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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2화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와. 늦지는 않았으니 걱정 말고 메이크업부터 받아.”
일찌감치 출발한 장한이었지만 예상대로 방송국 내부로 진입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우물쭈물거리는 수상한 차림새의 장한을 경비원이 다그치자 더욱 입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신히 핸드폰으로 찍은 오 피디 사진과 연락처를 보인 뒤 경비원이 오 피디와 통화를 하고 들여보내 줬다.
오 피디는 장한을 스타일리스트에게 딸려 보내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김AD가 말을 걸어왔다.
“저 친구가 오 피디님이 말씀하시던?”
“그래.”
“체격이나 얼굴, 골격을 봐서는 괜찮은데 자세와 목소리가 편집용이군요.”
“실전에 강한 친구야. 저 친구, 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억지로 모델 일을 한 적도 있지. 본인 말로는 런웨이 무대에서 넘어지고 뻣뻣하게 긴장하는 바람에 패션쇼를 망쳤다지만, 사람 통해서 알아보니 관객의 호응이 좋고 옷도 근사하게 소화해서 계속 붙들어 두고 싶었는데 극구 사양했다고 하더라고. 이번 섭외도 어찌나 꽁지를 빼던지.”
“에이, 그래도 런웨이와 카메라는 다르죠.”
“두 번 끌어내서 카메라 앞에 세웠는데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니까.”
김AD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예? 두 번이나요? 제가 오 피디님 빅팬이라서 그전부터 오 피디님 연출 프로는 다 챙겨 봤는데 저렇게 인상적인 게스트는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내 프로가 아니었어. 올드 게임을 하고 있어서. 덕분에 신 선배만 신이 났지.”
오 피디는 이를 갈았다.
“두고 봐. 쟨 대박이야. 내가 발굴했으니 두고두고 우려먹어 주지.”
한편 무대 위에 착석한 장한은 왠지 모를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미리 주고받은 인터뷰 질답지를 다시 읽었다.
무대 분장을 마치고 조명 아래에 앉혀 놓으니 깔끔한 실크 셔츠에 맵시 나는 물빠짐 진을 입은 그의 모습은 단정한 부잣집 도령 같았다.
다만 얼굴에 흰색 오페라 가면을 쓰고 있었다.
녹화 표시가 들어오기 전까지 장한은 마인드 컨트롤에 여념이 없었다.
‘오 피디님은 고마운 분이다. 벌써 몇 번이나 밥집에 큰 도움을 주셨지. 이 방송을 망치면 정말 죄송할 거야. 반듯한 말투와 정확한 발음을 유지하고 큰 목소리를 내야 해. 집중하자.’
의자 속으로 파고들 듯이 위축되어서 대본을 꽉 붙잡고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장한을 보고 인터뷰어가 조금 걱정 어린 눈빛을 던졌다.
오 피디는 녹화 방송이니 마음 편히 가지라고 했지만, 한은 이런 중압감을 두 번 버텨 낼 자신이 없어서 되도록 한번에 끝내기로 다짐했다.
다행히 녹화 시작 전에 신기할 정도로 차분해지고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다.
“토크쇼크 깜짝 인터뷰! 오늘도 깜찍이 진행자 윤예원입니다. 드래곤 쇼크의 순위권 랭커들을 소개하는 시간, 오늘은 특이하게 그동안 고대해 온 생산 계열 통합 랭킹 1위! 가히 부동의 1위라 할 수 있는 ‘한’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윤예원은 양쪽으로 동글동글 말린 단발 머리를 흔들며 애교스럽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한 님. 그런데 가면을 쓰고 나오셨군요. 출연 조건으로 원하셨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예, 얼굴이 알려지면 무작정 아이템을 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요.”
“아하, 그래서 게임 내에서는 주로 로브를 입고 다니시는군요. 로브 속에 이렇게 멋진 분이 숨어 있을 줄 미처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한은 약간 떨리고 더듬는 어눌한 말투였지만, 방송에 출연한 일반인 수준의 말투였다.
부드러운 저음은 여성 스텝들의 귀를 기분 좋게 자극해 왔다.
남자의 목소리를 밝히는(?) 여성들은 고대하던 스타를 대한 것처럼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고레벨 유저들이 막 협박해서 뺏어 가고 그러나요?”
“아이템 욕심에 레벨의 높고 낮음은 상관없죠. 왜 이러세요, 아마추어같이?”
아마추어 얘기는 방송 작가가 덧붙인 분량이었다.
진지한 태도로 대본 읽는 한의 어색한 말투에 윤예원은 웃기기보다는 귀여워서 무심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남들은 얼마 못 가 죄다 떨어져 나간다는 생산 계열 스킬들을 알려진 것만도 여러 개를 마스터하셨는데요. 혹시 생산직에 특화된 히든 클래스이신가요?”
“아뇨. 비밀 직업이 아닌 정규직… 공개된 일반 직업입니다.”
“그렇다면 설마……?”
“예. 1차 직업은 ‘농부’. 2차 전직은 ‘잡캐’. 3차 전직은 ‘망캐’였죠.”
웃고 깔깔거리던 스튜디오에 잠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드래곤 쇼크」의 개발사인 플레이 타임사(社)에서는 생산직을 철저히 취미 수준에 국한시키기 위해 여러 방해 장치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본인의 직업인 ‘잡캐’와 ‘망캐’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세요.”
“생산 계열에서 다른 직업의 전문 기술 두 가지 이상을 마스터할 수 있는 직업은 ‘잡캐’뿐입니다. 예를 들어 대장장이이면서 광부를 겸업하거나, 농부와 요리사, 재단사이면서 재봉사를 겸업한다던지 하려면 ‘잡캐’가 될 수밖에 없죠.”
게임사인 플레이 타임에서는 노골적으로 생산직 죽이기 정책을 폈다.
생산직들이 게임 내 물가를 조작하거나, ‘작업장’이라 불리는 게임 머니 전문 벌이 집단의 개입에 게임 밸런스가 휘청거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
윤예원은 신음을 흘리고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드래곤 쇼크」는 생산직들이 필요한 원재료를 구하기가 힘들고, 상점을 통해 산다면 무지막지한 적자를 부담하지만, 원료를 직접 캐내 팔 때는 들이는 어마어마한 노동에 비해 헐값입니다. 광부가 되어 철광을 캐도 곡괭이 수리비나 겨우 떨어질 정도이지요.”
한이 덧붙였다.
“생산 기술이 고랭크가 될수록 원료 채취와 가공품 제작이 빠르고 쉬워지기는 합니다. 여전히 돈벌이는 거의 안 되지만요.”
“그럼 ‘망캐’는……?”
“세 가지 이상의 생산, 제조 계열 마스터 스킬을 원하면 ‘망캐’로 전직해야 합니다.”
「드래곤 쇼크」에서는 생산직을 대놓고 ‘잡다한 캐릭터’, ‘망한 캐릭터’라 못박았다.
“흔히 딱 두 가지 기술만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대장장이와 채광 스킬 같은. 하지만 생산직에 도전했다가 캐릭터를 지워 보셨던 일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대장장이가 되려면 직업 소개소에 가죽 갑옷을 한 벌 만들어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무두질, 바느질, 재봉, 징 박기, 풀칠, 덧대기 기술이 필요하죠. 무두질은 ‘갖바치’ 직업, 금속 채광은 ‘광부’ 직업의 스킬입니다. 대장장이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많은 직업의 스킬이 더욱 고레벨로 요구됩니다. 결국 대장장이 마스터가 되려면 나머지 직업까지 함께 마스터하거나, 아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날려서 원료를 구해야지요. 한 가지 아이템을 만들려고 해도 필요한 스킬은 여러 가지인데다, 마스터 랭크에 올려놓지 않으면 절대로 쉽고 빠르다는 말이 안 나오는 게 생산 스킬입니다. 대장장이뿐 아니라 생산직이 전부 그런 식입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명의 생산직 지망자가 모여서 서로 필요한 재료와 기술을 공유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한은 고개를 저었다.
“생산 스킬 레벨이 조금만 올라가면 생산 관련뿐 아니라 문화나 상업 등 다른 계열 스킬을 요구하는 퀘스트들이 난잡하게 쏟아지지요. 또한 한자리에 오래 정착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각 지역별로 방랑하면서 국지적인 해결을 통해 퀘스트를 달성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필요한 생산 계열들을 모두 마이스터로 올린 뒤였습니다. 결국 생산직을 제대로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몸으로 떼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대장장이’ 마이스터가 되려면 나머지 직업들까지 함께 마스터하거나, 아니면, 로또 당첨금을 쏟아부어야 하죠. 길드를 통해 뭉친다거나, 상점에서 편하게 원재료를 사는 건 쉽게 생각해도 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한 님이 말씀해 주시니 실감이 나는군요. 오프라인에서 실제 생산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저들조차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생산직의 비애입니다.”
“현질(현금으로 게임 머니와 아이템 구입)도 어느 정도이지, 생산직은 원료가 기하 급수로 들어가는 비효율적 시스템 덕분에 초반부터 고전을 합니다.”
“그럼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모든 원료를 직접 얻으셨나요?”
“예. 제가 현질할 만큼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요. 조금 공개하자면 ‘농부’, ‘광부’, ‘어부’, ‘심마니’ 마이스터입니다. 생산직 막노동은 다른 게임을 할 때도 익숙하고…….”
“대단하시군요. 지옥의 난이도를 뚫고, 암굴 혹은 대미궁이라 불리는 생산직의 극악한 시나리오 퀘스트들을 무사히 마쳐 한두 가지도 아닌 여러 생산 스킬을 마스터하시다니요. 한 님은 원래 어려운 모험을 즐기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특별히 생산직을 시작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전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못해서 마법에도 약하고요. 단순 무식하게 반복 작업만 계속하면 되는 생산직이 편합니다.”
“그러시군요.”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신체의 움직임이 전투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래서 현실에서도 전투 능력이 강한 사람들이 게임에서 전사 계열로 유리했다.
한편 「드래곤 쇼크」는 수학과 과학을 마법으로 구현해 놓았기 때문에, 마법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마법도 못 쓰냐는 항의가 있었지만, ‘정령사’ 등의 직업이 있어서 무마되었다.
정령 마법 역시 전투와 회복 위주라서 전투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실전에 위력이 약했다.
“싸움에 불리해서 생산직을 택한 한 님에게는 검과 마법을 전면에 내세운 「드래곤 쇼크」가 다른 게임보다 유난히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드래곤 쇼크」를 고집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드래곤 쇼크」는 현재 게임 업계를 완전히 평정했습니다. 업계 매출 80%라는 위업을 달성했지요. 저는 게임으로 생활비를 법니다. 「드래곤 쇼크」는 피치못할 선택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이었다.
“끝으로 생산직을 꿈꾸는 용기 있는 소수의 유저들에게 가감없이 생산, 제조 계열을 소개해 주신다면?”
한은 진지하게 답변했다.
“어디를 가든 구박받고 괄시당하고 무시당할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전 대륙, 전 종족의 노예로 수탈당하는 시나리오의 연속입니다.”
한은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다 못해 폭소를 터트리는 스텝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진솔미가 돋보이는 인터뷰를 마쳤다.
오 피디에게 붙잡혀 회식까지 끌려갔다.
한은 방송국 스텝이나 연예인을 소개받으면서도 게임 속의 일을 더 걱정하느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집으로 돌아온 한은 오자마자 씻고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했다.
* * *
푸른 하늘과 넓게 펼쳐지는 평원에 요정과 정령이 어우러지는 빛무리가 나타났다.
―「드래곤 쇼크」의 세계로 오셨습니다. 한 님.
오프닝 장면이 끝나자 한은 게임 속의 익숙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게임 속에서 한은 남작으로, ‘포르테’라는 작은 영지를 다스렸다.
한이 있는 곳은 포르테 남작령의 작은 성이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작지만 알짜배기 땅으로 주위에서 군침을 흘려대는 영지였다.
“별일은 없었겠지.”
한은 정보창을 켜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영지 정보!’
포르테 (남작령)
―영지 등급 : SS
놀랍습니다! 영지민 모두가 이 위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지민들은 영주를 신처럼 숭앙하고 있습니다.
―영지민 : 13만 2천 5백 7명
현재 빠르게 출생, 유입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며, 인구 과밀이 우려되지만 상하수 시설이 완벽하며 잘 설계된 도시와 고층 건물들 덕분에 아직 20만 명 정도는 추가 수용이 가능합니다.
―충성도 : 790%
영주민들에게 영주는 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장도 : 11
위태롭습니다. 특히 영지의 병사 중 반 이상이 용병이기 때문에 자체 방위력이 몹시 낮습니다.
―위생 : 850%
대륙 어디에도 이처럼 완벽한 도시는 없습니다.
―치안 : 95
영지 기사와 병사 및 치안대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주민들의 긍지와 도덕성이 높아서 범죄율이 경미합니다. 유입 인구에 의한 범죄도 대체로 잘 통제되고 있습니다.
―보건 : 절대적. 극히 우수.
―교육 : 1,167
석학의 도시로 불리고 있습니다.
―특산품 :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현재 전 대륙에 공급되는…….
―교역 수익 : 25,157,850골드/분기
―관광, 축제 : 최종 단계인 12단계까지 개발되어 있으며…….
…….
…….
도시 정보창을 훑어보았다.
한의 예상 범위 내에서 인구가 늘고 발전도가 올라간 외에 특별한 변동은 없었다.
도시의 무역 흑자는 상당했으나 재투자와 무장 비용, 상납금으로 거의 쓰일 돈이었다.
한은 정보창 옆에서 깜박거리는 메일함을 열었다.
‘특수 상품 주문 건이 521통, 신규 고정 거래 요청 770통, 상납금 낼 날짜가 다가왔다는 알림 메일, 사적인 안부 메일과 스팸 메일…….’
거래 관련 메일들은 즉각적인 판단으로 2통을 제외하고 모두 승인했다.
2통은 블랙리스트에 올려 둔 진상 유저와 진상 길드에게서 온 것으로 거절을 눌러 미리 작성해 둔 회신이 전달되도록 했다.
그쪽에서 무장을 하고 쳐들어오더라도 걱정은 없었다.
생산직인 한과 한의 도시는 전투에 무능하지만, 미리 주변 영지들을 소유한 길드들과 돈독한 친분을 다져 놓았다. 배신하지 않는 골드의 힘으로.
발전도와 소득이 터무니없이 높은 한의 영지를 탐내는 길드나 유저는 많았다. 그러나 상위권 길드들과 주변 영주들은 한에게 포섭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이 영지를 소유한 채 발전시켜 꾸준히 상납금을 주는 편이 이득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사실 개간이 안 되는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고 산업도시로 일궈 낸 것은 생산직 마스터인 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임 머니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마다않는 작업장들도 한의 영지는 욕심내지 않았다. 지금 와서 영지를 뺏는다 해도 한의 영주로서의 영향력이 사라지면 발전도는 순식간에 추락한다는 점을 「드래곤 쇼크」에서 힘을 가진 유저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예외는 있는 것이다.
한의 영지는 ‘포르테’가 처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 영지를 빼앗아 간 용맹한 길드가 있었다.
예전에 한은 ‘안단테’라는 좀 더 넓고 잡풀이 자생하는 기름진(?) 땅을 하사받았다.
한은 그 첫 영지를 공을 들여 열심히 발전시켜 놓았다.
그런데 ‘넘버원 머니’라는 작업장을 갓 접수한 신규 폭력 조직이 생산직 영주를 만만하게 보고 전쟁을 걸어 한과 빈약한 영지군을 몰살하고 영지를 빼앗았다.
번성한 영지를 거저먹고 희희낙락 즐거워하던 ‘넘버원 머니’ 길드는 곧 자신들의 실수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단테’ 영지에서 기존 거래처에 공급할 물건들의 품질이 형편없이 하락하고 공급량이 턱없이 줄었다.
넘버원 머니 길드는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고 반품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썩었다.
원래 불모지였던 농지는 한이 영주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소출이 나지 않았다.
농토는 풀밭으로 바뀌고, 재고는 금세 동이 나고, 식량은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기타 생산직 영주만 관리할 수 있는 기반 시설들이 가동을 멈추면서 영지는 빠르게 무너져 갔다.
남들은 다 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게임에 무지한 채 작업장만 인수한 조폭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안단테’ 영지는 원래 모습이었던 불모지로 돌아갔다.
결국 ‘넘버원 머니’ 길드는 신용과 명예를 잃고 막대한 적자를 보았을 뿐 아니라, ‘안단테’ 영지 및 한과 이해관계가 있던 대륙의 왕후장상 및 거대 길드들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쉽게 얻은 것에 비해 작업장의 와해라는 큰 손실을 안게 되었다.
소탐대실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그 일이 있은 뒤 한은 경각심을 가졌다.
그때까지 한은 영지의 무장도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모든 유저들이 다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위험도를 0%에 가깝게 낮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포르테’ 영지를 불하받은 뒤 한은 주위 영지들을 방문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상호불침 및 ‘포르테’가 외부의 무장 세력에 공격을 받을 시 도와준다는 각서를 나눴다.
물론 그런 외교 조약은 명성과 신뢰도의 하락만 감수하면 언제든 날릴 수 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지만, ‘포르테’에서 그 대가로 들어오는 상납금은 무시 못할 액수였다.
한마디로 ‘포르테’를 털어 봤자 이득보다 손해가 크고, 주위 영지들 및 무력이 강한 길드들에서 고정적인 돈벌이가 되어 주는 ‘포르테’를 털리도록 좌시하지 않게 되는 구조였다.
어차피 상납금은 ‘포르테’에서 사들이는 영지 식량 및 생필품에 쓰였다.
‘포르테’와 주변 영지는 서로 도우며 이익을 나누므로 침략의 걱정은 덜었다.
‘순수익이 늘었으니 상납금을 비율에 맞춰 조정하고, 자원 구매를 늘려서…….’
한이 상납금과 자원 구매 요청을 보내자, 마침 게임에 접속 중이던 영주들에게서 곧바로 감사 회신이 왔다.
한은 영지의 나머지 일을 분주히 마치고 일어섰다.
“점심 식사를 대령할까요?”
집무실을 나서는 한에게 시종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아니, 드래곤 산맥에 다녀올 테니 식사는 도시락으로 때우지.”
한은 덤덤히 말했다.
게임 속에서는 달변까지는 아니라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매번 식사를 간단히 하시니…….”
“예전에는 건량만 먹었으니 이만하면 진수성찬이야.”
입에 바른 칭찬이 아니라 극도로 발전된 ‘포르테’ 요리사들의 음식 솜씨는 최고였다.
시종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시락을 들려 한을 워프게이트까지 배웅했다.
한은 영지민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한은 영주 집무실 근처의 워프게이트가 설치된 이동 장소로 갔다.
1인용 왕복 기능이 붙은 워프게이트를 성에 설치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거의 성을 세운 만큼의 고비용이었다―바쁜 한에게는 그 값을 톡톡히 해냈다.
“드래곤 산맥.”
워프게이트 앞에서 빛에 휩싸여 영주성에서 사라진 한은 드래곤 산맥의 중심부 칼라하르 봉 중턱에 다시 나타났다.
드래곤 로드 아몰레드의 레어였다.
붉은 비늘이 덮인 레드 드래곤의 거체가 밝은 빛에 감긴 광활한 레어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똬리를 틀고 있던 레드 드래곤 아몰레드는 부리부리한 파충류의 눈알로 내려다보며 한의 인사에 꼬리 끝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왔군.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인간이여.”
한은 별 대꾸 없이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무례하달 수 있지만 익숙한 일이라 아몰레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무례를 드래곤이 용납하는 것은 한뿐이었다.
한이 미리 준비해 둔 상납품을 꺼내자 아몰레드의 붉은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한은 종족 불문하고 전 드래곤의 수호를 받았다.
그 이유는 생산직 메인 시나리오인 ‘장인의 길’이라는 길고 험난한 스토리를 따라가며 깨다 보니 드래곤과도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 주제에 드래곤 산맥에서 겁 없이 채광과 제작을 하다가 마주친 산맥의 주인들에게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드래곤들은 드워프보다 솜씨 좋고 다양한 한의 공물에 지나치게 만족했다.
한을 드워프처럼 사노예화하려는 드래곤들의 신경전이 펼쳐졌지만 드래곤 로드의 중재로 모두 동등한 지분(?)을 갖기로 했다.
‘드래곤의 수호’는 전투 능력이 미약한 한이 몬스터들이 판치는 드래곤 산맥을 안심하고 다니라는 증표였다.
덕분에 드래곤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에 있는 몬스터들은 한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드래곤들은 한에게 편의를 많이 봐주는 편이었다. 드래곤 산맥의 채굴권을 전면 보장해 주고 진귀한 재료들도 구해줬다.
말하자면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공물을 바치라는 뜻이었다.
아직 대륙에서 용을 대면한 사람도 극소수였으나 한은 예외적으로 깊숙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이 생산직이기 때문이었다.
「드래곤 쇼크」를 개발한 게임사에서는 생산직이 철저히 이윤과 무관하게 조장하는 대신, 메인 시나리오나 중간의 굵직굵직한 퀘스트들을 2차 전직 이후부터는 모두 거창하고 제한이 없는 화려무쌍한 스토리로 꾸며 놓았다.
진정한 취미로 즐기는 매니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게임사가 안배한 극악의 난이도 덕분에 아직 한이 겪었던 핵심 시나리오에 도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핵심 퀘스트의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중요한 퀘스트나 미션들이 한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퀘스트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었다.
원래 적당히 분배되어야 했지만, 퀘스트를 받을 조건이 되는 유저가 한뿐이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생산직 유저의 전멸을 불러온, 게임사도 예측 못한 부작용이었다.
예컨대 블루 드래곤 로드가 한에게 티아라 제작을 맡기면, 골드 드래곤 로드는 자존심 때문에 다른 제작자를 찾아 왕관을 부탁―명령―해야 했다.
그러나 한 정도로 뛰어난 보석 세공술을 가진 장인은 드워프 중에서도 없었다.
자존심 강하고 성질 급한 드래곤들이 다른 장인이 성장하도록 기다리지 못했다.
결국 전 종족 드래곤 로드들이 한에게 몽땅 의뢰를 떠맡기는 형국이었다.
한은 아몰레드가 흡족하게 공물을 수거하길 기다려 말을 꺼냈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한 달 전 가져간 분량이 상당할 텐데?”
“로드들께서 제게 맡기신 의뢰품들을 보다 완벽히 만들려다 보니…….”
아몰레드는 한이 부려 놓은 진귀한 세공품들을 감상하면서 수긍했다.
“하긴 나의 심미안에 어울리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빛을 품고 있군.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아낌없이 쓴 것은 잘했다.”
2화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와. 늦지는 않았으니 걱정 말고 메이크업부터 받아.”
일찌감치 출발한 장한이었지만 예상대로 방송국 내부로 진입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우물쭈물거리는 수상한 차림새의 장한을 경비원이 다그치자 더욱 입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신히 핸드폰으로 찍은 오 피디 사진과 연락처를 보인 뒤 경비원이 오 피디와 통화를 하고 들여보내 줬다.
오 피디는 장한을 스타일리스트에게 딸려 보내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김AD가 말을 걸어왔다.
“저 친구가 오 피디님이 말씀하시던?”
“그래.”
“체격이나 얼굴, 골격을 봐서는 괜찮은데 자세와 목소리가 편집용이군요.”
“실전에 강한 친구야. 저 친구, 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억지로 모델 일을 한 적도 있지. 본인 말로는 런웨이 무대에서 넘어지고 뻣뻣하게 긴장하는 바람에 패션쇼를 망쳤다지만, 사람 통해서 알아보니 관객의 호응이 좋고 옷도 근사하게 소화해서 계속 붙들어 두고 싶었는데 극구 사양했다고 하더라고. 이번 섭외도 어찌나 꽁지를 빼던지.”
“에이, 그래도 런웨이와 카메라는 다르죠.”
“두 번 끌어내서 카메라 앞에 세웠는데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니까.”
김AD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예? 두 번이나요? 제가 오 피디님 빅팬이라서 그전부터 오 피디님 연출 프로는 다 챙겨 봤는데 저렇게 인상적인 게스트는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내 프로가 아니었어. 올드 게임을 하고 있어서. 덕분에 신 선배만 신이 났지.”
오 피디는 이를 갈았다.
“두고 봐. 쟨 대박이야. 내가 발굴했으니 두고두고 우려먹어 주지.”
한편 무대 위에 착석한 장한은 왠지 모를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미리 주고받은 인터뷰 질답지를 다시 읽었다.
무대 분장을 마치고 조명 아래에 앉혀 놓으니 깔끔한 실크 셔츠에 맵시 나는 물빠짐 진을 입은 그의 모습은 단정한 부잣집 도령 같았다.
다만 얼굴에 흰색 오페라 가면을 쓰고 있었다.
녹화 표시가 들어오기 전까지 장한은 마인드 컨트롤에 여념이 없었다.
‘오 피디님은 고마운 분이다. 벌써 몇 번이나 밥집에 큰 도움을 주셨지. 이 방송을 망치면 정말 죄송할 거야. 반듯한 말투와 정확한 발음을 유지하고 큰 목소리를 내야 해. 집중하자.’
의자 속으로 파고들 듯이 위축되어서 대본을 꽉 붙잡고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장한을 보고 인터뷰어가 조금 걱정 어린 눈빛을 던졌다.
오 피디는 녹화 방송이니 마음 편히 가지라고 했지만, 한은 이런 중압감을 두 번 버텨 낼 자신이 없어서 되도록 한번에 끝내기로 다짐했다.
다행히 녹화 시작 전에 신기할 정도로 차분해지고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다.
“토크쇼크 깜짝 인터뷰! 오늘도 깜찍이 진행자 윤예원입니다. 드래곤 쇼크의 순위권 랭커들을 소개하는 시간, 오늘은 특이하게 그동안 고대해 온 생산 계열 통합 랭킹 1위! 가히 부동의 1위라 할 수 있는 ‘한’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윤예원은 양쪽으로 동글동글 말린 단발 머리를 흔들며 애교스럽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한 님. 그런데 가면을 쓰고 나오셨군요. 출연 조건으로 원하셨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예, 얼굴이 알려지면 무작정 아이템을 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요.”
“아하, 그래서 게임 내에서는 주로 로브를 입고 다니시는군요. 로브 속에 이렇게 멋진 분이 숨어 있을 줄 미처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한은 약간 떨리고 더듬는 어눌한 말투였지만, 방송에 출연한 일반인 수준의 말투였다.
부드러운 저음은 여성 스텝들의 귀를 기분 좋게 자극해 왔다.
남자의 목소리를 밝히는(?) 여성들은 고대하던 스타를 대한 것처럼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고레벨 유저들이 막 협박해서 뺏어 가고 그러나요?”
“아이템 욕심에 레벨의 높고 낮음은 상관없죠. 왜 이러세요, 아마추어같이?”
아마추어 얘기는 방송 작가가 덧붙인 분량이었다.
진지한 태도로 대본 읽는 한의 어색한 말투에 윤예원은 웃기기보다는 귀여워서 무심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남들은 얼마 못 가 죄다 떨어져 나간다는 생산 계열 스킬들을 알려진 것만도 여러 개를 마스터하셨는데요. 혹시 생산직에 특화된 히든 클래스이신가요?”
“아뇨. 비밀 직업이 아닌 정규직… 공개된 일반 직업입니다.”
“그렇다면 설마……?”
“예. 1차 직업은 ‘농부’. 2차 전직은 ‘잡캐’. 3차 전직은 ‘망캐’였죠.”
웃고 깔깔거리던 스튜디오에 잠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드래곤 쇼크」의 개발사인 플레이 타임사(社)에서는 생산직을 철저히 취미 수준에 국한시키기 위해 여러 방해 장치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본인의 직업인 ‘잡캐’와 ‘망캐’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세요.”
“생산 계열에서 다른 직업의 전문 기술 두 가지 이상을 마스터할 수 있는 직업은 ‘잡캐’뿐입니다. 예를 들어 대장장이이면서 광부를 겸업하거나, 농부와 요리사, 재단사이면서 재봉사를 겸업한다던지 하려면 ‘잡캐’가 될 수밖에 없죠.”
게임사인 플레이 타임에서는 노골적으로 생산직 죽이기 정책을 폈다.
생산직들이 게임 내 물가를 조작하거나, ‘작업장’이라 불리는 게임 머니 전문 벌이 집단의 개입에 게임 밸런스가 휘청거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
윤예원은 신음을 흘리고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드래곤 쇼크」는 생산직들이 필요한 원재료를 구하기가 힘들고, 상점을 통해 산다면 무지막지한 적자를 부담하지만, 원료를 직접 캐내 팔 때는 들이는 어마어마한 노동에 비해 헐값입니다. 광부가 되어 철광을 캐도 곡괭이 수리비나 겨우 떨어질 정도이지요.”
한이 덧붙였다.
“생산 기술이 고랭크가 될수록 원료 채취와 가공품 제작이 빠르고 쉬워지기는 합니다. 여전히 돈벌이는 거의 안 되지만요.”
“그럼 ‘망캐’는……?”
“세 가지 이상의 생산, 제조 계열 마스터 스킬을 원하면 ‘망캐’로 전직해야 합니다.”
「드래곤 쇼크」에서는 생산직을 대놓고 ‘잡다한 캐릭터’, ‘망한 캐릭터’라 못박았다.
“흔히 딱 두 가지 기술만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대장장이와 채광 스킬 같은. 하지만 생산직에 도전했다가 캐릭터를 지워 보셨던 일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대장장이가 되려면 직업 소개소에 가죽 갑옷을 한 벌 만들어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무두질, 바느질, 재봉, 징 박기, 풀칠, 덧대기 기술이 필요하죠. 무두질은 ‘갖바치’ 직업, 금속 채광은 ‘광부’ 직업의 스킬입니다. 대장장이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많은 직업의 스킬이 더욱 고레벨로 요구됩니다. 결국 대장장이 마스터가 되려면 나머지 직업까지 함께 마스터하거나, 아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날려서 원료를 구해야지요. 한 가지 아이템을 만들려고 해도 필요한 스킬은 여러 가지인데다, 마스터 랭크에 올려놓지 않으면 절대로 쉽고 빠르다는 말이 안 나오는 게 생산 스킬입니다. 대장장이뿐 아니라 생산직이 전부 그런 식입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명의 생산직 지망자가 모여서 서로 필요한 재료와 기술을 공유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한은 고개를 저었다.
“생산 스킬 레벨이 조금만 올라가면 생산 관련뿐 아니라 문화나 상업 등 다른 계열 스킬을 요구하는 퀘스트들이 난잡하게 쏟아지지요. 또한 한자리에 오래 정착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각 지역별로 방랑하면서 국지적인 해결을 통해 퀘스트를 달성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필요한 생산 계열들을 모두 마이스터로 올린 뒤였습니다. 결국 생산직을 제대로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몸으로 떼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대장장이’ 마이스터가 되려면 나머지 직업들까지 함께 마스터하거나, 아니면, 로또 당첨금을 쏟아부어야 하죠. 길드를 통해 뭉친다거나, 상점에서 편하게 원재료를 사는 건 쉽게 생각해도 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한 님이 말씀해 주시니 실감이 나는군요. 오프라인에서 실제 생산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저들조차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생산직의 비애입니다.”
“현질(현금으로 게임 머니와 아이템 구입)도 어느 정도이지, 생산직은 원료가 기하 급수로 들어가는 비효율적 시스템 덕분에 초반부터 고전을 합니다.”
“그럼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모든 원료를 직접 얻으셨나요?”
“예. 제가 현질할 만큼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요. 조금 공개하자면 ‘농부’, ‘광부’, ‘어부’, ‘심마니’ 마이스터입니다. 생산직 막노동은 다른 게임을 할 때도 익숙하고…….”
“대단하시군요. 지옥의 난이도를 뚫고, 암굴 혹은 대미궁이라 불리는 생산직의 극악한 시나리오 퀘스트들을 무사히 마쳐 한두 가지도 아닌 여러 생산 스킬을 마스터하시다니요. 한 님은 원래 어려운 모험을 즐기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특별히 생산직을 시작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전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못해서 마법에도 약하고요. 단순 무식하게 반복 작업만 계속하면 되는 생산직이 편합니다.”
“그러시군요.”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신체의 움직임이 전투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래서 현실에서도 전투 능력이 강한 사람들이 게임에서 전사 계열로 유리했다.
한편 「드래곤 쇼크」는 수학과 과학을 마법으로 구현해 놓았기 때문에, 마법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마법도 못 쓰냐는 항의가 있었지만, ‘정령사’ 등의 직업이 있어서 무마되었다.
정령 마법 역시 전투와 회복 위주라서 전투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실전에 위력이 약했다.
“싸움에 불리해서 생산직을 택한 한 님에게는 검과 마법을 전면에 내세운 「드래곤 쇼크」가 다른 게임보다 유난히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드래곤 쇼크」를 고집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드래곤 쇼크」는 현재 게임 업계를 완전히 평정했습니다. 업계 매출 80%라는 위업을 달성했지요. 저는 게임으로 생활비를 법니다. 「드래곤 쇼크」는 피치못할 선택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이었다.
“끝으로 생산직을 꿈꾸는 용기 있는 소수의 유저들에게 가감없이 생산, 제조 계열을 소개해 주신다면?”
한은 진지하게 답변했다.
“어디를 가든 구박받고 괄시당하고 무시당할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전 대륙, 전 종족의 노예로 수탈당하는 시나리오의 연속입니다.”
한은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다 못해 폭소를 터트리는 스텝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진솔미가 돋보이는 인터뷰를 마쳤다.
오 피디에게 붙잡혀 회식까지 끌려갔다.
한은 방송국 스텝이나 연예인을 소개받으면서도 게임 속의 일을 더 걱정하느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집으로 돌아온 한은 오자마자 씻고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했다.
* * *
푸른 하늘과 넓게 펼쳐지는 평원에 요정과 정령이 어우러지는 빛무리가 나타났다.
―「드래곤 쇼크」의 세계로 오셨습니다. 한 님.
오프닝 장면이 끝나자 한은 게임 속의 익숙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게임 속에서 한은 남작으로, ‘포르테’라는 작은 영지를 다스렸다.
한이 있는 곳은 포르테 남작령의 작은 성이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작지만 알짜배기 땅으로 주위에서 군침을 흘려대는 영지였다.
“별일은 없었겠지.”
한은 정보창을 켜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영지 정보!’
포르테 (남작령)
―영지 등급 : SS
놀랍습니다! 영지민 모두가 이 위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지민들은 영주를 신처럼 숭앙하고 있습니다.
―영지민 : 13만 2천 5백 7명
현재 빠르게 출생, 유입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며, 인구 과밀이 우려되지만 상하수 시설이 완벽하며 잘 설계된 도시와 고층 건물들 덕분에 아직 20만 명 정도는 추가 수용이 가능합니다.
―충성도 : 790%
영주민들에게 영주는 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장도 : 11
위태롭습니다. 특히 영지의 병사 중 반 이상이 용병이기 때문에 자체 방위력이 몹시 낮습니다.
―위생 : 850%
대륙 어디에도 이처럼 완벽한 도시는 없습니다.
―치안 : 95
영지 기사와 병사 및 치안대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주민들의 긍지와 도덕성이 높아서 범죄율이 경미합니다. 유입 인구에 의한 범죄도 대체로 잘 통제되고 있습니다.
―보건 : 절대적. 극히 우수.
―교육 : 1,167
석학의 도시로 불리고 있습니다.
―특산품 :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현재 전 대륙에 공급되는…….
―교역 수익 : 25,157,850골드/분기
―관광, 축제 : 최종 단계인 12단계까지 개발되어 있으며…….
…….
…….
도시 정보창을 훑어보았다.
한의 예상 범위 내에서 인구가 늘고 발전도가 올라간 외에 특별한 변동은 없었다.
도시의 무역 흑자는 상당했으나 재투자와 무장 비용, 상납금으로 거의 쓰일 돈이었다.
한은 정보창 옆에서 깜박거리는 메일함을 열었다.
‘특수 상품 주문 건이 521통, 신규 고정 거래 요청 770통, 상납금 낼 날짜가 다가왔다는 알림 메일, 사적인 안부 메일과 스팸 메일…….’
거래 관련 메일들은 즉각적인 판단으로 2통을 제외하고 모두 승인했다.
2통은 블랙리스트에 올려 둔 진상 유저와 진상 길드에게서 온 것으로 거절을 눌러 미리 작성해 둔 회신이 전달되도록 했다.
그쪽에서 무장을 하고 쳐들어오더라도 걱정은 없었다.
생산직인 한과 한의 도시는 전투에 무능하지만, 미리 주변 영지들을 소유한 길드들과 돈독한 친분을 다져 놓았다. 배신하지 않는 골드의 힘으로.
발전도와 소득이 터무니없이 높은 한의 영지를 탐내는 길드나 유저는 많았다. 그러나 상위권 길드들과 주변 영주들은 한에게 포섭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이 영지를 소유한 채 발전시켜 꾸준히 상납금을 주는 편이 이득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사실 개간이 안 되는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고 산업도시로 일궈 낸 것은 생산직 마스터인 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임 머니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마다않는 작업장들도 한의 영지는 욕심내지 않았다. 지금 와서 영지를 뺏는다 해도 한의 영주로서의 영향력이 사라지면 발전도는 순식간에 추락한다는 점을 「드래곤 쇼크」에서 힘을 가진 유저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예외는 있는 것이다.
한의 영지는 ‘포르테’가 처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 영지를 빼앗아 간 용맹한 길드가 있었다.
예전에 한은 ‘안단테’라는 좀 더 넓고 잡풀이 자생하는 기름진(?) 땅을 하사받았다.
한은 그 첫 영지를 공을 들여 열심히 발전시켜 놓았다.
그런데 ‘넘버원 머니’라는 작업장을 갓 접수한 신규 폭력 조직이 생산직 영주를 만만하게 보고 전쟁을 걸어 한과 빈약한 영지군을 몰살하고 영지를 빼앗았다.
번성한 영지를 거저먹고 희희낙락 즐거워하던 ‘넘버원 머니’ 길드는 곧 자신들의 실수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단테’ 영지에서 기존 거래처에 공급할 물건들의 품질이 형편없이 하락하고 공급량이 턱없이 줄었다.
넘버원 머니 길드는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고 반품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썩었다.
원래 불모지였던 농지는 한이 영주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소출이 나지 않았다.
농토는 풀밭으로 바뀌고, 재고는 금세 동이 나고, 식량은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기타 생산직 영주만 관리할 수 있는 기반 시설들이 가동을 멈추면서 영지는 빠르게 무너져 갔다.
남들은 다 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게임에 무지한 채 작업장만 인수한 조폭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안단테’ 영지는 원래 모습이었던 불모지로 돌아갔다.
결국 ‘넘버원 머니’ 길드는 신용과 명예를 잃고 막대한 적자를 보았을 뿐 아니라, ‘안단테’ 영지 및 한과 이해관계가 있던 대륙의 왕후장상 및 거대 길드들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쉽게 얻은 것에 비해 작업장의 와해라는 큰 손실을 안게 되었다.
소탐대실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그 일이 있은 뒤 한은 경각심을 가졌다.
그때까지 한은 영지의 무장도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모든 유저들이 다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위험도를 0%에 가깝게 낮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포르테’ 영지를 불하받은 뒤 한은 주위 영지들을 방문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상호불침 및 ‘포르테’가 외부의 무장 세력에 공격을 받을 시 도와준다는 각서를 나눴다.
물론 그런 외교 조약은 명성과 신뢰도의 하락만 감수하면 언제든 날릴 수 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지만, ‘포르테’에서 그 대가로 들어오는 상납금은 무시 못할 액수였다.
한마디로 ‘포르테’를 털어 봤자 이득보다 손해가 크고, 주위 영지들 및 무력이 강한 길드들에서 고정적인 돈벌이가 되어 주는 ‘포르테’를 털리도록 좌시하지 않게 되는 구조였다.
어차피 상납금은 ‘포르테’에서 사들이는 영지 식량 및 생필품에 쓰였다.
‘포르테’와 주변 영지는 서로 도우며 이익을 나누므로 침략의 걱정은 덜었다.
‘순수익이 늘었으니 상납금을 비율에 맞춰 조정하고, 자원 구매를 늘려서…….’
한이 상납금과 자원 구매 요청을 보내자, 마침 게임에 접속 중이던 영주들에게서 곧바로 감사 회신이 왔다.
한은 영지의 나머지 일을 분주히 마치고 일어섰다.
“점심 식사를 대령할까요?”
집무실을 나서는 한에게 시종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아니, 드래곤 산맥에 다녀올 테니 식사는 도시락으로 때우지.”
한은 덤덤히 말했다.
게임 속에서는 달변까지는 아니라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매번 식사를 간단히 하시니…….”
“예전에는 건량만 먹었으니 이만하면 진수성찬이야.”
입에 바른 칭찬이 아니라 극도로 발전된 ‘포르테’ 요리사들의 음식 솜씨는 최고였다.
시종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시락을 들려 한을 워프게이트까지 배웅했다.
한은 영지민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한은 영주 집무실 근처의 워프게이트가 설치된 이동 장소로 갔다.
1인용 왕복 기능이 붙은 워프게이트를 성에 설치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거의 성을 세운 만큼의 고비용이었다―바쁜 한에게는 그 값을 톡톡히 해냈다.
“드래곤 산맥.”
워프게이트 앞에서 빛에 휩싸여 영주성에서 사라진 한은 드래곤 산맥의 중심부 칼라하르 봉 중턱에 다시 나타났다.
드래곤 로드 아몰레드의 레어였다.
붉은 비늘이 덮인 레드 드래곤의 거체가 밝은 빛에 감긴 광활한 레어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똬리를 틀고 있던 레드 드래곤 아몰레드는 부리부리한 파충류의 눈알로 내려다보며 한의 인사에 꼬리 끝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왔군.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인간이여.”
한은 별 대꾸 없이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무례하달 수 있지만 익숙한 일이라 아몰레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무례를 드래곤이 용납하는 것은 한뿐이었다.
한이 미리 준비해 둔 상납품을 꺼내자 아몰레드의 붉은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한은 종족 불문하고 전 드래곤의 수호를 받았다.
그 이유는 생산직 메인 시나리오인 ‘장인의 길’이라는 길고 험난한 스토리를 따라가며 깨다 보니 드래곤과도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 주제에 드래곤 산맥에서 겁 없이 채광과 제작을 하다가 마주친 산맥의 주인들에게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드래곤들은 드워프보다 솜씨 좋고 다양한 한의 공물에 지나치게 만족했다.
한을 드워프처럼 사노예화하려는 드래곤들의 신경전이 펼쳐졌지만 드래곤 로드의 중재로 모두 동등한 지분(?)을 갖기로 했다.
‘드래곤의 수호’는 전투 능력이 미약한 한이 몬스터들이 판치는 드래곤 산맥을 안심하고 다니라는 증표였다.
덕분에 드래곤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에 있는 몬스터들은 한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드래곤들은 한에게 편의를 많이 봐주는 편이었다. 드래곤 산맥의 채굴권을 전면 보장해 주고 진귀한 재료들도 구해줬다.
말하자면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공물을 바치라는 뜻이었다.
아직 대륙에서 용을 대면한 사람도 극소수였으나 한은 예외적으로 깊숙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이 생산직이기 때문이었다.
「드래곤 쇼크」를 개발한 게임사에서는 생산직이 철저히 이윤과 무관하게 조장하는 대신, 메인 시나리오나 중간의 굵직굵직한 퀘스트들을 2차 전직 이후부터는 모두 거창하고 제한이 없는 화려무쌍한 스토리로 꾸며 놓았다.
진정한 취미로 즐기는 매니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게임사가 안배한 극악의 난이도 덕분에 아직 한이 겪었던 핵심 시나리오에 도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핵심 퀘스트의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중요한 퀘스트나 미션들이 한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퀘스트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었다.
원래 적당히 분배되어야 했지만, 퀘스트를 받을 조건이 되는 유저가 한뿐이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생산직 유저의 전멸을 불러온, 게임사도 예측 못한 부작용이었다.
예컨대 블루 드래곤 로드가 한에게 티아라 제작을 맡기면, 골드 드래곤 로드는 자존심 때문에 다른 제작자를 찾아 왕관을 부탁―명령―해야 했다.
그러나 한 정도로 뛰어난 보석 세공술을 가진 장인은 드워프 중에서도 없었다.
자존심 강하고 성질 급한 드래곤들이 다른 장인이 성장하도록 기다리지 못했다.
결국 전 종족 드래곤 로드들이 한에게 몽땅 의뢰를 떠맡기는 형국이었다.
한은 아몰레드가 흡족하게 공물을 수거하길 기다려 말을 꺼냈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한 달 전 가져간 분량이 상당할 텐데?”
“로드들께서 제게 맡기신 의뢰품들을 보다 완벽히 만들려다 보니…….”
아몰레드는 한이 부려 놓은 진귀한 세공품들을 감상하면서 수긍했다.
“하긴 나의 심미안에 어울리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빛을 품고 있군.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아낌없이 쓴 것은 잘했다.”