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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실은 재준 씨가 얼마 전에 돈이 급하다고 좀 빌려달라는 거야. 난 몇 번이나 돈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안 빌려주면 나랑 헤어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 통장에 손을 대었어.”
그런데 풀어놓은 이야기가 가관이었다. 이정은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서서 울화통에 뒷목을 부여잡았다.
“야! 이 그렇다고 이 돈에 손을 대면 어떡해! 너 이게 어떤 돈인지 알아?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그 사고로 받은 남은 보험료란 말이야! 나중에 너 결혼할 때 들어갈 돈이란 말이야! 이 바보 멍청아!”
“미안해, 언니.”
“그 새끼 어디 있니? 나한테 속일 생각 하지 마. 내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받아낼 거니까.”
“사실은 며칠 전부터 연락이 안 돼. 그러다 어제 메일로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순간적으로 돈 빌려준 것부터 떠올랐어. 그래서 재준 씨 친구들한테 백방으로 알아봤는데……살고 있던 원룸을 빼고 유럽 여행을 갔대.”
“너한테 돈 빌린 놈이 그 후에 헤어지자고 한 것도 모자라서, 뭐? 유럽 여행을 가? 내가 그 자식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었지? 헤어지라고. 네 인생에 조금도 도움 안 될 사람이라고 내가 몇 번이나 그랬잖아. 나이 서른 처먹고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연락해보면 고작 한다는 말이 피씨방이라 하질 않아 클럽이라질 않나. 너 대체 그 새끼 뭘 보고 좋아한 거야? 응?”
“……미안해, 언니.”
이선이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소파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곧 이어 소리를 내며 다시 우는데, 그 작은 어깨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이정은 솟구치려 하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이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용증은 썼어?”
“……아니.”
“그래. 너처럼 물러터진 애가 그런 걸 생각할 리가 없지.”
나직이 혼잣말을 하면서 이정은 머리로 생각을 시작했다. 그 자식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작정하고 숨겠다면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내고 있던 원룸까지 뺐다니 거처는 더욱 오리무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당장 그 자식을 찾을 수가 있을까. 생각을 굴리던 이정은 잠시 후 이선에게 말했다.
“울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할 거야. 우선 그 자식 친구한테 다시 전화해서 좀 더 알아봐. 어떤 일정으로 간 건지. 분명히 네가 빌려준 돈으로 갔을 테니까. 그 자식 꼭 잡아야 해.”
누군가에겐 하찮은 것일지 몰라도 그녀들에겐 소중한 돈이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그 돈은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선은 바닥으로 꺼져가던 정신을 겨우 수습한 후 핸드폰을 들었다. 이정의 지시대로 재준의 친구들에게 모두 전화를 돌려 사정을 설명했고 그들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모았다.
그 결과 재준은 지중해 유람선을 타기 위해 유럽에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의 말로는 다른 여자와 동행했을 거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선에게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이정의 말대로 재준에게서 다시 돈을 돌려받는 것.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왜 하필 재준 같은 남자에게 한 순간에 반했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싸한 것은 외모 뿐, 그녀에게 다정하지도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고 고정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 돈이 떨어지면 아르바이트 한 두 달을 하면서, 월급으로는 모두 술을 마시는 데에 탕진했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며 이정에게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이선은 항상 불안했다.
처음 느껴보았던 사랑이라는 감정. 그 감정을 선사해준 남자를 언니에게 당당하고 솔직하게 자랑하거나 소개할 수 없었다는 것이 무척 힘에 겨웠던 것이다.
“내일 당장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 방법 밖에 없어. 나중에 그 자식한테 비행기 값도 청구할 거야. 휴가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아니야. 언니. 내가 갈게.”
“너한테 맡길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영어가 가능하잖아. 내가 가는 게 맞아.”
아주 어렵게, 이선은 재준의 지중해 유람 일정을 알게 되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찾아낼 수 있을 확률이 희박하니 우리 쪽에서 거기로 날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이정의 말이 납득되었다. 이선은 혹시 몰라 이정에게 재준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주었다. 재준의 통장을 만들 때 대리인의 자격으로 대신 만들어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이정은 그것을 열심히 외웠다.
그날 밤은 무척 길었다. 이정은 짐을 모두 싸놓고 침대에 몸을 뉘이면서 절로 터지는 한숨에 자주 뒤척거렸다. 휴가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 몰랐다. 행복해야 할 날의 마무리가 영 찝찝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곳에서 그 자식을 만난다고 해도 당장 전액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차용증을 쓰고 그것을 공증 받는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우선은 그렇게라도 한 후 그 자식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후우…….”
돌아누운 이정은 화장대 위에 놓인 사진 액자를 보았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이선과 이정. 네 명이 정원의 연못가에 웃으며 서 있다. 행복하고 단란했던 가족의 한 때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울컥해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
유람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 갑판에 올라선 순간 아주 잠시 동안, 이정은 그녀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목적을 잊을 정도로 유람선의 위용에 시선을 빼앗겼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져 있는 흰색 갑판에는 넓은 수영장과 비치 의자 수 십 개가 즐비했고, 야외극장도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을 때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유람선에는 승객을 위한 십 수 개의 고급 레스토랑과 칵테일 바, 그리고 면세점, 당구장, 헬스클럽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밤이면 곳곳에서 파티가 열려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고, 낮에는 각종 이벤트 행사로 유람선 여행의 재미를 북돋운다. 이정은 자신과는 다르게 그런 호화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배에 오른 사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곧 출발 신호가 울리자, 그녀는 정신을 수습한 후 점퍼의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었다.
G 갑판 선실 505호
이선이 재준의 친구 중 한 명에게 울며불며 매달려 알아낸 것이다. 재준은 바로 저 G갑판에 있는 505호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 친구라는 사람이 재준과는 달리 인간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이정은 G갑판부터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친구의 말대로라면 어제 재준은 데살로니가 항구에서 이 유람선을 미리 탔을 것이었다. 그를 찾아 용건을 본 후, 이정은 모레 오후 이탈리아 베네치아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 배에서 내릴 계획이었다. 가능하다면 그 자식의 뒤통수 한 대도 보너스로 휘갈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승객들로 뒤엉킨 복잡한 미로 같은 갑판 복도를 헤매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그러니까 아테네 항에서 30분을 정박한 후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즈음 이정은 한참 만에 G갑판을 찾아내었다. 그곳은 유람선의 뒤 쪽에 있었으며 다른 선실이 있는 갑판의 입구와는 차원부터 달랐다.
분명히 같은 유람선 안인데도 G갑판에 들어서기 위한 복도에는 이중문으로 구분시켜 두었고, 그 앞에는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보초처럼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정은 갑판의 벽에 붙은 숫자들을 쳐다보았다. 505호부터 508호까지 이 복도에 있다. 제대로 찾아 온 것이다.
그녀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선실을 찾느라 상기된 얼굴로 두 명의 덩치를 번갈아 쳐다보니 덩치들도 그녀를 덩달아 쳐다보았다. 하찮고 귀찮은 것을 보는 듯한 그들의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울컥했지만, 이정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중 한 명에게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