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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꽃다발



미스 꽃다발(1화)
프롤로그(1)


“물 좀 줘.”
내일이면 즐거운 주말이라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우려던 현수가 밤늦게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술 더 떠 물까지 달란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씩씩거리며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별거 아닌 일일 거라는 거였다.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물을 내려놓자 단숨에 들이켠 미라가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호흡을 골랐다.
“무슨 일이야?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아냐? 애는 어쩌고 이리로 와?”
“애 자는 거 봤고, 그 인간 들어온 거 보고 온 거야.”
“여기가 너희 부부 화풀이 장소냐? 왜 툭하면 이리로 튀어?”
현수가 입은 티는 너무 오래 입어 벌써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그만큼이나 오래된 칠부 바지는 색이 바래져 원래 색을 가늠하기도 힘들어 보였고 그것도 모자라 대충 묶은 머리가 산발을 하고 있는 모양을 보고 미라가 눈을 좁혔다.
“그거 버리랬지. 좀 버려라. 몇 년째야? 어떻게 올 때마다 그 모양새야? 아무리 여자가 혼자 살아도 꾸며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시끄럽고. 무슨 일이냐고.”
벌써 12시가 넘어간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도 꽤 피곤한 시간들이었기에 당장 잠이 들어도 모자랄 판에 팔자 편한 미라의 넋두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늘 나 회사 갔었어. 그이 만나려고.”
“그런데?”
분명 미라가 왔으면 자신도 알았을 텐데 들은 적 없는 이야기다.
“로비에 있다가 회사 여직원들 말을 들었어. 우리 그이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모 여직원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같다고. 같이 있던 애도 틀림없다고 그랬어.”
이건 또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린지.
절로 한숨이 나는 것을 참으며 현수가 미라를 바라보았다.
남은 말이나 뱉어 보라고.
“너 알지? 그 여직원이 누구야? 너도 그 회사 다니니까 알 거 아냐. 말해. 그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년이 누구냐고. 숨기지 말고 다 말해. 나 마음의 준비 하고 왔다고.”
아이고, 없던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아 이마를 짚으며 현수가 혀를 찼다.
벌써 소설 두어 권은 쓰고 나온 모양인데, 불쌍한 실장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와이프와 딸내미 보러 간다고 신나게 퇴근해 뜬금없이 닦달을 당했을 상사를 생각하니 벌써 불쌍해져 왔다.
“알지. 그년이 누군지. 알고말고.”
현수의 말에 미라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목덜미에 혈관이 일어선다.
이러다 애 잡겠네.
“나야.”
“나야가 어떤 년인데? 어디 부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오는 말에 현수는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나라고, 빙구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나란 말이야. 이제 대답이 됐냐?”
“뭐? 너? 설마……! 어떻게 네가……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친구라는 년이 어떻게 친구의 남편을……!”
“미친! 정신 안 차려? 그냥 나랑 친하게 지내고 늘 같이 지내니 그런 소문이 도는 거라고. 개인적인 일도 많이 터놓는 사이고. 네 신랑이신 내 상사께서는 항상 나에게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하신 마나님과 따님의 사진을 보여 주며 미친 사람처럼 웃으시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없으니까 내게만 그러셔서 그런 소문이 도는 거라고. 다들 너와 나 사이는 모르잖아. 빙구냐?”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자처하시는 친구님 때문에 결국 현수의 말투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얘는…… 내가 언제. 그렇구나. 난 또.”
“또 뭐? 가. 나 좀 쉬자. 황금 같은 주말이 시작되는 이 시간에 너랑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풀고 있어야 하냐?”
“늦었잖아. 나 그냥 자고 갈게.”
“미친.”
막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울려 현수의 입을 막았다. 역시나 웬수의 남편님이자 자신의 상사다.
이놈의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지만 올라오는 한숨을 꾹 눌러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한두 번인가요. 이제 이력이 납니다. 네.”
“누구야?”
“누구겠니? 추우니까 전화하면 나오란다, 네 신랑께서. 이런 인간도 와이프라고 끔찍하게 아끼시니 진짜 제 눈에 안경이라니까.”
“지지배, 말을 해도 꼭. 네가 우리 중매인이었거든.”
그랬다. 현수를 만나러 찾아온 미라를 보고 첫눈에 반해 쫓아다닌 건 한 실장이었으니까.
“내가 원한 건 아니었어. 시끄럽고, 전화 오면 얼렁 나가라. 서영이 데리고 오신단다. 애까지 엄마 잘못 만나 이게 무슨 고생이야?”
“서영이는 왜 데려와? 그 인간.”
뚫린 입이라고 제 신랑 욕하는 소리에 현수가 결국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애 혼자 두냐? 것도 이제 막 두 돌 된 걸? 적어도 애 두고 이 시간에 싸돌아다니는 엄마라는 인간보다 훨씬 낫지 않냐?”
“넌 도대체 누구 친구야?”
“오늘부로 네 친구 사양하지. 전화 온다. 가 봐라. 안 나간다.”
“칫, 암튼 미안해. 다시 보자 친구야. 간다.”
휴대폰에 대고 아양을 떨며 나가는 친구를 보며 현수가 잽싸게 문을 잠갔다.
솔로로 32년을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저런 꼴을 보이며 나가야 하는지.
암튼 이제 방해할 사람은 없으니 잠이나 자야겠다.
황금 같은 주말, 현수는 아주 깊은 잠을 자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이 될 생각이었다.
전쟁 같은 월요일을 위하여.


1.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다(1)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더구나 그게 주말이라면.
월요일. 현수의 하루 시작은 항상 똑같았다.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 빠른 샤워와 기본만 하는 화장, 유니폼처럼 정해진 검은 정장으로 마무리하고는 긴 머리를 곱게 빗어 머리 뒤로 단단히 묶었다.
전신 거울을 보며 앞뒤를 정리한 현수가 시간을 확인하고 옷에 맞춰 검은 백과 굽 낮은 검은 구두를 신고, 베이지색 롱 코트를 손에 걸친 채 집을 나섰다.
언뜻 보면 장례식장이라도 가는 사람 같지만 눈이 부시게 하얀 블라우스 덕에 커리어우먼이라는 티가 확 났다.
현관을 잠그며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넉넉하다.
이 정도면 토스트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사서 들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말을 제외하면 늘 똑같은 일상.
그럼에도 현수는 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할 일도 없는 주말이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었다.
피로는 주말에 풀어 줘야 한다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며, 잠으로 시작해 잠으로 끝나는 주말도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이었다.
그 일상을 깨트리는 친구 미라가 반가워지는 미친 증상을 보이는 걸 보면 가끔 정신이 돌기도 하나 보다.
“행복에 겨워 널을 뛰는 년.”
친구라는 인간에게 지어 준 별명을 뇌까리며 현수가 급하게 지하철을 향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속에서 현수가 가만히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어느 정도 여유가 되니 이제 작은 경차라도 하나 마련할까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솔직히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벌써 10년이나 묵은 운전면허증을 지갑에 넣어 신분증 대신 쓰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면허증은 그린면허증이 되었다.
역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훅 불며 숨을 막히게 한다. 아직 11월인데 기온은 한겨울처럼 느껴졌다. 옷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으로 회사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온몸에 느껴지는 훈기에 겨우 어깨가 펴졌다.
안내 데스크의 경비 아저씨를 지나치며 목 인사를 하는 현수의 모습은 일반 회사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막 인사를 끝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현수가 다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회사를 나섰다.
분명 시간이 남아 토스트와 커피라도 한 잔 들고 올 참이었는데 차가운 바람에 잊어버렸다. 그건 상관이 없는데 꽃집을 잊어버리다니.
고개를 흔들며 버릇처럼 시간을 확인하고 부리나케 단골인 꽃집을 향했다. 이미 준비해 놓았을 꽃을 들고만 나오면 될 뿐이지만 오가는 시간 때문에 출근 시간이 빠듯해져 버렸다.
커다란 꽃다발 덕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알바로 시작한 이 회사 근무 기간만 10년인 그녀에게 그리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마치 앞이 잘 보이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대기하는 현수 앞에선 굵은 머스크 향이 느껴졌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현수가 곧 꽃다발을 든 채 몸을 틀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커다란 꽃다발이 옆에 서서 인사를 하니 평상시 표정 없기로 유명한 윤 전무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요즘은 꽃다발도 말을 하는군.”
이 인간이 웬일이래? 농담을 다 하고.
“죄송합니다. 원래 제 일이라. 비서실의 김현수입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드러내지도 않고 딱딱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니 더 이상의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이런 향을 풍기는 사람은 회장의 큰아들 윤찬영 전무 이외에는 없었다.
유난히 냄새에 민감한 현수기에 그 향기만으로 사람을 구분하기도 했다.
그녀와 윤 전무 뒤로 조금씩 사람들이 모였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아무도 선뜻 올라타지 못했다. 다들 어려워하는 눈치가 역력해 전무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탄 현수는 그들을 위해서 과감히 문을 닫아 버렸다.
“아직 사람들이 타지도 않았어.”
“그런가요? 앞이 안 보여서요. 죄송합니다.”
항상 북적이던 엘리베이터에 달랑 두 사람만 있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도 편하게 올라갈 수 있으니 오늘은 윤 전무에게 고마워져 목소리도 부드럽게 나왔다.
뭐, 엘리베이터 못 탔다고 현수를 원망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인간은 왜 쓸데없이 일찍 출근해 아랫사람들 눈치나 보게 하는지 모르겠다. 알아서 좀 느긋이 출근하면 좋을 것을.
문제는 이 윤찬영이라는 인물이 일중독이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미래의 오너가 될 확률이 다분하니 다들 눈치 보기 바빴다.
전무의 사무실은 회장의 사무실보다 낮은 층이라 그가 먼저 내리니 꽃향기 속에 그의 진한 머스크 향이 머물렀다.
윤찬영. 서른여덟. 현 회장의 장남.
재벌 3세? 재벌 2세라고 해야 할까?
구멍가게 같은 작은 전파사를 중견 전자회사로 키운 건 현 회장의 아버지 고(故) 윤석만 회장이었다. 그 중견 전자회사를 지금의 대기업으로 올려놓은 사람이 현 윤대영 회장이니까 재벌 2세가 맞으려나.
그에게 2남 1녀가 있는데 그중 큰아들 윤 전무는 전처가 낳은 아들이었으며 남은 두 자녀는 지금의 회장 부인이 낳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 회장 부인이 그의 생모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비밀은 아닌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라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계모 밑에서 자라서인지 차갑고 냉정한 외모만큼이나 그 성질도 만만치 않는다는 평판이었다. 뭐 일은 잘하니 아무도 뭐라 내색은 안 하지만 꽤나 차가운 성격인 건 사실이었다.
180이 넘는 키 때문에도 사람들이 위압감을 느끼는데, 사내치고는 꽤 큰 눈에 서리를 담고 다녀 그 앞에 서면 다들 기가 죽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사내 여자 직원들 사이에 그는 선망의 인물이었다.
한 번의 이혼쯤이야 재벌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모양인가 보다.
그를 향해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직원들이 꽤 많은 모양이지만 잘생긴 외모 밑에 숨겨진 차가움에 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 이번에 또 다른 아들이 입사한다고 들었다. 형제의 난이 일어나는 건가?
관둬라. 나랑 뭔 상관이 있다고.
여전히 감도는 머스크 향에 절로 회사 윗사람들의 동향을 상기하던 현수가 얼른 머리에서 털어 내 버렸다.
자신이야 일하고 월급만 잘 받으면 그뿐이었다.
연봉이 좋은 편이라 삼사 년만 더 일하면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작은 가게라도 낼 수 있으리라. 이왕이면 부모님이 하셨던 파스타가게를 하고 싶었지만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남의 비위나 맞추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앞날을 준비해야 했다.
독신주의는 아니지만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실 원하지 않게 독신주의가 되었다는 말이 맞았다. 그러니 혼자 살려면 자금이라도 탄탄해야 서럽지 않은 법이다. 기댈 데 없는 이가 자신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