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필품의 달인 1
1화
성녀는 메마른 손을 모으며 간절히 기원했다.
“대륙을 파괴하는 마왕의 하수인 둘을 물리칠 용사 두 명을 보내 주세요.”
성녀는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대륙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주는 이를 함께 보내 주시길…….”
성녀의 기도는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에 닿았다.
하늘에서 눈이 멀 정도로 광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도성의 모든 이가 볼 만큼 휘황한 빛이었다.
찬란한 빛 속에서 장신의 세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두 명의 전사 그리고 깡마른 한 사람이었다.
프롤로그
「우리 동네 사랑의 밥집」
허름한 4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아크릴 간판이 붙어 있는 낡은 사무실.
벌써 몇 년째 불우 이웃에 도시락을 배달하거나 물 급식소를 운영하는 봉사 활동을 진행 중인 회원들이 허름한 소파에 모여 있었다.
“새나래 공원 무료 급식소는 구청에서 허가를 안 내주려고 해요. 주민들 민원 들어온다고.”
“일주일에 한 번만 한다는데도요?”
“그렇잖아도 노인들 모이는 곳인데 노숙자들이 더 몰려들면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인근 주민회에서 공원 단속까지 수시로 투서할 정도로 극성이라나.”
만덕 아저씨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뻔히 굶는 사람들 있는 거 알면서 너무하는구만! 요 앞 장미 아파트는 부녀회가 먼저 나서서 도와줄 일 없냐고 물어보던데.”
“다니다가 들은 말인데 그 일대가 부동산 업자들이 장난을 워낙 많이 친 지역이라서 거주 겸 투기 겸 모였다가 피 본 주민들이 많아 시세가 걸린 일에 엄청 민감하데요.”
회원들은 혀를 찼다.
거품 낀 가격으로 전재산을 톡 털어 엄청난 대출을 끼고 사들인 가장 큰 자산 겸 빚덩이인 아파트가 알고 보니 부동산 사기꾼들의 농간에 놀아난 꼴이라면 유난히 집착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제 와서는 시세가 매입가보다 뚝 떨어져 큰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이사도 가지 못할 것이고.
남아 있는 거품 가격이나마 유지하려고 필사적일 터였다.
막대 사탕을 빨며 잠자코 듣던 중학생 여자애가 불쑥 끼어들었다.
“거기 하니 오빠가 아는 사람 통해 알아본다고 하던데요.”
“오오, 한이가?”
“한이가 나선다면야 안심이지.”
회원들이 화색이 돌았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검은 진에 감싸인 길쭉한 다리가 나타났다.
“양반은 못되는구만.”
만덕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낀 깡마르고 키가 훌쩍 큰 청년이 커다란 가방을 방패처럼 허리 앞에 두르고 들어섰다.
문에 낀 가방을 끙끙거리며 빼낸 청년은 어색한 동작으로 사무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가 익숙한 얼굴만 보이자 그제야 안심했다.
청년은 숨을 크게 내쉬고 엉거주춤 소파로 다가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안녕하세요?”
회원들은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어눌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22살의 청년 장한을 반갑게 맞았다.
“한 오빠!”
“장한 녀석 같으니라고.”
“성격도 급하시긴. 한아, 새나래 공원 어떻게 됐니?”
장한은 약간 말더듬이가 섞인 우물거리는 말투로 얘기를 했다.
회원들은 얘기 중간에 끼어들거나 고치려 들지 않고 싱글거리며 참을성 있게 들었다.
“구청이랑 얘기가 되었대요. 곧 허가 날 테니까 기다리라고…….”
“역시 우리 장한이라니까!”
“언제 봐도 한이의 인맥은 끝을 모르게 깊고 넓어.”
대인 기피에 가까울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장한은 사람들이 인맥이니 빽이니 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도 인맥이랄 것까지는 없었다.
게임을 하다 만난 고객과 연이 닿아 도움을 받았다.
장한은 운동이나 공부 모든 면에서 무능했다.
장한이 유일하게 잘하는 일은 게임이었다.
게임 내에서 고정적으로 거래하는 고객 중에 ‘오 피디’라는 닉네임을 가진 실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그는 굵직굵직한 게임 방송 프로그램을 몇 개나 연달아 히트 친 능력 있고 귀하신 몸으로, 유독 장한의 게임 플레이에 관심과 호감을 보였다.
오 피디는 두 달 넘게 장한에게 자신의 프로에 출연하라고 종용했다.
업계 최고의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오 피디가 기획 연출한 ‘토크쇼크’라는 토크쇼에 생생 인터뷰 코너 출연을 집요하게 졸랐다.
장한을 몇 년째 알아 온 오 피디는 그가 정을 내세워 끈질기게 접근하면 졸리다 못해 승낙하는 성격임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좀 더 오래 버틸 줄 알았던 장한이 새나래 공원 무료 급식소 때문에 청탁을 해 오자, 냉큼 낚아채 처리해 주고 방송 날짜를 잡았다.
이 날이 녹화 당일이라 장한은 외출한 김에 밥집 사무실에 들른 것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새나래 아파트 단지 부녀회에서 무료 급식소 자봉을 하고요. 이번 일을 그쪽이 주도한 것처럼 얘기해 달래요. 어어… 케이블 티비 지역 뉴스에 짧게 내보낸다고 했거든요.”
“뉴스? 훈훈한 소식 같은 거?”
“네. 지역이랑 아파트 이름 좀 카메라로 잡아서 방송에 띄우면…….”
“집값에 도움이 될 거라고 설득했구나. 하하, 대단해! 결사 반대하던 주민들을 자봉단으로 합류까지 시키다니.”
“하긴 이런 일은 지역 주민이 동참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 그 동네는 까탈 맞아서 엄두도 못 냈는데.”
“……꼭 그런 건 아니고 원래 좋은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어디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있잖아요.”
회원들은 새삼 감탄했다.
밥집 사무실을 개소한 지 수년 째. 난관은 수도 없이 닥쳐왔다.
그때마다 결정적인 시기에 장한이 나섰다.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장한이 해결해 줄 거라는 반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장한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는 본인의 평가와 달리, 막상 난관에 부딪치면 특유의 창의적 발상과 직관, 필요할 때 발동되는 추진력으로 막힌 일을 일사천리 처리하곤 했다.
미수 할머니가 덥석 손을 잡아 왔다.
“아이고, 우리 손자 사위!”
“왜 이러세요?”
가은 엄마가 즉시 견제에 들어왔다.
“이제 6살인 미수를 어디 들이대시는 거예요? 한아, 그러지 말고 우리 딸 한 번 만나 보자니까. 이제 막 물이 오른 싱싱한 고등학생이야.”
“저, 저 오늘 갈 데가 있어서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계세요.”
땀을 뻘뻘 흘리며 부끄러워하던 장한은 황급히 손을 빼내고 휭 하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뭣에 걸려 넘어졌는지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예쁜 짓만 하는 아이를 뭐가 부족하다고 부모들이 망쳤으니…….”
회원들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중학생 때부터 용돈을 쪼개 기부하며 봉사 활동을 시작한 장한이었으니 오래된 회원들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잘 알았다.
장한은 어릴 때부터 뭐든 뛰어난 형 밑에서 열등한 아이로 비교당하며 컸다.
부부 교수인 장한의 부모는 장한의 형에게 큰 기대를 품었다.
반면 자신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얼뜨고 행동이 느린 장한을 못마땅해했다.
완벽한 가정에 유일한 오점으로까지 여겼다.
자기들끼리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하지만, 장한은 그 완벽한 가정의 울타리에 끼지 못하고 겉돌았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 보니 말더듬이와 소심증이 심해지고 이는 더욱 가족의 외면과 냉대를 불러왔다.
부모는 실망만 안겨 준 장한을 창피하다며 외면했다.
형은 대놓고 괴롭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형의 심술에 산속에서 길을 잃어 사흘간 헤매다 등산객들에게 극적으로 구조된 적도 있었다.
사흘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온 가족들은 장한이 어쩌다 퀭한 얼굴로 집에 퍼질러 자고―쓰러져―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잖아도 마르고 구질구질한 장한이 유난히 거지꼴이라며 눈살을 찌푸렸을 뿐.
장한은 사흘간 기아 체험으로 굶주림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장한은 중학생 때 소년 가장들의 수필집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배를 곯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용돈을 쪼개 기부하거나 봉사 활동을 다녔다.
다행히 장한이 처음 들어간 봉사 단체가 소규모이지만 내실 있고 진짜 자원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밥집이었다.
부모는 장한이 중2일 때 형의 유학을 도우려고 함께 이민을 갔다.
박한 생활비를 보내다가, 장한이 고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중퇴를 하자 학비마저 끊겼다.
장한에게는 부모의 무관심이 차라리 도움이 되었다.
장한은 자퇴 후 본격적으로 형이 쓰다 버려 둔 구형 게임 접속기로 게임을 시작했다.
장한은 한물 간 추억의 게임에서 꽤 큰 돈을 벌어 값비싼 신형 게임기를 살 수 있었다.
계정비와 생활비도 남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이 현재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상현실 게임 ‘드래곤 쇼크’였다.
장한은 게임으로 근근이 생활비와 기부금을 벌었다.
1화
성녀는 메마른 손을 모으며 간절히 기원했다.
“대륙을 파괴하는 마왕의 하수인 둘을 물리칠 용사 두 명을 보내 주세요.”
성녀는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대륙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주는 이를 함께 보내 주시길…….”
성녀의 기도는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에 닿았다.
하늘에서 눈이 멀 정도로 광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도성의 모든 이가 볼 만큼 휘황한 빛이었다.
찬란한 빛 속에서 장신의 세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두 명의 전사 그리고 깡마른 한 사람이었다.
프롤로그
「우리 동네 사랑의 밥집」
허름한 4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아크릴 간판이 붙어 있는 낡은 사무실.
벌써 몇 년째 불우 이웃에 도시락을 배달하거나 물 급식소를 운영하는 봉사 활동을 진행 중인 회원들이 허름한 소파에 모여 있었다.
“새나래 공원 무료 급식소는 구청에서 허가를 안 내주려고 해요. 주민들 민원 들어온다고.”
“일주일에 한 번만 한다는데도요?”
“그렇잖아도 노인들 모이는 곳인데 노숙자들이 더 몰려들면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인근 주민회에서 공원 단속까지 수시로 투서할 정도로 극성이라나.”
만덕 아저씨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뻔히 굶는 사람들 있는 거 알면서 너무하는구만! 요 앞 장미 아파트는 부녀회가 먼저 나서서 도와줄 일 없냐고 물어보던데.”
“다니다가 들은 말인데 그 일대가 부동산 업자들이 장난을 워낙 많이 친 지역이라서 거주 겸 투기 겸 모였다가 피 본 주민들이 많아 시세가 걸린 일에 엄청 민감하데요.”
회원들은 혀를 찼다.
거품 낀 가격으로 전재산을 톡 털어 엄청난 대출을 끼고 사들인 가장 큰 자산 겸 빚덩이인 아파트가 알고 보니 부동산 사기꾼들의 농간에 놀아난 꼴이라면 유난히 집착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제 와서는 시세가 매입가보다 뚝 떨어져 큰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이사도 가지 못할 것이고.
남아 있는 거품 가격이나마 유지하려고 필사적일 터였다.
막대 사탕을 빨며 잠자코 듣던 중학생 여자애가 불쑥 끼어들었다.
“거기 하니 오빠가 아는 사람 통해 알아본다고 하던데요.”
“오오, 한이가?”
“한이가 나선다면야 안심이지.”
회원들이 화색이 돌았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검은 진에 감싸인 길쭉한 다리가 나타났다.
“양반은 못되는구만.”
만덕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낀 깡마르고 키가 훌쩍 큰 청년이 커다란 가방을 방패처럼 허리 앞에 두르고 들어섰다.
문에 낀 가방을 끙끙거리며 빼낸 청년은 어색한 동작으로 사무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가 익숙한 얼굴만 보이자 그제야 안심했다.
청년은 숨을 크게 내쉬고 엉거주춤 소파로 다가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안녕하세요?”
회원들은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어눌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22살의 청년 장한을 반갑게 맞았다.
“한 오빠!”
“장한 녀석 같으니라고.”
“성격도 급하시긴. 한아, 새나래 공원 어떻게 됐니?”
장한은 약간 말더듬이가 섞인 우물거리는 말투로 얘기를 했다.
회원들은 얘기 중간에 끼어들거나 고치려 들지 않고 싱글거리며 참을성 있게 들었다.
“구청이랑 얘기가 되었대요. 곧 허가 날 테니까 기다리라고…….”
“역시 우리 장한이라니까!”
“언제 봐도 한이의 인맥은 끝을 모르게 깊고 넓어.”
대인 기피에 가까울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장한은 사람들이 인맥이니 빽이니 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도 인맥이랄 것까지는 없었다.
게임을 하다 만난 고객과 연이 닿아 도움을 받았다.
장한은 운동이나 공부 모든 면에서 무능했다.
장한이 유일하게 잘하는 일은 게임이었다.
게임 내에서 고정적으로 거래하는 고객 중에 ‘오 피디’라는 닉네임을 가진 실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그는 굵직굵직한 게임 방송 프로그램을 몇 개나 연달아 히트 친 능력 있고 귀하신 몸으로, 유독 장한의 게임 플레이에 관심과 호감을 보였다.
오 피디는 두 달 넘게 장한에게 자신의 프로에 출연하라고 종용했다.
업계 최고의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오 피디가 기획 연출한 ‘토크쇼크’라는 토크쇼에 생생 인터뷰 코너 출연을 집요하게 졸랐다.
장한을 몇 년째 알아 온 오 피디는 그가 정을 내세워 끈질기게 접근하면 졸리다 못해 승낙하는 성격임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좀 더 오래 버틸 줄 알았던 장한이 새나래 공원 무료 급식소 때문에 청탁을 해 오자, 냉큼 낚아채 처리해 주고 방송 날짜를 잡았다.
이 날이 녹화 당일이라 장한은 외출한 김에 밥집 사무실에 들른 것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새나래 아파트 단지 부녀회에서 무료 급식소 자봉을 하고요. 이번 일을 그쪽이 주도한 것처럼 얘기해 달래요. 어어… 케이블 티비 지역 뉴스에 짧게 내보낸다고 했거든요.”
“뉴스? 훈훈한 소식 같은 거?”
“네. 지역이랑 아파트 이름 좀 카메라로 잡아서 방송에 띄우면…….”
“집값에 도움이 될 거라고 설득했구나. 하하, 대단해! 결사 반대하던 주민들을 자봉단으로 합류까지 시키다니.”
“하긴 이런 일은 지역 주민이 동참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 그 동네는 까탈 맞아서 엄두도 못 냈는데.”
“……꼭 그런 건 아니고 원래 좋은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어디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있잖아요.”
회원들은 새삼 감탄했다.
밥집 사무실을 개소한 지 수년 째. 난관은 수도 없이 닥쳐왔다.
그때마다 결정적인 시기에 장한이 나섰다.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장한이 해결해 줄 거라는 반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장한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는 본인의 평가와 달리, 막상 난관에 부딪치면 특유의 창의적 발상과 직관, 필요할 때 발동되는 추진력으로 막힌 일을 일사천리 처리하곤 했다.
미수 할머니가 덥석 손을 잡아 왔다.
“아이고, 우리 손자 사위!”
“왜 이러세요?”
가은 엄마가 즉시 견제에 들어왔다.
“이제 6살인 미수를 어디 들이대시는 거예요? 한아, 그러지 말고 우리 딸 한 번 만나 보자니까. 이제 막 물이 오른 싱싱한 고등학생이야.”
“저, 저 오늘 갈 데가 있어서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계세요.”
땀을 뻘뻘 흘리며 부끄러워하던 장한은 황급히 손을 빼내고 휭 하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뭣에 걸려 넘어졌는지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예쁜 짓만 하는 아이를 뭐가 부족하다고 부모들이 망쳤으니…….”
회원들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중학생 때부터 용돈을 쪼개 기부하며 봉사 활동을 시작한 장한이었으니 오래된 회원들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잘 알았다.
장한은 어릴 때부터 뭐든 뛰어난 형 밑에서 열등한 아이로 비교당하며 컸다.
부부 교수인 장한의 부모는 장한의 형에게 큰 기대를 품었다.
반면 자신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얼뜨고 행동이 느린 장한을 못마땅해했다.
완벽한 가정에 유일한 오점으로까지 여겼다.
자기들끼리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하지만, 장한은 그 완벽한 가정의 울타리에 끼지 못하고 겉돌았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 보니 말더듬이와 소심증이 심해지고 이는 더욱 가족의 외면과 냉대를 불러왔다.
부모는 실망만 안겨 준 장한을 창피하다며 외면했다.
형은 대놓고 괴롭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형의 심술에 산속에서 길을 잃어 사흘간 헤매다 등산객들에게 극적으로 구조된 적도 있었다.
사흘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온 가족들은 장한이 어쩌다 퀭한 얼굴로 집에 퍼질러 자고―쓰러져―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잖아도 마르고 구질구질한 장한이 유난히 거지꼴이라며 눈살을 찌푸렸을 뿐.
장한은 사흘간 기아 체험으로 굶주림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장한은 중학생 때 소년 가장들의 수필집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배를 곯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용돈을 쪼개 기부하거나 봉사 활동을 다녔다.
다행히 장한이 처음 들어간 봉사 단체가 소규모이지만 내실 있고 진짜 자원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밥집이었다.
부모는 장한이 중2일 때 형의 유학을 도우려고 함께 이민을 갔다.
박한 생활비를 보내다가, 장한이 고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중퇴를 하자 학비마저 끊겼다.
장한에게는 부모의 무관심이 차라리 도움이 되었다.
장한은 자퇴 후 본격적으로 형이 쓰다 버려 둔 구형 게임 접속기로 게임을 시작했다.
장한은 한물 간 추억의 게임에서 꽤 큰 돈을 벌어 값비싼 신형 게임기를 살 수 있었다.
계정비와 생활비도 남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이 현재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상현실 게임 ‘드래곤 쇼크’였다.
장한은 게임으로 근근이 생활비와 기부금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