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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밤새 내리던 눈이 아침이 되자 비로 바뀌기 시작했다. 땅바닥이 얼어붙었고 사람들의 걸음도 조심스러워졌다. 북새통이 된 출근길에서 겨우 빠져나온 이재는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로비를 가로질러 뛰었다. 평소보다 20분이나 늦었다. 기상악화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문제지만, 지금 이재는 다급했다. 어젯밤 스위트룸과 비즈니스 룸이 있는 20층 복도에서 마주친 그의 표정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탓이다.
김민수 기획본부장을 우연히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순간에, ‘송 비서.’라며 그녀를 부르던 그의 음성과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서늘하고 차가웠다. 평소에도 다감한 성격의 오너는 아니었지만 어제는 유난히 살벌했다. 별다른 말이 없이 퇴근하라는 지시만 내렸지만, 이재는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안고 있었다.
승강기 안에서 이재는 바뀌는 숫자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심장도 그 박자를 더해갔다. 5년째, 매일 있는 일이다. 그의 비서가 되고 난 후부터, 출근하여 그의 얼굴을 볼 때까지, 심장은 늘 이렇게 엇박자를 내곤 했다. 이제 다른 여자와 약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인데도 감정은 이성을 누르고 순식간에 튀어나가 버린다.
“그만둬야 하는 건가.”
정말로, 호텔을 그만둬야 하는 걸까. 이재의 눈빛이 서글퍼졌다. 단 한 번도 드러내어 본 적 없는 감정, 짝사랑. 제이엔 호텔 사장 김지형을 향한 이재의 오랜 마음은 조만간 그의 약혼이 끝나고 결혼식이 준비되면 정리해야 할 것이다. 깊이 감추어 두었던 것을 꺼내어 버려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녀가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먼 곳의 그에게, 혼자만의 안녕을 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룸 앞에 선 이재는 심호흡을 한 후 벨을 눌렀다. 좀 전의 서글픔일랑 표정에서 싹 지워낸 후였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눌렀으나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어쩌면 아직 출근 전일 수도 있고 사장실에 계실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그녀는, 마스터키를 이용하여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형이 부재중이라 해도 옷가지들과 서류를 챙겨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재는 몇 걸음 안으로 들여놓기도 전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잠들어 있는 지형을 본 탓이었다. 이마에 손등을 얹고 기다란 다리를 꼰 채였다. 와이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접혀 올라가 있고 까칠해진 얼굴은 피곤이 묻어 있었다. 적막이 뒤덮인 비즈니스 룸 안에서, 그는 죽은 듯이 홀로 잠들어 있었다.
“사장님.”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결코 깨울 의지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그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를 마음껏 불러보고 싶었다. 그녀가 지형에게 처음 마음을 빼앗긴 날도 이랬다. 3년 전, 아무도 없는 조용한 새벽의 사무실에서 혼자 잠이 든 모습. 그 전 날에, 김 본부장과 그의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를 향한 마음 같은 것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
지형의 아버지와 불륜을 하고 결국 친모를 내쫓고 그 자리에 들어간 민수의 어머니, 이름 하여 지형의 계모. 계모는 지형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호텔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있고 그 도구로 김민수 본부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 그 대화를 듣고 난 후에야, 이재는 지형이 왜 그토록 동생인 김 본부장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장님.”
이재는 두어 걸음 다가서서 다시 입을 열었다. 지형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던 그날, 그 순간이 떠올라 머리와 가슴이 한꺼번에 복잡해졌다. 흐려진 시야로 이제 곧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될 그가 가득 차올랐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은 늘 그를 갈구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는 없다. 그의 비서로 있었던 6년의 세월 끝에 남은 건, 그렇게 텅 비어가는 가슴이었다.
이재는 그에게서 눈을 뗀 후 책상 쪽을 보았다. 더는 깨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릎 담요라도 가져다 줄 생각이었다. 책상 위 흩어진 서류들을 대충 정리하고 의자에 놓인 무릎담요를 가져왔다. 소파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그녀는 그것을 펴서 차분하게 덮어주었다. 행여 그가 깰까 조심하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느새 눈을 뜬 그가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헙!”
“출근시간이 늦었군.”
지형은 이재의 어깨 너머로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하곤 다시 그녀를 보았다. 나른하게 떠진 눈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여자를 짓궂게 응시했다. 이재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비가 얼어붙는 바람에 버스가 제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지형은 창문을 보았다. 빗줄기가 창문을 향해 힘차게 들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젯밤부터 시작된 이재를 향한 기묘한 반감은 날씨라는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게 만들었다.
“윤이령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말 한 게 송 비서가 맞나?”
“네. 사장님.”
“왜 그런 실수를 했지?”
이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령과 지형은 약혼을 앞두고 있는 관계였고, 비서로서 그런 상대에게 지형의 거처를 알린 것이 실수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약혼하실 분이라 당연히…….”
“오늘 방을 옮길 테니까 다른 비즈니스 룸을 알아봐.”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잠시 이재의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지금 그의 표정은 이령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듯했다. 선을 그어 놓고, 그의 영역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저 편의 사람으로 분류해 놓은 듯했다. 자신의 추측이 지나치게 앞서 나간 게 아닌가, 이재가 흠칫 당황할 무렵, 지형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오늘 일정은?”
“11시에 임원진 회의가 있고 3시에 상공회의소 방문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6시에는 다이아몬드 호텔 장우철 사장님과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상공회의소에서 저녁식사 장소로의 이동 동선이 조금 깁니다. 상공회의소는 김 본부장님이 대신 참석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해.”
“죄송합니다, 사장님.”
“어제 김민수 본부장과 무슨 얘길 나눴지?”
쉴 틈 없이 진행된 대화 속에서, 이재가 또 한 번 당황했다. 지형의 질문이 뭘 뜻하는지 파악하지 못해 이재가 되물었다.
“네?”
“꽤 늦은 시각이었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서, 그렇게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지? 저기에서 말이지.”
지형은 손가락으로 복도 끝 부근을 가리켰다. 이재는 그제야 그가 말하는 것의 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 퇴근 무렵 민수가 자신을 찾아와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냐고 말했었다. 평소 직원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사람이었기에 이재 또한 민수의 요청에 별 뜻 없이 응할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생신인데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민수의 투정에, 이재는 잠시 지형을 떠올렸었다.
지형과 민수와 지형의 계모이자 민수의 친모인 여자. 그 세 사람의 좁혀질 수 없는 관계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다소 부담스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민수에겐 어머니가 있고, 지형에겐 없다. 민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재는 다시 한 번 지형에게 연민을 느꼈을 뿐이었다. 무엇을 해도 누구와 무슨 얘기를 나누어도, 결국은 모든 것들이 지형을 향한다. 적어도 이재에겐 그랬다.
“그냥 개인적인 얘기들입니다.”
민수와 나눈 대화를 곧이곧대로 풀어 놓을 수는 없어 에둘러 말한 이재에게, 지형이 다시 물었다. 극도로 차가운 음성이었다.
“개인적인, 어떤?”
“날씨 얘기와 직원들 얘기였습니다.”
“날씨와 직원들 얘기가 그렇게 우스웠나?”
“네?”
“송 비서가 무척 환하게 웃길래. 내가 잘 못 봤나 해서 말이지.”
“그건……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뭐가?”
“제가 웃었는지 아닌지.”
지형은 이재를 똑바로 응시했다. 새삼스레 이재의 표정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녀가 비서로 있었던 5년 동안 자신의 앞에서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민수 앞에선 그렇게도 환하게 웃더니.
“웃었어, 송 비서.”
지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재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비서로서 그의 표정을 모두 안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에 어떤 표정과 말이 나올지도 간파하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안개 속이었다.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앞으론 웃지 말라는 지시인지, 아니면 웃은 게 기분이 나빴다는 뜻인지, 도무지 명백한 것이 없었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사장님?”
묻자마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 매우 짧게 스쳐간 그 순간에 이재는 분명하게 느꼈다.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