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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보기


1화


1. 몰래 훔쳐보다


태하는 새로 이사를 들어온 작업실을 휙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 산 음향 기기들도 마음에 들고 녹음실 한쪽에 마련한 방도 제법 흡족했다.
작곡을 하다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 새벽이 될 때가 많았다. 창작이란 것이 잠깐 멈춰버리면 이어지지 않고 흐름의 끈을 놓칠 경우가 많으니까. 그 시간에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다보면 모든 흐름이 깨져 제대로 된 곡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태하가 생각한 아이디어가 작업실 한쪽에 방을 만드는 것이었다. 작업을 하는 도중에 피곤하면 잠시 쉴 수 있는 그런 공간. 자다가 일어나서 언제든지 곧바로 작업을 할 수도 있고 꿈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영감을 놓치지 않고 표현할 수 있기에 그에게 방의 의미는 무척 큰 존재였다.
방 안은 조그만 원룸을 연상시켰다. 방 안에는 문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긴 욕실이다. 방 중앙에는 더블 사이즈의 침대가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책장과 책상, 옷장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크지 않은 창문이 있다.
작곡가 생활을 하면서 그는 올빼미처럼 새벽에 자는 일이 잦아졌다. 가끔은 작업을 끝내고 아침에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햇빛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되도록 창을 작게 만들었다.
원래 이 창문이 있던 쪽은 콘크리트 벽이었다. 그곳을 뚫지 않으면 창문이 나올 공간이 없어 인테리어업자와 상의를 한 뒤 벽을 뚫어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2중으로 방음창을 달았다.
태하는 창가로 걸어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문이 스르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는 곧 두 번째 문도 활짝 열었다.
5월의 상큼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볼을 간지럼 폈다. 그는 고개를 내밀어 창문 밖을 응시했다. 그곳은 건물 뒤편이었다.
건물 뒤편엔 빌라 건물 여러 채 있었는데 그 중 한 건물이 태하의 상가 건물과 맞닿아 있었다. 작년에 이 상가 건물을 구입하면서 뒤편에 빌라 건물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건물 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약 7, 8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태하의 상가 건물보다는 층수가 낮은 4층 건물이었다.
곳곳에 불이 켜진 빌라의 창들을 휙 훑어본 뒤 창문을 닫으려던 태하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4층에 있는 여러 개의 창문들 중에서 반쯤 열린 창문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여자는 한눈에 보아도 꽤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십대 후반의 나이쯤으로 보였고 가로등 불빛에 하얀 피부가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윤기 있는 긴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각이 진 이목구비가 조명 아래 선명한 명암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난히 몸이 말라 있었다.
그녀는 한손에 노트를 들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태하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뭘 적고 있는 거지? 학생인가?’
태하는 한동안 여자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여자가 방향을 틀어 창문으로 다가오시 시작했다. 태하는 얼른 창문에서 벗어나 벽에 몸을 기댔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웃고 말았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남의 집 여자나 훔쳐보다니……. 평소의 태하답지 않았다.
얼마쯤 그렇게 있었을까,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태하는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창문은 짙은 선팅이 되어 있어 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을 볼 수가 있었다.
천천히 문을 닫은 뒤 태하는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그녀를 지켜보았다. 얼마쯤 지나자 그녀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드리웠다. 그리고 곧 빌라 건물이 캄캄한 어둠에 둘러싸였다.
태하는 돌아서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가슴이 사춘기 소년처럼 콩닥거리며 마구 뛰고 있었다. 중학생일 때 짝사랑하는 여선생님을 보며 가슴 졸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꼭 그때 같았다. 철없고 순진했던 중학생, 계단 아래서 여선생님 치마를 몰래몰래 훔쳐보던 그때.
&
상가 1층에는 조그만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태하는 커피숍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지난밤 창밖으로 보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번 보았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이 기억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문득 태하는 그녀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며, 이름은 무엇이고, 성격은 어떠한지, 목소리는 어떠한지…….
그러다 태하는 곧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태하는 주문한 커피를 들고 곧장 작업실로 올라갔다.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그는 음향기기 앞이 아니라 곧장 방으로 들어가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침실이 있는 4층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방 안에 그녀의 실루엣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읽는 듯했다. 창문에 박힌 선팅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책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침실을 서성거리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슬립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하얀 허벅지가 아찔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태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태하는 불규칙적으로 뛰어 오르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진후였다.
- 선배, 작업은 어떻게 돼갑니까?
며칠 전부터 진후가 드라마 삽입곡에 들어갈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조금만 기다려. 지금 만들고 있는 중이야.”
태하는 작업실로 돌아와 만들다 남은 곡 작업을 시작했다.
저녁 무렵, 채하는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네 시간 가까이 머리를 썼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나 건반을 두드렸는지 손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 다시 작업을 할까 생각하던 태하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는 곧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태하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군살 하나 없었으며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은 터져나갈 것처럼 풍만했다. 그녀는 겉옷을 하나하나 걸치고 있었다. 외출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태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태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빨리 거리로 내려왔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쉽고 허전한 마음에 태하는 깊은 한숨을 바닥에 쏟아내었다.
작업실로 돌아가려던 태하는 발걸음을 돌려 그녀의 빌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빌라 1층에는 집이 없었고 2층부터 집이 있었는데 복도를 따라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었다. 2층 구조로 보아 그녀의 집은 402호였다.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온 태하는 402호 우편함에서 가스 요금 청구서를 꺼내어 살펴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백소은이었다.
그날 이후로 태하의 상사병은 조금씩 깊어졌다. 그는 작업실에 올 때마다 창문을 통해 그녀의 방을 몰래 훔쳐보았다. 물론 항상 창문이 열려 있지는 않았다.
가끔은 창문이 닫혀 있거나 커튼이 드리워질 때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걸어 다니며 책을 볼 때도 있었고 또 가끔은 컴퓨터 책상에 앉아 무엇을 생각하기라도 하듯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태하의 창문에선 통유리로 된 그녀의 집 거실도 보이지만 거실엔 늘 짙은 색상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그녀는 거실을 잘 나오지 않고 거의 침실에만 있는 편이었다. 어떤 날에는 옷을 갈아입고 거울에 비춰보기도 했었는데 거울과 옷장이 구석에 있는 바람에 그녀가 벌거벗은 몸을 태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또 어떤 날은 인상을 찌푸리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태하가 그녀를 지켜보며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동안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는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전체적인 그녀의 느낌이 우울하다는 것.
그녀를 몰래 훔쳐볼 때마다 태하의 가슴속에선 이상한 감정들이 서서히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분명 관음증 같은 것은 아니었다. 태하는 스스로 그렇게 선을 그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랑의 열병이라고.
태하가 그렇게 생각을 가진 건, 가끔은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둘 때였다. 가끔씩이긴 했지만 그녀는 태하의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었다. 마치 바로 코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눈동자를 응시하듯 말이다.
그럴 때면 태하는 짐짓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뜨끔하기까지 했다.
그때 태하는 생각했었다. 어쩌면 자신이 백소은이라는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태하가 여느 때처럼 1층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기다릴 때였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커피가 나왔다는 종업원의 말에 태하가 커피를 받아들고 막 돌아설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