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여신
1화
프롤로그.
그날은 눈이 왔다.
구라청―초황인 늘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다며 기상청을 그렇게 불렀다―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막 봄이 시작되고 있던 3월 끝자락의 눈. 그날, 승효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해인이와의 사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그때까지도 난 내내 부인하고만 있었더랬다.
승효도 해인이도 잃고 싶지 않았던 욕심이었다. 정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승효 입으로 듣는 이별의 말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애써 웃으며 카페를 나오면서도 겁이 나고 무서워 죽을 것 같았으니까. 카페를 나와 얼마를 걸었을까. 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눈을 감으면서 본 세상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그리고…… 초황일 만났다.
가만히 내 손을 그러쥐는 그의 손이 못 견디게 따스했다. 가슴이 울컥해질 만큼.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초황이야. 이초황.’
그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난 멍하니 그의 눈 속에 어린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노래방을 가고, 또 분식집에 들어갔다. 낯선 이와 그랬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반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리고…… 기억이 났다. 세황 오빠가 늘 말하던 못된 녀석. 꼭 한 번 본 오빠의 잘생긴 동생.
‘기억났어. 세황 오빠 동생!’
내 말에 초황은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백번의 말보다 그의 그 웃음이 위로가 되었다.
1장.
장맛비는 지겹다. 아침나절부터 쏟아지던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밤이 깊어 가는 동안까지 끈덕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난 주연을 가슴에 껴안고 가만히 그녀의 따스한 몸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따스한 여자인데 주연은 가끔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 만큼 차다.
“우리, 그만 만날래?”
이렇다니까. 난 피식 웃어 버렸다. 저런 말로 당황스러워하고 화를 냈던 이초황은 더 이상 없는데, 이 여자는 가끔 저딴 말로 나를 슬쩍 떠 보기 일쑤였다. 난 그녀를 안은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주연은 별다른 표정 없이 처음 자세 그대로 누워 있을 뿐이다.
나쁜 여자. 하지만 그래서 더 안쓰럽다.
우리, 그만 만날래? 하는 그 말이 떠나지 마라는 말이란 걸 알아들을 만큼, 난 이제 그녀를 잘 안다. 버릴지언정 더 이상 버림받지 않겠다는 의지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그래서 더 애처롭고, 안쓰럽고, 가슴이 아프다.
난 그녀의 턱을 돌려 나를 바라보게 만든 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아니. 싫어.”
주연의 시선이 내 입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알까?
그녀는 그저 내 얘기를 알아듣기 위해 내 입술을 쳐다보지만, 난 그런 그녀의 시선에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리고 때때로 그녀의 식대로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을 미치도록 질투한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간에 그녀의 눈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읽기 위해 그 입술에 머무는 것을 볼 때면 미친 듯이 질투가 인다.
“키스해 주라.”
시선을 그녀의 입술 위에 고정시키고 애원하듯 말했더니, 그녀는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싫어,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주연의 싫다는 말은 여느 여자들의 내숭과는 다르다. 그녀의 싫어, 는 정말이지 싫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기 싫었고, 그녀는 발버둥 치며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디 더 밀어내 봐.
난 더 단단하게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해 버렸다.
주연의 입술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하다. 그녀의 작은 혀는 매 순간마다 내 입속에 담고 싶을 만큼 맛있다. 싫다는 말마저 묵살하고 뺏고 싶을 만큼. 처음에야 주연이 떠날까 두려워 말 한 마디, 동작 하나도 조심하며 몸을 사렸지만, 이제 난 확실하게 안다. 내가 그녀를 떠날 수 없듯, 그녀 또한 나를 떠날 수 없단 걸.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초황!”
키스를 끝내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그녀는 거칠게 나를 밀어내며 으르렁거렸다.
“싫댔어. 못 들었니? 너도 나처럼 귀머거리였던 거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는 그녀는 사랑스럽다.
훗, 미친놈.
“해주기 싫대서 내가 했는데, 그게 왜?”
빙글 눈을 굴리며 말했더니, 작은 주먹이 금세 내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아파.”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말했다. 주연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어 버렸다.
“이리 와.”
두 팔을 벌리고 그녀를 채근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고 싶어.”
내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가지 마.”
“잘래.”
“비 많이 오잖아. 여기서 자.”
“싫어.”
저놈의 싫어! 싫어!
난 화를 내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 가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렇게 쏟아지는데, 그냥 오늘만 자구 가.”
“이초황.”
“알아!”
기어이 소리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저딴 식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섹스는 되고, 함께 잠드는 건 안 된다? 그런 어이없는 주연의 발상은 정말이지 짜증났다.
“비 너무 많이 와. 자구 가. 옆에서 자는 거 싫으면 내가 딴 방에서 잘게. 응? 운전하는 거, 위험해.”
하지만 난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다른 건 둘째 치고서라도 이 비에 운전은 위험했다.
조그만 입술에서 후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짜증난다, 이초황.”
주연이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아 버린다.
“나도 짜증나, 은주연.”
나도 똑같이 중얼거렸지만 이미 눈을 감아 버린 그녀는 내 입술을 읽지 못했다.
“이초황.”
두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건 내 대답은 필요 없다는 말이다. 난 작게 한숨지었다.
“안아 주라.”
저 말이 반갑지 않은 건, 그녀의 뜻을 내가 제대로 간파한 탓이다. 내 곁에서 잠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내가 그렇게 느껴 버렸으니까.
하지만 난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부드럽고 달콤하다. 갖고 있는 순간에까지 조바심이 들만큼.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춰지고 있었다. 지난 밤, 그렇게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이미 흔적도 없는 것 같았다. 픽 웃으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없겠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럴……!
그런데 있다. 있었다. 손에 잡히는 따스한 몸이, 온기가 있다.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비볐다. 꿈인가. 아직 내가 깨지 않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아도 그녀가 있다. 있었다.
뒤척이다 떨어진 시트자락이 허리에 걸쳐진 채, 그녀는 베개를 움켜쥐고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흩트려진 머리칼은 움켜쥔 베개와 그녀의 매끈한 등, 허리로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고, 얼굴 역시 그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안 갔어. 안 갔어, 은주연.”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보처럼.
절대로 곁에서 잠들지 않던 그녀였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순간을 나누고 싶지 않다던 그녀였다. 그런 매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그녀였다. 그리고 그 말처럼 단 한 번도 그녀는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잠을 잤던 적이 없었다.
어젯밤, 내가 좀 과하다 싶게 몰아붙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쉬이 잠들 그녀가 아니었다. 물론 먼저 나가떨어진 것도 나였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은주연…….”
이러는 게 못마땅하고 짜증나긴 했지만, 난 분명 지금 이 순간을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주연이 돌아가지 않고 내 곁에서 잠든 것에 대해서.
“훗, 후흐흐흐.”
난 미친놈처럼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내고 가지런히 감긴 눈을, 작은 콧날을, 붉은 입술을 차례차례 만져 나갔다.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손끝에 비로소 따스한 온기가 제대로 느껴지자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주연의 입에서 얕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그 숨소리를 느꼈다. 따뜻하고 달콤하다. 심장이 뛴다. 점점 더 거세게. 난 주연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맞대었다. 미치게…… 좋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깊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던 주연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주연은 거칠게 나를 밀쳐냈다.
“이초황.”
이를 앙다물고 내 이름을 씹은 그녀는 눈이 빠져라 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에도 좋기만 했다. 미친놈처럼. 비죽 웃었더니, 베고 있던 베개를 나에게 던져 버린다.
“나, 잠든 지 겨우…… 1시간 됐거든?”
주연은 옆 테이블에 놓은 작은 시계를 힐끗 쳐다보며 내게 말했다.
“더 자고 싶은데 어떡할까? 우리 집으로 갈까?”
밉살스럽긴.
“자. 더 자.”
난 주연의 베개를 그녀의 앞에 놓아주며 팡팡 쳤다. 곧장 눈을 흘기면서도 그녀는 다시금 자리에 누웠다.
“지분거리지 마.”
그녀가 스륵 눈을 감으며 앙칼지게 말했다.
“알았어.”
난 주연의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팔을 괸 채 옆으로 길게 누워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잠이 오겠니?”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주연이 물었다. 아아. 그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주연을 내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주연이 또다시 눈을 번쩍 떴다.
“어쩌자고?”
“자자고. 같이 자겠다고.”
내 말에 주연은 한숨을 폭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는 다시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난 그런 주연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잠은 오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주연의 몸과는 다르게 내 몸은 진작부터 깨어나기 시작했었으니까. 속으로 천천히 열을 세었다. 그리고 또 다시 열을. 또 다시 한 번 열을…….
1화
프롤로그.
그날은 눈이 왔다.
구라청―초황인 늘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다며 기상청을 그렇게 불렀다―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막 봄이 시작되고 있던 3월 끝자락의 눈. 그날, 승효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해인이와의 사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그때까지도 난 내내 부인하고만 있었더랬다.
승효도 해인이도 잃고 싶지 않았던 욕심이었다. 정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승효 입으로 듣는 이별의 말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애써 웃으며 카페를 나오면서도 겁이 나고 무서워 죽을 것 같았으니까. 카페를 나와 얼마를 걸었을까. 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눈을 감으면서 본 세상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그리고…… 초황일 만났다.
가만히 내 손을 그러쥐는 그의 손이 못 견디게 따스했다. 가슴이 울컥해질 만큼.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초황이야. 이초황.’
그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난 멍하니 그의 눈 속에 어린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노래방을 가고, 또 분식집에 들어갔다. 낯선 이와 그랬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반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리고…… 기억이 났다. 세황 오빠가 늘 말하던 못된 녀석. 꼭 한 번 본 오빠의 잘생긴 동생.
‘기억났어. 세황 오빠 동생!’
내 말에 초황은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백번의 말보다 그의 그 웃음이 위로가 되었다.
1장.
장맛비는 지겹다. 아침나절부터 쏟아지던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밤이 깊어 가는 동안까지 끈덕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난 주연을 가슴에 껴안고 가만히 그녀의 따스한 몸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따스한 여자인데 주연은 가끔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 만큼 차다.
“우리, 그만 만날래?”
이렇다니까. 난 피식 웃어 버렸다. 저런 말로 당황스러워하고 화를 냈던 이초황은 더 이상 없는데, 이 여자는 가끔 저딴 말로 나를 슬쩍 떠 보기 일쑤였다. 난 그녀를 안은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주연은 별다른 표정 없이 처음 자세 그대로 누워 있을 뿐이다.
나쁜 여자. 하지만 그래서 더 안쓰럽다.
우리, 그만 만날래? 하는 그 말이 떠나지 마라는 말이란 걸 알아들을 만큼, 난 이제 그녀를 잘 안다. 버릴지언정 더 이상 버림받지 않겠다는 의지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그래서 더 애처롭고, 안쓰럽고, 가슴이 아프다.
난 그녀의 턱을 돌려 나를 바라보게 만든 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아니. 싫어.”
주연의 시선이 내 입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알까?
그녀는 그저 내 얘기를 알아듣기 위해 내 입술을 쳐다보지만, 난 그런 그녀의 시선에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리고 때때로 그녀의 식대로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을 미치도록 질투한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간에 그녀의 눈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읽기 위해 그 입술에 머무는 것을 볼 때면 미친 듯이 질투가 인다.
“키스해 주라.”
시선을 그녀의 입술 위에 고정시키고 애원하듯 말했더니, 그녀는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싫어,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주연의 싫다는 말은 여느 여자들의 내숭과는 다르다. 그녀의 싫어, 는 정말이지 싫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기 싫었고, 그녀는 발버둥 치며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디 더 밀어내 봐.
난 더 단단하게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해 버렸다.
주연의 입술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하다. 그녀의 작은 혀는 매 순간마다 내 입속에 담고 싶을 만큼 맛있다. 싫다는 말마저 묵살하고 뺏고 싶을 만큼. 처음에야 주연이 떠날까 두려워 말 한 마디, 동작 하나도 조심하며 몸을 사렸지만, 이제 난 확실하게 안다. 내가 그녀를 떠날 수 없듯, 그녀 또한 나를 떠날 수 없단 걸.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초황!”
키스를 끝내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그녀는 거칠게 나를 밀어내며 으르렁거렸다.
“싫댔어. 못 들었니? 너도 나처럼 귀머거리였던 거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는 그녀는 사랑스럽다.
훗, 미친놈.
“해주기 싫대서 내가 했는데, 그게 왜?”
빙글 눈을 굴리며 말했더니, 작은 주먹이 금세 내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아파.”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말했다. 주연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어 버렸다.
“이리 와.”
두 팔을 벌리고 그녀를 채근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고 싶어.”
내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가지 마.”
“잘래.”
“비 많이 오잖아. 여기서 자.”
“싫어.”
저놈의 싫어! 싫어!
난 화를 내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 가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렇게 쏟아지는데, 그냥 오늘만 자구 가.”
“이초황.”
“알아!”
기어이 소리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저딴 식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섹스는 되고, 함께 잠드는 건 안 된다? 그런 어이없는 주연의 발상은 정말이지 짜증났다.
“비 너무 많이 와. 자구 가. 옆에서 자는 거 싫으면 내가 딴 방에서 잘게. 응? 운전하는 거, 위험해.”
하지만 난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다른 건 둘째 치고서라도 이 비에 운전은 위험했다.
조그만 입술에서 후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짜증난다, 이초황.”
주연이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아 버린다.
“나도 짜증나, 은주연.”
나도 똑같이 중얼거렸지만 이미 눈을 감아 버린 그녀는 내 입술을 읽지 못했다.
“이초황.”
두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건 내 대답은 필요 없다는 말이다. 난 작게 한숨지었다.
“안아 주라.”
저 말이 반갑지 않은 건, 그녀의 뜻을 내가 제대로 간파한 탓이다. 내 곁에서 잠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내가 그렇게 느껴 버렸으니까.
하지만 난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부드럽고 달콤하다. 갖고 있는 순간에까지 조바심이 들만큼.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춰지고 있었다. 지난 밤, 그렇게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이미 흔적도 없는 것 같았다. 픽 웃으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없겠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럴……!
그런데 있다. 있었다. 손에 잡히는 따스한 몸이, 온기가 있다.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비볐다. 꿈인가. 아직 내가 깨지 않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아도 그녀가 있다. 있었다.
뒤척이다 떨어진 시트자락이 허리에 걸쳐진 채, 그녀는 베개를 움켜쥐고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흩트려진 머리칼은 움켜쥔 베개와 그녀의 매끈한 등, 허리로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고, 얼굴 역시 그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안 갔어. 안 갔어, 은주연.”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보처럼.
절대로 곁에서 잠들지 않던 그녀였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순간을 나누고 싶지 않다던 그녀였다. 그런 매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그녀였다. 그리고 그 말처럼 단 한 번도 그녀는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잠을 잤던 적이 없었다.
어젯밤, 내가 좀 과하다 싶게 몰아붙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쉬이 잠들 그녀가 아니었다. 물론 먼저 나가떨어진 것도 나였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은주연…….”
이러는 게 못마땅하고 짜증나긴 했지만, 난 분명 지금 이 순간을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주연이 돌아가지 않고 내 곁에서 잠든 것에 대해서.
“훗, 후흐흐흐.”
난 미친놈처럼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내고 가지런히 감긴 눈을, 작은 콧날을, 붉은 입술을 차례차례 만져 나갔다.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손끝에 비로소 따스한 온기가 제대로 느껴지자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주연의 입에서 얕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그 숨소리를 느꼈다. 따뜻하고 달콤하다. 심장이 뛴다. 점점 더 거세게. 난 주연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맞대었다. 미치게…… 좋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깊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던 주연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주연은 거칠게 나를 밀쳐냈다.
“이초황.”
이를 앙다물고 내 이름을 씹은 그녀는 눈이 빠져라 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에도 좋기만 했다. 미친놈처럼. 비죽 웃었더니, 베고 있던 베개를 나에게 던져 버린다.
“나, 잠든 지 겨우…… 1시간 됐거든?”
주연은 옆 테이블에 놓은 작은 시계를 힐끗 쳐다보며 내게 말했다.
“더 자고 싶은데 어떡할까? 우리 집으로 갈까?”
밉살스럽긴.
“자. 더 자.”
난 주연의 베개를 그녀의 앞에 놓아주며 팡팡 쳤다. 곧장 눈을 흘기면서도 그녀는 다시금 자리에 누웠다.
“지분거리지 마.”
그녀가 스륵 눈을 감으며 앙칼지게 말했다.
“알았어.”
난 주연의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팔을 괸 채 옆으로 길게 누워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잠이 오겠니?”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주연이 물었다. 아아. 그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주연을 내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주연이 또다시 눈을 번쩍 떴다.
“어쩌자고?”
“자자고. 같이 자겠다고.”
내 말에 주연은 한숨을 폭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는 다시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난 그런 주연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잠은 오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주연의 몸과는 다르게 내 몸은 진작부터 깨어나기 시작했었으니까. 속으로 천천히 열을 세었다. 그리고 또 다시 열을. 또 다시 한 번 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