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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누난 주연의 일이라면 좀 과하게 나섰다. 남다른 그녀들의 가족사도 그것에 한몫했고, 정의감 가득한 희연 누나의 성격 역시 한몫했다.
희연 누나의 아버지가 잠깐 바람피웠던 상대가 주연의 어머니였다. 희연 누나가 태어난 지 고작 1년 만에 주연이 태어났으니, 이건 누가 보아도 좀 과한 상황이었다. 몸이 약했던 주연의 어머니는 주연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주연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희연 누나의 어머니는 주연을 싫어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누나의 어머니는 아직도 주연에 대해 민감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주연은 자신의 어머니와 판에 박은 듯 닮았단다. 잊을 수가 없겠지. 그 지독했던 배신감을 말이다. 어찌 되었던 누나의 어머니는 그랬고, 아버지 역시 그녀를 한때의 실수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오빠인 희창 역시 주연과는 데면데면한 사이란다.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그래서 외로워했던 그녀에게 희연 누나는 하나뿐인 가족이었고, 하나뿐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피붙이였다.
주연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꼭 피붙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 말을 하던 주연은 공허해 보였고, 또 반대로 내가 본 그 공허함이 잘못 본 것인 양 지독히 슬퍼 보이기도 했다.
“형한테 말하기는 낯간지럽지만, 사랑해. 주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더없이 똑 부러지게. 단호해야 할 만큼 진실했고, 진실한 만큼 확실한 마음이었으니까. 내 말에 형은 안심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고는 사실은 되게 바빠, 투덜대며 위층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보고 싶어.]
문자를 보냈더니, 띠링 하고 곧장 답 문자가 날아왔다.
[배고파.]
난 주연이 보낸 문자를 보며 혼자서 키득댔다. 배가 고프면 유난히 신경질을 더 펴 대는 여자였다. 온 집 안을 쿵쾅거리며 걸어 다닐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지환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건 말건 난 다시금 주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 먹을래?]
띠링. 역시 곧장 답 문자가 날아든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주연이 보낸 답 문자는 아주 짧고 아주 강렬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요, 형?”
“신경 끄고 일이나 해.”
아무 소리도 하지 말란 말이다. 생각 좀 하자 이거지.
이게 무슨 뜻인 거지? 난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곧장 주연에게 가야 하나? 아니, 그냥 장난인가? 아니, 아니다. 주연은 이런 식의 장난을 칠 줄 모르는 여자다. 아니, 싫어하는 여자였다.
“아아. 뭐냐고.”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나라고 했다. 그거면 된 거지, 뭐. 난 결정을 내렸다. 곧장 그녀에게 가기로.
“야, 지환이.”
“예. 형.”
“나 좀 나갔다 올 거야. 김 사장님 오시면 저 안쪽에 놔둔 보석함 드려. 나, 급한 일 땜에 나갔다 그러고.”
난 책상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어 들고 잽싸게 공방을 나섰다.
띠링.
그때, 다시금 휴대폰이 울렸다.
“허, 내참. 하! 은주연, 진짜 너…….”
문자를 확인한 난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
몽글몽글 차오르던 거품이 스륵하고 한순간에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허탈하다고 하는 거다. 허탈했다. 기운도 하나도 없고.
그러다…….
“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주연이 이런 식의 장난이라니.
은주연한테 이런 유치함이라니.
미치겠다. 진짜.
난 공방과 건물 주차장 사이에 서서 한참이 쿡쿡거리며 웃어댔다. 공방 문을 비스듬히 열고서 지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건, 동그랗게 눈을 뜬 주연이었다.
“샌드위치 먹고 싶다며?”
난 오른손에 든 봉지를 위로 들어 흔들어 댔다. 대번에 주연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때가 언젠데?”
주연에게 가려다 마지막 문자를 확인하고 쿡쿡거리고 있었을 때, 부탁한 보석함을 찾으러 온 김 사장과 딱 맞닥뜨렸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다시금 공방으로 들어가야 했고, 흐뭇해하는 그에게 차근차근 보석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와이프가 흡족해 할 거라면서 식사 대접을 권했고, 딱히 거절할 말이 없어 그와 점심을 함께했다. 그러고는 부랴부랴 마트에 들러 샌드위치 재료와 과일을 좀 사서 주연의 집으로 왔던 거였다. 뭐, 일단 툴툴댈 것은 짐작했다. 차에서 막 내리기 전에 보았던 시계는 이미 2시 30분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미안.”
난 퉁퉁 부어 있는 주연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풀어질 기미가 없는 주연은 쿵쿵 소리가 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식 웃었더니, 금세 뒤돌아선 그녀가 나를 흘겨봤다.
“재밌니?”
“아니, 전혀.”
정색하며 대답했다. 한데 눈을 가느다랗게 뜬 그녀는 추궁하듯 다시금 물었다.
“근데 왜 웃어?”
“웃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널 몰라?”
주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렇지. 너란 여잔 나를 너무나 잘 알지. 내가 그런 것처럼.
“귀여워서 그렇잖아.”
식탁에다 샌드위치 재료를 꺼내놓고, 과일과 음료수를 냉장고 안에다 정리하면서 주연을 향해 말했다. 찌릿,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든다. 주연은 나의 귀엽다는 말을 질색했다.
“뭐랬어?”
고개를 틀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던 말인지라 읽지 못했나 보다. 주연이 날카롭게 되묻는다.
“아무 말도 아냐. 너, 나 잘 안다구. 내가 너 잘 아는 것처럼.”
둘러댔지만 주연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점심, 안 먹었지?”
“샌드위치 말했잖아. 당연히 바로 올 줄 알았어. 늦겠다는 문자도 안 줬잖아.”
투덜투덜. 그러면서 간간이 나를 흘기는 그녀는 정말 귀엽다. 나는 고개를 틀고서 작게 킥 웃었다.
“배고파 죽겠어. 우유 한 잔 마셨단 말이야. 안 오겠다고 문자만 줬어도 이렇게 굶고 안 기다리잖아.”
생각하고 보니 또 신경질이 나나 보다. 나중엔 빽빽 소리를 지른다.
“기다려. 금방 해줄게.”
난 주연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곤 옆에 걸려 있는 레이스 앞치마를 둘렀다.
“은주연 집에 레이스 앞치마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알지?”
주연은 심플한 걸 좋아했다. 요란한 걸 질색해서 집 안도 온통 하얀색 일색이었다. 벽지도 가구도 이불도 몽땅. 옷장 안의 옷들도 거의가 하얀색과 무채색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주연의 집에 유독 튀는 그 하나, 그것이 핑크색 레이스 앞치마였다. 볼 때마다 참 웃긴다. 이 앞치마는.
“희연 언니가 사다 놓은 거랬잖아.”
주연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랬다. 희연 누나는 유독 레이스를 좋아했다. 괄괄하고 터프한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무튼 이쪽도 그쪽도 레이스랑은 안 어울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만들며 간간히 돌아본 주연은 식탁에 엎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주연의 시선이 내게 머물 때, 난 심장이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쉬이 포기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욕심내게 되는 아주 간절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주연은 그 순간을 자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더 간절하고, 더 따뜻하고, 더 행복한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른다. 나를 홀리려 일부러 하는 짓이라면 주연은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난 그녀에게 제대로 홀려 있었으니까.
“먹어.”
샌드위치 세 쪽과 직접 간 오렌지 주스를 그녀 앞에 놓았다. 벌떡 일어난 주연은 눈을 빛내며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하아.”
작은 혀끝이 부드러운 입술을 쓸고 지나갔다. 온몸이 쪼그라든다. 그러고는 스멀스멀 열이 오른다. 이럴 땐, 참 난감하다. 온통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에 시선을 뺐긴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남자라니. 빵 조각을 입가에 묻힌 여자와 키스를 생각하는 남자라니.
“왜? 너도 점심 안 먹었어?”
주연이 내 시선을 느꼈던지 한참 먹던 걸 중단하고 내게 물어왔다.
내가 보고 있던 건, 그 샌드위치 쪼가리가 아니라, 니 입술이거든?
난 팩 쏘곤 숨 막히게 키스해 버리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얘기했다.
“아니. 맛있게 먹기에. 더 만들까?”
응. 주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는다.
그래. 일단 먹이고 보자. 배가 불러야 신경질이 좀 덜하다. 이 여자는.


2장.


“뭐?”
여태 단 한 번도 예고하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그런데 모레 출발이란다. 이 여자는 늘 이런 식이다.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저 내겐 통보만 할 뿐이었다.
제길.
“한 일주일 정도 머물래. 전부터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거기.”
차갑게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도 주연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그래. 얘기했던 것도 같다. 정말 거기에 가보고 싶다고. 가자하고 갈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닌지라 따로 적금까지 붓고 있다고도 했었다. 맞다. 분명 주연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데 거기다 내가 그랬었다. 같이 가자고. 파리엔 꼭 함께 가자고.
빌어먹을.
“은주연. 그거만 기억해? 가보고 싶다 말했던 것만?”
내 물음에 주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어. 같이 가자고. 꼭 거긴 같이 가자고. 그건 기억, 안 나?”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천천히 이야기했다.
“기억나.”
하지만 주연은 비죽 웃으며 산뜻하게 그럴 뿐이다.
“그런데?”
“혼자 가고 싶어.”
늘 혼자 갔었잖아!
빽 쏘아주고 싶었다. 어떻게 저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 버린다. 주연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로서는 전의 상실이다. 혼자가고 싶다는데, 그것이 이유라는 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