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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레인






1화


프롤로그



지형은 얼굴을 굳힌 채 침대 쪽을 보고 있었다. 하얀색 와이셔츠 차림의 그는 룸 한편에 있는 데스크에서 두 시간째 업무를 보다가 중단한 상태였다. 건조한 낯빛과 침대 쪽에 고정된 시선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 상당히 분노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날 이대로 둘 거예요?”
그의 예비약혼녀는 정확하게 10분 전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코트와 블라우스, 그리고 스커트를 차례로 벗더니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올라가, 작정한 사람처럼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붉은 색 실크 브래지어와 팬티가 불빛 아래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굵은 컬이 들어간 긴 머리칼을 유혹적으로 넘긴다. 육감적인 몸매를 과도하게 움직이며 시선을 현혹시킨다. 확실히 다른 남자들이었다면 금세 옷을 벗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뛰어 들었을 것이다.
“약혼하기 전에 몸 한 번쯤 섞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비싸게 굴지 말고 이리 와요, 김지형 씨. 당신이 호텔 업무를 여기에서 보고 있는 걸 진작 알았다면 더 일찍 왔을 텐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전형적인 정략약혼이 될 텐데도, 여자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지형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후 무감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S호텔 사장의 무남독녀이자 기획본부장, 정확한 일처리와 깔끔한 업무능력으로 차기 S호텔 사장의 유력 후보 등의 수식어가 그녀에게 붙고 있지만, 지형은 그녀의 또 다른 이면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사교계의 발정 난 여우라는 호칭답게, 그녀는 남자 없이는 절대 밤을 보내지 않는 여자다. 아마도 결혼을 해서도 이 여자는 매일 밤 다른 남자들의 품에서 잠이 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형이 그녀와 약혼을 하리라 결심한 건, 순전히 계모 현숙과 이복동생 민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시시각각 호텔을 잡아먹으려 수를 쓰는 계모와, 그런 계모의 조종 하에 벌써 호텔의 기획본부장 자리까지 오른 민수에게, 이 호텔을 넘겨줄 수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간, 그리하여 지형에겐 추억이자 기억이자, 어머니 그 자체인 호텔을, 두 사람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S호텔의 힘을 빌린다면 계모와 민수의 입지가 조금은 좁아질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에이. 재미없네, 지형 씨.”
여자는 자꾸만 지형을 자극했다. 발정 난 불여우답게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형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낮고도 서늘한 음성이었다.
“남자가 그리도 궁했던가?”
“궁했다기보다는 나랑 약혼하고 결혼할 남자와의 속궁합을 한 번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 정도라고 해두죠. 부부관계가 재미가 없다면 결혼생활 할 맛이 나겠어요?”
“흐음. 당신은 어차피 결혼해서도 지금처럼 살 것 아닌가? 그 부분에 대해선 당신한테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윤이령 씨.”
“어머나? 호호호. 나 그렇게 부도덕한 여자 아니에요. 하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이 재미가 없어진다면 뭐 장담 못하죠. 우리 같은 사람들의 결혼이야 어차피 뻔한 거니까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런가? 좋아. 뭐, 손해 볼 장사도 아니지. 그런데…….”
지형은 이령을 잠시 응시했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령의 시선도 따라서 내려가 그의 바지 가운뎃부분을 쳐다봤다.
“보다시피 당신한테 반응하지를 않고 있군. 그래도 당신이 원하는 일이니.”
지형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고 혁대의 버클을 풀었다.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지에, 이령의 당황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어 팬티를 벗은 지형은 그녀에게 전혀 동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보란 듯이 내세웠다. 지형은 손으로 제 남성을 붙잡았다. 마스터베이션을 하듯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령의 몸 때문이 아닌, 제 손의 자극으로, 남성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리지. 곧 다 되어가니.”
이령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참담해진 것을 지형은 놓치지 않았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이 여자는 내일 밤, 모레 밤, 그리고 한동안 밤마다 그를 찾아올 것이다. 도도한 여우의 자존심을 뭉개버려야 다시는 꼬리를 치켜 올리지 못할 터였다. 제게만은 그녀가 절대 섹시한 여우가 아니라는 어필을 확실히 다져놓아야 했다.
“이제 해볼까?”
완벽하게 발기한 남성을 내려다보며 지형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얗게 질려버린 표정을 한 이령은 치아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거칠게 침대를 내려왔다.
따악!
이령의 손바닥이 지형의 뺨에 불꽃을 일으켰다. 자존심이 참혹하게 구겨졌다는 사실에, 이령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지형은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용서 못해.”
이령은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역시나 거친 손길로 벗었던 옷을 재차 걸쳤다. 힐까지 모두 신은 그녀는 씩씩거리며 비즈니스 룸을 나섰다. 쾅하고 닫힌 문소리를 들으며, 지형은 바지를 끌어올렸다. 말려 올라갔던 입 꼬리가 다시 스르륵 내려왔다. 문을 향해 내딛는 발길은 다분히 거칠었다.
이령에게 자신이 이 룸에 있다고 알려준 이는 다름 아닌 송 비서일 것이다. 그가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 사장실을 두고 호텔의 꼭대기에 있는 비즈니스 룸에서 업무를 보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와 민수뿐이기 때문이다. 오늘이 계모인 현숙의 생일이니 민수가 아직 호텔에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남은 건 송 비서였다.
문을 열고 나간 지형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승강기를 향해 걸었다. 양탄자 위를 걷는 걸음은 다소 격해 있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윤이령 따위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려주다니. 분노로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신호가 두어 번 흐르기도 전에 지형은 걸음을 멈추었다. 기민한 감각이 뒷머리를 자꾸만 잡아 당겼다. 돌아선 지형은 복도 끝을 보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눈이 가늘어진다.
복도의 끝, 어둠이 깔린 창가에 선 두 남녀. 송 비서와 퇴근했을 거라 여겼던 민수였다. 지형의 눈빛이 의심으로 일그러졌다. 송이재, 그의 비서가 이복동생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