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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보다 짙은
1화
프롤로그
까만 창에 눈발이 몰려들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창틀에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이정은 로브를 걸친 채 방의 한쪽 구석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게 아치형으로 나 있는 창문에 코를 박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건 없었다. 뭍에서보다 비교적 일찍 시작되는 제주도의 밤은 여느 때처럼 새카맸다. 다만 오늘은 어둠 속에 포말처럼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다는 것이 얼마쯤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이정은 입술 끝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니 이내 입술 언저리의 창문에 하얗게 성에가 낀다. 오늘도 하루가 넘어가고 있었다.
동하와 함께 서울을 떠나 이곳 제주도에 정착한 지 5년. 세월은 여전히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흘러가는 밤도,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는 아침도 여전하다. 그리고 늘 각인하듯 되새겨지는 생각 하나.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텅 빈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루를 마무리할 때 늘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상념을 비워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녀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다. 아쉬워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도록,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돌아섰다. 다시 책장으로 되돌려지던 이정의 걸음을 협탁 위 핸드폰 소리가 방해했다. 밤 11시. 이 시각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동하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은 제법 망설여졌다. 호텔 이사회가 끝나고 만찬과 함께 간단한 술자리까지 겸한 자리였기 때문에 그는 지금 제법 취해 있을 것이다. 그의 취기를 어르고 달랠 동안 하염없이 지쳐갈 자신의 모습이 선했다.
“네.”
액정에 뜬 번호가 동하의 것임을 알면서도, 이정은 항상 첫마디로 존대를 했다. 한 번쯤은 동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주길 바라는 일종의 염원인 셈이다. 물론 그 허무한 염원은 익숙한 저음이 건너오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잤어?
“아니. 눈 오는 걸 보고 있었어. 이제 들어온 거야?”
-응. 건너 와.
“……그래. 알았어.”
이정은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잠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려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젖가슴 골이 훤히 드러난 얇은 실크 로브가 눈에 거슬렸지만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떤 옷을 입든 어차피 동하의 손에 의해 벗겨질 것이다. 이정은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
3층짜리 대저택은 밤과 함께 찾아온 적막으로 휘감겨 있었다. 3층 복도를 지나가는 이정의 슬리퍼 소리만이 이따금 침묵을 깨웠다. 복도의 왼쪽 천장에 일렬로 달려 있는 작은 램프 불빛이, 이정이 지나갈 때마다 반짝거렸다. 그녀의 방을 나와 옆방 한 칸을 더 지나면 곧장 나타나는 동하의 방. 그 앞에 선 이정은 긴장의 숨을 들이켰다.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려던 순간, 안쪽에서 먼저 덜컥 문이 열렸다. 서늘하고 나른하게 내리깔린 동하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정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채 떼기도 전에, 그의 팔이 삐져나와 이정의 손목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에 의해 이정은 순식간에 그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술을 많이 마신 거야?”
이정을 방에 들여놓은 동하는 묻는 그녀를 잠시 빤히 내려다보곤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돌아섰다.
“아니. 마시지 않았어.”
“술을 안 마실 수 없는 자리였을 텐데 용케 잘 견뎠구나.”
“내가 하는 일에 딴지 걸 수 있는 인간이 있나? 내가 마시기 싫다면 마시기 싫은 거야.”
그렇게 말한 동하는 침대 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정은 그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크 그레이 정장에 와인색 타이를 맨 그는 큰 키와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보다 더 예쁘장하고 아름다운 외모는 스쳐지나가는 순간에도 충분히 설렐 만큼 눈에 띈다. 어떤 곳에 있어도 누구와 섞어놔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정의 눈빛은 이내 서글퍼졌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를, 동하의 왼쪽 다리. 은색 철제 지팡이에 의존해야 하는 그의 걸음은 마비가 된 왼쪽 다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절룩거린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에게 떨어진 단 하나의 불행이었다. 그것도, 이정 자신이 만든.
동하의 다리를 볼 때마다 이정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에 후려 맞은 듯 온몸이 아프곤 했다.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휘청거렸고, 그 휘청거림은 매번 흔들리고 갈등하는 그녀를 다잡아주곤 했다.
“무슨 생각 하는데?”
돌아선 그는 지팡이를 벽에 세워둔 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묻는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차가웠지만 부딪힌 눈빛은 깊었다. 이정은 만면에 억지로 흐릿한 미소를 만들어낸 채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
동하의 짧은 턱짓에 이정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허리를 감아오는 남자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눈앞에 놓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가슴께로 뜨거운 무언가가 번져나갔다. 더듬더듬 고개를 움직이며 동시에 허리에 머물러 있던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감쌌다.
“으음…….”
그의 입술에서 탁한 신음이 내뱉어졌다. 실크 가운은 너무도 쉽게 그의 손가락에 의해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쇄골선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얇디얇은 어깨끈이 내려간 건 그 다음이었다. 이정은 벗겨진 상체로 부딪쳐드는 한기에 턱이 떨릴 것 같았다. 엉덩이를 지분거리는 손의 느낌이 선명하여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반쯤 드러난 유방에 동하의 입술이 닿았다. 이정은 시선을 내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입술로 찾은 유두를 입 안 가득 물어버리는 그의 모습이 자극적이었다. 전율이, 염치도 모르고 등허리로 내달렸다. 젖가슴에서 아랫배로, 그리고 더 내려가 자궁을 달구며 숨죽어 있던 욕망을 끄집어내었다.
그가 다른 쪽 유두를 빨아 당기자 이정은 참지 못하고 ‘으읏!’ 신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등을 가득 덮은 긴 머리칼이 그녀의 마음처럼 흔들렸다.
음부에서 숨길 수 없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동하의 손이 나이트 드레스 천을 사이에 두고 더욱 깊고 어두운 곳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이정의 다리가 벌어지고 그의 손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조용하고 느리던 손길은 어느새 맹렬해졌다. 손가락으로 깊이 쑤셔대며 그녀의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쾌감에 이정은 허리를 거칠게 비틀며 동하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음이 노골적인 유혹을 담고 터졌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올려다보는 동하는 씨익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애무는 늘 그랬듯,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침대로 쓰러뜨려 몸을 나누지 않는다. 그가 덮쳐온다면 이정은 속절없이 그에게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하는 절대 그녀를 침대로 이끌지 않았다. 손가락을 빼낸 동하는 젖어버린 그것을 자신의 바지에 스윽 닦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정은 수치스러움에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나이트 드레스, 빨아야겠다. 네 여기 젖은 게 다 묻었을 걸?”
그는 이정의 음부 쪽을 흘깃 내려다본 후 다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짓궂은 미소를 걸친 채였다. 그의 모습에 이정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매번 그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하고야 만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으깨 물곤 끈을 어깨에 다시 걸쳤다. 그러곤 냉랭하게 돌아서서 바닥에 흩어진 가운을 주워 올린 후 걸음을 옮기는데, 등으로 동하의 저음이 날아들었다.
“이정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정은 항상 목이 메었다. 어딘가 사무치는 듯한, 그러면서도 위엄과 신중함을 잃지 않는 음성. 한때 분명히 그에게 설레었고 그를 좋아한 적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달라고, 재차 각인이라도 시킬 듯한 단호함.
“응.”
“잘 자라.”
그래, 그를 좋아했던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 감정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처박힌 채 지내온 5년이라는 시간은 감정을 퇴색시키기에 충분했고, 더는 앞으로 나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에도 바빴다.
동하야, 난 늘 흔들리고 있어.
내 인생이 이대로 주저앉을 까 봐. 머리가 텅 비어지고 손발이 묶인 채로 네가 조종하는 삶에 익숙해질 까 봐. 나는 없고 너만 있는 이곳에, 마비된 네 다리처럼 나도 마비되어 갈까 봐.
방문을 여는 이정은 웃지 않았다.
1화
프롤로그
까만 창에 눈발이 몰려들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창틀에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이정은 로브를 걸친 채 방의 한쪽 구석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게 아치형으로 나 있는 창문에 코를 박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건 없었다. 뭍에서보다 비교적 일찍 시작되는 제주도의 밤은 여느 때처럼 새카맸다. 다만 오늘은 어둠 속에 포말처럼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다는 것이 얼마쯤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이정은 입술 끝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니 이내 입술 언저리의 창문에 하얗게 성에가 낀다. 오늘도 하루가 넘어가고 있었다.
동하와 함께 서울을 떠나 이곳 제주도에 정착한 지 5년. 세월은 여전히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흘러가는 밤도,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는 아침도 여전하다. 그리고 늘 각인하듯 되새겨지는 생각 하나.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텅 빈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루를 마무리할 때 늘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상념을 비워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녀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다. 아쉬워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도록,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돌아섰다. 다시 책장으로 되돌려지던 이정의 걸음을 협탁 위 핸드폰 소리가 방해했다. 밤 11시. 이 시각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동하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은 제법 망설여졌다. 호텔 이사회가 끝나고 만찬과 함께 간단한 술자리까지 겸한 자리였기 때문에 그는 지금 제법 취해 있을 것이다. 그의 취기를 어르고 달랠 동안 하염없이 지쳐갈 자신의 모습이 선했다.
“네.”
액정에 뜬 번호가 동하의 것임을 알면서도, 이정은 항상 첫마디로 존대를 했다. 한 번쯤은 동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주길 바라는 일종의 염원인 셈이다. 물론 그 허무한 염원은 익숙한 저음이 건너오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잤어?
“아니. 눈 오는 걸 보고 있었어. 이제 들어온 거야?”
-응. 건너 와.
“……그래. 알았어.”
이정은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잠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려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젖가슴 골이 훤히 드러난 얇은 실크 로브가 눈에 거슬렸지만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떤 옷을 입든 어차피 동하의 손에 의해 벗겨질 것이다. 이정은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
3층짜리 대저택은 밤과 함께 찾아온 적막으로 휘감겨 있었다. 3층 복도를 지나가는 이정의 슬리퍼 소리만이 이따금 침묵을 깨웠다. 복도의 왼쪽 천장에 일렬로 달려 있는 작은 램프 불빛이, 이정이 지나갈 때마다 반짝거렸다. 그녀의 방을 나와 옆방 한 칸을 더 지나면 곧장 나타나는 동하의 방. 그 앞에 선 이정은 긴장의 숨을 들이켰다.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려던 순간, 안쪽에서 먼저 덜컥 문이 열렸다. 서늘하고 나른하게 내리깔린 동하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정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채 떼기도 전에, 그의 팔이 삐져나와 이정의 손목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에 의해 이정은 순식간에 그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술을 많이 마신 거야?”
이정을 방에 들여놓은 동하는 묻는 그녀를 잠시 빤히 내려다보곤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돌아섰다.
“아니. 마시지 않았어.”
“술을 안 마실 수 없는 자리였을 텐데 용케 잘 견뎠구나.”
“내가 하는 일에 딴지 걸 수 있는 인간이 있나? 내가 마시기 싫다면 마시기 싫은 거야.”
그렇게 말한 동하는 침대 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정은 그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크 그레이 정장에 와인색 타이를 맨 그는 큰 키와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보다 더 예쁘장하고 아름다운 외모는 스쳐지나가는 순간에도 충분히 설렐 만큼 눈에 띈다. 어떤 곳에 있어도 누구와 섞어놔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정의 눈빛은 이내 서글퍼졌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를, 동하의 왼쪽 다리. 은색 철제 지팡이에 의존해야 하는 그의 걸음은 마비가 된 왼쪽 다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절룩거린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에게 떨어진 단 하나의 불행이었다. 그것도, 이정 자신이 만든.
동하의 다리를 볼 때마다 이정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에 후려 맞은 듯 온몸이 아프곤 했다.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휘청거렸고, 그 휘청거림은 매번 흔들리고 갈등하는 그녀를 다잡아주곤 했다.
“무슨 생각 하는데?”
돌아선 그는 지팡이를 벽에 세워둔 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묻는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차가웠지만 부딪힌 눈빛은 깊었다. 이정은 만면에 억지로 흐릿한 미소를 만들어낸 채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
동하의 짧은 턱짓에 이정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허리를 감아오는 남자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눈앞에 놓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가슴께로 뜨거운 무언가가 번져나갔다. 더듬더듬 고개를 움직이며 동시에 허리에 머물러 있던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감쌌다.
“으음…….”
그의 입술에서 탁한 신음이 내뱉어졌다. 실크 가운은 너무도 쉽게 그의 손가락에 의해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쇄골선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얇디얇은 어깨끈이 내려간 건 그 다음이었다. 이정은 벗겨진 상체로 부딪쳐드는 한기에 턱이 떨릴 것 같았다. 엉덩이를 지분거리는 손의 느낌이 선명하여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반쯤 드러난 유방에 동하의 입술이 닿았다. 이정은 시선을 내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입술로 찾은 유두를 입 안 가득 물어버리는 그의 모습이 자극적이었다. 전율이, 염치도 모르고 등허리로 내달렸다. 젖가슴에서 아랫배로, 그리고 더 내려가 자궁을 달구며 숨죽어 있던 욕망을 끄집어내었다.
그가 다른 쪽 유두를 빨아 당기자 이정은 참지 못하고 ‘으읏!’ 신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등을 가득 덮은 긴 머리칼이 그녀의 마음처럼 흔들렸다.
음부에서 숨길 수 없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동하의 손이 나이트 드레스 천을 사이에 두고 더욱 깊고 어두운 곳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이정의 다리가 벌어지고 그의 손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조용하고 느리던 손길은 어느새 맹렬해졌다. 손가락으로 깊이 쑤셔대며 그녀의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쾌감에 이정은 허리를 거칠게 비틀며 동하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음이 노골적인 유혹을 담고 터졌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올려다보는 동하는 씨익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애무는 늘 그랬듯,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침대로 쓰러뜨려 몸을 나누지 않는다. 그가 덮쳐온다면 이정은 속절없이 그에게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하는 절대 그녀를 침대로 이끌지 않았다. 손가락을 빼낸 동하는 젖어버린 그것을 자신의 바지에 스윽 닦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정은 수치스러움에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나이트 드레스, 빨아야겠다. 네 여기 젖은 게 다 묻었을 걸?”
그는 이정의 음부 쪽을 흘깃 내려다본 후 다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짓궂은 미소를 걸친 채였다. 그의 모습에 이정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매번 그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하고야 만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으깨 물곤 끈을 어깨에 다시 걸쳤다. 그러곤 냉랭하게 돌아서서 바닥에 흩어진 가운을 주워 올린 후 걸음을 옮기는데, 등으로 동하의 저음이 날아들었다.
“이정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정은 항상 목이 메었다. 어딘가 사무치는 듯한, 그러면서도 위엄과 신중함을 잃지 않는 음성. 한때 분명히 그에게 설레었고 그를 좋아한 적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달라고, 재차 각인이라도 시킬 듯한 단호함.
“응.”
“잘 자라.”
그래, 그를 좋아했던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 감정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처박힌 채 지내온 5년이라는 시간은 감정을 퇴색시키기에 충분했고, 더는 앞으로 나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에도 바빴다.
동하야, 난 늘 흔들리고 있어.
내 인생이 이대로 주저앉을 까 봐. 머리가 텅 비어지고 손발이 묶인 채로 네가 조종하는 삶에 익숙해질 까 봐. 나는 없고 너만 있는 이곳에, 마비된 네 다리처럼 나도 마비되어 갈까 봐.
방문을 여는 이정은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