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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유혹




1화


1. 결혼식장에서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결혼식장.
하지만 얇은 인맥이라도 유지해야겠기에 여정은 미용실에서 장장 삼십 분이나 걸려 머리를 만들었다.
“어, 이게 머리가…….”
피곤해서 잠시 졸았더니 머리가 사자 머리가 되어있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나 나올 법한 스타일에 여정은 기겁을 했다. 어쩐지 이곳 원장님 추천으로 미스코리아가 된 애들이 많다더니 그 소문이 영 틀린 건 아니었다.
“고객님의 이목구비와 두상에는 이 스타일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디자이너들은 늘 이렇게 말을 한다. 여정은 한소리하려다 단념했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뭐 어때. 잘 보일 사람이 있겠어?’
머리를 한 뒤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꺼내어 나오자 미용실 간판이 보였다.
사자머리 미용실.
결혼식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결혼식장은 양평에 있었다. 차가 막히지 않고 쭉 달려도 한 시간 안에 도착하기 어려운 거리였다. 더 큰 문제는 여정이 아직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
아무리 잘 보일 사람이 없어도 민낯으로 결혼식장을 갈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도 잘 보여주지 않는 민낯이란 말이다.
어쨌든 식장에 도착해서 화장을 하기로 하고 여정은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가로수들이 그녀의 옆으로 휙휙 지나쳤다. 유난히도 가로수가 예쁜 도로였다. 문득 기분을 낼까 하는 생각에 그녀는 스피커 볼륨을 높이고 차창과 선루프를 열었다.
“우후, 달려 보는 거야.”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여정은 좌절하고 말았다. 삼십 분이나 걸려 만든 머리가 바람에 날려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그녀는 자동차를 주차장에 주차한 뒤 폭풍 화장을 시도했다. 기네스북에 도전하는 도전자처럼 그녀의 손놀림이 보이지 않았다.
번개처럼 화장을 끝낸 여정은 차에서 내려 식장 앞을 기웃거렸다. 식이 시작하기 5분 전이었다. 아직까지 홀은 사람들로 분주했고 식장 안에서는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우는 중이었다.
여정은 깔끔하게 5만 원을 담은 축의금 봉투를 신부 측에 전달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신부 대기실을 찾았다. 오늘의 신부인 대학 동창생 연희가 화사한 표정으로 여정을 반겨주었다.
“어머, 여정아, 와 줘서 고마워.”
‘고마워할 것 없어. 내 결혼식 때 너도 오면 돼.’
속으로 여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 여정은 솔로다. 나이 서른하나에 말이다. 물론 연애는 했었다.
여정이 기억하기로는 한 백만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어떤 남자와 첫사랑을 했던 기억이 정말 힘이 들 정도로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치 화석을 보면서 연대를 추정하는 기분이랄까.
그 첫사랑은 참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순박한 모습에 반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남자를 기억하려면 시간여행을 해야 했다. 8,9년 전으로.
윤진후, 이 남자 어떻게 변했을까. 키는 여전히 호리호리할 테고, 혹시 똥배라도 튀어나온 거 아냐? 얼굴에도 살이 쪘을까? 술을 많이 마셔서 얼굴이 까매졌다거나 딸기코 증상이 있는 거 아냐? 수염을 막 길러서 지저분하게 다닐까?
하지만 상상이 되지 않았다. 10년 가까운 세월은 그 모든 상상을 멈추게 해 줄 정도의 긴 시간이었다.
여정의 기억 속 그 남자, 윤진후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모범생 스타일이고 순진하다. 말도 시끄럽지 않고 조용조용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스타일이다. 요리해주는 걸 좋아하고 무척 자상한 남자다.
거기까지다. 더 이상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력이 나쁜 걸까, 기억할 만한 것들이 없는 걸까. 그런데도 가끔 여정은 이 남자를 기억한다. 때때로 외로움에 방바닥을 긁을 때마다 이 남자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추억한다.
왜?
첫사랑이니까. 첫 키스니까. 이 남자 외에는 제대로 사귄 남자가 없으니까.
그런데 동창생인 연희는 지금 예쁘게 신부 화장을 하고 신부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동안 남자 친구가 끊이지 않던 여자가 말이다. 여정이 아는 것만 해도 족히 열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부익부빈익빈.
“그래, 연희야, 축하해. 너 오늘 진짜 예쁘다.”
결국 여정은 속에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여자가 가장 예뻐야 할 결혼식에 연희는 다른 친구들보다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연희는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정은 괜히 심술이 났다. 저런 연희도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사귀는데 말이다.
“신부 입장하세요.”
누군가가 신부 대기실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연희가 식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아버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을 조심조심 걸어 신랑이 서 있는 단상까지 나아갔다.
‘아, 나는 언제 결혼해 보나.’
어릴 때는 소원이 과학자였다. 조금 커서는 미술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금 더 커서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선생님은 되지 않았다. 평범한 회사를 다니고 지금은 카페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리고 나이 서른하나가 되어 다시 꿈을 가져본다. 결혼을 하는 꿈.
여정은 식장 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남녀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상상을 하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주례사가 끝이 나고 결혼식도 끝이 났다. 가족사진을 찍고 나자 찍새가 소리쳤다. 신랑 신부 우인들 나와서 사진 찍으라고.
오늘도 여정은 어김없이 누군가의 결혼식 사진첩에 당당하게 얼굴을 올리기 위해 주뼛거리며 걸어갔다.
연희가 대학 동창이긴 하나 전공이 달라 우인들 중에 아는 얼굴들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연희의 고향 친구였다. 또는 워낙 친구가 없어 신랑 측 우인들 중에 여자들을 조금 풀었을지도.
사진 촬영을 할 때면 여정은 늘 제일 뒷줄에 서는 걸 좋아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자리를 잡을 동안 여정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앞줄에 서 있는 남자들이 여정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정도 남자들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답을 했다.
유난히도 앞에 있는 남자가 계속 쳐다보는 바람에 여정은 뒷줄로 시선을 돌렸다. 맨 뒷줄에서 키가 큰 남자가 여정을 보고 있었다.
짙은 나무색의 뿔테 안경너머 남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다른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달려 있었고 조금은 왜소한 체격이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반듯한 이미지, 각이 진 넥타이 매듭이 여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남자를 어디서 봤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에 여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 여정은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라식수술을 고려할 정도로. 가까이서 보면 모를까 멀리서는 저 남자가 누군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앞줄이 정리가 되고 여정은 천천히 뒷줄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 검은색 정장 아가씨, 가운데, 가운데.”
여정은 검은색 정장이 자신임을 알았다.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가운데로 이동하자 공교롭게도 그 남자의 옆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키 큰 남자의 옆.
그의 옆에 선 여정은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뭐라고 할까. 몸속에서 어떤 알 수 없는 호르몬이 분비된다고나 할까. 일종의 연애 호르몬 같은.
남자의 팔이 여정의 팔에 살짝 닿았다. 몸속 어딘가에서 찌르르 전류 같은 것이 흘러와 그녀의 혈관을 타고 도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내내 여정의 온몸은 벽돌처럼 굳어 있었다.
사진촬영이 끝난 뒤에야 여정은 방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바로 8년 전 헤어졌던 윤진후란 사실을.
누군가가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후 선배!”
꾀꼬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학교에서 제법 얼짱으로 통했었던 한가을이었다.
그녀가 남자를 향해 환하게 치아까지 드러내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정은 가을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시선 끝에 윤진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