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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렇게 얼마를 세었던 걸까. 잠이 들었던가 보다. 어느새 주연이 나를 흔들며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이초황. 일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주연이 얼굴을 찡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배고파.”
“……응?”
“배고프다고. 자꾸 내 흉내 낼래?”
그냥 생각 없이 되물었을 뿐인데, 주연은 다시금 그렇게 짜증을 부려 댔다.
“배고파?”
주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본래도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이지만, 배가 고프면 유난히 더 심해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샌드위치밖에 안 돼. 커피랑. 괜찮아?”
냉장고를 열어 보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연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죽을 것 같아. 저 테이블도 와작와작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픽 웃음이 났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
일단 커피를 내려놓고, 식빵과 재료들을 꺼냈다. 내가 능숙한 칼질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주연은 젖은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훗.”
시답지 않은 생각이 든 탓이다.
이딴 샌드위치보다야 저쪽이 훨씬 더 맛있는데 말이지.
뭐, 이 같은 생각이었다. 칼질을 하면서도 나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다.
“미친 거야?”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주연이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훗, 다 됐어. 앉아.”
난 그저 웃으며 얘기했다. 커피를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곤 샌드위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주연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와작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선 아. 좀 살겠네. 중얼거렸다.
“이럼 버릇 나빠지는데.”
주연이 입술을 삐딱하니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미 넌 충분히 나빠.”
난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그녀가 듣지 못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이로울 때가 많았다. 난 가끔 주연 때문에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할 때, 그녀의 눈을 피해 그녀를 욕하곤 한다. 아마도 그녀가 그 말들을 몽땅 다 알아들었다면 진작 초상이 났어도 났을 일이다. 난 그 생각에 또다시 피식 웃었다.
“이초황. 너 오늘 진짜 이상해. 진짜로 미친 거야?”
주연이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는 말했다. 뭐, 미쳤다고 해 두지. 오늘은 그녀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아침을 먹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또, 더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오늘의 경험은 아주 굉장한 일이었으니까.
“그럴지도…….”
“그거 안 먹을 거야?”
주연이 제 몫의 샌드위치를 다 먹고는 내 손에 있는 샌드위치를 탐냈다.
“더 만들어 줘?”
“아니, 그거면 돼.”
주연이 내 손에 있던 샌드위치를 잽싸게 빼앗아 가 제 입으로 쏙 넣어 버렸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씩 웃는 것이다. 난 그런 주연의 작은 코를 살짝 비틀어 버렸다. 나도 배가 고팠단 말이다.
“……갔을 줄 알았어.”
커피를 홀짝이다 말해 버렸다. 그냥 자연스럽게 넘겨 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주연과 만난 것이 일 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가 나와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아침을 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니가 불쌍해서.”
주연이 작게 킥 웃으며 대답했다.
“뭐?”
“가지 말라고 애원했잖아.”
이젠 숫제 생글거리며 얘기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안 갔어?”
하지만 난 주연처럼 그저 생글거릴 수만은 없었다. 설핏 인상을 썼던 모양이다. 나를 보던 주연의 웃던 낯이 스륵 굳어졌다. 주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선 나를 향해 물었다.
“그게 중요해?”
그녀의 물음에 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중요한가. 모르겠다. 그녀가 왜 가지 않았던가는 생각해 보면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기도 하다. 중요한 건, 왜 가지 않았나가 아니라, 가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었으니까. 주연은 대답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중요한 건, 주연이 내 곁에서 잠들었다는 것이다. 왜…… 가 아니라.
“아니.”
난 간결하게 대답했다. 빙긋 주연이 웃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난 주연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주연이 선선히 내 손에 이끌려 와 입술을 열었다. 아침의 사과, 아침의 첫 담배…… 꺼져 라고 말하고 싶다.
아침, 주연과의 키스는 천국이다.
할 얘기가 있다며 아래층 내 공방으로 내려온 형의 얼굴은 좀 심각했다. 형은 일단 차부터 마시라며 내어놓은 커피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미간만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얘기기에 저러는 걸까. 꺼내기에 난감한 이야기던가, 아주 심각하게 뭔가 틀어졌다는 걸 테다. 나까지 절로 인상이 써졌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혹시라도 형이 말하려는 것이 아버지와 관련되었다면 더더욱. 난 아버지의 얼굴만 생각해도 한숨부터 나온다. 언제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부터 조금씩 틀어지던 관계는 지금은 쉽사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 밖에는.
“뭐야? 할 말이 있어서 내려온 거, 형 아니야?”
무슨 얘기든 간에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답지 않게 너무 머뭇거리는 것 같아 나도 몰래 목소리가 커졌다.
“집, 아버지 일인 거야?”
설핏 인상을 쓰며 묻는 내게 형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런 식이면 좀 짜증인데, 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난 역시 형에게 좋은 동생은 아니었다.
“어제 아침에 니 오피스텔에 갔었어. 전날, 니 집에다 중요한 설계 도면이 든 시디를 놓고 왔더라고, 보니까. 오전부터 그쪽 간부랑 미팅이 잡혀 있어서 그냥 내가 찾아가야지 싶었어. 너야 잘 것 같아서 그냥 문 따고 들어갔지. 현관에 딱 들어섰는데, 여자 신발이 보여…….”
신발 이야기를 하며 내 눈치를 보는 형에게 난 계속해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살짝 열린 니 방문 사이로 낯익은 여자를 봤어. 일부러 본 건 아니야. 그래. 약간의 호기심이었지. 니가 워낙에 깔끔 떠는 녀석이라 집에 여자 들이는 거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 봤나 싶은 거야. 그게…….”
“은주연 맞아.”
이미 보았으면서도 막상 내 입을 통해 그 여자가 주연임을 확인한 것은 또 다른가 보다. 형의 눈이 커졌다.
“그, 그래? 둘이 언제부터, 아니, 아니…… 주연이랑 너, 둘이…….”
“그래. 은주연 맞고, 우리 연애한 지 일 년 좀 넘었고. 그 정도면 그 여자랑 나, 같이 자는 거 일도 아냐.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삐뚤어지고 버릇없는 말투였다. 형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하지만 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머리가 다 쭈뼛 서는 것 같았으니까. 난 거칠게 소리쳤다.
“주연이한테 딴 맘 있었어? 그래?”
“뭐라는 거야, 자식이! 아니야!”
형은 재빨리 부정했다. 그러고는 어이없단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댄다.
“난 그냥…… 진심이냐?”
불신이 가득 찬 눈이었다. 어이가 다 없다. 형의 동생은 주연이가 아니라 나였다.
“그게, 형한테 중요해?”
“너만큼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피붙이니까, 넌. 근데 주연이도 나한텐 동생이야. 가여운 녀석이고, 그래서 걱정이 많이 되는 녀석이야.”
“훗. 그러니까 나 같은 녀석이라 주연이가 걱정된다? 그거야?”
난 비죽 웃으며 형에게 되물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설사 나를 나쁜 남자쯤으로 치부했다 하더라도 그 말 속에 주연을 아끼는 형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진지했던 적 없었어.”
난 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제야 형의 불신에 차 있던 눈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훗. 근데, 형. 형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형이 걱정해야 할 사람은 주연이가 아니라 나야.”
“뭐?”
대체 무슨 소리냐 묻는 것이다. 주연은 본래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들리지 않으니, 굳이 답한 이유가 없거니와 원체 사람들에게 무심한 성격이기도 했다. 그녀는 꼭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말이 많은 여자인 것도, 신경질을 잘 피는 여자인 것도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한다. 형이 보는 주연은 내가 아는 주연과 다르다. 그러니 형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는 말인가 싶으면서도 형에게 말했다.
“신경질을 펴 대면서 나를 골려 대는 녀석도 주연이고, 그만 만나자며 내 속을 썩이는 것도 은주연이거든.”
“뭐라고?”
당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픽 웃음이 났다. 내가 형이나 희연 누나를 붙들고 속속들이 주연의 작태에 대해 설명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나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흥. 이중인격자.
난 속으로만 주연을 욕했다. 하지만 그러다 또 픽 웃어 버렸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모습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좋았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 느낄 수 있는 그것이 너무 좋다.
“희연이도 모르는 거지?”
“누나가 알았다면, 진작 형도 알았겠지.”
“훗, 그렇지. 그걸 알고도 절대로 가만있을 녀석이 아니지.”
“누구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어느 순간 여자로 보였고, 그래서 여자로 만나. 형이 알았으니, 이제 곧 희연 누나도 알게 되는 건가?”
“숨기고 싶어?”
숨기고 싶으냐고? 아니다. 절대로.
동네방네 떠벌리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었다. 물론 주연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절대로!”
난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
“주연이 또 다치게 되면, 내 동생이라도 너 안 봐줘.”
또, 라…….
살살 풀려 있던 내 입가가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도. 머릿속이 서늘해지는 것 역시.
“하나도 안 무서워. 희연 누나라면 모를까.”
굳어진 얼굴을 애써 풀며 생글거렸다.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지만, 스치듯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깝다. 내 시간이. 또 내 여자의 과거가.
“희연이가 좀 무섭긴 하지?”
내 말에 형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