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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지중해


1화


프롤로그



9월 초의 바다는 계절답지 않게 뜨거워보였다. 한 낮의 기온이 그리 높지 않다고 했지만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숨이 막혀왔다. 아니, 어쩌면 이 답답함은 이곳 아테네 항구의 더운 날씨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정은 입술을 앙다물며 드넓은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독기와 분노가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사실 이런 곳은 기분 좋은 여행의 차원에서 들러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정의 마음은 복잡하고 불쾌한 그 어떤 늪 속에 진득하니 빨려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건져내어지느냐 아니냐는 순전히 운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유럽의 항구도시의 정경을 즐길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정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50분. 이제 잠시 후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는 유람선이 이 항구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그 썩어빠진 놈과 드디어 재회를 하게 될 것이다. 갑자기 핸드폰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액정 화면에 이름 석 자가 떴다. 이정으로 하여금, 이 황금 같은 휴가를 망치게 한 주범, 동생 이선이었다.
“어.”
귀에 대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장은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선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테네 항구에는 도착했어?
“당연하지. 경치는 참 좋다 야.”
비꼬듯 대답하니 이선이 짙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를 지난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미안해, 언니.
이선이 또 울먹였다. 지난 일주일 간 이선의 그 울먹거림도 족히 열 번은 된다. 아직 더 분노를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피붙이라 이정의 마음도 차츰 불편해졌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이정이 어떤 마음으로 어린 동생을 키워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이정이 어떤 심정으로 7살이나 어린 동생을 거두어왔는지.
“거긴 아직 새벽일 텐데 뭐 하느라 잠도 안 자고 전화를 했어. 끊고 얼른 자. 다 잘 될 거니까. 이 언니가 서른 살 인생을 그냥 산 게 아니다. 불의에는 불의로 맞설 줄 아는 용기, 그게 이 언니가 가진 전부야. 알지?”
-그 자식이 돈을 안 돌려주면 어떡해, 언니.
“내가 진상 부리는 거 하난 또 잘 하잖아. 걱정 마. 아침 밥 거르지 말고 먹고 학교도 꼭 가. 알았지?”
-응. 언니.
달래듯 어르듯 이정이 몇 가지 당부를 하자 이선이 대답하곤 통화를 끝냈다. 착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쥔 손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이정은 먼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단언하듯 이선에게 말했지만 사실 그 자식으로부터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이번 지중해 행(行)에 들어간 금액까지 합산해서 받아내기 위해 법적인 절차까지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이선이 또 한 번 받게 될 상처가 걱정되기도 했다.
“하아. 이 나쁜 자식을 빨리 만나야 되는데. 주제에 지중해 유람이라니 팔자 한 번 단단히도 늘어지셨군.”
잔뜩 눈을 치켜뜬 채로 바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왼 편에서 매우 커다랗고 웅장해 보이는 유람선 한 대가 유유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정은 눈을 번뜩였다.
어제 그리스 데살로니가(Thessalonica) 항구에서 출발했을 저 유람선에 그 인간이 타고 있다. 동생 이선을 사랑이라는 가면으로 철저하게 기만한 것도 모자라,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의 절반을 뜯어내고 도망친 그 자식이.
조용하고 평화롭던 항구에 경적이 울렸다. 그러자 언제 모여든 건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승선 지점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정은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어깨의 배낭끈을 고쳐 메었다. 다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1>



일주일 전.
그날은 이정에게 아침부터 행운이 가득한 날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규모가 크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호텔 ‘세라비(Ce la vi)’의 객실 3팀의 팀장으로 전격 승진되었고,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호텔 측에서 특별히 그녀에게 열흘이라는 포상휴가까지 내려주었다. 2년제 대학의 호텔 관광학 공부를 마치자마자 몸담았던 곳이라, 그곳에서 받은 상은 이정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사실 그녀의 오랜 꿈은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유치원 교사였던 엄마의 영향이 컸고 막연하게 교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능 시험을 앞두고 당연하다는 듯 교육학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정은 곧 그녀 자신에게 불어 닥칠 어마어마한 고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능 한 달 전, 두 딸을 위해 함께 피자를 사러 나간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응급차로 곧장 병원에 도착했으나 두 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시간 간격으로 나란히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이정은 가장이 되어야 했다.
장례를 치르고 외삼촌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운영하고 계시던 꽃집까지 정리했다. 보험료로 받은 돈과 엄마가 이것저것 부어 놓은 적금을 모두 합쳐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아 있던 빚을 모두 갚았다. 다행히 그 빚이 그다지 금액이 크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두 자매는 그대로 기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이정은 그것을 이선의 미래를 위해 저금을 해두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돈을 벌 수 있는 직종과 대학을 고민한 끝에 전문대학 호텔 관광학과를 선택했고, 이정은 그녀에게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살아왔다. 그 결과물이 오늘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이정은 기쁜 소식을 안고 집으로 퇴근했다.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이지만 마당에는 살구나무와 호두나무가 심긴 정원이 있고, 아버지가 만들어놓으신 아주 작은 연못도 한편에 있다. 이정은 환한 얼굴로 그 연못을 쳐다본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거실에 올라선 이정은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울고 있는 이선을 본 순간, 환하던 미소를 싹 지웠다. 언니의 등장에 고개를 든 이선의 얼굴은 얼마나 울고 있었던지 퉁퉁 부어 있었다. 이정은 가방을 내려놓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선에게 다가갔다.
“문이선! 너 왜 그래?”
“언니야…….”
이정보다 아직 7살이나 어린 이선은 언니를 보자마자 안기며 울먹였다. 대학 졸업반인 이선은 저녁에 학원을 다니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몇 달 전에 그 학원에서 만난 남자와 목하 연애 중이었다. 연애를 하면서 어떻게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냐며 몰아붙여도 봤지만, 연애를 하며 매일매일 보게 된 동생의 환한 얼굴 때문에, 이정은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어? 왜 울고 있어?”
“으흑흑흑.”
“네 남자친구 때문이야?”
이선의 등을 토닥이면서 이정은 습관처럼 그 질문을 했다. 최근 들어 이선에게서 종종 보이는 우울한 표정의 원인은 대부분 남자친구 박재준 때문이었다. 이정과 동갑인 재준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착하고 성실하게 생겼다는 이선의 설명과는 달리, 이정의 눈에 비친 재준은 여자 등쳐먹게 생긴 기생오라비 스타일이었다. 분명히 순진한 이선이 재준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언니?”
“네가 재준이 그 자식이 아니면 울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이선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 재준이 자주 이유 없이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했다. 이선도 헤어지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재준이 첫 남자였고 그녀가 더욱 잘하면 마음이 돌아설 거라 여긴 듯했다.
“빨랑 말해. 이번엔 무슨 일인데? 또 헤어지자고 하디? 걘 아주 버릇되겠다, 응? 사귀는 여자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남자는 걔뿐일 거야.”
“……무슨 일 정도가 아니야.”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조용히 저 할 말을 내뱉은 이선이 이정의 품에서 살며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윽고 협탁 서랍을 열어 통장을 꺼내었다. 그러곤 그것을 펼쳐 이정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정은 뜬금없이 눈앞에 있는 통장을 보게 되었고, 그 잔고의 변화에 이맛살을 잘게 찌푸렸다. 그러곤 다시 눈이 홱 떠진다. 분명히 3천만 원이 든 통장이었는데 지금은 천만 원 뿐이다. 이정은 통장을 냅다 빼앗았다.
“너 이게 뭐야? 응? 이게 뭐냐구!”
전에 없이 이정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통장은 단순히 돈이 든 종이의 개념이 아닌, 부모님의 영혼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왔던 터라, 이정은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말 안 해?”
이정이 무섭게 다그치자, 이선은 그제야 흐느낌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결심한 듯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