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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첫사랑, 윤진후. 십 년만이었다. 이 남자가 지금 내 옆에 서 있었다고? 말도 안 돼.
여정은 감히 그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서 그를 힐끔 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 얼굴 그대로 유지하며 조금 늙었을 뿐.
아래로 내려가야 되는데 도무지 여정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일었다.
오늘따라 여정은 유난히도 굽이 높은 스틸레토 힐을 신고 있었다. 아래로 한 발 내딛던 여정은 그만 발목을 삐끗하며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진후의 팔을 붙들었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여정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8년 만에 듣는 진후의 목소리는 참으로 감미로웠다. 여정은 질근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은 죽은 척하고 싶었다.
눈을 뜬 여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진후가 여정의 몸을 보물 다루듯이 조심조심 일으켜 세워주었다.
거의 다 세워졌을 때쯤, 여정은 고맙다는 의미로 진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진후는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오랜만이야.”
여정은 힐끔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익숙한 이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보자 그녀의 심장이 제 박자를 잃고 미친 듯이 뛰어 올랐다.
여정은 가슴속에서 삐거덕거리는 추억들의 잔재들을 잠재우며 대답했다.“……네. 그러네요.”
겨우 한 마디 주고받는 그 시간이 여정에게는 길고 긴 영겁처럼 느껴졌다.
“여정아, 너도 진후 선배 오랜만이지?”
가을이 다가와 말을 걸기에 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오랜만이야. 진후 선배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아.”
여정이 빙그레 미소를 짓자 가을이 밝은 표정으로 진후를 응시했다.
“선배, 미국 물 먹더니 얼굴 완전 좋아졌다. 그때 미국 떠나기 전에 만났으니까 거의 8년 만인가?”
여정의 머리에 누군가 꿀밤을 때린 것 같았다. 다시 머리가 어질했다.
8년……, 여정과 헤어진 직후였다.
그동안 그는 미국에 있었고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여정은 호주에서 몇 년간 근무를 했었다. 그렇게 서로가 만날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배고픈데 우리 식사나 하러 가자.”
진후가 말했다. 여정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의 말투. 뭔가 어색할 때면 그는 늘 식사나 하러 가자고 말을 한다. 지금처럼.
“여정아, 우리 같이 먹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을이 그렇게 말을 했다. 여정은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십 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늘 여정보다 한 발짝 앞서 걸어가던 이 남자. 지금도 여전했다. 그래서 여정은 그의 뒤태를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다.
넓은 어깨, 잘 빠진 허리 라인과 길게 뻗은 두 다리, 그리고 조금 튀어 나온 뒤통수.
반가움 때문일까, 미련 때문일까, 아쉬움? 아니면 지난 추억이 밀려와서일까, 이제는 그저 지나간 꿈이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갑자기 여정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날, 여정은 고급 뷔페식당에서 한 손에 접시를 든 채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코까지 훌쩍이면서.



2. “우리 그때처럼 다시 키스할까?”


“넌 연희 시집가는 게 그렇게 슬퍼?”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여정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가을이 중얼거렸다.
여정의 친구들이나 동창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진후와 여정이 2년 동안 사귀었다는 사실을. 왜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속이며 몰래 만났는지 아직도 미스터리했다.
둘 다 너무 소심하고 소극적이라 그랬던 걸까.
여정은 맞은편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진후를 의식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초밥을 씹으며 그녀는 추억 여행을 떠났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았다. 처음엔 서로의 감정이 확실하지 않은데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창피해서 속였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그 이후에는 진후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에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다 서서히 이별을 준비했던 것도 같았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속여 가며 몰래 만났었던 것도 같았다.
미련스럽게 바보 같이. 어떻게 2년이란 시간 동안 주변 사람들 몰래 사귈 수가 있었을까. 매일 학교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을 두고 말이다.
“여정이는 결혼했어?”
젠장, 이 남자의 가장 큰 매력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포크로 초밥을 찍어 올리려던 여정의 손길이 우아하게 멈췄다. 어떤 의미로 물어본 건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심장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까부터 심장 속에 진동모드로 맞춰 놓은 전화기 한 대가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 안 했어요.”
대답을 한 뒤 여정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문득 예전에 이 남자에게 말을 높였는지 낮췄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높였다가 낮췄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진후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표정에 여정도 안도했다.
식사를 끝내고 간단하게 피로연 자리가 이어졌다. 대학 동창, 동네 친구, 고등학교 동창, 회사 친구, 우인들이 제각각이다보니 피로연은 일찍 끝이 났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신부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여정은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동차 앞에 멈춰 서서 막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녀의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여정, 잠깐만.”
진후였다. 손잡이를 쥐고 있던 여정은 스르르 손을 풀고 돌아보았다.
“괜찮으면…… 우리 이야기 좀 해.”
진후의 말에 여정은 거칠게 뛰어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도 원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진후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벽이 꽤 높아 보였다. 망설이기만 하고 다가서지 못하는 그녀에게 진후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그래요. 그런데 어디 가서…….”
진후는 예식장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카페 있던데, 거기가 좋겠어.”
“그, 그래요.”
여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그 예전 이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늘 한 발짝 정도 앞서 걷던 이 남자, 지금도 여전했다. 그래서 진후의 뒷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큰 키, 곧게 뻗은 다리며, 넓은 가슴, 주먹만 한 얼굴 크기, 긴 목.
“그런데 가을이는요?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가을이가 어디 갔는지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시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을이가 지인들 모임이 있어 가야 된다며 식사를 끝내자마자 나갔다는 사실을.
여정은 그저 둘이 함께 있는 게 신경이 쓰이고 부담스러워 핑계를 찾았을 뿐이었다.
여정의 물음에 진후가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 뒤편으로 오후의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진후의 얼굴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가을이? 너한테 인사 안하고 그냥 갔나 보네. 아까 약속 있다고 먼저 갔어.”
“네에.”
여정은 짧게 대답한 뒤 추억 속 한 페이지를 재현하듯 그의 뒤를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가요가 운치 있게 흘러나왔다.
진후와 자주 만났었던 그때쯤 유행하던 노래들, 어떻게 알고 주인장이 선곡을 했는지 미스터리하면서 감사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