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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머!”
태하의 바로 앞에 소은이 있었다. 태하는 한눈에 그녀가 백소은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태하가 돌아서다 소은과 부딪치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그녀의 하얀색 블라우스 위에 쏟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얼룩이 졌는데…… 세탁비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정말 고약했다. 태하는 얼굴을 붉힌 채로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그녀에게 세탁비를 주겠다고 했다.
“아뇨. 괜찮아요. 커피 한 잔 사서 어차피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럼 제가 커피라도 한 잔 사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태하의 가슴이 살며시 뛰어 올랐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닙니다. 제가 미안해서 그러니까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태하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 달 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커피숍에서 빠져 나온 소은은 태하를 향해 커피를 들어보이고는 고맙다는 의미로 살며시 고개를 까닥거렸다.
하지만 태하는 아무런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소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초면에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없을 것이다. 태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집에 남자가 집에 온 적도 없었고 통화를 길게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몇 번 통화를 하며 짜증내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어쨌든 장담할 수 없었다. 창문을 통해 그녀를 관찰한 시간보다 커튼이 드리워진 시간이 훨씬 더 많았기에.
그녀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네. 있어요.”
올해 들어보았던 말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슬픈 말이었다. 태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네.”
더 이상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할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태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빌라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태하는 엘리베이터 벽에 부착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마치 실연을 당한 사람 같았다. 한 달 동안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 마음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생각하자 걸레처럼 가슴이 너덜너덜해졌다.
적어도 임자 있는 여자는 거들떠보지 않는 게 평소 태하의 철학이었다. 태하는 아쉽지만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실연을 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태하는 거울을 보며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작업실에 들어오자마자 태하는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머릿속에서 찬찬히 그녀의 외모를 떠올리며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길고 탐스런 머리칼, 그리고 티 없이 맑은 검은 눈동자, 긴 속눈썹, 키스를 부르는 도톰한 입술, 심장을 뛰게 만드는 풍만한 가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가녀린 허리와 굴곡진 힙 라인, 늘씬한 다리. 그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작은 C코드. 어쿠스틱 기타의 느린 아르페지오 주법이나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는 천천히 음표를 그려 넣었다. 마치 신들린 듯이 오선지 위에서 음표가 날아다녔다.
역시 영감이었다. 여자와의 이별만큼 확실한 영감을 제공해 주는 모티브는 없었다. 그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애절한 마음을 노래에 담았다. 한 곡을 완성하는데 고작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태하는 곧 진후에게 전화를 넣었다.
“잔잔하면서 애절한 곡이야. 짝사랑의 슬픔, 실연의 아픔을 담은. 누구한테 주는 게 어울릴 것 같아?”
진후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 글쎄. 일단 완성되는 대로 몇 명 돌려 보자. 내가 몇 명 추려 볼게.
“그래, 수고 좀 해 줘. 참, 작사가 말인데, 새로 좀 알아봐 줘. 젊고 참신한 사람으로.”
- 알았어. 내가 찾으면 연락 줄게.
운명처럼 30분 만에 한 곡을 만들긴 했지만 막상 다 만들어놓고 나자 허전한 기운이 태후의 온몸을 감쌌다.
다음 날 태하는 곧바로 창문에 커튼을 달았다. 이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은 밀폐된 공간 안에서 고독을 즐기고 싶었다.
2. 키스에 가려진 슬픔
창문에 커튼을 달고 지낸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태하는 소은에 대해 궁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보름이 되는 날 그는 끝내 고독을 참지 못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고독이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녀의 창문은 불이 꺼져 있었다. 순간, 절망과 같은 비참한 기분이 그를 엄습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닫으려는 찰나, 건물 아래에서 남녀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너 정말 장난 아니다. 우리 이미 헤어졌잖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 자꾸 날 괴롭힐 건데?”
화가 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었으며 보통의 키에 꽤 단정한 스타일이고 마른 체격이었다. 곧이어 애절하게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아무리 널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아.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하자. 앞으로는 내가 잘할게. 정말 잘할게.”
소은은 차가운 목소리로 철우에게 말을 뱉어냈다.
“그 소리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제 그만 날 좀 놓아 줘. 제발 부탁이다.”
철우는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잡고 와락 끌어안았다.
“난 너하고 못 헤어져. 그러니까 다시 시작하자. 너만 돌아오면 돼. 너만.”
소은은 철우를 강하게 밀쳐내며 소리쳤다.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연락하지 마. 아니, 내 앞에 얼씬 거리지도 마. 네가 이러지 않아도 나 충분히 힘들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소은이 그렇게 말을 하도는 철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철우가 소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두 팔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짝!
소은이 철우의 뺨을 때렸다. 그 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에 제법 크게 울렸다. 철우는 손바닥으로 맞은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소은은 분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어깨가 들썩거리며 소리쳤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소은이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자 철우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철우가 등을 돌리며 돌아설 때까지 쏘아보던 소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5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태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였다. 백소은. 남자에게 뺨을 때린 여자가 소은이란 사실을 알아챈 태하의 심장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소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며 막 등을 돌리고 거리 건너편으로 걸어가는 철우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내 앞에 얼씬거리지도 마.”
소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는 빌라로 들어가지 않고 철우가 걸어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태하는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 태하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왠지 우울해져 있을 것 같은 그녀의 기분을 달래줘야 될 것만 같았다.
그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져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도 아까운지 그대로 계단을 뛰어서 내려갔다.
거리로 내려선 태하는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향해 냅다 뛰었다. 그런데 거리 어디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타려면 큰길가로 나가야 했기에 그 짧은 시간에 택시를 타고 갔다거나 이 거리를 벗어낫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던 태하의 시야에 조그만 선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실내 구석진 곳에 소은이 혼자 앉아 있었다.
태하는 너무 기뻐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를 찾긴 찾았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잠시 갈등하던 태하는 밀어붙이기로 했다. 기회였다. 천금 같은 기회.
그는 소은의 바로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뵙네요.”
갑자기 다가온 남자의 목소리에 소은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태하를 알아본 소은은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이슬을 보자 태하의 가슴이 아렸다.
“혹시 혼자 오셨어요?”
소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한잔할 수 있을까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태하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태하는 소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태하의 그런 행동에 소은은 황당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보았다. 태하는 얼른 본론을 꺼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