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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와,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생글거리며 말하는 재희를 향해 살짝 웃어주던 승표가 뺨에 와 닿는 눈길이 의식되었던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보기에도 아슬아슬할 만큼 흔들리는 눈으로 그 자리에 굳은 듯 섰다.
“아. 이쪽은 우리 언니예요.”
“안녕…… 하십니까. 한승표라고 합니다.”
당황스러운 그 인사에 원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재희가 눈짓을 했다.
‘뭐 해? 인사하잖아.’
그러면서 입으로만 조심스럽게 원영을 향해 읊조렸다.
“아아. 안녕하세요. 정원영입니다.”
“뮌헨호텔에서 같이 일하셨던 분. 세현호텔에서도 같이 일하게 됐고. 와. 근데 정말 반갑다. 어떻게 여기서 다 보네요. 여기 우리 언니 단골집인데. 맛있기로 소문났다더니 승표 씨도 여기 다니시나 봐요?”
“아, 응…….”
흘끗 원영을 바라보는 승표의 눈에 찰나의 고통이 스쳤다. 하지만 원영은 그걸 보지 못했다. 모른 척 지나쳐 주길 바란다면 그래 주자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약속 있어요?”
“어, 친구 좀 보기로 했어.”
“합석하면…….”
“유재희.”
원영이 재희의 말을 끊으며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재희는 입술을 자그맣게 삐죽이며 원영을 향해 알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봐요. 합석하고 싶은데 워낙에 우리 언니가 낯을 가려요.”
재희가 눈을 찡긋하며 승표를 향해 말했다.
“…….”
워낙에 무심한 사람이었지만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승표는 다시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원영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그대로인지. 짧은 머리칼, 새하얗고 말간 얼굴 위로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입술. 여전히 아프다. 아니, 무뎌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원영의 곁을 떠나온 것이 자신인데도 버려진 것 같은 기분으로 매번 가슴을 쥐어뜯던 나날들이었다. 시선조차 허용하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린 원영을 바라보는 승표의 마음이 금세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월요일에 봐.”
승표는 몸을 틀고 걸음을 떼었다. 그는 이미 사람이 있는 두 테이블을 더 지나쳐 원영과 재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부터 세 번째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원영이 있다. 그냥 지나쳐 와. 원영이한테 알은척하지 말고. 더 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해. 다 왔어? 그래. 알았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탁 올려놓으며 승표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저 생각 없이 여기로 약속을 잡았다. 예전부터 늘 자주 오던 곳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지섭에게서도 여기 이름이 나왔고, 자신도 그러겠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 시간에 원영을 딱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가슴은 처음 원영을 마주친 순간부터 두 근 반 세 근 반 제 속도를 잃고 헤매고 있었다.
“휴우…….”
“원영이 옆에 누구냐?”
지섭이 자리에 앉자마자 승표를 향해 물었다.
“동생이래.”
“원영이한테 동생이…… 아아. 새어머니 딸?”
“그런가 봐.”
“그런데 갑자기 왜 원영일 모른 체하고 지나치래? 원영이도 나 봤는데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리고.”
“재희 씨를 알아. 그런데 재희 씨가 원영이 동생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언니라고 소개하기에 나도 모르게…….”
“언니라고 소개하기에 모른 척했다?”
단박에 승표가 할 말을 간파한 지섭이 삐딱하니 물었다.
“그래.”
“거기에 원영이도 동참한 거고?”
“…….”
승표는 지섭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앞에 놓인 물 잔만 만지작거렸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자식.”
“훗.”
그 소리에 승표가 피식 웃었다. 그가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었다. 그저 담백하게 잘 지냈냐는 인사를 건네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어색하게 하는 인사라니, 두 눈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흔들려 버리는 모습이라니…….
“괜찮냐?”
“괜찮겠냐?”
괜찮지 않았다. 원영과의 재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우연히든 아니든 만나게 된다면 깔끔하게 인사를 건네줄 생각이었다. 너 아니어도 이렇게 건재하다는 걸 보여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 같은 모습이었어도 원영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의 만남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에, 맞닥뜨리는 순간을 지나고서도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병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탓하는 지섭을 향해 승표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에 지섭의 얼굴은 더 걱정스럽게 변했다. 누구보다 자신이 원영을 향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아는 녀석이었다. 승표는 원영과 재희가 앉은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재희 의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원영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찌르르 아렸다.
“원영이, 그대로지?”
“…….”
“한국 들어오면서 무슨 생각 했냐? 원영이 어떻게 할래?”
“모르는 거냐?”
“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원영이는.”
승표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에 지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 했다.
“그렇지. 원영이는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근데 그건 아냐?”
“뭘?”
“우리 원영이…… 이쪽 신경 쓰이나 보다?”
지섭의 말에 승표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원영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마주하는 그 눈에 괜히 놀라 다시금 고개를 돌려 버린 건, 역시 그 하나다.

톡톡톡.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원영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언니!”

전화를 받자마자 느닷없이 그같이 말하는 재희였다.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고 하지 않고 있었더니, 설핏 떨리는 음성으로 재희가 말했다.

“거봐, 운명이랬지? 승표 씨가 자기 옆에 있어 달래.”

그러고는 한참을 들떠 횡설수설하며 그에 대해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멍해졌었다. 왜일까, 라는 물음과 함께. 그렇게 승표와 재회한 것이 열흘 전이었다. 그리고 어제, 재희로부터 그 같은 전화를 받았다. 늘 거절만 했었다는 그가 갑자기 왜, 재희를 받아들인 걸까. 혹시 자신이 그 같은 결정에 뭔가 촉진제 역할을 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전화를 끊고 한참을 고민했더랬다. 그러고는 결국 승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야 할 것 같다고.
“미안. 늦었어.”
상념을 깨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승표가 서 있었다.
“아니. 나도 좀 전에 막 왔어. 앉아.”
“그래.”
변한 곳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깔끔하게 잘린 머리칼. 남자 피부라고 하기엔 유난히 하얀 피부. 그리고 그에 딱 떨어지는 무테안경. 하긴, 승표와 헤어져 그를 보지 못했던 시간은 고작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잘 지냈어?”
“늘 똑같았어.”
그랬다. 늘 똑같았다. 승표가 없는 것 말고는.
“안 막혔어?”
“막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한가하더라.”
“어. 여기요!”
원영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고는 앞에 앉은 승표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씽긋 웃었다. 그러자 승표가 얼굴을 굳혔다.
‘후…….’
“뭐 마실래?”
“커피.”
“사이다 주세요.”
“훗.”
“왜?”
“여전하구나, 그놈의 사이다는.”
스르르 풀어지는 얼굴. 그런 승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원영은 그제야 마음이 좀 느긋해지는 걸 느꼈다.
“아아. 훗, 그러게.”
원영이 마주 웃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금세 바뀌었다. 그녀는 괜스레 서글퍼졌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여기는 승표는 그랬다. 자신이 승표에게 부족했을지언정 자신의 마음 안에선 그 누구보다 우선이었던 그였다.
“놀랐지?”
“나만큼 너도 놀랐잖아.”
“사실은 그래.”
“응. 너 당황하는 거 다 보였어. 조마조마해서 혼났다.
원영의 말에 이번엔 승표가 피식거렸다.
“바보 같았어?”
“응.”
원영은 그때를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재희…… 내내 거절하다가 받아들인 이유, 혹시 거기에 내가 있니?”
금세 진지해진 얼굴, 차분히 내려앉은 눈빛으로 원영이 승표에게 물었다. 찻잔을 집어 들려던 승표가 딸깍 소리를 내며 다시 내려놓았다.
“내 짐작이 틀렸니?”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승표가 틀렸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아니라고. 그저 재희와 한번 시작해 보고 싶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한데 한동안 승표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근두근. 가슴이 불안하게 널을 뛰었다.
“정원영. 그거 알아?”
“…….”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바랐는지…… 알아? 왜, 라고 물어 주길, 또 한 번만 잡아 주길…… 그랬다면, 그랬다면…….”
“지금, 그 얘기 아무런 의미 없어. 우린 우리 얘기를 하기 위해 만난 게 아니야. 승표 너와 내 동생, 재희를 말하자는 거야. 운명을 만났다기에, 사랑 별 볼 일 없어 하던 아이가 운명 운운하며 사랑 타령을 해 대기에 누군가 했지. 대체 뮌헨에서 자리 잡겠다던 애가 갑자기 제 계획 다 접어 가며 따라 나온 그 남자가 누군가, 어떤 사람인가 그랬어. 그런데, 그게 너야.”
“…….”
“내내 거절만 하던 네가 시작을 해 보자고 했다며? 그 얘길 하면서 행복해 죽어, 재희가. 다시 물을게. 재희에게 시작을 말한 그 속에 나, 있니?”
차근차근한 원영의 물음에 승표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져갔다. 승표는 쏘아보듯 원영을 한번 쳐다보다 아예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정원영, 네가 거기 있냐고?”
승표의 입매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거기에 왜 네가 있을 거라 생각해?”
“아니야?”
“아니야. 재희 좋은 여자지. 밝고 명랑하고 쾌활하고,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지.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재희 거절했던 그 속엔 너 있었어. 분명. 하지만! 없어. 이번엔 달라. 재희에게 시작을 말한 건, 그것과는 달라. 너, 절대로 없어. 네 착각이야. 대답이 마음에 드니?”
“그러지 마.”
“뭘?”
“안 어울려.”
‘안 어울려, 그렇게 싸늘한 거. 안 어울려. 그렇게 차가운 넌.’
“나도 내가 왜 그렇게 인사를 건넸는지 모르겠어. 그냥 반갑게 ‘오랜만이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황스러워 나도 모르게 한 그 인사말 하나가 상황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도…… 알겠어.”
“승표야. 우리, 절반이 넘는 사람을 공유하고 있어. 네 친구가 내 친구고, 네 선배가 내 선배고, 네 어머니에 우리 아빠에…… 시작하려거든…… 아니, 시작했거든, 깨끗하게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중에 재희나 너에게 상처가 될 일은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승표는 차분하게 정리를 하는 원영의 흔들림 없는 표정을 외면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지. 시작을 말한 것이 자신이었으니. 시작이라면, 아니, 시작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원영을 모른 척했던 상황을 재희에게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야겠지.
“원영아. 나 그렇게 떠나고, 아팠니? 나만큼, 아니, 아니…….”
왜 원영에게 그런 걸, 물은 건지 승표는 자신조차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아픈 만큼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상처받았었는지. 지난 상처를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팠건 아니건, 이제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승표의 시선이 원영에게로 돌아오는 순간,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무의미하다는 듯 무덤덤하게 읊조렸다. 그에 마음을 또 다치는 승표다. 상처가, 상처가 너무 깊었나 보다. 딱지가 벌어져 핏물이 흐른다. 아직도 원영은 승표에게 아프다. 아픈 사랑이다. 아까운 사랑이다. 서러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