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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꽃다발(2화)
1.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다(2)
“꽃 배달입니까?”
혼자 생각에 빠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나 보다. 눈앞에 한 실장이 반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네, 실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서영이가 아침부터 울고불고 난리라서.”
급히 꽃다발을 내려놓고 회장실의 화반을 가지러 다녀오는 사이 한 실장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애 엄마는요?”
“주무셨지요. 우유 먹이고 달래 놓고 깨우고는 왔는데 전화해 봐야겠어요.”
준비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열고 작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실장의 모습을 보니 다시 한 번 결혼이란 제도에 회의가 느껴졌다.
처음 비서실에 근무할 때 한 실장은 완벽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나의 실수도,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칼 같던 인간은 사라지고 그저 남편과 아이 아빠의 모습으로만 보이니. 그래도 저리 좋다는데 어쩔 수 있나.
“지지리도 복 받은 년.”
그래서 항상 현수의 입에서 나오는 욕의 대상자는 한 실장의 사모님이신 주미라 되시겠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휴! 추워. 벌써 겨울이 왔어요. 올겨울 따뜻하다더니 일기예보를 믿은 내가 바보지.”
들어오자마자 사무실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 비서를 보며 현수는 고개를 까닥여 화답을 하고 부지런히 화반에 꽃꽂이를 하고 있었다.
싱싱한 분홍 장미를 목까지 댕강 잘라 가운데 끼워 놓고 글라디올러스와 안개꽃으로 넓게 퍼지게 만들자 화사한 꽃 장식이 책상을 가득 메웠다. 그 모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가운데 분홍 장미를 몇 개 더 꽂아 넣었다.
제법 예쁘고 품위 있게 나왔다.
“와, 예뻐요. 어쩌면 대리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세요? 따로 배우셨어요?”
“응.”
“아, 그렇구나.”
한편 비서실 3년 차 민지에게 가장 알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앞에 앉아 화반을 바라보며 가늠하고 있는 김현수 대리였다.
유니폼처럼 늘 똑같은 옷차림에 빈틈없이 올린 머리. 검은 뿔테 안경만 쓰면 영락없는 여기숙사 사감같이 보일 듯했다. 매사 딱 부러지고 자기가 맡은 일은 어떤 상황이든 어그러진 적이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럼에도 회사 내 직원들과 교류가 거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빡빡하게 묶어 올린 머리 때문에 인상도 사납고 차가워 보였다. 그러나 실장님과 대화하는 와중에 웃는 모습을 보고 환해지는 그 얼굴에 놀랐다.
160인 자신이 하이힐을 신어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걸 보면 적어도 키가 165를 넘는다는 말이었다.
마치 여학생이 처음 학교 갈 때 다려 입는 교복처럼 주름 한 점 없는 검은 정장은 맞춘 것처럼 그녀의 몸을 감싸며 본인은 모르겠지만 예쁜 선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조금만 꾸미면 모든 남성의 시선을 받을 텐데 김 대리는 세상에서 가장 관심 없는 종자가 남자라는 듯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거나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딱딱하지만 미소를 보이는 사람은 오직 한 실장과 회장님뿐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에서 은근히 한 실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업무 이외에 같이 있는 시간도 많았고 밖에서도 따로 만나는 눈치이긴 했다.
그래도 저 외모를 지니고 만나는 사람이 한 실장이라니.
둘이 같이 서면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한 실장도 얼굴이야 나쁘지 않지만 숱 적은 머리카락 덕에 이마가 넓어 보인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점점 넓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더구나 결혼 3년 차로 아이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불륜이라니, 그런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칼날 같은 성격에 빈틈이라곤 없는 김 대리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괜찮은 사람들 중에 은근 김 대리에게 접근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적도 꽤 있는 걸 보면 그들이 내는 소문이겠지 싶어진다.
“뭐 해? 이거 회장님실 가져다 두라니까.”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나 보다. 어느새 자신을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는 김 대리의 눈빛에 움찔한 이 비서가 잽싸게 화반을 들고 회장실을 향했다.
그런 이 비서를 흘겨보며 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서실의 대리라고는 하지만 사실 잡무 담당이었다. 대외 수행비서인 한 실장이 회장님을 따라다니는 동안 사내에서 모든 스케줄과 환경 정리를 하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고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한 실장이야 회장의 식사 약속에 따라갈 테니 구내식당을 향하는 시간은 아마도 실장님과 회장님이 나가는 시간이 될 것이었다.
오늘은 이 비서부터 보낼 생각이었다. 비서실은 비워 둘 수 없어 돌아가며 식사를 했다.
분명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웬일로 호출 받아 들어간 한 실장님과 회장님이 꼼짝을 안 하고 좀체 회장실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옆에서 빠르게 분첩을 두드리는 이 비서를 보며 현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심시간만 되면 모든 일을 제치고 외모에 신경 쓰는 이 비서를 보면 신기하기는 했다. 그저 밥 한 끼 먹으러 구내식당 가는 것뿐인데 뭔 멋을 그리 내는지.
아침도 굶어 배가 고파 오는데 웬만하면 약속 장소로나 가실 것이지 왜 안 나오는지 오늘따라 짜증이 나려고 하는 것을 참으며 대신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김 대리, 잠깐 나 좀 볼까? 그리고 민지 씨는 나 대신 오늘만 회장님하고 같이 움직여요.”
드디어 문이 열리더니 한 실장이 나와 뜻밖의 말을 하고는 이 비서를 회장님께 붙여 내보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꽤 심각한 일 같았다. 보통은 한 실장이 못 움직이면 현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겨우 3년 차인 이 비서를 보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둥지둥 따라나서는 이 비서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나도 참 기가 막혀서. 아무튼 좀 앉죠. 현수 씨.”
둘만 있으면 한 실장은 현수에게 ‘김 대리’가 아닌 이름을 불렀다. 그건 와이프 친구를 대하는 그만의 예의였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는 자신에게 은인이라며 현수를 꽤 깍듯이 대했다. 그런 와이프도 예쁘다고 쩔쩔매는 모습이 좀 웃기긴 했지만 친구로서는 고마웠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들었던 수더분하다는 생각은 단 오 분 만에 사라졌다. 매사 정확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회장의 믿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현수가 이 자리까지 오는 데 많은 도움과 배움을 준 사람도 한 실장이었다. 이런 사람을 팔불출로 만든 걸 보면 미라의 실력도 보통은 넘으리라.
“누가 문 이사에게 투서를 한 모양이에요.”
“투서요? 무슨?”
이건 또 뭔 말이래. 투서라니. 그리고 그 투서란 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현수 씨랑 나랑…… 아무튼 허! 참, 기가 막혀서.”
“에?”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은데.
“그걸 바로 회장님께 말씀 올린 모양입디다. 아무튼 그 인간 입도 싸.”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한 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요?”
“사정 설명을 드렸죠. 그래서 회장님도 웃어넘기시기는 했는데 그래도 불미한 소문은 잠재우는 게 좋다고.”
“저더러 사표를 내라는 건가요?”
저절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직은 빠른데, 목표한 돈이 모여지지 않았다. 이만한 월급 주는 곳을 구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런 소문을 달고 그만두면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린다.
“무슨 말을요. 사실도 아닌 일로 왜 현수 씨가 사표를 내요.”
화들짝 놀라는 한 실장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안정을 찾고 나자 슬슬 화가 난다.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그런 소문을 내고 다녀요? 제가 뭘 했다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아무래도 그 소문 도는 게 걸리시는 모양이에요.”
“어쩌라는 건가요?”
짜증에 목소리가 올라가자 한 실장이 일순 주저하며 현수의 눈치를 봤다.
“저기…… 그러니까…….”
“한 실장님. 실장님답게 말씀하세요. 저보고 어쩌라는 건가요?”
“휴……. 저번 주, 윤 전무님 비서인 안영미 씨가 퇴사한 건 알죠?”
알고말고. 깐깐한 윤 전무 밑에서 3년간 고생한 안 비서는 결혼 발표와 동시에 사표를 제출했다.
퇴사 전 3개월 동안 후임을 물색했지만 결국 윤 전무 마음에 드는 비서가 없어 아직 그 자리가 공석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여러 여직원이 도전했다가 눈물만 쏙 빼고 뛰쳐나온 것 또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렇잖아도 이쪽 비서실에서도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당분간 그 자리를 현수 씨가 메워 주셨으면 하세요.”
“그러니까 저더러 윤 전무님 비서로 가라는?”
“아주 잠시예요.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만. 그리고 그동안 이런 소문도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에요.”
잘리지는 않은 모양인데 기분은 참 더럽다. 회장님 비서에서 전무 비서는 분명 강등이었다. 그것도 있지도 않은 일 때문에.
“그런데요. 제가 전무님에게 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렇게 가면 소문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넘칠 텐데요.”
“저도 그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문제없다고 하시네요. 전무실 비서가 공석인 건 사실이고 그래서 꽤 불편해하시니까 이쪽에서 전무님 배려 차원으로 차출해 보내 드리는 형식이라고.”
말이 좋아 차출이지. 이걸 소문을 인정한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또 쑥덕거릴 거리를 만들어 주는 꼴이었다.
거기다 윤 전무가 어떤 사람이던가. 비서에게 지랄맞게 군다는 소문이 자자한 인간이었다.
거기서 못 견디면 나가라는 말이리라. 잠시라는 말을 믿을 현수가 아니었다.
제길, 월요일 아침부터 이게 웬 날벼락인지.
사표를 던져? 그러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이런 엉뚱한 소문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망친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변명을 하는 것도 자존심이 가로막았다.
좋아, 간다고. 지랄맞아 봐야 지가 얼마나 지랄맞겠어. 어디 한번 붙어 보지 뭐.
“현수 씨?”
별반 표정 변화가 없는 현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보며 괜히 한 실장의 등 뒤로 한기가 흘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왜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 속에 감춰진 건 용암같이 뜨거운 다혈질 성격임을 이미 아내인 미라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널뛰는 미라의 성격을 단번에 잡아 버리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니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김 대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는 건 생각보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내일부터 그쪽으로 출근하면 되나요?”
“그게…… 그쪽에 비서가 없는 관계로 지금부터 그쪽으로 가서 정리를 해 줬으면 하세요.”
“지금요?”
아주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네. 그러나 이미 결심한 일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러죠. 그럼 전 제 짐 좀 정리할게요. 그동안 제가 사무실을 보고 있을 테니 실장님은 식사하고 오세요.”
“아니, 저.”
“괜찮아요. 잠시뿐인데요, 뭐. 간단한 짐만 챙겨 가고 남은 건 제 사물함에 두고 갈게요. 제가 회사를 관두는 것도 아니고 잠깐 출장 간다고 생각하죠. 어서 다녀오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내모는 김 대리를 보며 한 실장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와이프에 대한 이야기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내미 자랑을 할 사람이 필요했고 회사 내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김 대리뿐이었다.
비서실에 근무하다 보니 여기저기 귀띔을 바라는 인간들이 많아 일 이외에는 일체 다른 부서와의 만남을 자제해서 회사 내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성격 때문에 윗사람들에게 건방지다고 미움도 꽤 받았다. 회장의 신임이 두터울수록 회사 내에서 외로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김 대리에게는 편하게 대할 수 있어 좋았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녀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지만 방법이 없었다.
“곧 사람 구해 내려 보낼게요. 그때까지만 고생하세요.”
“저 사형당하러 가나요? 그저 회장실에서 전무실로 바뀔 뿐인데 웬 걱정이세요. 식사나 하러 가세요. 나중에 제가 집으로 놀러 갈게요. 그때 봬요.”
몰아내듯 한 실장을 내보낸 현수가 문을 닫고 천천히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은 상자에 개인 물품을 챙기면서 이를 갈았다.
성질 같아선 더러운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당당히 뒤집어엎은 뒤 사표를 던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고 있었다.
“참자, 참아. 딱 3년만 참자. 내가 3년 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사 때려치우고 만다.”
박박 이를 가는 현수의 모습은 평소 냉철하고 딱딱한 비서실 검은 얼음이라 불리는 김 대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