하구나.”
“더 높은 존재라 하면…….”
월령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 단어를 떠올렸지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아 얼른 지워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다시 일었다, 지워지기를 수차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얼굴은 그 숨결이 입술에 닿을 듯 가까이 와 있었다.
“네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마치…… 품어 달라 조르는 향이다.”
태는 인간 여자와의 접촉이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유혹적인 향은 처음이었다. 어느 신녀들도 이렇듯 좋은 향이 나지 않았는데……. 마치 이제껏 잃고 있던 한 부분을 찾은 듯, 끝없이 갈망하게 될 것 같은 향이었다.
“서, 설마……. 진정으로 태룡님이란 말씀이십니까?”
너무도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월령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태룡이라면 그의 신비한 눈동자도, 산에 지어진 이 기이한 집도 납득이 갈 듯했지만, 낯선 사내 품에 안겨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라 부끄러웠다.
“나의 존재는 진정이고 참이다. 하나, 이곳에 들어온 너는 무엇이냐. 사람이냐? 아님 신녀이냐?”
여전히 월령의 턱을 잡은 태의 손이,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끌어온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서 더욱 깊이 향을 음미했다. 흠칫 놀라 몸을 떨던 월령이 한 발짝 물러서려 하지만 태의 힘이 그보다 강했다.
“저는 환운국의 공주인 월령이라 합니다. 그러니 신녀가 아닌 사람이지요.”
겨우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눈을 내리 깔아 태의 시선을 피하는 것뿐. 월령은 떨리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 답했다.
“사람이면 이 저택에 들어올 수가 없는데 신기한 일이구나.”
목덜미에 느껴지는 태의 숨결에 뒷머리가 곤두서고 소름이 돋을 듯했지만 싫어서가 아니었다. 어딘가 달콤하고 간지러운 것이 이제껏 느끼지 못한 감각이라 낯설어 그런 탓일 거다. 하지만 그를 알 리 없는 월령은 그저 태가 어서 떨어지기만을 바랐다.
“몇 백 년이나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더니 이제야 보낸 용의 신부라 더욱 특별하다 이건가.”
목덜미를 따라 귓가로, 볼로 입술을 옮겨 가며 읊조리는 태의 음성이 너무도 아찔하여 월령은 그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잘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기 바빴다.
“이제 그만 떨……으읍!”
더 이상은 힘이 드니 이제 그만 자신에게서 떨어지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말을 잇기도 전에 태의 붉은 입술이 월령의 입술을 덮었다. 놀란 비명이 속절없이 삼켜지고, 월령의 여린 입안을 태의 두툼한 혀가 범해 온다. 부드러운 감촉이 오돌오돌한 입천장을 핥아 지나고, 한껏 겁을 먹은 월령의 혀를 태가 훑어 올리며 농락했다. 부드럽게 강 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태의 숨결과 촉촉한 혀가 월령을 옮아 매었다.
생전 처음으로 해 보는 입맞춤에 정신이 쏙 빠진 월령은 숨 쉬는 법도 잊고서 얼굴이 붉어진 채 남자의 가슴을 온 힘으로 밀어내 보지만 이번에도 태의 힘이 월등히 강했다. 태는 몇 번이고 월령의 혀를 툭툭 건드리고, 쓸고, 훑으며 그녀의 혼을 쏙 빼 놓은 후에야 품에서 놓아주었다.
1.
올해로 천년하고도 백번의 해를 더 넘긴 환운국의 주민들은 약탈의 설움에 놓인 적 없고, 침략의 고통을 겪은 적도 없다. 그저 자애로운 왕들의 비호 아래 늘 평화로운 세상을 누리는 것이 백성들의 일이었다.
하나 이제는 그것도 모두 옛말이다.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강을 가득 채우던 비님이 그 모습을 감춘 것이다. 15년이란 시간동안 전대미문의 기근이 계속 되었다. 오죽하면 선대왕이 서거 직전까지 태룡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민심은 갈수록 흐트러져만 가고, 이웃을 해하는 건 기본이요, 절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또한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고 걷는 걸음마다 백성의 시체가 늘어섰다. 이 모든 것은 하늘님의 뜻이라며, 백성들은 환운국도 곧 운명이 다하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왕궁의 움직임은 달랐다. 그들은 이 가뭄의 원인과 해결 방법이 왕족에게 있으리란 것을 알았고, 그것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것은 왕도, 왕자도 아닌 나라의 단 하나뿐인 공주, 월령이었다.
“막내야, 우리 아가. 정말로 그곳으로 갈 작정인 게냐.”
평소에는 잠행을 나가는 문으로 쓰이기에 사람의 발길이 뜸한 별궁의 쪽문 앞. 그곳에서 충효왕과 월령이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껏 궁 안에서 입던 비단옷이며 신발은 벗어 두고, 무명옷에 봇짐을 둘러멘 딸의 모습이 안쓰러워 충효왕은 자신의 마른 손으로 월령의 볼을 쓰다듬는다. 깊은 시름에 시달린 탓에 움푹 파인 아바마마의 눈가가 애달파 월령은 더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시어요. 아바마마. 이제껏 선조들이 외면했던 언약을 제가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비님이 다시 내려만 준다면 아까울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던 왕은 한숨을 내쉬고는 딸의 무명옷을 바라보았다.
“시집오는 공주의 모습이 이래서야 태룡께서도 싫어하실까 걱정되는구나.”
환운국은 대대로 용이 보우하는 나라이다. 때문에 이제껏 전래되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 중에는 용감무쌍하고 정의로운 용에 관한 내용이 많다. 다만, 그 중에도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태초의 왕비와 태룡에 관한 이야기다.
강의 신의 딸이 환운국의 왕비로 오고 얼마 안 있어, 태룡이 찾아와 그녀를 며느리로 맞고자 한다. 하지만 이미 지아비가 있는 왕비는 태룡의 제안을 거절하며 자식 중 딸이 태어나면 며느리로 보내마 약속하고, 일 년이란 세월이 흘러 왕비는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러자 다시 찾아온 태룡을 향해 왕비가 말하길 ‘이 아이는 나라를 이어받을 튼튼한 남자 아이입니다. 후일에 갖게 될 딸을 며느리로 맞으심이 어떠신지요.’라고 했다.
왕비의 제안에 그러마하고 대답한 태룡이 떠나고, 다시 몇 해가 흘러 왕비는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이번에는 딸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다시 찾아온 태룡에게 아쉽게도 이번에도 남자를 출산하였다 속이고 후일을 기약한다. 그렇게 몇 번이나 왕비의 꾀로 약속이 어그러지지만 태룡은 한 톨의 의심도 없이 왕비를 믿는다는 이야기다.
언뜻 태룡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듯한 이 얘기가 실제 역사임을 아는 이는 왕족뿐이다. 월령이 말한 대로 선조들은 이 언약을 쭉 지키지 않았다. 선대 태룡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리고 300년 전부터 태룡이 왕궁을 찾는 일은 없었다.
월령은 나라의 수호신인 태룡이 노여워하여 비님을 내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약속을 지켜 그의 신부로 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지금은 산을 올라야 하니 이 옷이 편합니다. 흙먼지에 괜히 비단을 상하게 하면 더 보기가 사나울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어요. 태룡님께 말씀드려 훗날 어엿한 혼례식을 올리자 할 것입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가뭄이 해갈되면 온 백성들의 축하 속에 네 혼례를…….”
딸의 대답이 과히 대견해, 목이 멘 충효왕은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바마마의 약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듯, 월령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왕의 품에 안기어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해가 더 기울기 전에 가야만 합니다. 부디 소녀의 걱정은 접으시고 존체 무탈히 계시어요, 아바마마.”
“그래, 월령아. 네 말 잘 들어 무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마. 그러니 너도 궁 걱정일랑 말고 조심히 다녀오너라. 꼭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충효왕의 품에서 떨어진 월령은 몸을 숙여 큰절을 한 번 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쪽문을 나섰다.
궁 밖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메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발끝에는 물기 잃은 풀이 버석거렸다. 이대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면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 나올 것이나, 월령은 북쪽으로 올라가 천문산(天門山)으로 향할 것이다.
그 산 꼭대기에는 상서로운 금빛 구름이 띠처럼 둘러져 있는데, 나라의 이름이 환운국(晥雲國)인 것 또한 천문산의 저 구름 덕분이다. 태룡이 사는 저곳에서 비가 시작되고, 끝도 난다. 이를 모르는 이는 환운국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비님을 내리고자 한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야 할 것이다. 태룡을 만나기 위해서는 해가 지기 전에 구름 너머 정상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 ⁂ ⁂
방금 전까지 주황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먹물을 푼 듯 까만 밤하늘로 둔갑하였다. 지금쯤이면 정상에 도달했어야 정상이건만,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 탓인지 앞도, 뒤도 쉽사리 구분하기 힘들다. 그저 하늘에 뜬 달빛을 길잡이 삼아 지친 걸음을 계속해 옮길 뿐.
“제법 온 것 같은데, 아직도 먼 건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습한 기운 덕분에 월령은 자신이 천문산의 구름 속에 갇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정상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제자리만 뱅뱅 도는 것 같아 미칠 노릇이었다.
새조차 울지 않는 적막 속에서 봇짐 속 수통의 물이 찰랑이는 소리만 들린다. 이제까지 길잡이 삼던 달빛마저 야속하게 느껴져 잠시 걸음을 멈춘 월령은 눈앞의 큰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봇짐을 풀어 하나 남은 다식을 베어 물었다. 이 순간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외롭고 서글프며 무서웠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괜한 폐가 될 거 같아 궁녀며 호위를 무른 것이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된다. 말벗이라도 있다면 지금의 막막함이 덜할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바스락’하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무언가에 의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소리란 것을 듣지 못했던 산속에서 드디어 자신 이외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기쁜 마음에 당장 몸을 일으킨 월령은 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옥색의 한푸(汉服)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자기의 신장보다 한참이나 큰 대문을 지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여인이 들어간 대문 너머 보이는 것은 웬만한 양반집보다 훨씬 큰 청기와 집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이 지내던 40칸짜리의 궁보다도 큰 것 같았다. 그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이 산속 한복판에 지어져 있다니……. 상상도 못 했던 광경에 월령은 홀린 듯이 방금 전 여인이 지난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오니 바깥 풍경만큼이나 넓은 내부에 기가 눌린 월령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방들도 컴컴하기만 했다.
“계십니까?”
용기 내어 좀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간 월령은 혹여 귀신에게 홀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방금 여인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아니 계십니까?”
넓은 마당 어디에도 좀처럼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대답을 기다리던 월령은 안채에서부터 행랑채까지 서서히 불이 밝혀져 오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흡사 도깨비불이 몰려드는 듯하여 등골이 서늘해졌다.
“초대받지 않은 주제에 목소리만 크구나.”
예상과는 달리 대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옥색 한푸를 입은 여인이 아닌, 옷고름을 풀어헤친 사내였다. 하얀 적삼을 입은 남자는 탄탄한 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채라 월령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며 저 사내는 무어란 말인가. 자신이 산길을 헤매다 귀신이나 도깨비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저것들을 물리고 나면 아마 이곳은 산속의 공터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월령은 크게 소리쳤다.
“사, 사람이면 머물고 귀신이면 물러가거라!”
“날 보고 지금 귀신이라 했느냐? 이런 황당할 데가 있나. 아닌 밤중에 나타난 네가 오히려 귀신같단 생각은 아니 드느냐?”
당황한 월령이 말을 고르는 사이, 남자는 잽싸게 대청에서 내려와 월령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신기(神氣)에 버티는 것을 보니 너도 귀신은 아니구나.”
“이게, 대체 무슨……!”
놀란 월령이 손을 뿌리치려 하자 남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러고선 다른 한 손으로 월령의 턱을 잡고 끌어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 요망한 입을 놀려 다시 귀신 취급이나 해 보지 않으련?”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는 맑고 고요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빛깔을 띠기도 했다. 어떡하면 이렇듯 신비스런 빛을 낼 수 있을까. 흡사 금을 박은 듯도 하고, 마노를 박은 듯도 하다. 무언인가 모를 보석을 발견하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생김새는 또 어떠한가. 간간이 비추는 촛불마저 그 반짝임을 가릴 줄 모른다. 짙고 바른 눈썹과 쌍꺼풀진 날카로운 눈매, 거기에 높은 콧대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은 하얀 피부와 어울려 요매(妖魅)함을 더한다. 입술을 통해 들려오는 낮은 음색은 월령의 혼마저 홀릴 듯했다.
“어찌……. 사람이 이런 눈을 지니고 있겠습니까.”
한 풀 기가 꺾인 월령이 답했다. 그러자 좀 전보다는 다정한 음색으로 남자가 묻는다.
“네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과 귀신만 존재하느냐.”
“사람과 동물이 존재하지요.”
“정말로 그것만이 존재한단 말이냐? 환운국에는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을 터인데, 네가 잊은 듯하구나.”
“더 높은 존재라 하면…….”
월령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 단어를 떠올렸지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아 얼른 지워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다시 일었다, 지워지기를 수차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얼굴은 그 숨결이 입술에 닿을 듯 가까이 와 있었다.
“네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마치…… 품어 달라 조르는 향이다.”
태는 인간 여자와의 접촉이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유혹적인 향은 처음이었다. 어느 신녀들도 이렇듯 좋은 향이 나지 않았는데……. 마치 이제껏 잃고 있던 한 부분을 찾은 듯, 끝없이 갈망하게 될 것 같은 향이었다.
“서, 설마……. 진정으로 태룡님이란 말씀이십니까?”
너무도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월령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태룡이라면 그의 신비한 눈동자도, 산에 지어진 이 기이한 집도 납득이 갈 듯했지만, 낯선 사내 품에 안겨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라 부끄러웠다.
“나의 존재는 진정이고 참이다. 하나, 이곳에 들어온 너는 무엇이냐. 사람이냐? 아님 신녀이냐?”
여전히 월령의 턱을 잡은 태의 손이,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끌어온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서 더욱 깊이 향을 음미했다. 흠칫 놀라 몸을 떨던 월령이 한 발짝 물러서려 하지만 태의 힘이 그보다 강했다.
“저는 환운국의 공주인 월령이라 합니다. 그러니 신녀가 아닌 사람이지요.”
겨우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눈을 내리 깔아 태의 시선을 피하는 것뿐. 월령은 떨리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 답했다.
“사람이면 이 저택에 들어올 수가 없는데 신기한 일이구나.”
목덜미에 느껴지는 태의 숨결에 뒷머리가 곤두서고 소름이 돋을 듯했지만 싫어서가 아니었다. 어딘가 달콤하고 간지러운 것이 이제껏 느끼지 못한 감각이라 낯설어 그런 탓일 거다. 하지만 그를 알 리 없는 월령은 그저 태가 어서 떨어지기만을 바랐다.
“몇 백 년이나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더니 이제야 보낸 용의 신부라 더욱 특별하다 이건가.”
목덜미를 따라 귓가로, 볼로 입술을 옮겨 가며 읊조리는 태의 음성이 너무도 아찔하여 월령은 그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잘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기 바빴다.
“이제 그만 떨……으읍!”
더 이상은 힘이 드니 이제 그만 자신에게서 떨어지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말을 잇기도 전에 태의 붉은 입술이 월령의 입술을 덮었다. 놀란 비명이 속절없이 삼켜지고, 월령의 여린 입안을 태의 두툼한 혀가 범해 온다. 부드러운 감촉이 오돌오돌한 입천장을 핥아 지나고, 한껏 겁을 먹은 월령의 혀를 태가 훑어 올리며 농락했다. 부드럽게 강 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태의 숨결과 촉촉한 혀가 월령을 옮아 매었다.
생전 처음으로 해 보는 입맞춤에 정신이 쏙 빠진 월령은 숨 쉬는 법도 잊고서 얼굴이 붉어진 채 남자의 가슴을 온 힘으로 밀어내 보지만 이번에도 태의 힘이 월등히 강했다. 태는 몇 번이고 월령의 혀를 툭툭 건드리고, 쓸고, 훑으며 그녀의 혼을 쏙 빼 놓은 후에야 품에서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