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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하아…….”
너무도 달콤한 한숨을 내쉬며 태가 멀어지자 월령은 가빴던 숨을 몰아쉰다.
“흐음, 역시나. 미약하나마 신기를 지녔구나.”
“아무리…… 후우……. 아무리 신부가 될 몸이긴 하나, 이건 너무도 갑작스런…….”
“갑작스러움을 넘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월령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여인의 음색은 옥색 한푸만큼이나 곱고 단아했다. 하지만 대청에 서서 월령을 바라보는 사화의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조를 듯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걸 느낀 월령은 괜히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태는 그런 공기엔 연연치 않는지, 가볍게 웃으며 사화를 바라보았다.
“내가 선객이 있음을 잠시 잊었구나.”
“하찮은 인간 계집의 맛을 보기 위해 이 사화를 기다리게 하신 것이옵니까?”
“이왕 엿들은 거, 방금 내 얘기도 잘 듣지 그랬느냐. 이 여인에게 미약하나마 신기가 느껴진다 하였다. 그러니 아주 하찮지만은 않은 게지.”
“그럼 오늘 밤은 저 계집에게서 신기를 듬뿍 받으시지요.”
뿔이 났는지 사화가 뾰로통하게 대답하자 태는 짐짓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귀선에게 네가 돌아갈 채비를 도우라 이를까?”
“태는 이 사화를 놀리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으시옵니까!”
볼멘 목소리로 타박하는 사화를 향해 태가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뚱해 있는 사화를 달래 주지도 않고 그냥 휙 지나쳐 안채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마당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월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화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 내야 했다.
“너 따위 미물이 감히 태에게 입 맞추었다 생각하면 열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여도 이 분이 풀리지 않을게다.”
“제가 원하여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태룡님의 뜻이었고, 의지였습니다.”
“닥치거라. 경솔한 계집! 그나마 내가 참는 것은 신성한 장소에서 피를 볼 수 없어서지, 내 힘이 미력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건 억울하다. 월령은 움츠러들었던 몸을 바로 펴며 사화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대가 누구인진 모르겠으나, 전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태룡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 모습이 남루해 보인다고는 하나 적어도 이 나라의 공주입니다. 그리고 장차 태룡의 신부가 될 몸이니 험한 말씀은 삼가시지요.”
“하! 신부? 감히 네가?”
기가 막힌 사화가 코웃음을 치고서 당장에라도 대청을 뛰어 내려와 월령의 목 줄기를 꺾어 버리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였다. 조용하기만 하던 집 안 가득 익숙한 음성이 울려 퍼지며 그런 사화를 나무랐다.
“언제까지 불온한 기운으로 이곳의 공기를 갉아먹을 생각이냐. 어서 들어오기나 하여라.”
태의 목소리에 마지못해 손을 내린 사화는 분하다는 듯 얼마동안 월령을 더 노려보고다가 몸을 돌려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후우. 하룻밤 사이에 별일을 다 겪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월령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선 겨우 걸음을 옮겨 돌계단을 올랐다. 신을 벗고 대청에 올라서니 고생에 지친 발끝이 검게 변해 있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긴 산길을 올랐는지 알려 주는 듯해 월령은 괜히 서글퍼졌다.
“기죽지 말자. 그래도 신부가 될 터인데 살뜰히 보살펴 주시겠지.”
마음을 다잡은 월령이 더러워진 버선을 벗으려 몸을 웅크리자 인기척 하나가 다가와 있음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누구인가 바라보니 푸근한 인상의 여인이 소매를 걷고서 그녀 곁에 다가와 있었다.
“누구신지…….”
“태님의 시중을 드는 귀선이라 합니다. 공주님께서 그 먼 길을 직접 올라오셨다면서요. 목욕물을 받아 두었으니 일단 피곤부터 푸시지요.”
“태님이라 하시면……. 태룡님을 칭하시는 것이지요? 그분께서 그리하라 이르셨습니까?”
“아이고,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태님이 직접 명하신 것이니 염려 마시고 절 따라 오시지요.”
만면에 다정한 미소를 띤 귀선은 대청을 따라 이어지는 넓은 마루를 앞서 걸어갔다. 월령은 버선 벗기를 포기하고 그 뒤를 따라 걸으며 하나둘 지나치는 장지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빛은 환히 비추는 데 어느 곳도 사람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아 참으로 기묘하고 쓸쓸한 집이란 느낌이 들었다.
“집이 쓸데없이 넓지요?”
그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귀선이 월령을 향해 물었다.
“태님께서는 안채에 머무르시는 듯하던데, 사랑채며 별당채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나요?”
“지금 운원당의 주인은 오롯이 태님뿐이라 조금 쓸쓸하지요. 용이란 존재가 워낙 반려에게 지고지순하답니다. 반드시 한 명의 지아비와 아내를 두지요. 아이도 세습을 위해 한 명만 낳는지라 식구가 늘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집이 이렇듯 넓은 것은 백성들의 믿음과 존경의 의미랍니다. 천백 년 동안이나 많은 이들이 태룡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양하던 것이 모이고 모여 이리 큰 집을 일구게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운만 띄운 채 말을 잇지 않는 월령에게 의아함을 느낀 귀선이 돌아보았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믿음에 답해 주지 않느냐 월령은 묻고 싶었다. 15년 동안 내리지 않는 비 탓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 속에 죽어 갔던가. 그런데도 태룡은 여전히 그 권세를 누리기만 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그 생각만 하면 따지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저 하인에 불과한 귀선에게 풀 얘기는 아닌 듯하여 속으로 삭히는 월령이었다.
“이제 막 데운 물을 담아 두었으니 어서 들어서시지요.”
어느새 욕탕에 당도한 월령이 흙먼지로 뒤덮인 무명옷을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벗으려 하자 옆에 선 귀선이 그것을 도왔다. 저고리를 벗고 치마의 매듭을 풀어 벗어 내자 속치마가 나왔다. 그러고선 단속곳에 바지, 속적삼까지 벗어 내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완연한 알몸이 되어 있으려니 귀선이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퍼 월령의 몸에 뿌려 주었다.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겨우 목간통에 들어간 월령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노곤고곤하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향도 은은한 것이 좋았다.
“난초 삶은 물인지요?”
“예, 향이 좋지요. 피부도 희고 부드러워진다 하니, 목욕물에 난초만 한 것이 없지요.”
가만히 눈을 감고 목간통에 등을 기대고 있으려니 조루(팥, 녹두를 갈아서 만든 가루비누)를 손에 묻힌 귀선이 월령의 어깨며 가슴께를 문질러 주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사화에게 험한 꼴을 당해 몸도 마음도 지쳤던 만큼 이 순간이 참으로 달콤했다.
영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물에 몸을 담근 지 얼마나 되었을까. 살풋이 밀려드는 수마에 몸을 내맡기고 잠을 청하였나 보다. 꿈에서 아바마마와 오라버니와 함께 화채를 먹는 꿈을 꾸었다. 도성은 안팎으로 활기가 넘치고, 모두들 밝게 웃기에 월령도 따라 웃었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님.”
‘아가야’ 하고 다정히 부르는 아바마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쩐 일인지 자신은 마당 한편으로 밀려나 가족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화채 그릇도 어느샌가 해골로 바뀌어져 있었다. 놀란 마음에 그것을 멀리로 던지고 어서 일어나 저들의 곁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증이 밀려들고 조바심이 났다.
“……주님.”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가족들은 자신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랑곳없이 행복한 미소만 짓고 있는 것이다. ‘저만 두고 가지 마시어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몇 번이고 삼키며 월령은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공주님!”
누군가 몸을 흔드는 기운에 퍼뜩 눈을 뜨니, 그곳은 자신이 지내던 궁궐도 아니고, 가족들은 곁에 있지 아니했다. 촛불이 비추는 광경들이 낯설어 눈을 감았다 뜨기를 두어 번. 서서히,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운원당의 욕탕이란 기억이 떠올랐다. 그제야 어깨춤에 느껴지는 타인의 온기가 신경 쓰여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더 계시다간 고뿔드십니다. 어서 나오시어요.”
귀선의 부름에 안도하는 한편, 가족들과 떨어져 있다는 실감이 들어 아쉬움이 진해졌다. 월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간통을 나오자 귀선이 물기 머금은 그녀의 몸을 무명으로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러고선 단속곳에 바지, 그리고 속치마만 입혀 주었다. 상의도 하얀 적삼뿐이다. 저고리도, 치마도 없었다.
“다른 옷은 더 없습니까?”
영문을 몰라 월령이 물었다. 그러자 좀 전과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띤 귀선이 답했다.
“오늘은 초야를 치러야 하니 이것만 입히면 된다는 태님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게 무슨……. 방금 초야라 하셨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를 듣게 되니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귀선이 말한 것만 되물을 뿐.
“예. 저는 그리 들었는데, 공주님께선 모르셨습니까?”
귀선의 물음에 월령은 격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이구, 망측하여라. 태님도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하지만 귀선의 태도는 여전히 별일 아니라는 듯 보였다. 그러고선 넋이 나간 월령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긴 복도를 지나 기어코 안채 앞에 놓아두는 것이다.
“귀선, 이건 정말……. 아니, 말이 안 됩니다. 갑자기 초야라니요.”
“일단 무슨 연유인지 태님과 말씀이라도 나눠 보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정히 큰일이 날 것 같으면 이 귀선을 크게 부르시어요. 당장에라도 구하러 달려들 터이니.”
귀선은 자신만 믿으라는 식으로 큰소리를 땅땅 쳤다. 그러고선 손수 안채 문을 열어 월령을 억지로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월령을 귀선이 막아섰다. 오른쪽으로 가면 같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면 이번에는 왼쪽으로 따라왔다. 문지기의 수비가 이리도 단단하다면 어떤 오랑캐도 침입할 수 없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 이리 끈질기게 구십니까.”
“끈질긴 것은 공주님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말씀드렸지요. 태룡의 사랑은 지고지순하답니다. 그러니 잘 얘기해 보시고 되도록 빨리, 건강한 아기씨를 보시어 이 넓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시어요.”
“잠깐만요. 귀선!”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월령을 귀선은 있는 힘껏 방 안쪽으로 밀어 붙였다. 그러고선 문을 탕 소리 나게 닫았다. 자신이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 큰일이 생기면 부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내가 억지로 너를 잡아먹으려 하는 줄 알겠구나.”
월령의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겨우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옷깃을 풀어 헤친 태가 보료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 아까 전 여인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아 죽일 듯 굴던 여자는 어디로 가고, 방 안에는 태와 월령뿐이다.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문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월령은 애꿎은 사화만 찾았다.
“그녀는 볼일이 끝나 돌려보냈느니라.”
“볼일이라 하시면…….”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 보려 머리 굴리기 바쁜 월령은 괜한 문답을 이끌어 냈다. 그 모습이 마치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의 발버둥 같아 보여 태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짐짓 신경 쓰지 않는 척, 자신의 손 위에 있는 흰 구슬을 내보였다. 그것은 마치 막 채취한 진주와 같이 영롱한 빛을 뿜으며 귀한 자태로 태의 손 위에 안착해 있었다.
“그것은 뭡니까? 진주입니까?”
“가치로 따지자면 진주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이니라.”
그렇게 말한 태는 손에 있던 구슬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니, 진주보다 귀하다는 것을 어찌 저리 아무렇지 않게 삼켜 버린단 말인가. 괜한 안타까움에 월령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혹여 몸이 불편하시어 귀한 약재를 드시는 것인지요.”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존재가 몸 불편할 것이 무엇 있겠느냐. 의심이 든다면 내 몸의 안위를 네가 직접 겪어 보려무나.”
월령의 바람대로 이렇듯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이 밤을 보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태에겐 그럴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는 하염없이 문 앞을 지킬 것 같은 월령의 손을 잡아 이끌고 함께 보료로 향했다.
“태님,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으시어요. 지엄한 법도 아래 남녀가 유별할진데 어찌 이리 서두르십니까. 이것은 어긋나도 크게 어긋난 일입니다.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을진데 어찌 이리 구십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지엄한 존재는 없다. 그러니 너도 법도입네 따지지 말고 순순히 내 말만 따르면 될 일이다.”
월령이 자꾸만 손을 빼려하면 할수록, 태의 힘이 더욱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어쩌지도 못하고 자꾸만 끌려가는 제 힘이 야속했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 어느덧 보료 위에 억지로 앉혀진 월령은 마지막 반항이라도 해 보려 두 손으로 제 몸을 가렸다.
“감히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월령이 이제까지와 달리 강경한 어조로 태를 거부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태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서 같잖다는 듯, 그녀를 밀어 보료 위로 넘어뜨렸다.
“이 모든 것이 네가 감히 내 신부가 되겠다 찾아 온 탓이니라.”
예상치도 못했던 태의 말에 월령이 놀란 눈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 홀대를 받는 이유가 자신이 신부가 되려함이 원인이라니.
“혹여 복수를 하고자 하심이십니까. 그 긴 세월동안 저희 왕조가 태룡과의 약조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월령은 주저하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태에게 물었다. 이것이 피를 이은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인가 싶어 두렵기도 했지만, 더 이상 물러날 길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에 가족과 이별을 하고 험한 산길도 올랐다. 처음으로 사내와 입맞춤을 나누었고, 그 탓에 웬 여인에게 미물 취급도 당하였더랬다. 그 모든 것을 견뎌 냈던 것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아바마마와 여전히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렇다면 전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복수니 벌이니, 네 입에선 재밌는 단어들만 연신 나오는구나.”
태의 눈동자가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의 눈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신기환(神氣丸)을 볼 때에도 약재냐며 제 몸 걱정을 해 주더니, 이번에도 생각지 못한 얘기를 쏟아 내고 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강단 있게 제 의견을 굽힐 줄 모르는 여인의 모습이 귀엽다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