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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정원영. 결혼하자, 나랑.”
원영은 이 남자가 미쳤나 싶었다. 꼭 밥 한 끼 먹자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예의 표정의 변화도 하나 없이 이 남자가 하고 있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결혼하자는 말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미쳤구나?”
“훗, 그런가?”
이 남자, 이제는 피식 웃는다. 그렇지. 제가 해 놓고도 이건 아니지 싶은 거겠지. 아무래도 그저 농이었던가 싶어 원영 역시 그저 피식 웃어 버렸다.
“진심이야.”
어느새 웃는 낯을 거두고 진지해진 얼굴이었다.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남자와는 몇 번의 식사를 한 것이 다였다. 진심 어린 청혼을 할 만큼의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워낙에 ‘옥토버페스트’에 자주 들렀던 그녀였던지라 그와 상관없이 이곳에 들러 그를 마주한 적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이 남자와 인연이 닿은 것을 헤아려 보자면 고작 2개월이었다.
그와 자신은 연인이었던 적도 없거니와, 연인이 되어 보자 싶은 생각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이라 했다. 그가 자신과 하고 싶은 것이 결혼이라고 했다.
“나 사랑해요?”
“아니.”
“그럼 나 잘 알아요?”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하다는 정도? 그래서 나랑 잘 맞을 것 같다는 정도?”
“어떻게?”
“아직 결혼은 생각이 없어. 하지만 언젠가 결혼은 할 예정이지. 사랑 따위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고. 제 일에는 열정적이지. 남의 눈은 신경 쓰지 않으며, 자기주장 확실하고, 자기 말에 책임질 줄 아는 고집도 있지…….”
“마스터.”
진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윤의 말을 끊으며 원영은 그를 불렀다.
“왜?”
원영은 되묻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안에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들어 있잖아요.”
“아아. 아직 생각이 없다는 거?”
그의 말에 원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젠가 할 예정이잖아?”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조금 앞당겨 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어차피 할 거라면 말이야.”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원영은 잠깐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웃음에 설득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갑자기 왜 결혼 생각이 들었는데요?”
“집안에서 성화가 심해.”
그가 매끈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다 그녀의 잔을 채워 갔다. 그러고는 남김없이 그 잔을 비워 버렸다.
“마이 갓. 내 맥주.”
“걱정 마, 내 줄 테니. 나를 앞에다 두고 맥주 걱정이야?”
“훗, 그러게.”
원영은 피식 웃고 난 뒤, 그에게 계속 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잘못하다간 팔려 가기 십상이야. 우리 아버지가 한다면 또 하는 사람이거든.”
“팔려가?”
“입맛 당기는 적당한 배경을 가진 어여쁜 영양 말이야.”
“정략결혼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들 부르더군. 비위 상하는 말이야. 안 그래?”
흔히 정략결혼이라 함은 사회적으로 부유하거나 지배층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 아니던가?
“마스터, 당신 부자예요?”
“우리 아버지가 부잔가 봐. 다들 그러더군.”
“그래요?”
“그러니, 네가 나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나와 더불어 아마도 상당한 지참금을 챙길 수 있을 거야.”
장난스럽게 한쪽 입술을 슬쩍 말아 올리며 그가 말했다. 거기다 눈까지 찡긋거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 댁에서 나를 거절할 수도 있어요.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거든.”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어. 내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면, 이란 단서가 붙은 정략결혼이거든. 나를 사랑해 주는 척만 해 주면 되는 거야. 쉽지 않아?”
“결혼이라…….”
일단 이 남자랑 결혼을 해서 함께 산다면 외롭진 않을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흥에 겨운 잘생긴 얼굴을 원 없이 볼 수 있을 테고, 자기와 비슷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것저것 참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뭐가 있을까.
원영은 턱을 괸 손에서 스르륵 검지를 들어 올려 자신의 볼을 톡톡 쳤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서.



1장.


“어떻게 된 거야?”
원영은 앞에서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자신을 안는 재희에게 멍한 얼굴로 물었다. 재희는 유학 생활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일 뮌헨에 정착하겠다고 했었다. 6개월 전엔 원하던 뮌헨호텔에 입사했다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간간이 전화를 해서는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마지막 통화를 했던 지난달에도 말한 적 없던 한국행이라니, 원영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다시금 재희를 향해 물었다.
“잠깐 온 거야?”
원영의 물음에도 재희는 그저 방싯방싯 웃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유재희. 어떻게 된 거냐니까.”
“아주 왔어.”
그러면서 성큼성큼 원영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놀래 주고 싶어서 얘기 안 했어.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세현호텔 입사 통보 이미 받았었어. 결정한 건, 좀 더 전이었고. 언니야. 나 커피.”
“어. 그래.”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니? 언니한테만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 같아.”
짧은 머리, 나이에 비해 한결 앳되어 보이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한 눈빛. 그대로다. 이만큼 가까워진 것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한 눈빛은 가끔 아주 멀다. 때때로 처음 만났던 그때의 서늘함이 느껴질 만큼. 원영은 재희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픽 웃었다.
“재미없다고?”
“응”
원영의 물음에 재희가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항상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놀리듯 말하던 재희였다.
“근데 느닷없이 들어오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뭐야?”
원영이 커피를 건네며 진지하게 물었다.
“사랑.”
간결하게 대꾸하는 말이 사랑이란다. 원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금 재희를 향해 물었다.
“사랑이라고?”
“응. 사랑이라고. 가슴을 된통 흔들어대는 사랑이 생겼다고. 그래서 왔다고.”
“그래서 왔다고?”
“뭐야, 재미없게. 왜 자꾸 되물어?”
“믿기지가 않아서.”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에 들어오더라도 적어도 3년쯤 후일 거라고 말하던 재희였다. 제대로 호텔리어로 성공해 원하는 호텔에 입사할 거라 말했던 재희였다. 그런데 그걸 포기한 이유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큼이나 그것에는 무심했던 재희가 사랑을 말하고 있는 거였다.
“사랑이 있냐고 물었었지?”
재희가 잠깐 왔던 지난해였다. 세계적으로 흥행이 되었던 멜로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영은 재희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그때 재희는 글쎄, 라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었다.
“있더라. 그 사람을 바이에른 광장에서 처음 봤는데…… 그 사람밖에 보이지가 않더라. 그리고 호텔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는…… 운명 같더라. 내가 운명을 말하더라, 언니야.”
더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같이 말하는 재희가 낯설었다.
“그 사람이 파견 근무 기간을 끝내고 한국으로 들어간다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냥 당연히 그 사람이 가겠다는 곳에 가야겠는 거야. ……우습지?”
우습냐고 물으면서도 배시시 웃는 재희였다. 재희의 말에 원영은 다시 한 번 픽 웃어 버렸다. 우스워서라기보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근데 그 사람은 날 거절해.”
“뭐?”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대. 아니. 그건 내 생각이야. 그런 것 같아 보였어.”
“그런데도 따라 나왔다고?”
원영은 어이없는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응. 운명이니까.”
“그 운명이란 소리는 좀 집어치워. 똑똑한 줄 알았는데, 너 지금 되게 바보 같아.”
“사랑은 원래 바보 같은 감정이야. 언니.”
“하!”
정말 바보 같은 재희의 말에 원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머니는?”
“좋아해. 알잖아. 엄마는 나 거기 머무는 거 싫어했던 거.”
“그래. 출근은?”
“일주일 후에.”
“집은?”
“호텔 근처에 자그마한 원룸 하나 얻었어. 대충 정리도 끝냈고.”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 말 안 했다고?”
원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재희를 향해 물었다.
“하던 대로 하지? 무심하게. 무덤덤하게. 훗.”
재희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원영의 표정은 금세 딱딱해졌다. 그랬다. 처음부터 이 아이에게 느꼈던 거부감이 사그라졌고, 원체 쾌활한 재희의 성격 탓에 어울리는 것도 금세 익숙해 졌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꼬집어 말하는 재희를 볼 때마다 원영은 기분이 상했다. 다분히 장난이 섞인 말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재희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같이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이제 재희는 자신에게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마음으로 인정한.
“뭘 또 그렇게 무섭게 그러냐? 그냥, 놀래 주고 싶었다니까. 서운해?”
“점심 먹으러 가자. 안 먹었지?”
“응. 아침도 안 먹었어. 일어나자마자 온 거야. 언니가 막 보고 싶어서.”
“늦었어. 아부 떨긴.”
원영이 눈을 흘기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운전은 좀 는 거야?”
주차되어 있던 원영의 하얀색 소나타 조수석 문을 열며 재희가 원영을 향해 물었다. 다분히 놀리는 듯한 얼굴로, 빙글거리며.
“무사고 5개월째.”
“자중하셨네?”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하는 재희를 향해 원영은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 어째 다른 건 금세 익숙해지면서 운전은 그리 되지 않는 것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한테는 다녀왔어?”
“아니. 내일쯤 가 볼까 싶어. 통화는 했어. 출발할 때도, 도착해서도, 또 좀 전에 언니한테 오기 전에도.”
“그래.”
“나한테, 이렇게 마음을 준 것처럼 아버지나 우리 엄마한테도 그래 주면 안 되나?”
지나는 말처럼 재희가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원영에게 말했다. 하지만 원영은 그저 입을 다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아이가 마음에 와 닿을 뿐이었다. 모든 상황을 다 떠나서 그저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다른 건 생각한 적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경 쓰지 마. 알잖아. 생겨먹은 오지랖이 이런 거. 언니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닌 걸 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상처, 또는 배신감. 그것이 원영으로 하여금 무심하고 시니컬한 성격을 형성하게끔 했던 것이라는 거. 재희는 그걸 알았다. 그래서 5년 전 그녀의 어머니와 재혼한 자신의 아버지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식의 이혼이었고, 그 과정에 얼마만큼 상처를 받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생각과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가끔 재희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뭐 먹을까?”
“거기 가자. 언니가 자주 가는 스파게티 집. 전에 거기 데려갔었잖아. 되게 맛있었어.”
“아아, 스텔라?”
“응. 거기.”
점심시간이 조금 안 된 시간인지라 ‘스텔라’에는 별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원영은 비어 있는 창가 쪽 자리로 가 앉아 즐겨 먹는 스파게티를 시켜 놓고 재희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다시금 그녀가 말한 그 사랑, 에 대해 물었다.
“사랑 별로라 그랬잖아.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랬는데 아니더라니까. ……어?”
배시시 웃으며 대꾸하던 재희가 딸랑거리며 소리가 나는 레스토랑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 무슨 일인가 싶어 원영도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봐! 운명이라니까.”
씩 웃으며 말하면서도 재희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원영은 단박에 흔들리는 눈으로 재희가 말한 그 운명을 보며 숨을 참아야 했다.
“승표 씨!”
막 지나치려던 테이블에서 나는 소리에 승표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